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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는 누구의 땅인가 ㅣ 살림지식총서 140
이성환 지음 / 살림 / 2004년 11월
평점 :
영유권 분쟁이 터지면 항상 지목되는 것은 독도와 간도지만, 상대적으로 간도에 대한 관심은 적은 편이었다. 아니, 적은 정도가 아니라 간도를 얘기하면 그게 무엇인지, 어디에 있는 것인지 모르는 이도 많다. 대개의 반응은, "섬인가?" 이 정도... 간도의 '도'자가 섬도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섬은 절대 아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동간도, 서간도라 부르고 한반도의 북쪽을 가리켜 북간도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한민족이 서간도보다 북간도에 집중적으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면서 북간도(동간도)를 그냥 '간도'라 부르게 되었다.
간도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던 지역인데 가곡 '선구자'의 일송정이나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그리고 윤동주의 '서시' 등이 모두 간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근래에 간도협약(1909) 체결 100년이 되는 2009년 이전에 간도 영유권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 이유는 국제법 또는 국제관례상 100년을 넘기면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없다는 '100년 시효설'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100년 시효설에 관해서는 국제법적으로 확립된 이론이나 원칙은 없다고 책은 전한다. 다만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영토 할양의 한 방법으로 사용했던 조차가 최대 99년을 기한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100년을 넘겨버리면 조차가 아닌 영유권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일종의 추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근거 없는 '100년 시효설'로 우리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져 간도 영유권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거라고 저자는 당부한다.
간도가 우리 땅이었던 시간과 우리 땅이 아니었던 시간을 비교했을 때, 우리 땅이었던 시간이 압도적으로 더 길지만, 저자는 굳이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 시절의 역사를 들먹이지 않는다. 짧은 페이지의 이 책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조선말 일제 침략기 시절 간도의 역사이며, 그로부터 지금까지의 관계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만주 전체의 지역을 살펴보더라도 한족이 지배하지 않은-못한-기간이 훨씬 더 길다.)
조선과 청나라는 간도 지역을 건국의 상징으로 중요하게 취급하여 이 지역은 무인지대였었고, 일종의 중립지대였다. 게다가 이 시기는 아직 국경이 선의 개념이 아니라 지대의 개념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무주지 또는 봉금지대가 국경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양국이 국경을 명확히 할 필요성을 갖고 세운 것이 "백두산 정계비"이다. 백두산 정계비에 의한 국경선도 중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나마도 비문의 해석을 두고서도 중국 쪽은 억지 주장을 펼치고 말았다. 중국에서 간행된 지도나 책들을 살펴볼 때, 중국 자신도 압록강 이북의 서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는 흔적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간도가 뜨거운 감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국주의가 판을 치던 그 시절의 국제관계의 역학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해야 했고, 러시아는 남하를 위한 전진기지가 필요했고, 조선은 임오군란 시절 청나라에게 신세를 진 게 있으므로 눈치를 봐야 했고,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해야 했고, 러일 전쟁 이후로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간도 땅에서의 분쟁을 종식시켜야 했다.
중국은 조선인의 실생활 거주지와 이전 등에도 일체 간섭 없이 오로지 영유권과 법률권만 요구했다. 그건 현실적으로도 그 지역을 개간하고 발전시키고 계속해서 살고 있는 조선인들을 몰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고, 그들을 몰아내고 중국인으로 채워넣을 수도 없는 자국의 입장 때문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고, 간도 지역의 국제 사법부 관할로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열강의 간섭으로 조선의 실지배마저도 간섭을 받아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법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양쪽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나온 타협안이 "간도협약"(1909)이다.
간도협약이, 단순히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간도 지역을 맞바꾼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삼키기 위한 일본의 선택이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동북공정 문제와 맞물린 간도 영유권 문제는 중국 뿐 아니라 일본과도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다.
허면, 간도협약의 효력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협약은 법적 효력이 없으므로 간도는 한국의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한국 쪽의 일관된 주장이다. 을사조약이 원천적으로 무효이므로 간도협약은 성립할 수 없고, 설사 을사보호조약이 유효하다 하더라도 일본이 간도협약을 체결할 권리는 없었다. 일본이 가져간 외교권은 '한국의 외교를 감리, 지휘'하는 것으로 조약 체결의 주체(당사자)는 어디까지나 한국이기 때문이다. 백번 더 양보해서 을사보호조약이 유효하고 일본이 조약 체결의 당사자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을보호조약상의 보호권의 범위를 벗어나고 있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역시 무효가 된다. 말인즉슨, 보호국(일본)이 피보호국(한국)의 외교권을 대리하는 데 있어서 그 범위는 피보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목적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간도협약은 일본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팔아 치운 것이므로 역시 보호국의 권한의 범위를 벗어난다. 마지막으로, 간도협약이 유효하다고 가정하더라도, 협약의 당사자는 일본과 중국으로서 조선은 제3국에 해당된다. 조약은 당사국에게만 효력이 있을 뿐, 제3국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의해서도 간도협약에 의한 간도 영유권의 변경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간도협약에 근거하여, 그 후 간도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부당성만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일본 책임론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그밖에 196년의 한일기본관계조약에서도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은 '이미 무효'라고 밝히고 있고, 카이로 선언에서도 "일본은 만주, 대만, 팽호도 제도 등 중국으로부터 뺏은 지역을 전부 중국에 반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샌프란시스코조약(1951)에서도 "1941년 12월9일 이전에 일본과 중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협약 및 협정은 전쟁의 결과로서 무효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간도협약이 무효라고 해서 그것이 곧 바로 간도가 한국 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간도협약이 무효라는 것은 1909년 간도협약 체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한국과 중국 사이에 간도 영유권 확정을 위한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역사와 영토 문제에 있어서 객관성을 상실하고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자칫 영토확장주의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왜곡된 역사의 굴절을 그대로 남겨둔 채 방치하는 것 역시 함께 지양해야 할 문제다. 더군다나 온 국민의 의식 속에 너무나 먼 나라 얘기같은 '간도'에 대한 인식을 바로 세우는 것 역시 우리의 필연적 과제일 것이다. 간도협약의 원천적 뮤효를 자각시키고 새로이 간도 영유권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 시작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장애는 아직도 남아 있으니 분단 조국의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단숨에 통일이 될 수 없고, 단숨에 간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단숨에 뭐든 바로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관심을 갖고 주시하고 또 앞장서서 풀어나가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 정도는 '인식'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 대한 책임이며 의무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