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영호 옮김 / 민음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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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노동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고 있습니다.
이전 북클럽에서 독서후기를 읽고 충동구매한 경우죠. 허허 ^^;

'노동의 종말' 이라는 문제의식이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종말' 이라고 하니까 좀 무서운데, 익숙한 표현으로는 '20대 80의 사회' 가 있겠죠.

20대 80의 사회라는 것은,
빈부격차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20의 사람만으로도 100을 먹여살릴 수 있다는 표현이기도 하죠.
80의 사람이 해야할 일은? 기계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술' 이라는 것에 대해서 가지는 이미지는 굉장히 좋은 편입니다만,
이것이 또 하나의 편견이고 선입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1.

전 '기술' 하면, 핸드폰 광고가 먼저 떠오르는데요.
정말 매일 같이 새로운 핸드폰들이 출시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우린 그 광고들을 보면서,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과,
'아 갖고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되겠죠.

'와 세상 좋아졌다.' 라는 생각이,
바로 우리가 '기술' 에 대해 가진 좋은 이미지입니다.

그 핸드폰을 샀을 때,
우리가 누리게 될 놀라운 기능과 그만큼의 편의가,
우리를 설레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새로운 기술이 우리에게 편의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아마 기술을 싫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식상한 예로 공장에 도입된 자동생산시스템 덕분에,
10명이 하던 일을 5명이 할 수 있게 되었다면?

아마 그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을 싫어하지 않을까요?

아시겠지만,
흔히 핵폭탄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에 대한 얘기가 아닙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인 산업 기술에 대한 얘기입니다.

분명, 좋은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싫어함이 나뉜다는 것.
우리가 가진 기술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기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입니다.

다만, 그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좋은 기술이냐 나쁜 기술이냐를 판가름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편리와 효율을 제공하는 좋은 기술의 하나로 이미지화되어 있는 산업 기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3.

산업화되어가는 농촌 마을(가칭 책마을)을 예로 들어볼까요.

요즘 농촌은 예전처럼 이땅은 박씨네땅, 저땅은 윤씨네땅, 이런 식이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지만, 땅주인은 변했죠.
마을의 몇몇 사람(촌장)이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생계를 꾸립니다.

손으로 하던 추수를 기계로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여러 사람이 몇시간에 걸려서 해야하는 추수를 기계로 하면 금방 끝나겠죠?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네땅, 윤씨네땅에 들여오면,
매일 저녁 평상에 앉아 쉬고있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겠지만,
이 성범표 자동추수기를 박씨와 윤씨가 일하는 농장 주인에게 판다면,
아마 매일 저녁 일자리를 구하러 읍내에 다녀오는 박씨와 윤씨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4.

성범표 자동추수기는 고장도 잘 안나고 정말 좋은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박씨와 윤씨를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니.. 조금은 아이러니하네요.

그렇습니다.
산업 기술 자체는 좋은 것임에도,
이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판단을 달라질 수 있는겁니다.

산업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곧 산업 기술을 도입하는 이유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누가, 왜 기술을 도입하느냐는 것입니다.
'왜'는 '누구'의 이해관계에 불과하니까,
누가 기술을 도입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느냐,
아니면, 농장 주인이 도입하느냐.

박씨와 윤씨가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을 줄이겠지만,
농장 주인이 도입하면, 산업기술은 일자리를 줄이는겁니다.

기술 자체는 중립적이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아래에서의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셈입니다.

5.

이런 역설적인 현실은,
그대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남게됩니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기계파괴운동)이라는 것이 있었거든요.
100명분의 일을 거뜬히 해내면서 자신의 일자리를 쫓아버린 기계를 미워해버린 영국사람들을 보면서,
웃어넘길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오래전 영국과 같이 효율적인 생산과 더 많은 이윤을 위한 새로운 기술들은 계속 도입되고,
오래전 기계를 파괴했던 영국의 노동자들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자들은 신기술 도입 시 노동조합과 사전 협의를 하라며 신문 한구석을 장식하기도 합니다.
기업의 경영권을 침해하고, 신기술의 도입을 방해한다는 누명이 씌워진 채로.

씁슬한 현실입니다.

6.

제러미 리프킨은,
그의 저서 <노동의 종말>의 2/3 이상을 미국의 근대사를 예시로 들어,
기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일자리의 감소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제, 경제학을 전공한다는 경제학자들 또한,
기술의 발달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시장과 고용의 창출을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는 기술 발달의 단면을 나타내는 것일 뿐,
실제, 새로운 기술의 도입이 새로이 고용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쫓아낸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경제는 기업의 힘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기업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고 기업에 이윤을 만들어주는 사람은, 크게 보아 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기치로 한 서로간의 경쟁으로 너도나도 인력감축에만 열을 올려,
전 산업에 걸쳐 실업자와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하는 지금의 추세는,
상품의 구매자를 재료로 상품을 만드는, 즉 스스로의 존재기반을 무너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윤과 시장, 시장과 경쟁이 없는 자본주의를 상상할 수도 없는 노릇.

우리는 이런 예측 가능한 비극 속에서,
오늘도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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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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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에 쓰여졌으니,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그해 있었던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연극으로까지 만들어졌다는 소설.

이제서야 읽고나니,
지난 찰나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네요.

책을 덮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좋은 느낌을 받아 부족하나마 몇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마음 무거움을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서요.

게시판을 둘러보니,
몇분의 후기도 찾을 수 있었는데,
설혹 지루하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셨는지요.
神과 종교에 대한 반정립? 아니면 神과 종교로 대변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

듬성듬성 읽은터라,
조금은 뻔한 (하지만 중요한) 결론을 내며 책을 덮었으나,
이남호씨의 서평을 읽으며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생겼습니다.

종교와 신에 대한 변증법적 반정립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반정립의 주체가 민요섭과 조동팔 두명이라는 것에 착안한다면 조금 더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거죠.

민요섭과 조동팔 모두 현실의 모순 위에 선 기독교적 신앙과 실천에 대해서 회의했고, 인간의 정의에 주목하였으나,
민요섭이 '신앙'이라는 테두리 주위를 배회하며 새로운 신앙을 찾았던 반면에,
조동팔은 틀 자체를 벗어나 있었다는 발견이 그것입니다.

소설의 시작이자 시간상의 끝 무렵,
(어떤 이유에서) 지친 민요섭은 기도원으로, 즉 神에게로 돌아가게되고,
이를 본 조동팔은 그에게서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테두리를 벗게했던 (물론, 그에게서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색깔이 두드러지지만) 민요섭의 회기를 보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두려워하며 민요섭을 살인하게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처럼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요섭은 왜 회기했을까?
그리고, (서평에서 비판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는) 조동팔의 극단적(?) 탈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여러분들과 같이 얘기해봤으면 좋겠네요.

참, 마지막으로,
뻔하지만(?) 중요했던 결론에 대해,

'어쩔 수 없다' 며, 이기적 인간의 본성이라는 허울에 숨어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자신과 문제를 포괄한 구조조차 고찰하지 않은 불평 불만만을 늘어놓지 말고,
비록 때로 굽히고 꺽이더라도, '사람이 만들어야 할 희망' 앞에 '사람의 정의' 앞에 솔직하고 당당해야 하겠다는 다짐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사람의 정의' 가 그들의 교과서에나 나오는 빛바랜 도덕적 문구는 아니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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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의 선택 룰라
브리 뚜 알비스 지음, 박원복 옮김 / 가산출판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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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브라질은 우리나라와 굉장히 비슷한 역사적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에 의해서 오랜 식민지배를 받았고, 60년대 군부독재와 70년대 브라질의 기적이라는 경제호황기를 누렸죠.
80년대 들어 군부독재가 끝나고 들어선 민간정부에서는, 소위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서 많은 폐단을 낳게 되구요.

5천 4백만 명이 하루 1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고, 15%가 넘는 실업율.
3%의 인구가 차지하는 토지가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는 반면, 최빈층 40%는 1%만 소유하고 있는 나라.
가장 높은 수준의 세금과 불평등한 세금구조, 2천5백억 달러에 이르는 천문학적 규모의 외채더미가 브라질을 상징합니다.

복지국가를 상징하는 벨기에와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인도의 합성어인 '벨런지아'라는 별칭이 나타내듯이,
경제규모 세계 12위 이면서, 세계최고의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공존하는 나라.

브라질입니다.

2.

2002년이었습니다.
신문 사회면이나 국제면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했던 기사가, 브라질에서 좌파정권이 집권했다는 대선 기사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그냥 '룰라'입니다.
18세에 수도공으로 시작해서, 브라질 금속노조 위원장으로, 그리고 3차례의 낙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겁니다.

그의 당선이 이렇게 이슈가 되었던 것은,
단지 좌파정권이라는 사실 외에도, 선거가 유례없이 많은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인데요,
위와 같은 사회적 갈등 속에서, 뭔가 달라질거라는 기대감이 많은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를 이끌어냈겠죠.

국제사회도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조중동 메이저급 신문들은 그저 '좌파'라는 단어를 부각시켜 이미지 만들기에 여념을 없었을텐데, 그건 그렇다 치고,
민주노동당을 비롯해서 노동계 인사들이 줄줄이 성명을 발표하고 그 중 몇몇은 브라질로 건너가기도 했던 사실이 기억에 남습니다.

2002년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선거가 그 즈음이었을테니,
우리나라의 진보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노동계 인사들의 입장에서는,
룰라, 그리고 그가 속한 노동자당(PT)의 집권이 반가웠을만도 합니다.
자신들이 그리고있는 미래가 될테니까요.

3.

그런데, 막상 브라질의 분위기는 그들이 기대하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모양입니다.

저자인 브리뚜 알비스씨의 논조는,
엄하게 말해서, 룰라가 좌파적인 성향을 계속 유지했다면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거든요.

이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논평에서 볼 수 있듯이,
실제, 룰라는 89년, 94년, 98년 3차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고,
여러차례의 낙선을 거치면서 그의 정치 경제적인 입장을 상당부분 절충하는 과정을 거치게됩니다.
미국에 대한 태도, IMF, IBRD와 같은 세계금융권에 대한 태도와 같은 정책기조나 대외발언도 많이 물러졌구요.

극좌파에서 중도좌파로 우향우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급기야 그의 선거 캠페인은 '평화와 사랑'이었을 정도로 두리뭉실해집니다.
( 두리뭉실하다고 표현한 것은, '평화와 사랑'이 언뜻 보기에 말은 좋지만,
굉장히 구체적이고 이해타산적인 현실 정치영역에서, 평화니 사랑이니 하는 단어들은 불분명한 정책기조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

대선 당시 룰라 후보의 경제정책 참모 기도 만테씨는 "우리는 70∼80년대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면서,
노동당과 룰라 정부의 변화가 무죄임을, 나름의 융통성임을 얘기하지만,
룰라가 집권에 자신을 맞추었다는 느낌이 드는건 왜인지요.

뭐 자신의 신념을 유지한 채로 집권을 이루어내든, 집권에 맞게 타협을 하든,
그건 룰라의 자유고, 브라질 유권자의 자유일겠지만,
좌파정당의 정치 경제적 미래를 짚어볼 욕심을 가졌던 독자에게는,
브라질 노동당과 룰라가 적절한 예시가 될 수 없다는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4.

이제 집권 1년반을 넘어가는 룰라 대통령은,
집권 당시 굉장히 긴장했던 우파로부터는 '쟤가 왜 저러지?'하는 의혹의 시선을,
좌파와 극빈층으로부터는 실망과 배신이라는 힐책을 받으면서,
굉장히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좀 더 두고 볼 일이지만,
캐나다, 브라질까지 묶었던 NAFTA에 이어 남미 전체까지 미주대륙 전체를 2005년까지 묶어내겠다는 미국의 FTAA 의 추진의지를 옅보자면,
간판 유지가 언제까지 가능할지 두고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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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가족 이야기
조주은 지음, 퍼슨웹 기획 / 이가서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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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학이란 모름지기 이래야한다는 흐뭇함을 느낍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써낸 조주은씨의 말 그대로 옮기자면, '자신의 삶을 통째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조주은씨는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만나 울산에 살면서 느낀 일상의 갈등을,
결국 한권의 책으로 써냈습니다.

물론, 여느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아내와는 다르게,
대학도 졸업했고 대학원도 다니고 있지만,
그녀가 느끼는 일상의 갈등마저도 다른건 아닙니다.

일주일은 주간 일주일은 야간 노동을 해야하는 남편, 그리고 어린 두 아이와 함께 사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은,
그녀와 그녀 가족의 일상이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자 가족의 삶 일반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느끼는 갈등은 현대자동차 노동자의 부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그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갈등을 깊이 고민한 노력의 결과는,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들에게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사회학의 혜택이자 매력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2.
'자신의 삶을 통째로 연구대상으로 삼는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비록, 정도는 다를지라도, 우리는 매일같이 스스로의 삶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어제 하루 갈등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 하루 고민이 있습니다.
이런 갈등과 고민은 누구에게나 연구대상이고, 우리는 나름대로의 연구 결과를 가지고 이런 갈등을 해결해나가죠.
또 때로는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를 만났을 때, '아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도움을 주기도 하구요.

저는 이런 것들 모두가 사회학을 구성하는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자동차에 다니는 남편이 있다'는 공통점을 가진 많은 여성들 중에서 조주은이라는 여성에게 특별한 점이 있었다면,
아마 대학 졸업장과 대학원 학생증일진데,
대학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주어지는 학문적 기회들은,
그런 조각들을 조립하는 능력을 좀 더 키워주었을 겁니다.

일상의 조각을 주워모으는 과정 자체는 다를게 없습니다.

3.
사건의 순서를 따지자면,
대학 졸업이 첫번째이고, 결혼이 두번째, 대학원 입학은 세번째입니다.

결혼을 하고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따라 울산에서 보냈던 얼마간과 그 속에서 느꼈던 풀어낼 수 없는 갈등이,
그녀가 아이를 들쳐업고 서울로 올라오게 했던 이유였던 셈입니다.

풀어낼 수 없는 갈등이 무엇이었는지, 그녀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나는 남편의 아무런 도움 없이 혼자서 연년생 두 아이를 키워야 했다. 그건 상상 밖으로 힘든 일이었다. 남편이 밤샘 야간노동을 마치고 아침에 들어오면, 아침상을 차려주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밤을 샌 남편이 숙면해야했기 때문에.
둘째는 들쳐메고, 첫째는 유모차에 태우고서 하루 종일 화봉동 거리를 쏘다녀야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집에 들어가면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이 자고 있는 집으로 들어간다는게 꺼려졌다. 종일 점심도 거른 배를 움켜쥐고 갓난쟁이 두 아이를 업고 밀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하염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주부를 상상해보라.
그렇게 힘든데도 왜 하루 종일 길거리를 배회해야 했을까? 그게 차라리 나았기 때문이다. 집에서 울며불며 떼쓰는 아이들을 달래 본 적 있는지, 그리고 거기에 밤샘 노동에 지쳐 곯아떨어진 남편도 있었는지. 나는 혹시라도 남편이 깰까 신경이 곤두서고, 차라리 집을 나서는게 당영한 배려이며 내조라고 생각하는 아내이자 엄마였던 것이다.'

'내 안에 갈증이 생겼다. 곧 그 갈증은 갈등이 되었다.
..(중략)..
내 의문과 딜레마에 대해, 그리고 그 의문과 딜레마를 쉽게 이야기할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해 강한 궁금증이 계속 일었다. 그리고 어느 날, 스스로 답을 찾겠노라는 다짐도 함께 생겨났다.
..(중략)..
나는 엄마, 아내,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해 다시 탐구해야 했고, 나와 우리를 그토록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시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서울에 올라와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고,
자신의 갈등을 풀어내려했던 그녀의 논문은 이렇게 한편의 책으로 나오게 됩니다.

4.
그 시작은 개인의 갈등에서부터 시작했을지라도,
이것이 '사회적'이라는 수식어를 얻기 위해서는,
한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말 그대로 '사회적'이어야 하는건데,
그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밝혀내야하는겁니다.

갈등은 개인적이지만,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회적 구조는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 사회적 구조를 밝혀내면 그 혜택은 자신과 비슷한 갈등을 겪는 이들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여튼 그러기위해서는,
우선, 잠시 갈등이 가져다주는 감정에서 벗어나, 좀 더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녀의 경우는,
일주일 단위로 주야간 근무를 하는 남편의 직장,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과 전업주부인 자신,
그녀가 거주하는 사원아파트의 주부공동체,
그리고 울산이라는 지역의 특수성, 등등을 돌아보게 되고,
관련한 논문과 자료를 수집하고, 옆집 위집 아줌마들과 인터뷰도 합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여기서 한발자국만 더 나아가면 됩니다.
단순히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가 아니라, '이게 이래서 저건 저렇다'는,
다양한 사회적 조건들간의 '연관관계'를 밝혀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5.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자동차 업계는 대부분 그녀의 남편처럼 일주일씩 주야간으로 일을 합니다.
일주일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 일주일은 저녁에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에 퇴근하는 것이죠.

이런 노동형태가 신체리듬상 전혀 올바르지 않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자동차 업계들이 이런 노동형태를 고집하는 이유는, 설비 투자에 들어간 돈을 최대한 회수해야하는 기업의 생리에 있습니다.
자동차 산업과 같이 대규모 제조업일 수록 설비투자에 큰 규모의 자본이 필요하고, 새로운 설비투자가 있기 전까지(즉, 효율성의 측면에서 그 기계를 사용할 수 없게 되기 전까지) 최대한 기계를 돌려서 자동차를 많이 만들어야하는겁니다.
이것이 24시간 쉬지않고 라인을 돌려야하는 이유가 되는거죠.

고용은 기업의 권한인데,
자동차 업계 전체가 이런 노동형태를 가지고 있으니, 개인의 입장에서는 신체리듬을 따질 여지가 없어집니다.

6.
'주야간 노동'과 함께 자동차 업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는 '시간제 임금'입니다.

현대자동차니 대우자동차와 같은 대공장 노동자들이 5,000만원에 가까운 연봉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실제, 책에 첨부된 노동자들의 월급명세서를 보면, 적게는 3,000만원에서 4,000만원까지 되어있는데요. 왠만한 대졸자 취업생의 2배 가까이 되는 연봉이네요.

이런 높은 연봉은 시간제 임금 덕분입니다.
머리 속에 떠올려보시면 대충 알겠지만, 자동차와 같이 대규모 제조업의 경우 호황과 불황일 경우 그 손차이가 엄청날 것입니다.

이런 호황과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탄력적인 운영이 필요하죠.
호황일 때는 최대한의 동력을, 불황일 때는 최소한의 동력을 운영하는겁니다.

그런데, 고용이라는게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게 아닌지라 문제가 됩니다. 고용을 하면 임금을 줘야하고, 임금을 주는 것은 자동차를 만들기 때문인데, 팔리지도 않는 자동차를 만들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자동차 업계는 기본급의 비중을 줄이고, 붙였다 떼었다 할 수 있는 잔업과 특근과 같은 시간제 임금을 광범위하게 도입합니다.
한마디로, 4,000만원이라는 상대적 고임금은, 기본 근무 외에도 매일 2시간씩의 잔업을 하고 휴일 및 공휴일에도 쉬지않고 특근(특별근무)를 해야 받을 수 있는 연봉이라는겁니다.

따라서,
휴일과 공휴일에 쉬고, 아침먹고 출근해서 집에 와서 저녁먹는 사람과,
매일 2시간씩 잔업하고 가끔이든 매번이든 휴일과 공휴일에 특근을 한 사람과는 연봉 차이가 엄청날 수 밖에 없죠.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하루의 여가시간과 휴일을 반납하고 자발적으로(?) 잔업과 특근을 선택하는 이유는,
기본급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시간급이 주어지는 매력(마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7.
잔업과 특근이 높은 비율의 시간급을 가지는 근거는 두가지입니다.
(휴일 특근의 경우는 20만원 가까이 된다는군요.)

잔업과 특근이 일반적인 생체리듬을 깨는 노동인 것이 하나요,
(낮에 일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잖아요.)
호황과 불황시 유동적으로 라인을 돌려야하는 기업의 이윤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한 것이 둘입니다.

이 경우 불황이 되면,
낮은 기본급과 높은 시간급으로 이루어진 현대자동차의 상대적 고임금은 실상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잔업과 특근이야 추가적인 성격이 강해서 고용에 필수적이지 않으니,
잔업과 특근을 없애버리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테니까요.

8.
주야간 노동을 하는 남편과 전업주부인 부인, 그리고 두명의 아이로 정형화되어 있는 울산의 가정경제에서,
'주야간 노동'과 '시간제 임금'이라는 두가지 코드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가족의 생계가 달려있는 가족임금을 벌기 위해서는,
'주야간 노동'과 '시간제 임금'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없고,
가족의 생활은 남편의 노동형태에 강하게 종속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야간노동을 하고 돌아온 남편의 숙면을 위해서,
아이를 들쳐업고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들의 갈등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2시간의 잔업을 포함해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남편이 있다는 물질적인 조건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해도,
여성들에게 스스로의 삶의 기회를 박탈하고 남편과 가정에만 종속된 전업주부로 내모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10.
그런데,
여성들은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기회를 박탈당한 갈증과 갈등을,
힘들게 노동하는 남편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자식교육에 대한 욕심으로,
달래고, 대리만족하는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는데에 진정한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이에 반하는 뜻으로는 '미봉책'이라는 것이 있는데,
미봉책은 당장의 문제에만 급히 대응하는 것으로, 해결하지 않은 문제의 원인이 다시금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어서 좋지 못합니다.

밤새 12시간 일하고 지쳐돌아온 남편이 안쓰러워 정성스럽게 밥을 차려줄 수 있고,
남편의 숙면을 위해 아이를 업고 밖으로 나올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특근 두번 하면 벌 수 있는 40~50만원의 돈을 위해서, 굳이 아이까지 맡겨놓고 낮은 시급의 유통업이나 서비스업에 직장을 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하는 남편을 생각해서 자신은 검소한 생활을 하더라도 자식은 생산직 노동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업주부의 힘든 일상을 같은 남편을 가진 옆집 위집 여성들과의 수다로 털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이기에 미봉책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업주부일 수 밖에 없는 물질적 조건이 되었던,
'가족임금을 전제로 한 남편의 주야간 노동, 시간급 노동'이 변하지 않는 한,
여기에 생계가 달린 가족의 생활형태는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이에 종속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11.
그래서,
조주은씨는 이렇게 꽉 짜여진 틀에서 한발 나아가 '노동시장의 전면적인 재구조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주야간 노동과 시간급 노동이라는 노동형태에 대한 규제를 통해서,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주야간 노동이 없어지고, 시간급 노동이 줄어든다면,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가사노동을 분담할 수 있는 시간적 조건'은' 확보될 것입니다.

그런데, '은'에 강조를 두고자 함은, 그것은 말 그대로 '시간이라는 하나의 조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성들 또한 누구에게 종속된 것이 아닌 평등한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가사노동이 분담되어야 하는데,
단순히 시간의 확보만으로 가사노동의 분담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겁니다.

그녀 역시도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고,
동시에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들의 의식전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12.
사실, 남성들에게 생계비를 전담시키고, 그에 따라 여성들이 자연스럽게 전업주부가 되어 가사노동을 하는 현상은,
남과 여, 여와 남간의 고정되어있는 특수성 때문이 아니라, 근대에 들어오면서 시작된 사회적 역할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근대'를 상징하는 열쇠 중의 하나는 '산업혁명과 제조업'.
대규모 생산설비를 통해 가장 적은 비용으로 대량의 재화를 생산해야 하는 제조업의 생리가,
위와 같은 구조를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실제, 제조업 이후에 떠오른 서비스, 금융, IT 분야는 굳이 남성에게 편중할 이유는 많이 없어진 듯 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도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은 필연적으로, 여성들을 주체화하고, 남성들의 의식을 변화시킬 것이구요.

13.
그런데 저는 그녀의 문제의식과 해결책이 좀 더 완결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문제의식은,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와 여성의 사회적 진출, 그리고 가사노동에 대한 남성의 의식전환,
여기에서 멈추고있는데,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주야간 교대근무나 시간급 임금, 그리고 가족임금과 같은 노동시장의 형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요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효율을 통한 최대의 이윤이 지상과제인 기업의 생리에서는 그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 역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야간에 멈춰있는 기계와 손실액을 계산해야하는 기업의 생리와 맞대면해야 하는 국면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녀의 기획은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있네요.

하지만, '노동시장의 전면적 재구조화'라는 결론은 그녀가 가진 문제의식의 줄기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 노동시장의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의 풍부한 문제의식을 발견하실 수 있을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어렵지만 소중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지금까지 얘기한 그녀의 삶의 위치가,
노동자 일반에 있지 않고, 소위 '노동귀족'이라 불리는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라는 점을 좀 더 염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실제, 위와 같은 노동현실 보다는,
노동시장의 60~70%에 이른다는 비정규직 노동자이 더 일반적일텐데,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60~70% 의 임금을 받고, 고용안정이나 여러 복지혜택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으니까요.
정규직 노동자들과 같은 주야근 교대, 잔업, 특근을 하면서도, 가족의 생계비용을 벌기가 빠듯한 것이 이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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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27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고 나름대로 흐뭇한 독서후기를 썼었는데, 당췌 찾을 수가 없네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돌아보니 대충 이렇습니다.

1.
제가 <1984년> 바로 이전에 읽었던 책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였는데,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는 점입니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되죠.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근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쓰여진 것이라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가 회의로 바뀔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라는겁니다.

신이 모든 것을 규명해주었던 중세에는 없었던 사람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 <유토피아>와 같은 유토피아 문학이라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약합니다만은,
중세가 막을 내린 후에는, <유토피아> 외에도 많은 유토피아 문학, 그러니까 희망찬 사회에 대한 기대들이 쏟아져나왔었죠.
이런 희망은 1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희생 속에서도 꺽이지 않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을 거쳐가면서 꺽이기 시작합니다.

2.
두번째는, <1984년>을 읽는 재미에 대해서입니다.

전체주의를 비판했던 이 책은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던 모양입니다.

80년대 쯤에 출판된 이 헌책의 앞뒤를 덮고있는 그 당시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 더욱이 그러합니다.
일당독재, 일상생활에 대한 감시, 노동수용소와 같은 코드들이 강조되고있죠.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들은 몇가지 더 있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용 코드들 역시나 중요합니다만, 몇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겁니다. 냉전시대의 쓰임새에는 별로 걸맞지 않았을지라도, 꽤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첫번째는, 삼국지의 삼분지계를 떠올리게 하는, 3국의 세계질서.
이 책의 배경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국을 기본으로 한다는겁니다.

두번째는, 3국의 경쟁질서와 전쟁과의 관계입니다.
소설에서는 심심하면 한번씩 폭탄이 떨어지는데,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이 폭탄이 가지는 경제적 의미입니다.

세번째는.. 잊어버렸네요. ^^;

그럼, 여러분 나름대로 추가적인 코드들을 찾아 재밌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오랜만에 쓴 긴 독서후기를 줄이려니 너무 억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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