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노동자운동은 주로 노조운동의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노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활동가(또는 노동자 정치조직)가 노조를 어떻게 이끌 것인가는 남한 노동자운동의 전진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노조에 대한 올바른 태도와 개입 없이 노동자운동의 전진을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트로츠키의 [노동조합 투쟁론]은 현장에서 노동자운동을 계급적으로 밀어가고자 하는 활동가에서 아주 귀중한 실천의 무기가 될 것이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는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노조는 자본가계급의 노무관리기구가 될 것인가 아니면 계급투쟁과 해방의 무기가 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는다고 분명하게 지적한다. 날로 격화되는 세계 자본 간의 경쟁, 만성적인 불황과 세계대공황의 위협, 거대한 실업, 半실업자군의 존재 등은 조합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을 순식간에 회사살리기, 나라살리기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노사협조주의자, 아래로부터의 분노와 투쟁의지를 억누르는 관료로 전락시켜 버린다. 이것은 정규직 노조운동에서 극명하게 입증되었으며, 최근 비정규직 노조 지도자 일부의 심각한 동요와 관료적 행태들에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현장활동가는 자본주의를 폐지하고 노동자해방을 쟁취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가질 때만, 그리고 노동조합과는 질적으로 다른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조직(당) 및 그 현장소조(현장분회)와 결합하여 노조 운동을 밀어갈 때만 동요와 타협으로 빠져드는 것을 원천봉쇄할 수 있으며, 심각한 위기에 처한 노동자운동을 일관되게 노동해방의 길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 책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미국, 중국 등 세계 노동자운동, 혁명운동의 중대한 경험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기에 남한의 현장활동가들에게 넓은 시야와 함께 살아움직이는 원칙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남한 노동자운동의 역사와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진단할 수 있는 이론적 능력을 갖게 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장활동, 노조활동, 현장조직활동 등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골치아픈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소중한 영감과 시사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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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2
이태하 지음 / 책세상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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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인과 비종교인, 그 갈등의 실마리를 찾아

책을 지은 이태하 교수는 철학을 하시는 분입니다. 서경대에서 강의를 하고 계시다는군요.
<종교적 믿음에 대한 몇 가지 철학적 반성> 이라는 제목에 섞인 '반성'이라는 단어가 암시하지만, 이 교수 께서는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갈등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해요.

제작년이었나요, 오랜 기독교 신자이셨던 아버지께서 돌연 교파를 옮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시겠지만, 현재 우리 나라에는 크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순복음교회, 성공회 등등 여러 교파가 있고, 또 그 교파 내에서도 다양한 교단으로 쪼개져 있죠. 거대 교파인 장로교에서 생소한 대한예수교침례회로 적을 옮기신 것입니다.

집안에 갈등이 굉장히 많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는 중에 저는 대한예수교침례회의 수련회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 평행선

고등학교 이후로, 그러니까 소위 머리가 큰 이후로, 저와 '신앙'은 줄곧 평행선을 이뤄왔습니다. 응당 아버지를 쉬이 이해하기 힘들었죠.
수련회는 그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교파를 옮긴 이후에 신앙'생활'이 달라진 아버지가 제게 실마리를 제시한 덕도 있었구요.
이 교수 역시도 평행선에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을 '종교'와 '과학'이라고 이름 붙여도 될런지요.
실제, 개신교인들이 제공하는 불신감이란, 대략 그(녀)들의 '배타성'에 기인하다고들 해요.

하지만, '개신교인들의 배타성이 문제다' 라고 쉬이 결론 내리기엔 다소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이는 분명, 배타하는 주체와 배타당하는 객체 사이의 불균등한 세력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으니까요.
개신교인들은 분명 한국사회에서도 엄청난 세력을 이루고 있는 배타하는 주체인 셈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배타당하는 객체일겁니다.

세력관계를 차치하고 본다면, 배타당하는 객체 역시도 배타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 배타성이란, 토론이나 설득의 과정 없이 이루어지는 물리적인 행동이 빚는 폭력성을 뜻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 점에서 이 교수의 이 책, 분명 읽어볼 가치가 있을겁니다.

# '상보성'을 아시나요?

이 교수의 전공인 '종교철학'은, 메타학문입니다.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종교철학의 연구대상인 학문이란, 다름 아닌 신학이구요.

따라서, 아쉽게도, 이 책의 결론이 명쾌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즈음은 적지 않이 예상할 수 있습니다.
계속 평행선의 비유를 들자면, 종교철학은 평행선의 접점을 찾기 보다는, 평행선의 거리를 좁힐 따름입니다. 종교철학자는, 종교의 전제조건이 되는 세계관, 즉 신학의 일관성 내지는 정합성만을 검토할 테니까요.

그는 과학과 종교의 '상보성'을 얘기합니다.
만약, 과학과 종교라는 평행선을 만나게 하려고 했다면 '상호보완성'이라고 하겠지만, 만나지 않는 평행선이니 '상보성'이 옳은 표현일겁니다.

상보성은 접점 보다는, 두 평행선이 향하는 방향에 더욱 주목합니다.
각각의 평행선은 각각의 역할을 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죠. 같은 방향이란, 다름 아닌 '삶의 문제의식' 이구요.

교수는 자살사건을 예로 들었으나, 전 연애담을 예로 들께요.

갑동이와 병순이가 서로 헤어졌다면,
'삶의 문제의식'은, 두 사람의 슬픈 마음이요,
'과학의 역할'은, 두 사람의 행적을 좇는 것이고,
'종교의 역할'은, 행적의 바탕이 된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병순이와의 헤어짐이 너무 슬프다며 찾아온 갑동이에게,
절친한 친구인 을동이는, 그간 있었던 '사실'을 들음과 동시에, '사실'에 내재된 두 사람의 속내를 곰곰히 생각해 볼테니까요.
삶의 문제의식을 해결하는데에는, 사실 만으로는 몹시 부족하다는겁니다.

# 주연은 내어줄지언정

오늘날의 철학은 과학에게 꽤나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철학계의 동향은 전연 모르니, 철학자 탁석산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나라에서 철학자가 현실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는 사례는 생명 공학과 관련한 윤리 문제가 거의 다가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런지요.

그의 논평처럼, 철학은 과학에 주연을 내어줄지언정, 연극판 밖으로 쫓겨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밤하늘의 수많은 십자가들이 이를 보여준다면 섣부른 판단일런지요.

그렇다면, 문제는 오히려, 평행선의 접점을 만들고 심지어 하나로 만드려 하는 억지 노력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접점에 서있는 두 평행선의 이름은 '철학적인 과학'과 '과학적인 철학'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상보적 노력의 밖에는

이쯤되면, 수련회를 다녀온 후의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가 조금 풀리는 듯 합니다.

대한예수교침례회의 비판 자체는 충분히 긍정적인 것이었습니다.  - 물론, 이곳 역시도 '오대양사건'으로 대표되는 많은 말썽(?)을 일으켰고, 많은 의혹이 있지만 - 그것은 기존 개신교 우파 내지는 다수파를 이루는 교파들의 옳지 못한 행적들에 대한 비판에 근거하는데, 재정 마련을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금전거출이라든지, 세력 확장을 위한 무리한 사업 집행들을 도마에 올립니다.

하지만, 그(녀)들의 통쾌한 비판의 이면에는, 바로 '과학적인 철학' 이 있습니다.

그(녀)들은 창조과학회(http://www.kacr.or.kr)라는 학회의 부흥을 기반으로, 성경의 기적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요,
이는 과학과 철학의 상보성에 어긋나는 셈이에요.

창조과학회의 과학적 논거에 대해서는 과학자들이 판단할 일이겠지만,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란, 과학의 힘을 빌어 철학을 설득하려는 '과학적인 철학'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과학적인 철학이든 그냥 철학이든,
그(녀)들의 이런 노력이 인간의 실존적인 물음에 대해서 자꾸 현실 도피적으로 흐르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던, 마르크스의 명제는 이곳에 자리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녀)들은 아슬아슬한 자동차 경주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어요.
자신의 실력으로 관객에게 속도감을 선사하지 못하고, 경쟁 선수를 위압하려 지나치게 옆에 붙었다가 불의의 사고로 치닫는 안타까운 장면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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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
박동진 지음 / 책세상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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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적 신화

익히 들어온 '정보화 사회' 선언.

우리가 살아갈 사회를, 새로이 부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기존 사회에 대한 실망과 갈등, 그리고 새 사회에 대한 갈망이 어우러져,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해서 미처 충분히 살펴보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정보화 사회'를 받아들였는지도 모릅니다.

<전자민주주의가 오고있다>의 저자 박동진 교수는, 이를 두고 '정보적 신화' 라 이르고 있습니다.

정치에서는 인터넷의 보급과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직접민주주의의 시대를,
일상생활에서도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같은 가전기기의 네트워크화를 두고 생활의 편리함을,
전사회적으로 정보화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의 신화 부수기가 자못 기대되지 않습니까.

그가 주목하는 부분은 전자투표의 활성화를 두고 일컬어지는 직접민주주의, 혹은 전자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입니다.
전자투표를 통한 용이한 정치에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주장, 심지어 참여의 활성화를 떠나서 대의제 민주주의를 극복한 직접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그는 이제 기술과 정치의 만남을 지켜봅니다.

# 정치와 경마

" 정치가 전문화되는 순간부터 데모스는 자신들의 모든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기게 되며, 이때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 (27쪽)

기술에 의해 자극받아야 할 만큼, 대의제 민주주의는 못난 것이었나 봅니다.

민주주의 본연의 형태인 직접민주주의를 두고, 통제 불가능한 대표에 의해서 수행되는 오늘날의 간접민주주의를 변호하는 논리는 효율성이었습니다.
고대 도시공동체와 비교할 수 없이 커져버린 국가규모에서 당시의 광장문화를 재현하기란 좀처럼 힘들다는 것이죠.

이 효율성의 논리란 여간 드센 것이 아니어서,
과거의 군사정권이나 체육관 선거와 같은 대통령 간선제는 폐지되었어도, 오늘날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 이 효율성의 논리는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가 명명백백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 민주주일텐데,
'정치인'이라는 직함이 보여주듯이, 정치는 전문가(?)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되어버렸고,
민중은, 데모스(Demos)는, 마치 경마나 경륜을 하듯 자신의 삶을 정치게임에 내맡긴 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배팅을 제외하고는 그저 게임의 결과에 대해서만 왈가왈부할 따름입니다.
게임의 결과인 물질적 이득에만 관심이 있을 뿐인 이들이, 게임 자체를 즐길리 만무합니다.

# 게임의 성격

" 전자민주주의의 새로운 한 축은 체제 유지를 위한 절차적 측면의 보수적 논리로 기능해온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
" 직접민주주의라는 이상화되고 신화화된 이념을 제출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본원적 의미를 복구하는 논술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해 권력은 데모스로부터 나온다는 수사가 아니라, 데모스가 권력을 수행하는 것을 상징하는 비관적 저항적 실천적 논술로 직접민주주의를 전망하는 전자민주주의를 요구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게임 경마장은 한산하기 그지 없습니다.
'인생역전'이라는 게임의 결과에 기대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가산을 탕진하는데 매우 적합하다는 혹평을 들으며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죠.

마사회 측에서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해,
게임의 결과가 조작이나 우연이 아니라, 게이머의 철저한 분석에 따라 결정된다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였습니다.

다시 '인생역전'의 저울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의 발달이, 기존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민중의 참여를 독려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경마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많은 조건들, 이를테면 말의 건강상태나 컨디션, 기수의 능력, 등등을 좀 더 세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졌다한들,
그것은 배팅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경마인 것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죠.

굳이 게임에 비유하자면,
'민주주의 정치'란, 자신이 게임의 주인공이 되어야하는 일종의 '아케이드 게임' 일텐데,
이미 오늘날 정치게임의 성격은 그것과 다르며, 전자투표라는 기술의 발달로 이 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동진 교수는 직접민주주의 논쟁에 앞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를 질문하며 멀리 돌아갑니다.
그는 '자유민주주의'로 부터 시작합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을 규명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 기술과 게임의 성격

" 하나의 새로운 정치적 절차를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

기술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그것은 게임의 성격과는 별개로 작용해요. 그것은 경마를 더욱 경마답게 할 수도 있고, 아케이드 게임을 좀 더 아케이드답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따라서, 경마나 경륜에 비유할 만한 오늘날의 정치게임을 아케이드 적으로 만드는 것은,
기술을 통해서 이루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술은, 정치게임의 성격을 변화시킬 정치적인 투쟁에 이용될 성질의 것입니다.

기술 자체의 중립성이라는 맥락에서, 박동진 교수는 세가지 가설을 제시합니다.
기술이 어떻게 사용되는냐에 따라,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는 조지 오웰의 <1984년>에 그려진 바와 같이 소수의 권력층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민중을 감시하는 '정보독재사회'가 될 수도 있고, 오늘날 일반적인 경향으로 드러나는 것 처럼, 대의제 민주주의에의 참여를 보완하는 것에 그치는 '정보민주주의 사회'가 될 수도 있고, 그가 지향하는 직접민주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도 있다고 말이죠.

그의 결론은 자못 실천적입니다.
" 비민주적인 전자감시 사회의 가능성을 입증하는 것보다는 민주적 전자감시의 허구성을 파헤치기 위한 저항적 논술이 더 민주적인 논술이 된다. "

기술의 발달에 대한 환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실천적인 접근방식 - 정치적 투쟁 - 이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정보매체의 민주화' 내지는 '협의민주주의'에 잘 배어있습니다.

# 협의민주주의가 말하는 민주주의의 정신

'정보매체의 민주화'에 대해서는, 적은 분량이나마 다소 비중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NEIS나 전자주민카드, 전자지문데이터베이스 논쟁과 같이, 분권화로 익히 선전되어온 네트워크가 실제로는 행정권력에 의한 개인정보의 초집중화를 가져오는데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연계할 때 좀 더 풍성하게 얘기할 수 있으니, 홍성욱 교수의 <파놉티콘 - 정보사회 정보감옥> 독서후기에서 좀 더 다루도록 하고, '협의민주주의'에 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 참여의 증대가 현대 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정치적 진실은 시민 토론에서 나오는 것이지 아이디어의 경쟁에서 나오지 않는다. 민주적 참여의 주요 수단은 양이 아니라 질이다. " 라는 것이 제가 받아들인 협의민주주의의 정신입니다.

협의민주주의는 '어떻게 논쟁을 결론지을 것이냐'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지 않고 있으니 만큼, 그 자체로는 완결된 논리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협의민주주의의 약점이라기 보다는, 간접ㆍ직접 민주주의에서 간과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 세력들이 전자투표와 같은 기술적 발달을 두고 직접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는 바탕에는,
참여의 증대를 통해서 직접민주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오해가 바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직접민주주의까지 끼어들어, 민주주의의 자식들이 서로 정통성을 논쟁합니다.
하지만, 협의민주주의는 점잖게 타이릅니다. 간접이든 직접이든 너희들 중 누가 대를 이어받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정신, 구성원 각자가 정치의 독립적이고 평등한 주체가 되는 것, 이 중요한 것이 아니겠냐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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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가들도 이제는 철학공부를!


왜 갑자기 철학을 얘기하는지 궁금하신가요?

이번 수련회에서 현장투 쪽 동지가 '변증법' 철학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지나치게 지식 유희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실천과 결합시키고 정치학, 경제학과 결합시킨다면 철학 학습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왜 철학학습이 필요한지에 대해 아래에 첨부한 문국진의 글이 나름대로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순회토론에서 <철학 학습>을 했으면 좋겠다고 울산동지들이 얘기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읽어보려고 했던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바가반 지음, 책갈피)을 이번에 다 읽어봤습니다. 제가 잘 모르는 자연과학적 지식들이 꽤 많이 나와 어려운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맑스주의 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있게,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무척 도움이 됐던 책입니다. 순회토론 철학학습 때 이 책도 교재로 포함시키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 서평을 올립니다.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에 대한 입문서이다. 즉,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개설서로서 훌륭한 개설서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특정 이론들(계급 투쟁 이론, 잉여 가치 이론, 국가 이론 등)을 한데 통합하고 그것들의 토대를 보강해 준다. 그리고 철학은 특히 역사적 전환점과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변혁적 사상과 지도에 매우 중요한 직접적 요소이다.

이 책의 지은이 바가반은 스리랑카의 변호사라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마르크스주의자이다. 1927년에 태어난 그는 세계적인 격동의 해인 1968년에 <청년 사회주의자>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다. 지은이의 독특한 이력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자연과학 지식이 넓고 정확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과학자가 보기에도 타당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을 해설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대개의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는 자연과학 지식이 피상적이고 심지어 부정확하다. 하지만 바가반의 지식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본 전제를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다.

이 책을 끝낸 직후에 저자는 현대 세계의 특정한 모순들을 보여 주는 이 책의 속편을 쓰기 위해 경험적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노쇠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유럽과 소련의 체제 붕괴에 충격을 받아 ―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 나라들을 퇴보했으나 모종의 노동자 국가로 여겼다 ― 바가반의 일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던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이 책을 미완의 것으로서,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야 함을 뜻한다.

대부분의 기존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는 변증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은 자연 세계에 대해서 정확하고 넓은, 그리고 단연 탁월한 이론적 이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스리랑카보다 부실한 우리 나라의 교양, 특히 인문·사회과학도를 위한 자연과학 분야 대학 교육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아래 글은 해방연대(구 평등연대)의 <평등세상> 사이트에서 퍼 왔습니다.

≫ [칼럼] 노동활동가들도 이제는 철학공부를
    계급철학, 변증법철학, 사회주의철학을 위하여  <2005-04-17 오전 10:46:52>

[칼럼] “노동활동가들도 이제는 철학공부를”

(본 칼럼은 노동네트워크 nodong.net에 매주 연재중입니다.--문국진)


1. 철학은 너무 어렵다?

철학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용이나 초보자용으로 나온 입문서류도 많이 있다. 문제는 입문서라 해도 제대로 된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내용이 너무 빈약해서 교재로 사용하기 곤란한 책들이 많이 있다.

요즈음 노동자 교육이나 강의 등이 많이 시행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교육대상인 노동자들의 낮은 수준이나 사상의 빈약함에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교육주체, 교육 강사 쪽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즉 너무 어렵게 학구적으로 설명한다든지, 노동자적인, 계급적인 정서와 생활감각을 놓치고 그저 지식만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든지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이제는--맑스가 「포이에르바하테제」에서 말했듯이--“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 이제 모든 노동자교육운동에서 ‘교육자부터 교육시키자’! 그리고 노동자의 계급적 정서에 적합한, 그리고 대중의 생활감각과 경험에 확실히 근거한 교육운동으로 나아가자!


2. 책을 읽지 못하는 사정

지금 선진노동활동가들의 사정은 이렇다--그 힘든 노동을 하고, 퇴근하여 쉴 틈도 없이 여기저기 활동하러 다녀야 되고,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와 인터넷 뒤져보고 잔다. 도대체 언제 책을 읽으란 말인가?

물론 인터넷 뒤져보는 것도 중요한 공부 방법이 되었다. 그러나 보다 체계적이고 보다 필수적인 매체는 역시 책이다. 노동활동가들도 그건 알고 있다. 즉 활동이 점점 더 깊어갈수록 학습의 필요성을 더욱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강의도 다니고, 토론회도 다니고, 더 선진적인, 계급의식화된 활동가는 보다 심도 깊은 세미나에 결합하든가, 학습소모임을 하든가 하고 있다.

그런데 본인 자신은 직접 주체적으로 독서도 안한 채, 남들이 강의하고 발제하는 걸 듣기만 한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발전에 한계가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일상에 쫒기는 활동가들은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그것도, 제일 어렵고, 딱딱하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 철학 책을?


3. 요렇게 하면 그 어려운 철학공부도 마스터할 수 있다

필자가 대학원에 가서 터득한 책 읽기 비밀을 돈 한 푼 안 받고 제 글을 읽는 여러분에게만 전수해주겠다.---우선 한 권의 책을 다 읽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철학공부를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중요한 책 한 권을 선정해서 전부 완독을 하는 편이 좋지만) 비밀이란 이렇다---목차를 보고 그 중에서 꼭 읽고 싶은 부분을 선정해서 그 부분만 읽는다! 그러면 그 책은 끝이다.

다음으로, 경제학이나 정치학과는 달리, 철학서들은 너무 깊게 파고드는 경향이 있어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철학은 ‘양’보다는 ‘질’이 훨씬 더 중요한 학문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해보자---한 권의 책을 선정해서 하루에 2-3페이지만 집중 읽는다. 그러면 1주일에 10페이지 정도를 본다. 하루 30분만 투자해도 좋다. 가지고 다니면서 짬짬이 공부한다. 노동활동과 실천 활동에 바쁜 선진노동활동가들은 책을 멀리 하게 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러나 해고자활동가나, 혹은 진정 선진적-변혁적 활동가(혁명가)로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맑스주의변증법철학을 확실하게 정리해야 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철학책을 손에 쥐어야 한다!


4. 좌파 인텔리활동가들의 경우

좌파 인텔리활동가들의 경우는 과거에 학습한 철학지식을 다 버려야 한다. 우리가 80-90년대에 잘못된 스탈린주의철학(심지어는 레닌의 ꡔ유물론과 경험비판론ꡕ도 문제투성이이다)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근본 토대에서부터 다시 철학을 재학습해야 한다.

지금 서울사회과학연구소나 신좌파나 자율주의, 프랑스철학들이 대유행이다. 그 쪽으로 빠져드는 많은 진보지식인들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일탈이다. 그 사람들은 그 쪽으로 가라고 하고, 좌파는 기존 철학 학습에서 기계적 유물론(즉 주체가 상실된 속류 반영론)이나, 스탈린주의적으로 형해화된 변증법을 거두어내고 정통 맑스주의적 좌파 철학을 완전히 재정립/재구성하는 작업에 동참해야 한다.

인텔리활동가들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아주 치밀하게 커리큘럼을 짜고, 가장 올바르게 교재를 선정해서 꾸준히 철학학습을 진행/심화시켜가야 한다. 변증법에 대해 무지하거나 초보적인 지식으로 만족해서는 결코 실천의 올바른 발전은 기할 수 없다. (예컨대 모택동의 글들은 지극히 수준 높은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었고, 변증법적 철학방법론으로써 정세를 분석하고 운동내 정세를 분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반면 트로츠키의 경우는 비록 그가 훌륭한, 뛰어난 맑스주의정치학적 저술을 많이 남겼지만, 철학에 관해서는 빈약했다. 그저 “불균등결합발전론”을 제기했는데, 그 자체가 과연 헤겔적 깊이를 담은, 충분히 변증법적인 사상인가는 의심스럽다.)


5. 그러면 왜 철학이 필요한가? 왜 철학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세 가지 필요성을 들 수 있다.
첫째, 사고의 훈련, 둘째, 판단의 방법, 셋째, 사색의 깊이--바로 이러한 것을 위해서 철학, 특히 변증법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지면 관계상 간단히 설명한다.

첫째, 철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서 꾸준히 읽어나갈 때 저절로 사고의 훈련이 된다. 즉 생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둘째,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철학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 모든 현상을 다루고자 하기 때문에, 그 활용도가 넓고, 그 자체가 세계관이요, 인생관이자, 인간의 의식을 고도로 발전시켜주는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80년대 이래 좌파인텔리활동가들은 필수적으로 철학을 학습하고 토론해 왔다.

이제 노동활동가들도 필수적으로 ‘철학적 훈련’을 거쳐야만 인텔리활동가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고, 인텔리활동가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운동의 계급적 헤게모니를 가져갈 수 있다. 공부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노동대학들이 유행이지만, 정말 제대로 된 노동자철학 강의가 아쉬운 형편이고, 선진 활동가들의 철학 학습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셋째, 철학은 과학적 판단력을 길러줄 뿐 아니라, 사색의 깊이를 가져다준다. 철학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구체적이며 가장 실천에 유익한 학문인 것이다.


6. 진정한 맑스주의자가 되려면 철학공부는 필수

왜 다시 철학인가?---맑스주의의 구성요소가 철학/경제학/정치학(혹은 사회주의이론)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념으로서의 맑스‘주의’는 원래 독일관념철학에 근원을 두었다. 즉 칸트에서 피히테, 셸링, 헤겔로 이어지는 연장선상에 맑스와 엥겔스가 존재하였다. 또한 맑스 정치경제학은 본래 아담 스미스와 리카아도의 영국고전경제학에 대한 비판적 승계로 탄생한 것이기에, ꡔ자본론ꡕ을 진정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미스의 ꡔ국부론ꡕ을 선행 읽어야 된다고 어느 선배는 말하였다.
사회주의이론의 경우, 생시몽/푸리에/오웬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관한 국내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맑스주의적 사회주의사상은 본래 이들 프랑스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작업의 역사적인 연장선상에 위치하였다. ꡔ공산당 선언ꡕ 후반부에 나열된 각종의 당대 사회주의자들과의 혈투 속에서 맑스주의는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그 태생적 근원인 헤겔 변증법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레닌은 죽을 때 유언장에서 “부하린 그는 변증법을 알지 못한다”라고 썼다) 맑스와 레닌의 철학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맑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진정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이 있었다. 즉 기계적 유물론이라든가 객관주의적 유물론, 속류 반영론 등 소위 역사에 존재했던 ‘변증법적 유물론’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실천사업들 속에서의 제반 한계들이 도출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올바른 입장의 철학이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하며, 철학 학습 속에서 자신의 실천적 문제점들을 반성할 수 있어야 하며, 세계관이자 방법론인 철학을 훈련함으로써 사회적 실천 속에서 철학을 활용하여 제대로 된 실천을 해야 한다.

철학의 결여, 특히 변증법철학의 결여는 필히 수많은 오류를 낳게 된다. 온갖 편향과 오도된 판단, 빗나간 인식 등은 바로 탈(侻)변증법 때문에 야기되는 인식론적 오류인 것이다.

이상에서 철학의 필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면 이제 읽기 쉬운 철학책으로서 교재 삼을 만한 자료들을 몇 개 추려서 독자들에게 전한다. 이 중에서 마인드가 맞는 책을 골라서 열심히 공부하시길 바란다. 순서는 난이도에 따라 쉬운 것부터 정리하였다.


[철학 추천도서 목록]

ꡔ철학은 내 친구ꡕ, 청년사 (이것도 내용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ꡔ철학의 기초이론ꡕ, 백산서당 (얇은 책이라 접하기 쉽지만, 이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ꡔ철학 에세이ꡕ, 동녘 (운동권 내 베스트셀러이나, 태부족이다)
ꡔ21세기 철학이야기ꡕ, 코리아 미디어 (신간으로서, 변증법철학의 내용을 주로 다루었다)
ꡔ모순론/실천론ꡕ (모택동 저서로서, ‘노동자의 책’ 사이트에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ꡔ마르크스의 사상ꡕ, 북막스 (캘리니코스의 책으로, 마르크스 이해를 위한 포괄적 입문서)
ꡔ재미있는 철학 강의ꡕ, 이성과 현실사 (중국책으로, 예를 많이 들었다)
ꡔ이야기 속의 철학ꡕ (이 역시 변증법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 해설한 중국책)
ꡔ새롭게 보는 논리학ꡕ, 책벌레 (약간 어렵지만, 변증법적 논리학 이해에 도움이 된다)
ꡔ철학의 기초이론ꡕ, 두레 (제목처럼 기초이론은 아니고, 필자가 교재로 사용 중이다)


[보유(補遺)] 이번 메이데이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대축제로 치르기 위해 지금부터 치밀하게 준비하자


이번 메이데이를 노동대중이 혁명적으로 도취될 화끈한 대축제 분위기로 만들자. 혁명이 일어나면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흠뻑 도취될 대전환의 정치선동을 선보이자. 각 단체는 지금까지의 활동성과 및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노선을 간명한 테제로서 총괄하여 대중에게 제출하자. 대중에 대한 선동과 별도로 정치분파들의 강령(초안)을 간명히 정리하여 제기하자.

강령적 내용을 현 단계에 적합한 슬로건으로서 제출하자. 현 민노총 지도부에 반대하는 또 다른 반대파 지도부의 맹아세력을 대중 앞에서 과시하자. 노동조합 기회주의적 관료의 운동방식이 아닌 노동정치운동세력, 노동변혁정치운동세력의 진면모를 보여주자.
일찍이 맑스는 “혁명은 민중의 축제”라고 말한 바 있다.

---한 손에는 책을, 다른 한 손에는 축배를, 우리의 변혁적 정치의 무기를! (050416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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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인 맥락 이해하기

몇일 전에 읽었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아 <독립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하승우씨 역시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똘레랑스의 기원을 찾아 저 멀리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몹시 고된 일이지만,
그는 독자를 배려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 추상 개념에는 그 개념이 만들어진, 또는 그것이 두드러졌던 특수하고 구체적인 맥락이 담겨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 맥락이 사라지면서 개념은 벽에 걸린 박제로 변하기도 한다. 특히, 그런 추상 개념이 정의나 질서, 도덕과 관련된 윤리적인 개념이라면 이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구체적인 삶과 분리된 윤리적인 개념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때로는 피를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략) 윤리적인 개념에 속하는 똘레랑스 역시 이런 위험을 안고있다.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등장한 구체적인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

저 역시, 전에 책마을에 독서후기를 올리면서,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풀이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 역시, 홍세화씨의 책을 보면서 알게 된 '똘레랑스' 라는 개념을 쉬이 차용하는 우를 범한 셈인데, 이번에 읽은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때의 비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답니다.


# 관용과 똘레랑스

제가 실수했던, 관용과 똘레랑스의 차이에서 부터 얘기를 시작해볼께요.
관용은 똘레랑스 보다 미국의 탈러런스(tolerance)에 가깝다고 해요. 미국의 탈러런스는 1649년 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발표한 '탈러런스 조례' 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데요,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미국에서 탈러런스는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략) 탈러런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절하는 '도구'이지 공공 선이나 정의를 위해 사회를 다시 짜는 '원리'가 아니다. (중략) 똘레랑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

관용과 똘레랑스는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관용은 서로의 이익을 적당한 선에서 조절함으로써, 갈등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똘레랑스는 서로의 입장차이를 명확히 하는 이성적인 토론을 중시하니 만큼, 갈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 이라며, 갈등에 대해 참 인색하지는 않은지요.
매번 조정되고 봉합되는 갈등이란, 어느새 안에서 곪고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똘레랑스의 역설

'똘레랑스의 역설' 이라는 말도 있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강조하는 똘레랑스지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앵똘레랑스에게 마저 똘레랑스 할 경우엔, 똘레랑스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짐을 뜻합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라는 똘레랑스의 기치는, 이러한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똘레랑스도 앵똘레랑스 할 수 있다는 것은, 똘레랑스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뜻합니다.
전제조건이란, 다름아닌 두 주체간의 권력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죠. 평등하지 않은 두 주체간의 똘레랑스란, 결국 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겁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역시도, 타협이나 관용과는 다른, 똘레랑스의 적극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요.


# 차별하는 똘레랑스

아무리 똘레랑스의 개념이나 기준을 명확히 한들, 현실에서 똘레랑스를 두고 일어나는 설전을 막을 수는 없을겁니다.
어차피 똘레랑스란, 인간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개념이니 만큼,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기준이 되기는 힘들겠죠. 하나의 태도 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똘레랑스와 접붙이기' 에 기꺼이 한 단락을 할애한 것은 꽤나 적절해보입니다.
그는 이 장에서, 홍세화씨의 실험 - 그는 입국제한이 풀린 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겨레 신문에 토론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요. - 에 대해 평하기도 하고, 시민간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운동, 무엇보다도 똘레랑스의 역설을 비껴갈 수 있는 불평등의 조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노력들이겠지만, 저 역시 후자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불평등이란 똘레랑스가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똘레랑스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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