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blog.hani.co.kr/westmin/6434)

1. 꼬마 연사.

난 꽤나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도 그닥 활발한 편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꼬맹이 땐 특히나 그랬던 것 같다. 부모님은 성격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며 날 동네 웅변학원에 보내셨다. 나처럼 낯을 가리는 아이들이 많았던 건지, 성공하려면 외향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았던 건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엔 웅변학원이 유행이었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무찌르자, 공산당’ 따위의 반공 구호나 ‘허리띠 졸라매고 죽어라 삽질하자’는 식의 새마을운동 캠페인 같은 연설문을 주절거렸던 듯하다. 마지막엔 항상 두 손을 차례로 치켜들며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외칩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 기억이 난다. 당연히 원고는 내가 쓴 게 아니었다. 학원에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유형 가운데서 골라준 것이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는 말들이 진정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외워대느라 허덕댔을 따름이다. 돌이켜보면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풋내기 중의 풋내기’ 연사였던 것이다.

2. 알파벳 송.

1990년대 초반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는 대중음악계에 커다란 충격파를 몰고 왔다. 물론 우리 가요 최초의 랩은 홍서범의 ‘김삿갓’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랩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식이 대중 속으로 파고들게 된 데에는 서태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가수들이 노래를 부르다 간주가 나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튀어나와 짧은 랩을 뱉어대고 사라지는 모습은 하나의 공식처럼 굳어졌다. 

가사는 주로 영어로 된 것이 많았다. 우리말과 영어가 절반씩 섞인 것도 많았다. Hey Yo, Come On Baby 따위의 추임새가 유난히 많이 등장했다. 래퍼들 가운데 재미교포나 유학파 비율이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영어 가사 가운데는 문법에 견줘보면 어색한, 콩글리시 냄새가 물씬 나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 것도 ‘시적 허용’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노래방에서였다. 유행하던 댄스 가요를 부르던 친구는 간주가 나올 때에도 마이크를 움켜쥐고 한껏 폼을 잡았다. 화면에선 영어 랩 가사가 아우토반을 질주하는 스포츠카처럼 엄청난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좀 따라하는 듯하던 친구는 이내 포기하곤 이렇게 외쳐댔다. “A B C D E F G….” 배꼽을 움켜잡은 우리들도 곧 동참했다. 우린 속사포 같은 영어 랩 가사가 뭘 뜻하는 건지에는 관심도 없었다. 의미 없는 알파벳 나열에 다름 아니었다. 

3. 시인과 논객 사이.

가리온. 한국 언더 힙합의 대부라 불리는 이들. PC통신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검은 소리’를 통해 알게 된 MC 메타(이재현)와 나찰(정현일)이 1998년 초 결성했으니 어느덧 햇수로 10년째다. 이들의 1집 앨범(2004)은 ‘한국적 힙합의 이정표’라는 평과 함께 골수팬들을 낳았다. 당시 함께한 프로듀서 제이유(최재유)는 음악적 견해차로 팀을 떠났고, 두명의 래퍼로 재정비한 가리온은 두장의 싱글 앨범을 냈다. 

이들은 우리말로만 랩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흔한 ‘Yo’도 없다.
“요즘 10대들 사이에선 미국 힙합은 전혀 듣지 않고 국내 것만 듣는 애들도 많아요. 미국 건 들어봐야 무슨 얘긴지도 모른다는 거죠. 우리도 그래요. 영어 랩은 할 능력도, 할 생각도 없어요. 영어로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온전히 할 수도 없고, 어찌어찌 영어 랩을 한다 해도 그걸 알아들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이들이 꼽는 힙합의 우선순위는 이렇다.
요즘 힙합을 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라임’(시에서 운율과 같은 개념. 랩을 할 때 비슷한 발음이 대구를 이루게 배치해 리듬감을 주는 것) 플레이만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근데 그건 가장 낮은 차원이거든요. 그보다 중요한 게 랩에 감정의 흐름을 실어 표현하는 ‘플로우’이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건 어떤 메시지를 담았느냐 하는 거죠.”

기타 연주로 치면, 얼마나 빠르고 화려하게 치느냐는 가장 낮은 단계의 기준이고, 연주에 감정을 얼마나 잘 담아내느냐가 한 단계 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속주로 유명한 잉베이 말름스틴보다 영혼이 실린 연주를 들려주는 에릭 클랩튼이 한수 위라는 주장도 이런 근거에서 나온 것 같다. 물론 이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곡을 치느냐다. 원곡의 질이 떨어지면 아무리 훌륭한 테크닉으로 영혼을 담아 연주하더라도 큰 감동을 주기 어렵다. 

“래퍼는 시인과 논객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에요. 논객처럼 확고한 자기주장을 담아내면서도 시적인 요소를 활용해야 하는 거죠. 특히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려면 끊임없이 사색하고 성찰해야 해요. 내공을 쌓아야 한다는 거죠. 물론 힙합이 오랜 기간 억압받고 소외돼온 빈민가 흑인들이 분노의 목소리를 내던 데서 유래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 상황에선 사회를 향한 도식적인 분노와 비판만으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1집에서 ‘자의식을 파고드는 내안의 목소리’에 무게중심을 둔 이들은 오는 3월께 발표할 2집에선 ‘인간관계, 사회현상에서 나타나는 대립과 모순, 그리고 대안’에 대해 얘기할 작정이란다. 풋내기 꼬마 연사, 래퍼들에게 한수 배웠다.

[광고] 가리온은 요즘 뮤지컬 연습에 한창이다. 미국 서부 힙합의 대부 투팍과 동부 힙합의 제왕 노토리어스 B.I.G. 얘기를 담은 ‘래퍼스 파라다이스’의 두 주인공을 맡았다. 두 진영이 전쟁과도 같은 싸움을 벌이던 시절, 투팍이 먼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1년 뒤 노토리어스 B.I.G.도 총격으로 숨진다. 이후 두 진영은 전쟁을 멈추고 평화의 손길을 내민다.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실화를 다룬 ‘래퍼스 파라다이스’는 3월9일부터 홍대앞 전용극장에서 관객을 맞이한다. 개인적으로 정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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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월간지 <함께걸음>)



2006년 3월 건국대 새천년기념관.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특별상에… 연. 영. 석.” 무대 위 외침이 울려 퍼진다. 선뜻 무대 위로 뛰쳐나가는 사람이 없다. 어색한 침묵. “혹시 연영석씨 이 자리에 안 오셨나요?” 객석 저 뒷자리에서 무대를 향해 황급히 내달리는 그림자가 보인다. 청바지와 수수한 점퍼 차림의 그가 무대 위에 오르자 환한 조명이 얼굴을 쫓는다. 당황해하는 낯빛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트로피를 건네받은 뒤에도 얼떨떨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듯한 얼굴로 마이크 앞에 선다.

“끊임없이 창작 욕구를 만들어주는 억울하고 어두운 사회에 감사합니다. 사회가 어두울수록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처음 표정과 달리 또렷하고 힘 있는 목소리다. 고개를 꾸벅 하고는 무대에 오를 때처럼 황급히 내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박수가 쏟아진다. 손뼉이 마주치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의 노래만큼이나 묵직한 소리다.

1989년 3월 홍익대 교정.

조소과에 입학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세살 땐가, 네살 땐가, 다 타고 남은 성냥으로 방 벽지에 그림을 그리다 혼나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생 땐 그림 잘 그린다고 상도 받았다. 하지만 부모님은 자식이 미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잘하는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골서 소판 돈을 훔쳐 상경, 근근이 세탁소를 꾸리며 먹고 살기도 빠듯했다. 미술학원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4수’만에 꿈을 이뤘다. 

대학에선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이 한창이었다. 적잖은 등록금 때문에 허리가 휘는 부모님을 떠올리며 ‘깎으면 좋지, 뭐’ 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동참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과대표도 맡은 터였다. ‘학생운동’이란 것에 대해 고민해보는 계기가 됐다. 그러고 보니 세상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뼈 빠지도록 죽어라 일만 하신 부모님, 여전히 셋방살이를 못 면하고 계셨다. 일한 만큼 돌려받는 세상이 이치에 맞는 거 아닌가? ‘세상의 중심은 노동자’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대학교를 마친 뒤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뜻 맞는 그림쟁이, 글쟁이, 음악쟁이, 영화쟁이들과 단체를 만들어 노동문화활동을 시작했다. 록밴드 ‘메이데이’에게 가사를 써주다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몇 년 뒤엔 남들 앞에서 자작곡을 부를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속상하고 괴로울 때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면 힘이 났다. 그래, 음악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자!

1인 음반사 ‘맘대로 레이블’을 만들고 1집 ‘돼지다이어트’(1999) 2집 ‘공장’(2001) 3집 ‘숨’(2005)을 발표했다. 주위에선 내 노래를 민중가요라 한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름을 붙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제 몸뚱아리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웃음, 눈물, 아픔, 분노 따위를 목놓아 외치고 싶을 뿐. 

2006년 12월 홍대앞 커피숍.

“연영석씨 음악은 민중가요 하면 떠오르는 정형과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행진곡풍으로 단결, 투쟁을 외치는 노래들이 많잖아요. 저까지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집회나 행사가 아닌, 일상에서도 쉽게 부르고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일자리를 얻지 못해 매일 잔소리 듣는 백수, 월급도 제대로 못받고 매까지 맞는 이주노동자, 카드빚에 내몰려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아주머니, 죽어라 일하고 고작 시급 3천원밖에 못받는 알바생…. 그들의 삶과 정서를 지극히 개인적인 노랫말로 담아내는 거죠.” 

“다음 앨범은 어떻게 준비하고 계신가요?”
“최근엔 작업을 거의 못하고 있어요. 좀 지친 것도 같고요. 계란으로 바위치기란 생각도 들고. 그래도 2007년 말이나 2008년 초에는 4집을 내야죠. 이번엔 장애인에 대한 노래도 하고 싶어요.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장애인 동지들을 보면 배울 점이 참 많은 것 같아요. 사실 저 한쪽 눈이 안보여요. 어릴 때 열병을 앓았거든요.” 

“미술은 이제 손놓으신 건가요?”
“그 좋아하던 미술을 접을 만큼 음악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언젠가 조각도 다시 할 생각이에요. 미술을 통해서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거든요.” 

“만일 세상이 너무 밝아지면 창작 욕구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소수자들도 아무 어려움 없이 사는 세상이 오면 지금보단 편안한 음악을 하게 되겠죠. 하늘에 구름 떠가네, 술 한잔 나눕시다, 뭐 이런…. 정말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어요. 쉽진 않겠지만요.”



['포오즈'라는 제목의 이 조각 작품은 연영석씨가 1994년에 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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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4-1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상소감 멋지네요..^^ 연영석씨는 원래는 미술을 전공했었군요

sb 2007-04-1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포오즈' 인상적이죠?
 

(출처: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펴내는 월간지 <함께걸음>)



당신의 스무살은 어땠나요? - 이장혁

1. 나의 스무살

대학 문턱서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대형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100명 이상 우글거리는 교실. 같은 반 친구가 누군지 알기도 힘들었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복잡한 학원행 버스 안에서 그보다 더 복잡한 내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면, 아무데서나 내려 거리를 무작정 걷거나 극장으로 향했다. 같은 영화를 앉은 자리에서 세 번 연달아 본 적도 있다. 장면과 음악을 다 외었다. 

친한 친구 두명 중 하나는 재수를 준비하는 듯하다가 급작스레 유학길에 올랐다. 서운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동네 레스토랑에서 통기타 가수 아르바이트를 했다. 나도 거기서 얼마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물론 웨이터였다. 검은 나비넥타이를 맨. 집에는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걸로 돼있었다. 

그리고, 첫사랑. 뜨겁게 달아올랐고, 예기치 못하게 식어버린…. 지금은 미국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다는 얘기를 건너 들었다. 스무살, 하면 정말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난다. 그것들은, 몇몇 단어의 나열로 그려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2. 스무살

(작사/작곡/노래 이장혁)

내가 알던 형들은 하나둘 날개를 접고
아니라던 곳으로 조금씩 스며들었지
난 아직 고갤 흔들며 형들이 찾으려했던
그 무언가를 찾아 낯선 길로 나섰어
이해할 수 없었던 세상의 수상한 질서
하지만 난 상관없는 듯…

너는 말이 없었고, 나는 취해있었어
우리에겐 그런 게 익숙했던 것처럼
귀찮은 숙제같은 그런 나를 보면서
더 이상 어떤 말도 넌 하기 싫었겠지
내가 말한 모든 건 내 속의 알콜처럼
널 어지럽게 만들고…

밖으로 밖으로 너는 나가버리고 안으로 안으로 나는 혼자 남겨져
밖으로 밖으로 널 잡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나는 취해만 갔어

어둡고 축축한 그 방 그녀는 옷을 벗었고
차가운 달빛 아래 그녀는 하얗게 빛났어
나는 그녀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고
창밖이 밝아 왔을 때 난 모든 걸 알았지
그녀가 예뻤냐고 그녀의 이름이 뭐냐고
가끔 넌 내게 묻지만…

밖으로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고 안으로 안으로 그녀는 잠들어있어
밖으로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지만 안으로 안으로 우린 벌거벗었어
밖으로 밖으로 눈부신 태양이 뜨고 안으로 안으로 날 비추던 햇살
밖으론 밖으론 난 아무렇지 않은 듯 안으론 안으론 하지만 난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3. 그의 스무살

영등포고 시절 그는 문예부 문을 두드렸다. 시를 참 많이도 읽고 많이도 썼다. 독서토론 땐 형들이 그저 멋져보였다. “난 밖에 나가면 세상의 틀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살거야.” 혁명을 꿈꾸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곤 대학으로, 재수학원으로, 직장으로, 세상의 질서 속으로 하나둘 스며들어갔다.

그는 형들의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다. 대입고사를 치르던 날 수험장에 가지 않고 도망쳤다. 졸업 뒤엔 영등포에서 백화점 청소일이며 건물 철거일이며 닥치는 대로 했다. 돈이 좀 모이면 음악 CD를 사서 헤드폰 끼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배고프면 햄버거 하나 사먹고, 지하철 타고 돌고 돌고 또 돌고…. 둥지 없는 새처럼 떠도는 삶이 좋았다. 

여자도 만났다. 그 기억을 거르고 걸러 훗날 ‘스무살’이라는 노래에 담았다. 단편영화와도 같은 영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노랫말에 등장하는 여자는 두명. 그는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연이 있다”고만 했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묻지 말아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1996년, 고교시절 스쿨밴드를 같이 하던 친구를 수소문해 ‘아무밴드’를 결성했다. 홍대앞 클럽에서 공연하던 이들은 98년 첫 앨범 <이.판.을.사>를 발표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2000년 밴드가 해체되고 나서야 뒤늦게 ‘저주받은 걸작’ 등등의 평가와 함께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미 절판된 이 앨범은 요즘 경매 등을 통해 5만원이 넘는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밴드 해체 뒤 홀로 공연하곤 했던 그는 2004년 솔로 1집 <이장혁 Vol. 1>을 냈다. 멜로디는 더 유려해지고 노랫말은 더 깊어졌다. ‘스무살’은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갔고, 골수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내년에 발표할 2집 앨범을 준비중이다.

4. 우리들의 스무살

“사실 ‘스무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노래에요.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는 얘기들을 하죠. 처음엔 굉장히 뜻밖이라고 생각했어요. 각자 스무살 기억이 다 다를텐데, 왜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는 건지. 누구는 제 노래를 들으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떠오른다고도 하고….”(이하 이장혁)

나도 ‘스무살’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스무살 위로 나의 스무살이 물흐르듯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은 다들 비슷한 것 같아요. 구체적 기억은 다를지언정.” 

그의 노래는 각자의 스무살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차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하필 스무살일까?
“그때를 기점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하잖아요. 당연히 혼란스러울테고. 누구나 거치는 상징적인 시기 같아요.” 

그의 말처럼, 꼭 호적상 스무살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상징적 ‘스무살’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스무살은 나의 스무살로, 당신의 스무살로, 모두의 스무살로 전이되는 것이리라. 노래의 울림이 더없이 깊은 이유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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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보넷)

문화관광부는 지난 2일 한미FTA 협상 결과 및 이에 대한 정부 대책을 발표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예상했던대로 저작권 분야에서는 미국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고 말았다. 이는 일부 산업적인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의 문화적 자율성과 공공성을 희생양으로 삼은 이번 한미FTA 협상의 당연한 귀결이다. 협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이런 비참한 결과를 가지고, 해당 정부부처로서 문화관광부는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마땅할 터인데, 국민들에게 머리 숙여 사죄하기는 커녕 협상 결과를 치장하는데 정신이 없으니 더욱 통탄할 노릇이다. 사후 대책이라고 내어놓은 것도 기실 한미FTA 협상과 무관하며, 이미 예전부터 시민사회나 학계에서 요구하던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라 이를 대책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무색하다.

문광부는 처참한 협상 결과를 무마시키기 위해 "선진제도의 도입으로 저작권 보호수준을 강화하여 정보 지식의 생산을 촉진하고 후생증대를 도모하는 한편 이용자들의 후생손실효과의 발생은 예방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는 협상 결과를 입맛대로 포장한 것으로 '아전인수'의 극치를 보여준다. 공개된 협상결과만 보더라도 미국의 요구사항을 모두 수용한 꼴인데, 이런 것이 선진제도의 도입이고, 후생증대를 가져오는 것이라면, 문화관광부가 왜 협상 전에는 미국의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는지 의문이다. 또한 이것들이 선진적인 제도라면 굳이 한미FTA 협상을 통하지 않고도 충분한 국내 논의를 통해서 도입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 우리가 입법권까지 양보하면서 미국의 제도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국이 요구하던 저작권 보호기간 연장도 저작자 사후 70년으로 합의해 주었고, 단지 2년의 유예기간을 양보받았을 뿐이다. 협상 발효 시점에서 저작권이 있는 모든 저작물에 대해서 20년의 보호기간이 추가로 연장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미 사망한 저작자의 저작권을 20년 연장한다고 하여 무슨 창작의 활성화를 가져온다는 말인가? 미국 내에서 조차 극심한 비판과 조롱을 받은 이런 문제많은 제도를 강제로 수용하게 되는데, 그래서 향후 20년 동안 추가로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데, 2년 간의 유예가 무슨 큰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문광부가 이를 미국이 다른 나라들과의 체결한 FTA에는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자신들의 협상실패가 어느 정도인가를 드러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포탈 등 온라인서비스제공자는 저작권자가 요구하기만 하면, 저작권 침해자에게 개인 정보를 넘겨주도록 허용한 것도 큰 문제이다. 저작권 침해로 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는 것도 아닌데, 저작권자가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개인정보를 요청하면 서비스제공자가 의무적으로 개인정보를 공개한다는 것은, 경찰이나 검사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작권자에게 허용해 주는 꼴이다. 현재는 통신비밀보호법상 법원에서 발부한 영장이 없으면 정보공개는 허용되지 않는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이러한 관행이 다른 영역으로 확대될 계기가 될 것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문광부는 이런 협상결과를 두고도 형사 소송 대신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어 다수의 범죄자 양산이 예방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는 국민을 명백히 오도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기 사건의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인적사항을 알면서도 민사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형사고소부터 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보라. 저작권자는 형사합의금을 받기 위해 앞으로도 형사절차를 이용할 것이다. 왜 빠른 길을 두고 돌아가겠는가?

오히려, 협상결과는 저작권 침해죄의 비친고죄 범위를 확대하여, 형사절차의 개시를 용이하게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형사절차를 통해 저작권 침해가 다루어질 가능성은 더 확대되었다. 기존에 영리, 상습적인 침해행위 만을 비친고죄로 하던 것에서 '상업적 규모'이기만 하면 저작권 침해에 대하여 저작권자의 고소없이도 처벌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이다.

저작권 침해시 손해배상의 하한액을 명시하게 한 법정손해배상제도도 문제이다. 법정손해배상제도는 실제 손해를 넘어서는 배상을 가능하게 하므로, 저작권자는 침해라는 우연에 의하여 이득을 보게 되는 꼴이므로, 저작권자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제도이다.

이와 같은 저작권 협상 내용의 문제점은 '산업피해액이 얼마다'라는 식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산업 피해를 넘어 우리 국민들이 저작물을 이용할 자유와 권리, 나아가 국내 문화의 발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또한 협상 결과 도입될 제도들은 여러가지 문제점으로 국내에서 도입되지 않고 있었던 제도이다. 이러한 문제가 많은 제도들을 왜 심층적인 논의 과정도 없이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와 협상단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우리나라에 도입해야 하는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문광부의 평가대로라면 이번 협상결과는 우리 사회의 후생증대에 기여할 것이므로 별다른 대책이란 필요없을 듯하다. 그러나 문광부는 여러 가지 보완대책을 내놓았다. 온라인서비스제공자가 저작권자에게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사용범위를 제한하는 것, 일시적 복제권을 인정하는 대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정이용의 예외를 도입하는 것, 포괄적 공정이용 조항의 도입, 저작권법의 4개법으로 분법, 저작권 옴부즈만 설립, 저작권 침해관련 형벌규정 재검토, 선도조건부 기소유예 제도 도입, 저작물 유통 및 이용 활성화 추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한미FTA 협상 결과와 상관없는 내용이며 이전부터 논의되었던 것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 저작권법의 4개법으로 분법은 아무런 대책이 되지 않는다. 법의 내용을 문제되는 판에 법의 형식을 바꾸는 것이 무슨 대책이란 말인가?
- 또한, 선도조건부 기소유예제도는 이미 검찰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에 불과한데, 이를 특별히 한미FTA 대책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 포괄적 공정이용 조항은 시민사회단체가 수년전부터 도입하자는 주장을 해 왔고, 그런 내용의 저작권법 개정안이 이미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 대표발의로 국회에 상정되어 있다. 그러나 문광부는 그동안 포괄적 공정이용 조항의 도입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명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한미FTA가 체결되자 이런 약속을 하고 나오니, 협상결과의 충격을 무마하기 위한 언론플레이용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 저작권 옴부즈만은 아무런 실효성이 없다. 권리자의 부당거래 관행을 감시한다는 것인데, 이는 공정거래위원회에서 하면 되는 일인데다, 아무런 법적 권한도 없는 옴부즈만이 이용자의 고충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 저작물 이용 및 유통 활성화 역시 한미FTA와 무관하게 문광부가 진작 적극적인 정책을 내었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문광부는 그동안 이를 위한 적극적 노력을 하지 않았다. 예컨데, 저작권 보호 캠페인은 엄청난 비용을 들여가며 진행하면서 상업적 가치가 없는 저작물에 대한 기증 캠페인은 얼마나 노력하였나. 저작권보호위원회는 수십명의 직원을 두며 운영하면서, 창작자들에게 저작물 기증을 설득하고 아카이브를 구축하기 위한 사업에는 얼마나 투자하였나. 한미FTA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내놓은 대책이란 것도 실효성없는 것들 뿐이니 그 진정성에 큰 의문이 들 뿐이다.

문광부는 협상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 포장하는 데 급급해서 국민을 오도하는 기만적 행위를 당장 중단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국민들에게 머리숙여 사과하고 협상 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라! 나아가 일부 산업적 이익을 위해 우리의 문화적 권리와 입법권을 포기하는 한미FTA 체결은 즉각 무효화되어야 한다!

2007년 4월 5일 한미FTA 저지 지적재산권 분야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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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을 기준으로 복제를 막았다가 풀었다가.. 재밌군요. 음반사들은 '저작권'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음악인들은 수익의 공정한 배분을 조건으로 이에 어울리고.
이번 이엠아이의 사례는, 기술을 이용한 기업의 이익 보호(를 전제로 한 저작권 보호) 노력이 얼마나 실효성을 갖는지 질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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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음반사 이엠아이(EMI)는 2일 디아르엠(DRM·디지털저작권관리)이 없는 고품질 음원을 애플의 콘텐츠 공급 사이트인 아이튠스에서 다른 음원보다 30% 비싼 가격에 팔기로 했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5월부터 판매될 이 음원들을 구입하면, 애플의 아이팟뿐 아니라 다른 기기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된다.

디아르엠이란 디지털 콘텐츠의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한 기술을 말한다. 음원판매 사이트들은 각자 암호화된 고유 사용권한을 부여하는 디아르엠을 채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이튠스에서 내려받은 음악은 아이팟이 아닌 다른 기기에서는 들을 수 없다. 디아르엠이 구매 음원의 자유로운 사용을 침해하고 애플 같은 기업의 시장 독점에 기여한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디아르엠을 삭제하거나, 업체마다 다른 디아르엠을 표준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이엠아이의 결정은 음반 판매가 줄어드는 데 대응해, 디지털 시장을 공세적으로 개척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 몇 해 동안 음반사들은 음악파일 불법 복제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고 신문은 분석했다. 시장조사업체 엔피디(NPD)그룹의 자료를 보면, 지난해 미국 온라인에서 5억900만곡이 합법적으로 판매됐으나 50억곡이 불법 복제됐다. 이엠아이는 시험 판매를 통해 누리꾼들이 가격이 비싸도 디아르엠이 없는 음원을 구매하는 성향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디아르엠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다른 거대 음반사들의 행보도 관심거리다. 현재 다른 음반사들은 디아르엠이 없는 음원 판매를 시험 중이지만 즉각적인 디아르엠 삭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음반사들은 디아르엠 삭제가 더욱 빈번한 저작권 침해 행위를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애플 최고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올해 말까지 아이튠스에서 이용할 수 있는 500만곡 중 절반에서 디아르엠이 제거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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