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동아일보)

나는 충청도 산골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한 겨울 새벽이 되면 나는 일어날 시간이 되어서 잠에서 깨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의 냉기 때문에 잠에서 깨곤 했다.
그 새벽에 나는 지주가 아버지를 불러내어 왜 빚을 갚지 않느냐고 호통치는 것을 들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신보다 나이 어린 지주에게 수모를 겪은 아버지는 수치심 때문에 자식의 얼굴을 바로 보지 못했다.

그 날,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사회 생활 시간에 “우리의 역사에는 춘궁(春窮)에 굶주린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봄에 양식을 꿔주었다가 가을에갚는 훌륭한 환곡 제도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린 소견에도 ‘그런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기억이 선연하다.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 자금 압박을 받을 때 흔히 하는 말로 ‘과부 대동빚을 지더라도…’라는 속담이 있다. 그 본래의 의미가 어디에 있든 간에 그것은 우리에게 멍에와 같은 고리채(高利債)를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고, 실제로 거기에는 사악한 뜻이 담겨 있다.

원래 대동법(大同法)이란 지방의 특산물로 세금을 바치던 것을 쌀로 일원화하여 바치는 제도를 의미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은 후 토지 제도가 문란해졌다. 농지도 황폐하여 민생의 삶이 어려워지고, 화폐 제도도 무너져 국가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 제도를 일원화한다는 의미에서 그 당시로서는 가장확실한 재화(財貨)였던 쌀로 세금을 받았는데 이러한 제도는 나름대로 합리성을 띄고 있었다. 1608년(선조 41년)에 경기도 지방부터 시작된 대동법에 따르면, 시기별 지역별로 다소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논 1결(結·약 3000평)당 미곡 13∼16말을 징수해 그 중에서 8∼10말은 중앙의 선혜청(宣惠廳)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지방 재정에 충당했다.

그런데 수리가 발달되지 않았던 전통적인 천수답의 농경 사회에는 소위보릿고개라고 하는 계절적 빈곤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 이제 대동미는 조세의 편의를 위한 제도가 아니라 백성들의 짐이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환곡이라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환곡이란 보릿고개에 양곡을 빌려주고 추수기에되받는 제도로서 처음에는 좋은 뜻에서 출발했고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기록에 의하면 이러한 구휼(救恤) 제도는 매우 오래 전부터 실시되었다. 이미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 16년(194년)부터 시행된 바 있고, 고려 시대와 조선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간헐적으로 실시되어 오던 이 제도가 상설 제도로 정착된 것은 인조 4년(1626)이었다. 대동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임진 병자의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 재정이 황폐해지고 농촌의 삶이 곤궁해진 데 그 실시 이유가 있었다. 정부에서는 상평창(常平倉) 또는 진휼청(賑恤廳)을 통해 환곡을 시행했다. 이 제도는 일제 시대인 1917년까지도 존속되었다.

당초 환곡의 이자는 봄부터 가을까지 6개월 동안 20%(연리로 치면 40%)였고, 조선조 후기에 들어오면 6개월에 10%(연리 20%)였으니까, 오늘의 제도에 비하면 다소 고리(高利)였다고는 하지만 가혹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가 어렸을 적에만 해도 이를 흔히 장리(長利) 쌀이라고 불렀다. 이장리쌀이 대동법과 시기적으로 맞물리고 혼재되어 훗날에는 그 양자를 구별하지 않은 채 모두가 고리채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나 관리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농민들로서는 춘궁에 환곡을 얻는다는 것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농민들이 요구하는 환곡의 절대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자 남이야 굶주리든 말든 이런 때에 재산을 불릴 수 있다고 착안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지방의 토호 지주들이었다. 지주들은 처음에는 아름아름으로 쌀을 꾸어 주었고, 그 이자도 조정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쌀이 화폐의 대용이었던 시절, 쌀을 꾼다는 것은 단순히 식량의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가 상업 자본으로서 화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때부터 지주들은 쌀을 매개로 한 축재를 시작했고, 이자는 날이 갈수록높아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이러한 고리채에 대해 저항할 수 없었고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결국 장리 쌀의 이자는 높아만 갔다. 봄에 1섬을 빌려 6개월 후인 가을에 1섬 반으로 갚았으니 6개월 이자가 50%인 셈이며 연리로 치면 100%인 고리채가 되었다. 농민들은 당장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쌀을 꾸었지만 가을이 되면 빚을 갚기는커녕 빚을 갚기 위해 다시 장리 쌀을 꿔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농민들은 이 빚의 악순환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었다.

그 본래의 의미는 좋았지만 대동법이니 환곡이니 장리 쌀이니 하는 것은 결국 소작농을 영원히 소작농으로 묶어 놓는 굴레가 되었으며 지주들은 이러한 굴레를 통해 영원히 지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요즈음의 은행 대출 이자가 연리11%라는 사실과 은행 이자를 0.1%만 낮춰 주어도 기업의 형편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생산성이 낮았던 조선조 당시의 소작농에게 연리 100%라는 것이 얼마나 가혹했고 견디기 어려운 굴레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다. 환곡은 그 당시로서 달러 빚과 같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악덕이자 놀이였지 결코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소작농에 대한 환곡의 악폐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인권마저도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곧 초야권(初夜權)이었다. 초야권이라 함은 소작농의 딸이 시집가기 전 순결을 지주에게 먼저 바쳐야 하는 악습을 의미한다. 그러니 소작농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지금도 슬픔과 분노를 느끼게하는 대목이다.

대동법이나 환곡이 이토록 악법으로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그것이 좋은 제도라고 속아 배워야 했을까?
그것은 이 시대의 역사가 가진 자들의 기록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국유화 시대’를 살았던 농민들로서는 그들의 아픔과 한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들의 한은 대물림됐다.

이 환곡의 모순에 대해 최초로 항변한 것이 곧 갑오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 5월에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한 농민군이 정부군에게 제시한 폐정 개혁 14개조였다. 더욱 기 막힌 일은 해방을 맞이한 후에도 이 전근대적인 악습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농경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에게 토지와 쌀은 영혼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 영혼을 가질 길이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민중이, 또는 농민이 역사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식의 시각을 제시할 뜻은 없다. 다만 가난하고, 그래서 배우지 못한 민초들은 압제받고 산 것만도 한이 맺히는데 역사마저도 가진 자의 편에 서서 사실을 호도하고 왜곡하는 이면을 환곡이라는 이름으로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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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수학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고 따분한 과목으로 꼽힌다. 부모들이 아이에게 수학 선행학습을 많이 시키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좀더 일찍 가르쳐서 학교에서 배울 때 쉽게 따라가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선행학습이라는 것이 대부분 반복적인 문제풀이 위주의 수업이라는 데 있다.
 
전국수학교사모임 체험교재팀장인 김남준 서울 신묵초 교사는 “초등학교 때는 수학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흥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사교육을 통해 주어진 문제를 빠른 시간 안에 푸는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아이들이 일찌감치 수학에 흥미를 잃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6학년이 되면 한 반 학생의 절반 가량이 수학을 포기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이들이 좀더 쉽고 재미있게 수학을 접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 생활 속에서 발견하는 수학=김 교사는 “수학을 배우는 목적은 수학을 통해 일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라며 “일상생활 속에 숨어 있는 수학을 아이와 함께 찾아보면 수학과 친해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일상 속에서 수 감각을 익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위를 이용해 어림셈을 해 보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예를 들어, 아이의 팔 길이나 보폭 등을 이용해 거리를 재 보는 것은 수학적 감각을 기르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된다. 아파트 정문에서 현관까지의 거리가 몇 걸음이고, 미터로 환산하면 대략 얼마인지 알아보는 식이다. 이때 오늘날과 같은 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어른 주먹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거리(한 자, 약 30.3㎝) 등 몸을 이용해 길이를 쟀다는 사실을 설명해 주는 것도 좋다.

전기와 수도, 가스 등 공공요금 청구서도 좋은 소재다. 예를 들어, 수도 요금 청구서 뒷면에는 요금 체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는데, 아이와 함께 1세제곱미터의 물이 어느 정도의 양이고 요금은 얼마인지 등을 알아보고 단가에 따라 요금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김 교사는 “냉장고에 들어 있는 음료수 병이나 우유갑에 쓰여 있는 단위들이 뭘 의미하는지 살펴보면 분수와 소수, 비율 등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밖에 벽지와 욕실의 타일, 골목의 보도블록에서는 무늬꾸미기 단원에 나오는 테셀레이션(같은 모양의 조각들을 서로 겹치거나 틈이 생기지 않게 늘어놓아 평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 놀이로 배우는 수학=초등학교 입학 전의 어린아이라면 놀이를 통해 수 개념을 익히는 것이 좋다. 집에서 ‘엄마표 놀이’를 통해 딸에게 수학을 가르친 경험을 〈수학아, 놀자〉라는 책으로 묶어낸 이원영씨는 수학놀이의 장점으로 엄마가 자유롭게 아이의 기호와 성장 단계에 맞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꼽는다. 예를 들어, 승부욕이 강해지는 6~7살 때에는 ‘10 만들기’ 카드놀이를 하면 지루해하지 않고 놀이에 몰두할 수 있으며, 4~5살 이상이 되면 역할놀이를 좋아하는데 이때 가게놀이를 한다면 즐겁게 덧셈·뺄셈을 배울 수 있다. 이씨는 “연산 부분에서는 적당한 연습이 필요한데 지루한 학습지나 문제집을 생각 없이 계속 푸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은 방법”이라며 “같은 연산이라도 물건을 사기 위해, 또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한다면 지루하지 않게 할 수 있고 생각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말했다. 비싼 교구를 살 경우 ‘본전 생각’ 때문에 ‘잘 활용해야겠다’는 부담을 느끼기 쉬운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소재를 활용해 놀이를 하면 만드는 과정 자체가 교육적일 뿐 아니라 부담도 없어서 일석이조다.

이씨가 제안하는 ‘10 만들기’ 카드놀이는 서양카드 1벌을 숫자가 안 보이게 쌓아둔 뒤, 엄마와 아이가 번갈아 카드를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카드 2장의 합이 10이 되면 두 장을 가져가는 게임이다. 쌓아둔 카드가 다 없어지면 각자 가져간 카드 숫자의 합으로 승부를 가린다. 또 가게놀이는 집안 물건에 가격을 매긴 뒤 1부터 10까지 숫자가 쓰인 가짜 돈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놀이다.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돌려받는 과정에서 덧셈·뺄셈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다.

■ 책으로 배우는 수학=수학은 단지 계산 능력이 좋다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과목은 아니다. 풀이 과정이 아무리 간단하더라도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풀 수 없다. 예를 들어, 곱셈 단원의 문장으로 된 문제의 경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장에 나오는 수를 무조건 곱하기만 하면 틀릴 수밖에 없다. 〈초등 공부 독서가 전부다〉의 저자인 강백향 수원 화서초등학교 교사는 “저학년 때는 수학을 잘하던 아이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몇 가지 단서를 주고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문제를 만나면 어렵다고 느낀다”며 “수학적 사고에는 논리력과 문제 이해력이 필수”라고 말했다. 논리력과 이해력을 높이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 풍부한 독서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특히 수학그림책과 수학동화 등 수학 관련 책(표 참조)을 꾸준히 읽으면 논리력과 이해력을 키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야기와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수학 개념과 원리를 깨칠 수 있다.

이종규 기자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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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28일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리는 3회 맑스 코뮤날레에 발표자로 초청된 안드레아스 아른트(58·오른쪽 사진)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부 교수는 헤겔 변증법의 대가로 손꼽힌다. 1992년 이래, 전 세계 진보적인 헤겔(왼쪽 사진) 연구자 500여명이 참여한 국제헤겔연맹 의장을 맡아 왔다. 이 단체는 중도보수 성향의 국제헤겔회의와 함께, 세계 양대 헤겔학회로 꼽힌다.

그는 현실 개념을 파악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의 의미를 재정립한 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저서 〈칼 마르크스:그의 이론의 전체연관에 대한 연구〉와 〈변증법과 반성:이성개념의 재구성을 위한 연구〉는 헤겔 변증법 철학과 변증법 일반에 대한 고전적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26일 고려대에서 만난 아른트 교수는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도구로서 헤겔 변증법을 적극 옹호했다. 그는 또 “‘노동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서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경수 한신대 학술원 연구교수가 인터뷰를 도왔다.

-헤겔 철학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헤겔 이론은 근대의 지반에서 나왔다. 근대를 역사적으로 반성한 것이다. 헤겔 철학의 새로움은 구조에 대한 기술 뿐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항상 같이 사유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새로움은 인권을 새롭게 조명한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추상적 자유가 아니라 사회 정치적 제도를 통해 확보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자유는 빈말이 아니라 구조 즉 시스템으로서 확보해야 한다고 봤다. 헤겔 변증법은 ‘복합적 구조들의 역사적 발전’을 기술하는 데 그 어떤 방법론보다 탁월한 도구이다. 변증법을 통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올바르게 보고 기술할 수 있다.

-동일성에 대해 차이의 우위를 강조하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헤겔 변증법을 싫어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고 싶나?

=들뢰즈는 근대적(모던)이란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모던은 계속 발전되어 나가고 또 항상 현재화되는 개념이다. 현재 흐름 속에서의 발전의 개념인데,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모던을 ‘발전이 종결된 하나의 단위’로 오해하고 있다. 변증법은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이 말하는) ‘차이’를 하나의 연관 속에서 고찰하고 총체성 안에서 고찰한다. 이를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간과하고 있다. ‘동일성’에 대해 추상적으로 사고하며 ‘차이’와 대립시키고 있다.

-1990년 이후 한국에서는 데리다, 푸코, 들뢰즈 등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과, 이들과 철학적 영향을 주고 받은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 네그리 등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이론을 어떻게 보나?

=네그리는 대중의 자발성 이론에 기초해 있다. 하지만 대중 조직화 등 실천 환경에 대한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세계화의 대안 이론이 될 수 없다. 대중에게 이미 자발성이 있고 제국이 있으며 항상 대항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은 철학적으로 나이브(순진)하다.

-논문 ‘시간의 경제’에서 ‘자유시간’을 누릴 줄 아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어떤 의미인가?

=사회적으로 노동 시간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는 경제에 중요하다. 유한한 존재가 어떻게 행복한 삶을 가질 것인지, 우리가 가진 시간을 자율적으로 규정하고 구성해나가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동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시간과 관계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 ‘노동형식’이 자유시간 안에 침투해 들어왔다. 자유시간 조차도 노동이나 업적을 위해 쓰이는 휴식이 되었다. 또 여가나 소비 산업을 위해 휘둘리고 있다. 자유시간을 쓸 수 있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좋으면서 행복한 삶이 뭔지 근본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생의 다른 대안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거기서 출발해 정치적 대안을 찾아야 한다. 출발점은 노동시간의 단축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허구적 욕구를 재생산해 낸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사용가치’에 근거한 요구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다시 한번 미래 생을 꿈꾸고 사회적으로 배워야 하고 정치적 대안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신자유주의와 정보혁명 시대에 유의미한 변혁적 도구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국가가 자본주의를 규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론〉의 ‘1일 노동시간’장을 보면, 마르크스는 국가가 잔혹한 아동 노동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단계에서 국가가 자본주의 잔혹성을 누그러뜨리는 기능도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 비판적 운동도 중요하다. 고삐풀린 신자유주의 움직임을 제어해줄 수 있다. 유럽연합 등 모든 기관을 이런 식의 비판 운동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경우 노조간 연대 조직이 유럽노동헌장을 제정하려고 한다. 이런 움직임은 유럽의 최소 노동조건을 만드는 운동의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지배 철폐만을 외칠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경제적 대안을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상품 생산과 분배, 소비를 어떻게 규정하고 계획적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 이 대목에서 인터뷰어에게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경제적 대안'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사회민주주의와는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더라면 좋았을텐데요.)

-독일 등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동향은?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 변증법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 마르크스 변증법 이해를 다루는 문헌들이 많이 나오고 있으며 토론도 활발하다. 이런 미국 쪽 움직임이 오히려 유럽 쪽에 영향을 주고 있다. 내가 맡은 대학 강좌를 보면, 최근 몇해 마르크스 철학이나 정치경제학 과목 수강 학생들이 점점 늘고 있다. 1989년 현실 사회주의 붕괴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는 더 이상 정치적 의심을 받지 않으면서 위축되지 않고 마르크스 사상을 있는 그대로 과학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도그마(독단)에 빠질 가능성을 줄이는 긍정적 계기가 됐다.

글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학자인 들뢰즈는 “내가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것은 헤겔주의와 변증법이야”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들뢰즈를 포함해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헤겔을 포함한 서구 형이상학을 이성 중심의 철학으로 파악했다. 이성 대 비이성 등의 이항 대립구조 속에서 사유하면서 부차적인 것을 무시해 버렸다는 게 그들의 관점이다. 서구 형이상학이 지배와 피지배의 폭력적 위계질서를 내적 기제로 하고 있다는 비판도 여기에서 나온다. 들뢰즈는 ‘차이(다름)’를 버리는 것은 개별자 자신의 고유성을 버리는 것이라면서 ‘동일성(같음)’에 대한 ‘차이’의 우위를 강조한다.

이런 비판에 대해 헤겔주의자들은 이성에는 억압적 기능 뿐 아니라 해방적 기능도 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유 또한 반성으로서의 이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 등을 지적하며 이성에 대한 새로운 신뢰가 필요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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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제3회 맑스 코뮤날레 학술문화제가 오는 28일부터 사흘 동안 서강대 다산관에서 열린다. 코뮤날레는 비자본주의적 공동체를 뜻하는 코뮌과 격년의 의미인 비엔날레의 합성어다. 코뮌의 이상을 추구하는 격년제 축제란 뜻이다.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계를 모색하는 비판적 사유의 ‘정신’이 함께 모여 연구 성과를 내놓고 그 현실 정합성과 이상의 높이 등을 따지는 대동 학술 축제라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한국만의 특수한 이벤트이다. 18개 단체 120여명의 연구자가 발표·토론에 참여한다.

이번 대회의 주제는 ‘21세기 자본주의와 대안적 세계화’이다.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화는 더 이상 외부를 용납하지 않”으면서 “국가는 초국적 자본의 대행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자본의 이윤 증식의 욕망에 존재의 모든 가치와 생명력을 팔아넘기고 있다”고 주최 쪽은 규정한다.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탐색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대회 주제를 감안할 때 자연스럽다. ‘코뮌적 생태문화사회’ ‘코뮨주의’ ‘21세기 사회주의를 위한 대안적 경제전략’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득재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발표문 ‘코뮌주의적 생태문화사회구성체 요강’에서 생태적 문화사회공동체를 대안사회로 제시한다. 그는 △상위체계에서 자본·국가 연합에 균열을 내어 사회공공성을 재구성해나가는 연대를 이뤄내고 △하위체계에서 지역평의회 및 협동조합 등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을 제안한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 대표는 발표문 ‘대중이란 무엇인가:코뮌주의 신체론’에서 “코뮌주의 역사에서 대중은 대체로 대상화된 실체로 간주되어 왔다”면서 “실체가 아닌 ‘흐름(flux)’으로서의 대중 개념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정훈 ‘수유+너머’ 연구원은 글 ‘코뮌주의에서 능력의 개념’에서 마르크스의 능력개념을 잠재력과 협력으로 파악하고 이런 능력을 구현하는 코뮌이라는 새로운 사회의 구축운동을 ‘코뮨주의’라고 규정한다.

곽노완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사회전체 성원에게 기본생활비를 조건 없이 지불하는 ‘기본소득’ 담론을 확장시킨 ‘사회연대소득’ 개념을 제시한다. 그는 자본과 임대 소득을 폐기한 뒤 확충된 재원으로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균등분배할 경우 삶의 질 향상은 물론 소비가 늘면서 국내총생산도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베를린 자유대 철학과 교수이자 국제헤겔연맹 의장인 안드레아스 아른트 교수는 논문 ‘시간의 경제’를 통해 “자본주의가 구조화하는 노동은 생산성 향상이라는 논리로 비노동시간을 노동시간에 종속시키고 있다”면서 “가치증식요구라는 ‘자본의 시간’으로부터 해방되어 ‘사회적 통제’ 아래서 최대의 비노동시간을 확보하고 그 것을 사용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는 처음으로 20~30대 젊은 석·박사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영 코뮤날레’ 세션도 마련됐다. 이 세션에선 ‘성매매/성노동’과 ‘대학에서 맑스주의자로 살아남기’를 주제로 하는 자유포럼과 15개의 논문이 발표되는 개인토론회가 마련됐다.

코뮌주의 등 ‘공산주의론’에 대한 다양한 탐색이 이뤄진 데 대해 주최 쪽은 마르크스 연구자들의 자신감의 표출로 해석했다. 중앙대 교수인 강내희 집행위원장은 미국의 헤게모니가 위기를 맞고 있고 남미 8개국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음을 상기시킨 뒤, “자본주의의 대안 세상에 대해 고민한 세력은 마르크스주의자밖에 없다”면서 “코뮌주의 등에 대한 탐색은 새로운 세상을 연구해 오면서 축적된 힘을 자신감과 함께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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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1987년 민주화 이전에도 사람들은 잘 살았다. 밥 먹고 돈 벌고 놀고 여행하는 데 큰 불편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시대 이른바 ‘친북 좌파’가 나라를 망쳐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3공, 5공 시대를 그렇게 기억한다. 그게 ‘자유’였을까? 그 시절 경찰서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고 더욱이 감방 같은 곳은 선량한 사람들과는 무관한 범죄자의 세계로만 여긴 사람들, 나라에서 시키는 대로 한눈팔지 않고 산 사람들은 그때 자유로웠을까?

‘자본주의적 자유주의 가치의 선전원’이었던 아이제이아 벌린(1909~1997)의 관점에 서면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벌린은 타인 또는 외부의 간섭, 강제,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을 자유라 규정했다. ‘소극적 자유’다. 그것은 권리청원, 찰스1세의 처형, 공화정 수립으로 이어진 17세기 영국혁명을 거부했던 토머스 홉스와 18세기 미국혁명을 부정했던 제러미 벤담이 일찍이 역설했던 자유론과 일치한다. 왕당파와 절대주의 지지자들의 자유론이다. 이들에 따르면 선한 왕이 지배했던 고대왕국의 신민이 21세기 민주국가 시민보다 훨씬 더 자유로웠을 수 있다.

벌린이 1958년 옥스퍼드대 사회정치이론 강좌교수 취임강연에서 그런 자유론을 설파한 지 40년이 지난 1998년 케임브리지대학 근대사 왕립석좌교수가 된 ??틴 스키너는 취임강연에서 벌린의 자유론에 도전했다. 그가 지지하는 17세기 영국혁명 때의 공화정 의회파 저술가들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했다. 우선 “부당한 간섭 없이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자유에 대한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유인이 아니어도 특정한 권리와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예컨대 옛 로마나 미국 노예들도 드물지만 좋은 주인 만나면 즐거운 놀이와 휴식, 맛난 음식을 만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 주인의 기분이나 생각이 바뀌어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질지 몰랐다. 그들이 누린 자유가 이처럼 전적으로 타인의 자의적 의지, 선의에 달려 있는 것이라면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있다 한들 그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다. 따라서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권리와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역량이 타인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적극적 자유’다.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도, 복수의 사람들을 한꺼번에 마음대로 만날 수도, 책을 마음대로 읽을 수도 없었으며, 머리카락과 치마 길이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정부를 비판하는 말을 뱉는 순간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 했던 빅 브러더의 세계, ‘유신’ 독재 이후 군사정권에 고개 쳐들지 않은 대가로 얻은 자유가 진짜 자유였을까. 스키너에 따르면 왕이나 빅 브러더는 그들이 신민을 구속하든 말든 그 존재 자체가 자유를 자유일 수 없게 만든다. 그러면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가 크게 진전됐다는 지금 사람들은 자유로울까?

벌린이나 홉스의 자유론에 따르면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병실을 나올 수 없는 것은 자유를 누릴 힘이 없어서지 자유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지금의 신자유주의시대에 극빈자나 사회적 낙오자, 소수자에게도 얼마든지 자유는 있다. 다만 그걸 누릴 힘이 없을 뿐이다. 정말 그들에게 자유가 있을까? 무한경쟁의 우승열패식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강자는 권력을 독점하고 약자는 가속적으로 더 약해질 수밖에 없으며 그런 처지에서 평등한 기회는 보장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선 소수 강자, 상위 20%만이 자유롭다.

18세기 공리주의 등장 이후 ‘적극적 자유’론은 쇠퇴했고 자유가 아니라 국가보호 아래 안전과 행복 추구가 최선이라던 왕당파 홉스와 벤담의 소극적 자유론이 세상을 지배했다. 이 때문에 “자유에 대한 좀더 넓고 좀더 깊이 있고 무엇보다도 좀더 민주주의적인 생각이 대부분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게 스키너의 생각이다. 〈퀜틴 스키너의 자유주의 이전의 자유〉(푸른역사 펴냄)는 바로 이 ‘시야에서 사라진’ 적극적 자유론, 공화주의적 또는 신로마적, 민주주의적 자유론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좌파이념의 확산을 막기 위해 간섭의 부재라는 의미의 개인의 사적 자유를 옹호”한 벌린의 자유론, 냉전시대 서방진영의 ‘정전’이자 ‘무기’가 됐던 그 자유론을 넘어서서, 공화주의와 시민적 자유론마저 불온시했던 이 땅에선 친숙하지 않은 스피노자, 루소, 헤겔, 마르크스, 자코뱅, 좌파들의 자유론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 출발점이 영국 역사상 자유론을 둘러싸고 가장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17세기 영국혁명 당시, 홉스와 벤담의 자유주의가 판치기 ‘이전의 자유’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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