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한국 사회는 미국 버지니아공대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을 ‘한국 문제’로 여기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그간 나온 분석들은 한국인의 유별난 민족주의·집단주의·숭미주의 등에 그 원인을 돌렸다. 상당 부분 동의할 수 있지만, 좀더 정교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의 과민반응에 대해 ‘과잉 민족주의’ ‘천박한 민족주의’ ‘집단적 죄의식’ 증후군 등의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과연 그런가? 민족주의와 관련은 있지만 민족주의가 원인은 아니다. 한국인의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독특성에 주목하는 게 문제의 핵심을 짚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인은 범주화 능력이 매우 탁월하다. 그 능력은 기질로까지 발전했다. 이는 불확실성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인은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의 나이, 고향, 출신학교 등 신상명세에 대해 매우 궁금해한다. 그런 기본 정보로 상대방을 어떤 범주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불편해하다 못해 불안증세마저 보인다.
그런 기질엔 명암이 있다. 일을 처리하거나 인간관계를 발전시키는 데서 신속을 기할 수 있는 반면, 편견과 ‘편가르기’가 발휘되는 토양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속도에 대한 숭배는 체질로 굳어졌기 때문에 그 어떤 부작용에도 이 ‘범주화 게임’은 지속되고 있다.

한국인들이 그런 독특한 기질을 갖게 된 건 인구의 사회문화적 동질성, 일극 집중구조, 높은 인구밀도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그 어느 범주(편 또는 패거리)에도 속하지 않은 채 홀로 살아간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비정규직과 프리랜서에 대한 지독한 차별도 바로 그런 문화의 산물이다.

비슷한 참사가 국내에서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이 범인의 출신지역과 학교를 안 따질 것 같은가? 무슨 나쁜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거의 본능이다. 이는 집단주의와 비슷하지만 집단주의는 아니다. 한국인은 강한 집단주의 기질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집단이익보다는 개인·가족 이익을 앞세운다. 반쪽짜리 집단주의라고나 할까. 이는 서양에서 개발된 ‘개인주의-집단주의’ 모델로는 포착이 안 되는 한국적 특성이다.
한국인들의 집단주의·민족주의가 강하다고 하지만, 집단·민족에 대한 충성도는 높지 않다. 충성도는 낮은 반면 범주에 대한 인식도만 높을 뿐이다. 즉 세상에 대한 인지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한국인의 ‘냄비근성’이라는 것도 실은 ‘인지’와 ‘충성’ 사이의 괴리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이다.
왜 이민 1.5세대를 한국인으로 보는가? 범주화 기질에 따라붙기 마련인 본질주의 성향 때문이다. 한국인의 천성이 된 연고주의도 바로 그런 본질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연고를 본질로 보고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일상적 삶의 태도는 철저하게 자기 이익 중심이라는 점에서 집단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번 사건에 대한 과민반응이 애국·애족심 때문이었을까? 그런 점도 있겠지만, 이미 모든 국면에서 미국화된 한국 사회의 미국 의존도가 그만큼 높다는 걸 웅변해주는 걸로 보는 게 더 타당할 것이다. 막연한 숭미주의를 넘어서 미국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하나가 나와 내 가족의 실질적인 이해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옳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 10만명 시대’와 최근의 ‘토플 광풍’이 말해주듯이, 이제 서울에선 국내 지방 도시보다는 미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의 과정과 절차가 ‘통상독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반민주적 작태로 일관했는데도 의외로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인의 집단주의·민족주의 비판은 필요하거니와 바람직하다. 그러나 나의 ‘범주 집단’은 알뜰하게 챙기고 관리하면서 그런 비판을 하는 건 위선이다. 한국인은 범주화 기질 때문에 공정성에 매우 취약한 국민이다. 개인별 평가보다는 이른바 ‘범주 등급제’가 제공해주는 과정·절차 축소의 비용절감 효과를 더 높이 평가한다. 개인을 개인으로 볼 수 있는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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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운찬 씨가 대선후보를 사퇴했군요. 인물을 중심으로 새롭게 정당을 만들고 세력화하려는 '여권의 주목인사' 정운찬에게는 흥미가 없지만, (아마도 이명박 씨에 견주어) "학자 출신이 경제 문제를 더 잘 해결할 수 있다" 던 '지식인' 정운찬에게는 흥미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도 3불 정책 폐지 운운했지만.

- 아무튼, 그의 대선후보 사퇴를 두고 성한용 기자가 1일자 신문 첫 장에 쓴 기사가 유독 눈에 밝혀 옮겨봅니다. 여권의 대선전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는데 있어서의 현실적 어려움에 초점을 맞춘 것이 상당히 참신했지만, 마지막 두 단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은 분명 논평이고, 논평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역구도, 간판, 요행수" 를 바탕으로 권력을 탐했던 현재의 지식인 정운찬 대신, "도덕성과 전문성"을 가진 미래의 지식인들에게 말이죠. 성한용 기자의 논평은 마치 악담 처럼 들립니다.

- 오히려, 그에게 핵심적으로 부족했던건 중간에 슬쩍 등장했던 "정치적 집념"이 아닐까요. 정치적 집념은, "충청권 결집"과 같은 기존 정치세력들과의 관계맺기 보다는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더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물론, 그럴 분은 못되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래는 기사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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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정운찬(61) 전 서울대 총장도 접었다. 4월의 마지막날, 서울 중구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그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낭독했다.

대선 출마를 포기한 이유는 뭘까? 그는 ‘정치 세력화’라는 말로 설명했다.
“나는 자격과 능력이 부족하다. 정치는 비전과 정책 제시만이 아니라, 이를 세력화하는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미래와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지지해 달라고 요청하자면 이러한 정치 세력화 활동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인정받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태여 해설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간명하다.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소중하게 여겨 온 원칙들을 지키면서 동시에 정치 세력화를 추진해 낼 만한 능력도 부족하다.”

그의 원칙은 뭘까? 그의 제자인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지식인으로서의 몸가짐’이라고 설명했다. 도덕성이란 얘기다. 그런데 현실 정치를 하려면 조직과 돈이 필요하다. 조직과 돈은 ‘몸을 굴려야’ 만들 수 있다. 그는 이 부분에서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 것 같다.
그는 ‘마당발’이지만, 정치인들은 잘 모른다. 재산은 방배동 아파트를 포함해 11억2500만원이다. ‘남의 돈’을 끌어대는 수완도 별로 없다. 정치적 집념의 부족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겠다. 권력은 결국 집요한 사람들이 차지한다. 1987년 이후 대선후보 반열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올랐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노무현 이인제 등은 정치인이었다. 법조인 이회창, 관료 출신 고건도 있었다. 재계에서는 정주영 정몽준이 있었다. 학계 출신은 이수성 전 서울대 총장이 유일했다.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최종 승자는 언제나 정치인이었다.
정 전 총장도 정치판의 이런 현실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정직한 사람이다.

사실 그는 대선 출마를 선언한 적이 없다. 그가 잠재적인 대선후보로 부각된 것은 2006년 1월이다. 정치인들은 충남 공주 출신으로, 경제 전문가라는 그의 이력을 주목했다. 한나라당의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 맞설 수 있는 환상적 조건이다. 그도 솔깃해했다. 서울대 총장 4년 임기를 마친 2006년 7월 이후 지금까지 ‘대선 후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가 만약 출마 쪽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먼저 충청권 결집을 시도했을 것이다. 신당 창당도 시도하겠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서서히 ‘망가져’, 그의 ‘원칙’은 무너졌을 것이다. 불출마 선언 시기를 4·25 재보선 직후로 잡은 까닭은 뭘까? 4·25 재보선은 2007년 대선으로 가는 길에서 의미있는 분기점이다. 대선후보나 정치인들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는 불출마를 선택했다. 그게 국민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무튼 그의 불출마는 한 가지 분명한 정치적 교훈을 남겼다. 정치의 문외한들이 ‘참신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역 구도, 간판, 요행수에 기대어 권력을 잡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정치는 정치인들의 몫이다.

성한용 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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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여울 > 혁명과 인간의 삶-모든 혁명은 현재진행형이다


서문: 혁명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

1. 영국혁명 (1640-1660년) - 페터 벤데
2. 명예혁명 (1688-1698년) - 에크하르트 헬무트
3. 미국혁명 (1763-1787년) - 헤르만 벨렌로이터
4. 프랑스혁명 (1789-1799년) - 미하엘 바그너
5. 1830년 7월 혁명: 프랑스와 유럽 - 악셀 쾨르너
6. 독일혁명 (1848-1849년) - 디터 하인
7. 파리 코뮌 (1871년) - 베아트리스 부비에
8. 볼셰비키 혁명 (1917-1921년) - 디트리히 바이라우
9. 독일혁명 (1918-1919년) - 클라우스 쉐호벤
10. 멕시코혁명 (1910-1940년) - 호르스트 피쉬만
11. 중국혁명 (19세기 후반-1957년) - 위르겐 오스터하멜
12. 이집트혁명 (1952-1962년) - 마이클 손힐
13. 쿠바혁명 (1958-1959) - 니콜라우스 베르츠
14. 문화대혁명(1966-1976) 현대 중국의 정신적 외상 - 토머스 헤베러
15. 68혁명 - 아서 마윅
16. 이슬람 혁명 (1979년) - 파울 루프트
17. 동독의 89혁명 - 하르트무트 츠바르

부록
출전
저자 약력
해제: 근대세계와 혁명
옮긴이의 말

- '레볼루치오'(revolutio)는 중세와 근대초기까지도 천문학적 용어로 쓰였다. 행성들의 순환이나 규칙적인 회귀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다. 14세기가 되어서야 정치영역으로 옮겨졌는데 이때에도 봉기와 시민전쟁이 예전상태로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용어였다. 홉스가 청교도혁명이 왕정으 부활과 함께 순환운동으로 끝났으므로 '혁명'으로 파악했다.(7)

- 명예혁명이 되어서야 미래지향적 변화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를 지니게 디었다. 미국혁명, 프랑스혁명을 통해 지금의 의미가 구현된 셈이라 한다.

- 혁명은 국가를 전제로 했다. 정부의 인적구성변화 - 사회의 정치적 조직변화 - 소유관계만 아니라 사회구조에도 영향을 미친다 -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포함된다.(9)

- 열악한 상황이 최고로 악화된다고 해서 항상 혁명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 위기에 뒤이어 호황이 오고 최초의 개혁들이 독재를 느슨하게 만드는 상태야말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13)

- 윌러스틴은 근대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혁명은 혁명이 아니었음을 역설한다. 근대 세계의 혁명이란 기껏해야 기존지배 계급의 자리바꿈이거나 성공적 변신, 또는 기존 국가간체제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시켰을뿐이었다. 프랑스혁명도 러시아혁명도 국가간 체제를 떠받치는 역할을 수행했을 뿐이다.(503)

김동택

- 윌러스틴은 우리시대에 필요한 것은 기존 체제를 연장시키는 혁명이 아니라 체제 자체가 무너져야 하는 것이며 그럴 때 세계는 좀더 평등하고 분권화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 에코는 미래사회가 '포스트모던인가 또 하나의 중세인가'를 언급하면서 잘 조직화된 현대사회에서 사소한 사건은 전체로 파급되며 그 결과 중앙의 통제력은 상실되고 또 다른 중세, 즉 보다 평등한 분권적 체계로 세계가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이다.(504)

- 네그리와 하트, 윌러스틴은 공통적으로 붕괴가 자동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주는 것은 아니기에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대안 운동과 전략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실체가 분명치 않다. 이것이 근본적 변혁을 야기할지, 기존 체제의 지배 계급이 또한번 성공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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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진보적 문화운동의 목표는 충분한 자유시간의 확보이며, 이를 위해 자본의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국가 기능을 근본적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강내희 중앙대 교수는 지난 24일 열린 2007년 문화연대 첫번째 월례포럼에서 6월 민주화 운동 이후, 문화운동을 매개로 한 문화 지형의 변화를 집중 조명했다. 그는 “문민 정부가 시작된 1990년대 초반 이후 문화운동이 신자유주의 세력의 본격적인 포섭 전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존립 조건의 악화라는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분석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는 △문화운동이 합법화 이후 진보적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데 게을리한 점과 △신자유주의가 삶의 방식을 더 많이 지배하면서 리얼리즘 이론이 설득력을 잃게 된 점을 주요인으로 꼽았다.

하지만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하면서 문화의 ‘사유화 경향’에 맞서 문화의 ‘사회적 공유’를 추구하는, 즉 문화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문화의 사유화 경향이란 저작권 강화 등 문화 영역에 대한 시장적 접근이 증대되면서 문화콘텐츠에 대한 공유적 권리가 축소되는 현상을 말한다. 강 교수가 말하는 문화민주주의는 “문화적 표현 수단에 대한 대중 접근권을 강화함으로써 문화적 실천에서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려는 태도”다.

그는 앞으로 진보적 문화운동의 목표는 임금노동이 중심인 ‘노동사회’에서 벗어나, 개인들에게 ‘가처분 시간’이 주어지는 문화사회로의 이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강 교수는 “자유시간 확보는 임금 노동시간을 줄여야 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실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했다. “한국은 엄청나게 많은 사회적 부를 가지고 있다.” (* 가처분 시간이 뭐죠? '문화사회'가 '임금노동'에 대비해 어떤 특성을 갖고 있다는 건지. 친절하지 못한 기사네요.)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자본의 지배를 영속화하는)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공유나 그와 연계된 자율적 공간들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강 교수는 특히 노동대중이 “임금은 반드시 돈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간이나 서비스도 임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노동운동이 노동시간 단축 투쟁에 집중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사교육 시장 의존을 줄이는 대학 입시혁명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녀 교육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또 △대중들이 대중매체의 자본주의 대안부재론 주입과 소비 조장에 현혹되지 않도록 견인할 필요성과 △대안적 세계화 구축을 위한 국제 연대 강화론도 폈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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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국악계의 서태지’ 작곡가 강성구
최근 국악과 공연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곡가를 꼽으라면? 단연 강상구(35)씨다. 국악에 서양음악을 접목시켜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그의 작업들이 연이어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농담 삼아 ‘국악계의 서태지’로 불릴 정도다.

강씨는 최근작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로 국악에서 뮤지컬까지 넘나드는 만능 작곡가로 자리를 굳혔다. 지난해 7월 초연한 〈화성에서…〉는 웅장하고 서정적인 선율로 한국 창작 뮤지컬 아리아의 수준을 높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작품으로 강씨는 지난해 한국뮤지컬대상 작곡상을 받았고, 5월12일 열리는 제1회 뮤지컬어워드에도 작곡상 후보로 올랐다.

강씨는 국악계에선 이미 스타 작곡가로 꼽힌다. 최근 몇년 동안 대중적으로 성공한 대표적 국악음반인 해금연주자 정수년씨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과 가야금연주자 이슬기씨의 〈연둣빛 찻집에서〉가 모두 그의 작품이다. 부드럽고 서정적인 선율이 매력인 강씨 특유의 분위기가 사랑받으며 각각 4만장과 2만장 이상이 팔렸다. 국악음반으로는 보기 드문 성공이다.

연이어 성과를 내면서 요즘 강씨에겐 작곡 요청이 쏟아지고 있다. 가야금 연주자 정길선씨 음반에 두 곡을 집어넣었고, 최근 아쟁연주자 이문수씨 음반 작곡작업을 마쳤다. 비보이 공연물 〈피크닉〉의 작곡을 마치자마자 서울예술단이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 연극인 〈이〉를 뮤지컬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이밖에도 각종 작곡 의뢰가 줄지어 있어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판이다.

그를 만난 27일에도 그는 아침부터 녹음 작업 중이었다. “〈화성에서…〉 공연용 음악 반주를 녹음하는 중인데 어제는 오케스트라, 오늘은 합창 녹음해요. 요 나흘 동안 하루 4시간밖에 못 잤습니다.” 그런데도 얼굴에선 피곤함이 엿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많이 했는데, 요즘 조금씩 정답을 찾아가는 과정 같아요. 국악을 넘는 색다른 음악을 하고 싶은데 지금 제가 하는 퓨전국악과 뮤지컬이 그 시작인 것 같습니다.”

강씨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피아노를 잠깐 배운 것 말고는 본격적인 수업 없이 혼자 음악을 공부해 음대에 진학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습작처럼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음악대학에 가기 위해 삼수를 했어요. 집에서 반대가 심해 유학을 생각한 적도 있었죠.” 어려움 끝에 중앙대 한국음악과에 진학했고, 대학 3학년이던 1996년 KBS대학국악제에서 국악과 재즈를 접목한 〈젊음에 부치는 풍경〉으로 우수작곡상을 받으면서 재능을 드러냈다. 그 뒤 여러 국악음반 작업에 참여했고,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이 성공을 거두면서 이름을 얻었다.

국악에서 뮤지컬까지 넘나드는 다양한 분야들은 모두 그가 그리는 음악 인생의 한 과정이다. “장르 구분을 떠나 영화나 드라마 음악도 하고 싶어요. 국악·뮤지컬 작곡가가 아닌 그냥 작곡가로 불렸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가 진짜 해보고 싶은 것은 크로스오버 창작 작품집이다. 머지않아 강씨가 직접 피아노를 친 음반이 팬들을 찾아올 듯하다.

김미영 기자 kimmy@hani.co.kr, 사진 강상구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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