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버지니아 참극의 ‘왜곡된’ 알권리 
 
우리나라 언론은 뭔가에 단단히 홀려 있다. 바로 ‘알권리 만능주의’다. 국민적 관심이 큰 이슈는 뉴스가치가 크고 따라서 언론이 이를 집중 조명하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고 ‘마구잡이식’ 보도 행태까지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 버지니아 공대 참사사건은 언론이 알권리를 빙자해 저널리즘 정신을 망각한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법하다.

첫째, 우리 언론은 시중에 떠도는 미확인 정보를 여과없이 보도하면서 오보성 기사를 양산했다. 용의자의 국적, 범행동기, 조씨 부모의 자살설과 모친의 강도 총격 사망설 등이 그랬다. 이젠 아예 이런 경우를, 예기치 않은 사건의 초기 보도과정에서 으레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실관계의 정확성은 어떤 경우에도 보류할 수 없는 저널리즘의 근간이다. 오히려 중대하고 민감한 사안일수록 확인된 정보만을 보도하는 게 언론의 철칙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언론은 그 순간 ‘황색지’로 전락한다.

둘째, 우리 언론은 아니나 다를까 사건을 선정적으로 처리하는 구태를 잊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동원해 범행 상황을 세세히 묘사하는 것은 물론 조씨의 섬뜩한 육성과 동영상, 사진을 그대로 노출했다. 심지어 <문화방송>은 바로 이 때문에 미국 방송의 상업성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전하는 와중에도 문제의 영상을 반복했다. 몰염치의 극치다. 이는 진중한 접근이 요구되는 사건을 시청자의 이목이나 붙잡아둘 ‘호재’로 여긴 장사치의 심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셋째, 우리 언론은 가해자 주변 인물들의 인격권을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의 가족이고 친지라고 해서 이들의 사생활이 무고하게 침해되고 명예가 훼손당할 이유가 없다. 조씨는 이미 언론에 의해 반사회적 일탈자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런데도 <조선일보> 등은 조씨 누나의 실명과 직장, 사진 등의 신상정보를 시시콜콜 공개했다. <한겨레> 등은 조씨 가족의 과거 행적을 이 잡듯이 파헤쳤다. 그 전리품으로 이들이 서울의 반지하 집에 월세로 산 ‘이력’과 조씨 부모가 이웃과의 교류에 소극적인 ‘취향’을 소개했다. 그것이 사실일지언정 조씨의 인격 장애와 무슨 관계인가. 행여 언론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고 비사교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외톨이가 된다고,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암암리에 전제했던 것은 아닐까.

알권리라는 미명 아래 언론의 미확인 정보 유포가 정당화될 순 없다. 생생한 화면을 제공한다고 ‘친절한’ 뉴스가 되는 게 아니다. 인격권을 내팽개친 무분별한 보도는 엄한 희생양을 만들어내기 쉽다. 그래서 분명히 해두고자 한다. 알권리는 세계시민으로서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라고 있는 것이지 세속적 호기심 차원에서 엿보고 싶은 인간의 말초적 심리에 편승하라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버지니아 참극의 당사자인 미국 언론은 비교적 알권리에 충실했다. 그 결과 건조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하게 사안에 접근했다. 희생자들의 추모석 사이에 조씨를 빠뜨리지 않고, 그 위에 친구가 되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글을 남기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발현한 것도 아마 알권리를 고집하느라 ‘재미없어진’ 언론 덕분일 것이다.

김재영/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100호점… 탄력붙는 신문 공동배달망
양적팽창·내실다지기 한창…“대선 지나면 참여폭 늘것” 기대 
 
신문유통원의 공동배달센터(공배센터)가 1호점을 낸 지 1년만에 100호점을 기록했다. 국민의 언론매체 선택권 보장과 신문산업의 진흥을 위해 출발한 신문유통원의 공배사업이 100호점을 넘어서면서 점차 탄력이 붙고 있다. 이에 더해 수도권 중심이었던 공배센터가 전국화 바람까지 타기 시작했다.

“이제 천안쯤 도달했습니다. 부산까지 뻗어가려면 아직 먼 길이지만 부지런히 도로를 닦아 7월 이전까지 대전에 도착하고, 올안에 대구까지 간다는 게 목표입니다.” 강기석 신문유통원장은 100호점인 마포센터 개소식이 있던 지난 20일 공동배달사업을 전국 고속도로 망에 비유하면서 청사진을 펼쳤다. 3년안에 전국 공배망이 완성되면 위기에 처한 신문산업이 다시 살아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문유통원 목표대로라면 올해 안에 직영·민영을 합해 공배센터가 296개가 된다. 이 수치는 공배사업의 5개년 계획안 최종 도착점인 565개의 절반이 넘는다. 공배센터가 수도권에서 전국으로, 도심에서 외곽으로 퍼져나가는 양적 팽창의 또 한편에선 유통 정보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실 다지기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배달관리, 예산회계등 유통원의 전반적인 사업을 디지털화하여 업무의 효율성을 꾀하고 있다. 이 사업에 들어가는 올해 예산은 국고 350억과 유통원이 수익사업으로 충당하는 30억으로 충당한다.

김기홍 문화관광부 미디어정책팀장은 “5년간 신문유통원에 지원하는 예산이 879억이다. 초기 사업 진전을 위해 올해 350억원과 내년 230억원으로 집중 집행한 뒤 지원이 점차 줄어든다. 일단 연말까지 수도권에는 유통망이 100% 가동될 것으로 보고 있다”고 공배망을 낙관하는 분위기이다. 내후년부터 정부예산이 줄어들기 때문에 유통원은 이른 시일내에 자립구도를 확보하는 게 시급한 과제이다. 이를 위해 유통원은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직영센터의 최소화와 우정국 제휴 등 배달망을 이용한 부대 수익사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공배센터의 추진 방식을 두고 물론 다른 목소리도 있다. 김영호 언론개혁시민연대 대표는 “이미 배달망이 갖추어져 있는 대도시 중심으로 공배센터를 꾸려가는 것은 자칫 실적위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맡을 사람이 없어 쉽지는 않겠지만 보급소가 거의 없는 면단위 이하의 정보 소외지역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출발 전부터 논란이 많던 공배센터가 큰 진전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아직까지 제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시장 점유율이 높은 조선·중앙·동아의 불참으로 배달부수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공배사업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한 신문사는 한겨레, 강원도민, 경향, 서울, 국민, 경인일보에 그친다.

이에 대해 정연구 한림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배달 도로망이 깔렸는데 아직까지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이 너무 적다”라고 공배센터의 현재를 진단하였다. 정 교수는 조중동의, 신문유통망 구축하는데 왜 국고를 지원하냐는 지적에 대해 단호히 반박한다. “신문은 공공재이므로 유통 인프라를 국고로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중동도 공배망에 참여해 절감된 유통비용으로 지면경쟁”할 것을 제안했다.

조중동의 합류 여부에 대해 박광열 부천 공배센터장은 그렇게 먼일만은 아닐 것으로 전망했다. “조중동 본사 차원에서는 가입을 반대하고 있지만 일부 지국들은 비공식적으로 참여가 활발하다. 또 과점언론 중에 한 신문은 현재 직영체제를 가동하고 있으나 갈수록 적자가 늘고 판촉비가 많이 들어 민영으로 돌리고 있다”고 밝혔다.

신문유통원의 공배사업은 올해 대선이 큰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는 견해들이 많다. 정연구 교수도 “참여정부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며 이해가 갈렸던 보수언론들이 대선이후 참여의 폭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고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다.

문현숙 기자 hyunsm@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로쟈 > 민주화 20년과 지식인의 죽음

금요일(한겨레)과 수요일(한국일보)를 제외하면 내가 주로 가판에서 조간으로 집어드는 건 경향신문이다. 아마도 작년 하반기에 연재된 '진보개혁의 위기'란 '특집기사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듯하다. 기획력과 기동력이 있는 신문으로 새롭게 각인된 것이다. 이 연재는 올봄에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후마니타스, 2007)으로 묶여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한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읽히는데,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기획기사가 오늘 아침신문의 특집으로 실렸다(한동안 연재될 듯하다). 민주화 이후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이 감소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이라 '유예돼 왔던' 죽음이라 고 해야 할 텐데, '한국의 사례'로 읽어두고 옮겨놓는다(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분기점은 김대중 정부에서의 '신지식인론'이었다. '항소'나 올리는 전통적 지식인상에 '사약'을 내린 격이 아니었을까?).   

경향신문(07. 04. 23)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김종목·손제민기자)

경향신문(07. 04. 23) 2007년 한국 지식인의 풍경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쉽게 이런 새 세대 지식인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 교수가 말한다. “대학 교수에게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연구 업적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를 따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 학교에서 우수 교수 평가 기준은 ‘연구비 수령 건수와 액수’라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학계의 ‘빅브라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학진’이란 약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연구 지원 기관은 학계의 거대한 지배자다. 학진의 힘은 연간 1조원 가량을 쓴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경쟁하는 체제, 이것이 한국 학술의 레짐(regime·체제)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온 김모씨. “전 에세이식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학진 체제 아래서는 빛을 볼 수 없어요. 학진은 정형화된 논문식 글쓰기밖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어진 김씨의 말. “이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마감 맞추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좋은 평가로 연구비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논문 작성 노동자’만 수없이 양상되는 거죠.” 그는 “학진 체제 아래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학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경향신문(07. 04. 23) 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

지식인은 신분적 특권이나 재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행사한다. 지식인과 그 출신 배경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지식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식인의 자유로움에 대한 주장은 이런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지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유명 지식인이 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정도의 지식인이 되려면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지식의 습득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학(同學) 끼리 유대 관계도 맺어진다. 이른바 학벌(學閥)이라는 것은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지식인은 한편으로 신분과 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속을 하며 문화적인 동질성을 도모한다.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은 두 가지 다른 집단을 상대한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집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이다. 지식인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하기도 하고, 피지배 집단에 봉사하기도 한다(*그러한 지식인상의 원조가 러시아 인텔리겐차이다).

전자의 경우 지식인은 기존 체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정착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지식인은 현 지배체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며 대중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체제 고착이든 체제 전복이든 지식인은 자신의 무기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경우에나 지식인의 힘은 자신의 이해 타산을 숨기면서 공정하고 보편적인 수사학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의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건, 아니면 뒤집어져서 새로운 체제가 되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식인이 지닌 관점을 보편성의 준거로 삼으면서 그의 상징적 권력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면 지식인은 어느 쪽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그럴 경우라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한 한말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일제시대이다. 기존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 기반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당시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질곡에서 벗어날 방향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 희망을 간절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더구나 위기상황 돌파의 유력한 방법으로 교육을 통한 체제 갱생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동안 민족독립의 공통분모 아래 억눌려있던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노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 따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면서 지식인은 양극화되었다. 이런 대립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타났고, 휴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의 체제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섬기면서 서로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배제와 탄압에 골몰했다. 우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남쪽의 경우 지식인 집단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쪽과의 경쟁에 적극 참여했다.

좌우의 민족통합 이데올로기가 억압된 상태에서, 1970년대의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독재의 옹호,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과 민주화 지향 노선으로 나뉘어 복무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의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민주화 노선이 대세를 점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20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화의 명제를 확산시키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명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함께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이와 같은 남쪽의 시도는 동유럽과 소련의 해체, 중국의 급속한 개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북한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처럼 민주화와 민족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식인의 담론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 호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시기에는 인권 보장과 민주화의 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고 정착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 통제도 사라졌고, 그동안 금기 영역이었던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비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동안 지식인 현실 참여의 주요 통로였던 민주화 명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고, 민족 통합에 대한 전망도 남북 교류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의 북한 퇴출 압박에 북한이 핵개발로 맞서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대결을 주장하며, 민족 통합의 지향을 견제하는 담론이 부각되었고, 이른바 ‘신우파’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정착에 따라 지식인의 민주화 명제는 구호의 단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민족 통합의 명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신우파’의 미미한 견제만 보일 뿐이다. 민주화의 명제가 현실화되고, 민족 통합의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맹렬하게 요구하던 지식인은 담론의 초점을 잃고 새로운 열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한국 사회가 강제로 포섭된 사건은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가운데 스스로 보편성을 구현한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지식인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로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세계적인 ‘투명’ 경쟁 체제의 효율성을 당연하게 선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전통적 권력도구였던 글쓰기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던 자들이 지식인의 독점 영역에 침입하여 ‘신지식인’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구지식인’으로 치부되는 형편이 된다. 보편적 지식인의 요새였던 대학의 변신도 현저하다. 대학도 수요와 공급 법칙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대학의 지식인은 상인(商人)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시대의 방향을 이끄는 선구자가 아니라, 문화상품을 만들어 파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된 것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문화 콘텐츠 개발에 연관될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적 동질성도 더 이상 확보될 수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반인 글쓰기의 위상 변화에 보이는 그들의 당혹감일 뿐이다. 그들의 옛 열정은 사그라졌고, 그들의 상징권력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식인의 위기가 설왕설래되고 있다.(장석만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07. 04. 23.

P.S. 러시아 인텔리겐챠를 영국의 젠틀맨, 일본의 사무라이에 비교하기도 한다(우리라면 '선비'에 해당할까?). '지식인의 죽음'은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마지막 사무라이' 시대에 견줄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분명 한때는 그들의 시대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한다. 해서 지식인의 죽음은 애도할 만한 것이지만 비통한 일은 아니다. 차라리 지식인을 '가장'하는 치들이 더 문제인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한국방송, 보도·교양 늘려 공영성에 ‘힘’
뉴스 늘리고 교양프로 핵심시간대 배치…아나운서들 진행자로 대폭 기용

한국방송이 2007년 봄개편을 맞아 시사교양 분야를 강화하는 방향의 개편안을 내놓았다. 30일부터 시행되는 이번 개편으로 오락 분야는 줄고, 보도와 교양 분야는 늘어 지난해 가을개편에 비해 보도는 40분, 교양은 145분 늘어났다. 정연주 사장 2기 체제와 대선 시기에 한국방송 프로그램이 당분간 공영성에 주력할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뉴스 시간부터 늘어났다. 주말에 방송되는 〈KBS 뉴스9〉가 10분, 매일 아침 6시에 방송되는 〈KBS 뉴스광장〉도 5분 늘어났다. 심야시간 뉴스프로그램(〈KBS 뉴스〉 월~금 밤 12시15분)도 신설했다. 자체 소비자 고발센터와 실험실을 운영하는 〈이영돈 피디의 소비자 고발〉(금요일 밤 10시), 3박3일 72시간 동안 현장을 관찰하는 〈다큐멘터리 3일〉(목 밤10시), 발빠르게 화제의 인물을 만나는 15분짜리 프로그램 〈단박인터뷰〉(화~목 밤 10시45분)도 모두 시사교양 분야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선뵈는 프로그램이다.

1텔레비전에서는 시사를, 2텔레비전에서는 교육 분야를 강화했다. 2텔레비전은 매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취학전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 〈KBS 아이뚜뚜〉 시간대로 정하고, 〈엄마의 무릎학교〉 〈TV유치원 파니파니〉 〈맹꽁서당〉 3편을 연속 방송한다. 일요일 오전에는 월요일 밤으로 시간을 옮긴 〈미녀들의 수다〉를 대신해 초보 엄마 아빠에게 육아 경험을 전수하는 〈빅마마〉가 신설되는 등 전반적으로 교육프로그램에 마음을 쓴 인상이다. 남성우 편성본부장은 “앞으로 한국방송이 사용할 다른 채널이 나온다면 어린이 채널을 만들 수 있다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개편을 진행했다”고 말했다.

교양 프로그램을 주말 핵심 시간대에 배치한 것도 눈에 띈다. 새로 신설한 〈한국사 전〉을 토요일 저녁 8시10분에, 〈과학카페〉를 금요일 밤 10시에서 토요일 저녁 7시대로 자리를 옮겨 방송한다. 강성철 편성기획팀장은 “주말 저녁 7~8시라는 핵심 시간대에 한국방송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프로그램들을 전진배치했다”고 말했다.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서도 2텔레비전 〈스펀지〉 〈스타골든벨〉 〈해피선데이〉 등 정보오락 프로그램은 지금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는 소폭 개편에 그쳤다. 올가을쯤 〈스펀지〉 같은 기존 간판 프로그램에 비길 만한 대형 오락 프로그램을 새로 준비중이라고 했다.

이번 개편에서는 오락과 시사 할 것 없이 공영성 강화라는 방향에 맞춰 아나운서들을 진행자로 대폭 기용했다. 24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있었던 개편 설명회(사진)에서는 백승주·최송현·고민정·박지윤·최동석 등 아나운서 15명이 새 프로그램 진행자로 얼굴을 비췄다. 이번 개편으로 박지윤 아나운서가 4개 프로그램 진행을 맡았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출처: 한겨레)

현장 목소리 담은 ‘공론의 장’ 만들었죠
출판잡지 <기획회의> 200호 앞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한국 출판계의 쟁점이 모이는 공론장이자 출판 정보의 허브인 격주간 잡지 <기획회의>가 200호 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1999년 2월 첫 호를 낸 이래 만 8년3개월 동안 한 호도 거르지 않고 내달려온 <기획회의>는 다음달 중순 200호 고지에 오른다. 지면으로 펼친 한국 출판의 현장이라 할 이 잡지를 맨 앞에서 이끌어온 이가 뚝심과 저력의 출판쟁이 한기호(49·사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이다.

출판계 안팎에서 이 잡지를 읽는 독자가 1만 명에 이르지만, 그가 처음부터 거창한 꿈을 품고 잡지를 만들기 시작한 건 아니다. 창작과비평사(현 창비)에서 15년 동안 전문 영업자로 활약했던 그는 1998년 가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웠다. 외환위기 여파로 한국 출판계에 유통대란이 터진 때였다. 출판도매상 송인이 부도를 내고 쓰러지자 그는 채권단 재산관리인으로 들어가 송인이 스스로 일어서도록 돕는 데 앞장섰다. 그 일이 계기가 돼 창간한 게 <기획회의>의 전신 <송인소식>이었다.

“처음엔 출판 유통이 제자리를 잡도록 돕는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그런데 잡지란 게 생명체와 같아서 시간이 좀 지나자 자기 동력이 생겼다. 독자들이 점점 더 수준 높은 글을 요구하다보니 책을 만드는 데 시간과 돈을 더 들여야 했다. 도매상 송인의 지원을 받는 방식으로는 자생력을 키우기 어려웠다. 2004년 7월 <기획회의>로 이름을 바꾸고 유료화했다. 돈 받고 파는 잡지가 됐으니 기획도 더 충실해졌다.”

<기획회의>는 나올 때마다 번번이 출판계 안팎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민감한 주제를 과감하게 파고드는 한 소장의 성격은 잡지의 주목도를 높였다. 한쪽에서는 그의 용기를 칭찬하는 박수가 터졌고, 다른 쪽에서는 반발의 목소리도 나왔다. 한국 출판의 방향을 놓고 설전이 벌어지기 일쑤였다. 그 논쟁의 공간을 제공한 것이 또한 <기획회의>였다.

한 소장은 잡지를 통한 논쟁 가운데 가장 기억할 만한 것으로 ‘전자책의 미래’, ‘주례사비평’, ‘도서정가제’ 등을 꼽았다. “2000년 전자책 논쟁이 붙었을 때 <기획회의>에서 ‘이북(e-book·전자책)은 없다’고 단언했다. 전자책 출판인들은 5~6년 안에 전자책이 출판 시장의 60~70%를 차지할 거라고 주장하던 터였다. 나는 종이책이 더욱 발전할 거라고 봤던 것이다. 지금 와서 보면, 전자책은 없고, 종이책은 여전히 책의 중심이다.”

2002년 <기획회의>는 ‘주례사비평’에도 돌을 던졌다. 평론가와 출판사와 언론사가 유착해 몇몇 여성 소설가들의 작품을 품질과는 상관없이 ‘한국 문학의 축복’이라는 둥 해가며 띄워주기로 일관할 때, 그는 ‘이런 식으로 가면 한국문학은 처절한 죽음을 맞고 말 것’이라며 반성을 촉구했다. 그 때문에 그는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지금 한국 문학이 어떻게 됐는지 생각해보면 ‘주례사비평’ 논쟁은 더 철저히 진행돼야 했다.”

2004년 이후 계속된 도서정가제 논란에서도 그는 분명한 목소리를 냈다 “책 팔아 돈 버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면, 양질의 책이 나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하는데, 도서정가제가 그 기초”라고 그는 강조했다. 최근의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서도 그는 “일부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한국 출판의 위기를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팩트’(사실)와 ‘필드’(현장)는 한 소장이 잡지를 만들면서 항상 염두에 두는 두 단어다. “책이 중요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중요한 만큼 책에 관한 통계와 기록과 사실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다.” 이 ‘팩트’를 책임지는 일을 출판 현장 종사자들을 통해 했다. <기획회의>를 현장의 목소리로 채운 것이다. 현장 중심의 기획이야말로 <기획회의>를 활기 넘치는 잡지로 이끈 힘인 셈이다. 200호에서 그는 ‘키워드로 읽는 10년 후 한국문화 지형도’를 그려 특집으로 꾸미고 2000년 이후 베트스셀러 200종을 분석한 별책도 낼 예정이다.

글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장철규 기자 chang21@hani.co.k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