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문화 - 낮과 다른 새로운 밤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1
김중식.김명환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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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울의 홍보를 위해 기획된 '서울문화예술총서' 의 첫번째 편입니다. 1부는 구한 말 부터 1970년대 까지의 서울의 밤풍경을 그리고 있고, 2부에서는 문화적 이슈를 가볍게 다루고 있습니다.

1부는 삽화와 함께 문화적 풍속을 옅보는 수준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2부는 주제의 일관성이 다소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주제를 가진 '책' 이라기 보다는, 서울을 소개하기 위한 '홍보용 책자' 에 더 가깝습니다.

서울의 문화지구로 선정된 인사동, 대학로, 신촌, 홍대에 대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현상 분석에 그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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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박범준.장길연 지음, 서원 사진 / 정신세계원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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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시에서 성장했고 남 부럽지 않을 만큼의 대학교육을 받은 박범준 장길연 부부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하고 무주의 한 산골에 정착합니다. 비록 크지 않은 규모이지만 함께 농사를 짓고, 화장실이니 목욕통과 같은 집기들은 직접 만들어 쓰며, 범준씨가 글을 쓰고, 길연씨가 천연염색을 하며 살아가죠.

언젠가 언론에도 올랐다는 이들의 삶은 아마도 ‘이색성‘ 이 강조되었겠지만, 정작 두 사람의 글에서 도시를 떠나 산골에 삶터를 마련한 ’이색성‘ 이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답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수필에 가까운데요, 주된 내용은 두 사람의 행복관과 연애관이며, 이것이야말로 이들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게 만든 것입니다. 주거와 생계는 두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표현’ 이자 ‘방식’ 일 뿐입니다.

두 사람은 ‘행복이란 이렇게 사는 것이다‘ 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사는 것도 행복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자신있게 ‘행복이란 무엇이다’ 라며 절대적인 정의를 내리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각자 행복에 대한 대답은 다를 것이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저 수많은 행복관 중의 하나일 뿐일 두 사람의 행복관을 주목할 만한 이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두 사람이 주관대로 삶을 꾸려나갔다는 ‘사실‘ 인데요, 이것은 거꾸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관에 맞추어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오늘날은 마치,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복모범답안에 맞추어 경제적 능력을 키우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 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주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는 현실이, 곧 그(녀)들이 ’주관이 없다.‘ 거나 사회통념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주관대로 삶을 꾸려갈 ‘용기가 없다.‘ 는 것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녀)들이 주관이나 용기대로 살아갈 수 없도록 하는, 외부적 객관적 조건들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생활환경, 교육수준, 부양가족, 등 과 같은 것들이죠.
범준씨와 길연씨 역시도, 산골에 삶터를 마련하면서 ‘당장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라는 생계 고민을 했었고, 이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객관적인 조건들이 반영되고 고려되었을테니까요.

범준씨와 길연씨의 꿋꿋한 삶이, 선택의 기회에서 용기를 내어야 할 사람들 뿐만 아니라, 기회로부터 박탈당한 이들에게도 희망의 메세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 보태어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의 연애관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답니다.
감정 보다는 이해나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대화의 방법에 대해서 열심히 고민한 흔적들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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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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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뭉실한 감상 보다는 명쾌한 주장을 좋아하고, 삶을 회고하기 보다는 진취적으로 계획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동안 시를 가까이 하지 못했던 나름의 이유가 그러했습니다.
행간에 담겨있는 글쓴이의 정황과 심정을 이해하기 위한, 고작 몇분의 시간에 저는 무척이나 인색했었습니다.

시는, 제가 냉정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에만 잠시 제 곁에 머무르다 이내 떠나곤 했죠.

하지만, 노해의 시 <노동의 새벽>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읊는 노동자의 일상은 전문 취재기자의 그것보다 절절하고,
그가 읊는 노동의 소외와 계급의 대립은 마르크스의 그것 만큼이나 가슴을 파고들며,
그가 읊는 노동자의 긍지, 노동계급의 힘은 우리 동지의 그것 만큼이나 따가운 채찍질이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구분했을 법한 분류를 무시하고, 언제든지 쉬이 집어들 수 있도록 다시 분류해 봅니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아직 오르지 못한 오늘, 노해의 시는 우리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1. 노동자의 일상
신혼, 어디로 갈거나, 포장마차, 가리봉 시장, 봄, 졸음, 휴일특근, 손무덤, 석양, 천생연분, 이불을 꿰메면서, 썩으러 가는 길

2. 노동의 소외, 노동자의 삶
하늘, 멈출 수 없지, 얼마짜리지, 지문을 부른다, 모를 이야기들, 바겐세일, 어쩌면

3. 노동자의 긍지, 노동계급의 힘
통박, 시다의 꿈, 진짜 노동자,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노동의 새벽, 별 볼일 없는 나는

4. 노동자 투쟁, 해고
밥을 찾아, 떠나가는 노래, 떠다니냐, 어머니, 아름다운 고백, 장벽

5. 계급의 대립, 노동계급의 잠재력
당신을 버릴 때, 바람이 돌더러, 어쩔 수 없지, 대결, 허깨비

 

잠시 곁을 떠난 동지에게 「당신을 버릴 때」를, 차가운 감옥에 갖힌 동지에게 「아름다운 고백」을, 
제게는 「별볼일 없는 나는」을 쥐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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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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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상적인 개념의 구체적인 맥락 이해하기

몇일 전에 읽었던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서, 저자인 이나미씨는 자유주의의 기원을 찾아 <독립신문>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하승우씨 역시도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에서, 똘레랑스의 기원을 찾아 저 멀리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죠.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몹시 고된 일이지만,
그는 독자를 배려해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 추상 개념에는 그 개념이 만들어진, 또는 그것이 두드러졌던 특수하고 구체적인 맥락이 담겨 있는데, 시간이 흘러 그 맥락이 사라지면서 개념은 벽에 걸린 박제로 변하기도 한다. 특히, 그런 추상 개념이 정의나 질서, 도덕과 관련된 윤리적인 개념이라면 이는 위험스러운 일이다. 구체적인 삶과 분리된 윤리적인 개념은 인간의 삶을 억압하고 때로는 피를 부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략) 윤리적인 개념에 속하는 똘레랑스 역시 이런 위험을 안고있다. 따라서, 그 위험을 피하려면 똘레랑스라는 개념이 등장한 구체적인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

저 역시, 전에 책마을에 독서후기를 올리면서, '똘레랑스'를 '관용'으로 풀이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어요. 저 역시, 홍세화씨의 책을 보면서 알게 된 '똘레랑스' 라는 개념을 쉬이 차용하는 우를 범한 셈인데, 이번에 읽은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는 그때의 비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답니다.


# 관용과 똘레랑스

제가 실수했던, 관용과 똘레랑스의 차이에서 부터 얘기를 시작해볼께요.
관용은 똘레랑스 보다 미국의 탈러런스(tolerance)에 가깝다고 해요. 미국의 탈러런스는 1649년 아메리카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발표한 '탈러런스 조례' 에서 처음 나타난 것인데요,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 미국에서 탈러런스는 차이를 드러내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략) 탈러런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절하는 '도구'이지 공공 선이나 정의를 위해 사회를 다시 짜는 '원리'가 아니다. (중략) 똘레랑스는 갈등하는 이익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서로 연대하는 것이다. "

관용과 똘레랑스는 갈등을 바라보는 관점이 사뭇 다른 것 같아요.

관용은 서로의 이익을 적당한 선에서 조절함으로써, 갈등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똘레랑스는 서로의 입장차이를 명확히 하는 이성적인 토론을 중시하니 만큼, 갈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그러고보면, 우리는 '좋은게 좋은 것' 이라며, 갈등에 대해 참 인색하지는 않은지요.
매번 조정되고 봉합되는 갈등이란, 어느새 안에서 곪고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똘레랑스의 역설

'똘레랑스의 역설' 이라는 말도 있어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강조하는 똘레랑스지만,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앵똘레랑스에게 마저 똘레랑스 할 경우엔, 똘레랑스의 취지 자체가 무색해짐을 뜻합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라는 똘레랑스의 기치는, 이러한 역설을 피하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똘레랑스도 앵똘레랑스 할 수 있다는 것은, 똘레랑스가 가능하기 위한 전제조건을 뜻합니다.
전제조건이란, 다름아닌 두 주체간의 권력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죠. 평등하지 않은 두 주체간의 똘레랑스란, 결국 권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쪽의 손을 들어주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겁니다.

'앵똘레랑스엔 앵똘레랑스로' 역시도, 타협이나 관용과는 다른, 똘레랑스의 적극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요.


# 차별하는 똘레랑스

아무리 똘레랑스의 개념이나 기준을 명확히 한들, 현실에서 똘레랑스를 두고 일어나는 설전을 막을 수는 없을겁니다.
어차피 똘레랑스란, 인간의 완전함을 부정하는 개념이니 만큼, 그것이 어떤 보편적인 기준이 되기는 힘들겠죠. 하나의 태도 내지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똘레랑스와 접붙이기' 에 기꺼이 한 단락을 할애한 것은 꽤나 적절해보입니다.
그는 이 장에서, 홍세화씨의 실험 - 그는 입국제한이 풀린 후 한국에서 활동하면서, 한겨레 신문에 토론코너를 진행하고 있어요. - 에 대해 평하기도 하고, 시민간의 접촉을 보장하는 공간, 자율성과 연대감을 기르는 자치운동, 무엇보다도 똘레랑스의 역설을 비껴갈 수 있는 불평등의 조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노력들이겠지만, 저 역시 후자에 좀 더 힘을 실어주고 싶어요.
불평등이란 똘레랑스가 가지는 약점이기도 하고, 동시에 똘레랑스를 실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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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5
조세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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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보다는 '난쏘공' 이라는 줄임말로 더 익숙한 책. 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문학으로서, 당시 대학가에서는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이제는 수능 필독서가 되었다는 그 책.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무척이나 늦게 만났습니다.


"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승용차 시트 뒤에 달려 있는 트렁크에 구멍을 뚫었다. 드릴로 구멍을 뚫은 다음 십자나사못을 틀어넣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권총 모양의 두가지 공구를 사용했다. 하나로는 구멍을 뚫고 다른 하나로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넣었다. 선참 공원들은 나를 <쌍권총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난장이의 아들에게 이것은 아주 놀라운 체험이었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 나는 트렁크 안에 상체를 밀어놓고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트렁크의 철판에 드릴을 대면, 나의 작은 공구는 팡팡 소리를 내며 튀었다. 구멍을 하나 뚫을 때 마다 나의 상체가 파르르 떨었다. 나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한입 가득 물고 있했다. 구멍을 뚫기가 무섭게 일에 문 부품을 꺼내 박았다.

날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나를 구해 주고는 했다.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쌍권총의 사나이>는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혓바늘이 빨갛게 돋고, 입에서는 고무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

인용한 단락은, 극중 주인공격인 난장이의 첫째 아들 영수의 독백입니다.
<난쏘공>을 이미 일독하신 분들, 그리고 혹 제가 인용한 단락을 통해 <난쏘공>을 처음 접하신 분들께 한가지 물어볼께요.

" 영수의 심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문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물론, 모범답안 같은건 애초에 없습니다. 그저 제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살펴보고싶을 따름이니까요.

전 많은 분들이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를 지목하셨으리라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저는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를 지목했습니다.

...

엄밀히 말해, 무자르듯 나눌 수는 없지만,
전자(前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분배' 라는 관점, 후자(後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소외' 라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배'는, 삶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영수라는 노동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있는 곳은, 휴일도 없이 잔업이니 철야니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과 볼품없는 저임금, 먼지와 기름때로 알려진 열악하고 더러운 작업장이죠.

'소외'는, 삶의 정신적 황폐입니다.
잔업 철야로 24시간 쉬지않고 돌아가는 기계,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들어오는 개량된 기계. 일의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든 기계일진데, 되려 노동자들은 기계에 매달려가는 듯한 느낌과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는거죠.

앞서, '대부분이 전자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라고 감히 추측한 것은,
많은 분들이 '부의 분배' 가 노동문제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자인 '소외' 의 문제 역시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오히려, '소외' 를 빼고는, 과거든 현재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심지어, 자칫 오해를 낳을 수도 있구요.

오늘날은, 한층을 둘로 나눈 닭장과 같은 공장도 없고, 잠 안오는 약을 먹어가는 소녀노동자도 없고,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옷핀을 들고다니는 작업장관리자도 없다는 항변이죠.
<난쏘공>이 고발하는 70년대 노동현실이, 30년이 지난 오늘, "그땐 그랬지" 라는 하나의 굳어진 과거로 치부되어, 스테디셀러로, 수능필독서로 박제화되는 겁니다.

하지만, '소외' 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장이는 오늘도 작은 공을 쏘아올려야 합니다.

오늘날, 울산이며, 광주, 아산에 있는 세계 유수 기업의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일을 하는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는, '시래기와 꽁치를 넣어 끓인 국에 보리가 더 많은 푸석한 밥, 허연 김치 몇 조각의 점심' 을 먹지는 않았더라도,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기계에 속박받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돌아가는 라인에 몸을 맡겨야하고, 여전히 신기술 도입에 일자리 걱정을 해야하는 영수입니다. 그에게 일이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먹고 살기위해 라인에 매달리는 것이죠. 여전히 기계가 그의 일과, 삶을 결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척도로 생각하는 '분배' 란, 즉 물질적 조건이란, 기실 '소외' 의 일부분일 따름입니다. 결국, 정당하지 못한 분배란, 소외의 '결과'라는거죠.

기계를 소유하지 못한 영수, 기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기계에 매달려가는 영수, 소외된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의 몫이야,
응당 기계의 다음이 아니겠습니까.

'분배' 라는 척도는,
<노동의 종말> 이 예견하듯 점점 정도를 더해가는 소외 속에서, 점점 더 척도로서의 자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난쏘공>에서 그저 70년대 분배의 문제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는건 참 아쉽고, 무기력한 일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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