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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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어디에서 줄곧 글을 써왔던 금주씨의 소개글이 참으로 멋스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글의 틈새틈새에 본문의 한구절을 인용하던 그의 글쓰기 모양새 덕분에,

<청춘의 문장들>이 그리도 마음을 때렸던 것이다.

 

문장으로 옮기는 일, 문장으로 옮기는 일. 그것이었다.

글쓴이, 이 서른중반의 소설가의 이름보다 궁금했던 것은,

그가 문장으로 옮기고 싶었던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의 자취, 그리고 옮겨진 문장들이었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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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틀만에 책장을 덮어버린 이 친구는,

어제오늘 때로는 책을 닫고 한숨을, 때로는 주위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게되었다.

 

청량리역에서 내려 시립대 언덕으로, 학교를 잠시 들러 다시 집으로 향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동안,

그의 시선은 대학시절 숱하게 서성이던 청량리 시계탑에도, 도로로 난 길보다 5분이 빠르다는 청량리 뒷골목에도, 몇해전 양차지부 - 철도노조 청량리차량지부 - 깃발을 들고 역내를 둘러다녔던 역사와 주욱 뻗은 철로에도, 그 언젠가 한국어를 전공한다던 중국인 친구와 식사를 했던 고기집에도, 네학번 선배의 이름이 적혀있던 학교 앞 사제 플랭카드에도, 학교 앞 신축상가공사장에도,

 

머물고 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펜과 종이 대신, 문장과 키보드 자판을 떠올리며.

 

#

길어야 두장을 넘어가는,  길지 않은 삶의 자취들.

그리고 시인이자 소설가 다운 예의 아름다운 문장들도 참 볼만 하지만,

<청춘의 문장들>을 읽은 이여, 우리도 문장으로 옮겨보자. 못할 것 무에 있는가.

 

그도 그럴 것이,

김연수 역시도 소유형용사를 빼고, 그저 '청춘의' 문장들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청춘을 사랑하는 이여, 청춘의 문장들일랑 오늘부터 써내리자.

놓치고 싶지 않은, 놓쳐서는 안되는 청춘의 그것을 문장으로 붇들어보자.

 

마지막으로,

시를 사랑하는 이여, <청춘의 문장들>을 읽어보자.

오래도록 시를 읽고 곁에 두어온 시인이 자신의 자취방과 벗어버린 넥타이와 아끼는 시집을 소개해 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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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아 사랑해
이지선 지음 / 이레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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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친구녀석이 있습니다.

입대하던 날에 성경을 선물했었는데,
뭐 이것저것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받지 못했었답니다.

자대에 와서야 소포를 받았는데,
한권은 역시 성경이었고, 또 한권은 '지선아 사랑해!' 라는 책이었죠.

이지선씨 역시 독실한 기독교신자인데,
대학 2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었답니다.
그 후 3년동안,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으로 시작해,
화상 치료와 성형 및 재활 치료를 받으며 그녀가 느꼈던 절망과 고통, 그리고 다짐과 감사, 행복을 담은 일기 형식의 글입니다.

전 이제서야 알게됐지만,
'주바라기' 라는 개인 홈페이지와 그녀의 다시 일어서기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팬사이트, 그리고 언론을 타면서 많이 유명해져버린 그녀라고 합니다.

사실, 그저 그렇게 책을 집어들었는데,
고작 몇장을 넘기지도 않고서, 조심스레 고쳐앉는 저를 볼 수 있었답니다.

그녀의 의지와 마음에,
저 역시 작은 축복을 더하면서,

제게 꼭 와닿았던 이지선님의 글을 발췌합니다.
(출처: 지선아 사랑해! - 도서출판 예림)

" 예전에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많이 집착했었다. 사람, 물건, 시간, 추억들.. 하지만, 사고를 당하고, 사고 전에는 한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도난을 두번이나 당하면서 나는 예전에 정말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그래서 내가 손 안에 꼭 쥐고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말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가 진정으로 이 땅에서 가질 수 있는 것, 그것은 나의 육신도 나의 재물도 나의 운명도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

" 사람들이 장애에 대해 갖는 또 한가지 착각은 '장애는 곧 불행' 이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장애인 판견을 받기 전까지의 25년을 그런 생각으로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누가 누구를 동정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장애인들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장애는 불편할 뿐이지, 결코 불행하지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의 경계는 장애와 비장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땅이 장애의 기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신체의 다름과 불편으로 삼았을 뿐이지, 실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건강과 다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누가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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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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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에 쓰여졌으니, 제가 태어나기도 전이네요.
그해 있었던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고,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연극으로까지 만들어졌다는 소설.

이제서야 읽고나니,
지난 찰나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네요.

책을 덮고 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좋은 느낌을 받아 부족하나마 몇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마음 무거움을 덜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아서요.

게시판을 둘러보니,
몇분의 후기도 찾을 수 있었는데,
설혹 지루하지는 않을지 걱정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의 아들>의 어떤 부분에 주목하셨는지요.
神과 종교에 대한 반정립? 아니면 神과 종교로 대변된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

듬성듬성 읽은터라,
조금은 뻔한 (하지만 중요한) 결론을 내며 책을 덮었으나,
이남호씨의 서평을 읽으며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이 생겼습니다.

종교와 신에 대한 변증법적 반정립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 반정립의 주체가 민요섭과 조동팔 두명이라는 것에 착안한다면 조금 더 재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거죠.

민요섭과 조동팔 모두 현실의 모순 위에 선 기독교적 신앙과 실천에 대해서 회의했고, 인간의 정의에 주목하였으나,
민요섭이 '신앙'이라는 테두리 주위를 배회하며 새로운 신앙을 찾았던 반면에,
조동팔은 틀 자체를 벗어나 있었다는 발견이 그것입니다.

소설의 시작이자 시간상의 끝 무렵,
(어떤 이유에서) 지친 민요섭은 기도원으로, 즉 神에게로 돌아가게되고,
이를 본 조동팔은 그에게서 '기독교적 신앙'이라는 테두리를 벗게했던 (물론, 그에게서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도전이라는 색깔이 두드러지지만) 민요섭의 회기를 보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 상실을 두려워하며 민요섭을 살인하게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처럼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요섭은 왜 회기했을까?
그리고, (서평에서 비판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는) 조동팔의 극단적(?) 탈주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여러분들과 같이 얘기해봤으면 좋겠네요.

참, 마지막으로,
뻔하지만(?) 중요했던 결론에 대해,

'어쩔 수 없다' 며, 이기적 인간의 본성이라는 허울에 숨어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자신조차 돌아보지 못한 채, 자신과 문제를 포괄한 구조조차 고찰하지 않은 불평 불만만을 늘어놓지 말고,
비록 때로 굽히고 꺽이더라도, '사람이 만들어야 할 희망' 앞에 '사람의 정의' 앞에 솔직하고 당당해야 하겠다는 다짐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네요.

작가가 얘기하고 싶었던 '사람의 정의' 가 그들의 교과서에나 나오는 빛바랜 도덕적 문구는 아니었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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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청목 스테디북스 27
조지 오웰 지음 / 청목(청목사)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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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조지 오웰의 <1984년>을 읽고 나름대로 흐뭇한 독서후기를 썼었는데, 당췌 찾을 수가 없네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었는지 돌아보니 대충 이렇습니다.

1.
제가 <1984년> 바로 이전에 읽었던 책이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였는데,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는 점입니다.

중세가 막을 내리고 근대가 시작되죠.
그런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근대에 대한 기대와 함께 쓰여진 것이라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가 회의로 바뀔 시점에서 쓰여진 것이라는겁니다.

신이 모든 것을 규명해주었던 중세에는 없었던 사람의 희망을 표현한 것이 <유토피아>와 같은 유토피아 문학이라면,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약합니다만은,
중세가 막을 내린 후에는, <유토피아> 외에도 많은 유토피아 문학, 그러니까 희망찬 사회에 대한 기대들이 쏟아져나왔었죠.
이런 희망은 1차 세계대전의 무수한 희생 속에서도 꺽이지 않았었는데, 2차 세계대전을 거쳐가면서 꺽이기 시작합니다.

2.
두번째는, <1984년>을 읽는 재미에 대해서입니다.

전체주의를 비판했던 이 책은 굉장히 요긴하게 쓰였던 모양입니다.

80년대 쯤에 출판된 이 헌책의 앞뒤를 덮고있는 그 당시 출판사의 홍보문구를 보면 더욱이 그러합니다.
일당독재, 일상생활에 대한 감시, 노동수용소와 같은 코드들이 강조되고있죠.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재미들은 몇가지 더 있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용 코드들 역시나 중요합니다만, 몇가지 더 추가하고 싶은겁니다. 냉전시대의 쓰임새에는 별로 걸맞지 않았을지라도, 꽤 중요하게 느껴졌거든요.

첫번째는, 삼국지의 삼분지계를 떠올리게 하는, 3국의 세계질서.
이 책의 배경은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국을 기본으로 한다는겁니다.

두번째는, 3국의 경쟁질서와 전쟁과의 관계입니다.
소설에서는 심심하면 한번씩 폭탄이 떨어지는데, 자칫 소홀해질 수 있는 이 폭탄이 가지는 경제적 의미입니다.

세번째는.. 잊어버렸네요. ^^;

그럼, 여러분 나름대로 추가적인 코드들을 찾아 재밌게 읽으시길 바랄께요.
오랜만에 쓴 긴 독서후기를 줄이려니 너무 억울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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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 High Class Book 42 세상을 움직이는 책 34
토머스 모어 지음, 박병진 옮김 / 육문사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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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우리는 흔히 `이상향`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원뜻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상향`에는 분명 현실과의 괴리가 있기 때문에,
`이상향`이든 `존재하지 않는 곳`이든 얼추 비슷하긴 합니다만,
또 한편으로, `이상향`에는 현실을 딛고 나아가려는 적극적인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500년 전 사람인 토마스 모어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사회는 어떠했을까 하는 호기심에 책을 들었습니다만,
한편의 저작을 둘러싼 배경은 더욱 흥미진진하더라구요.

<유토피아>라는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 고전은,
플라톤이 살았던 까마득한 옛날 이후에 다시금 유토피아 문학의 시작점이 되었던 저작입니다.
새로운 시작 이전에는 중세시대가 있었죠.

대충 감이 오시겠지만,
중세는 신에게 인간이 꽉 잡혀있던 시대였습니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죠.
신의 말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과 삶 이후까지 신에게 믿고 의지하던 때였으므로,
현실의 고통은 합리화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현실의 고통이나 불만, 갈등 따위가 늘 해결되었으므로 이상향을 꿈꿀 필요가 없었죠.
이상향이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중세가 막을 내리고,
현실의 고통과 불만, 갈등을 한번에 해결해주던 신의 말씀 또한 인간의 이성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됩니다.
갈등은 표면화되죠.

유토피아 문학은, 이런 현실의 갈등으로부터 다시 나오게됩니다.

실제, <유토피아>의 토마스 모어는,
1500년대 즈음 남미 본토를 발견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기행문 <신세계> 에서 그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는데, 사실 남미 본토야 오래 전부터 있어왔으니 `새로운 대륙`이란 외지인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겠죠.

여튼,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발견한 신대륙, 그리고 거기에서 평화롭게 살고있던 원주민의 생활상은,
르네상스 시절 영국사회의 갈등을 발판 삼아 <유토피아>라는 문학으로 거듭나게 되는겁니다.
일종의 풍자문학이 되는 셈이죠.

1부는 라파엘, 모어, 피터 세 사람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화의 주제는 당시 영국사회에 만연했던 도둑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형제도에 대한 각자의 해결책이고,
2부는 얘기를 좀 더 나누기로 한 세 사람이 따로이 자리를 잡고, 라파엘의 유토피아 경험담을 듣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주된 내용이야, 당연히 라파엘(라파엘은 극중 신대륙을 보고 온 여행자로 설정되어있음)이 신대륙에서 보고 온 사회의 모습이겠죠.
생산수단 공유제와 하루 6시간의 노동과 충분한 여가시간, 민주적인 선거제도와 도덕적인 국민들, 신앙의 자유와 공동 집회를 비롯한 사회 곳곳의 모습은 당시 영국사회를 교묘하게 비꼬면서 이상향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각박해지는 현실에서 현실논리와의 싸워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공상입니다.
꿈을 꿀 수는 있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무모하기 때문에 맥이 빠지는 것이 공상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상은 소중합니다.
공상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할 때 나오고,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때 나오기 때문입니다.
공상은 멋들어진 결과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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