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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 코드 일부 오역

번역서와 원문 일부 분석 결과 오역 발견... 출판사 "수정 중"
미디어다음 / 홍정희 통신원
다빈치 코드에는 생각보다 많은 오역들이 숨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다빈치 코드의 책 표지.
번역서를 읽으면서 문장이 매끄럽지 않아 읽기도 불편하고 이해도 잘 되지 않았던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을 법하다. 물론 이것은 배경 지식이 부족하거나 문장 해석 능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번역이 잘못된 경우도 많다. 올 해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다빈치 코드 역시 마찬가지다. 다빈치 코드에는 생각보다 많은 오역들이 숨어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코리아헤럴드 신문사 부설 어학원 영한번역 전문반 학생들이 한 달에 거쳐 다빈치 코드 번역서 11쪽에서 28쪽까지의 내용을 원문과 대조해 분석한 결과 오역이 한 쪽 당 평균 2~3개에서 많게는 6~7개까지 나타났다.

이 분석을 담당한 전문반 학생들과 교사는 “번역이 잘못되면 줄거리 파악에는 큰 지장이 없을 수도 있지만 결정적인 오역으로 소설의 복선이 사라지는 바람에 독자들의 흥미가 반감된 경우도 있었다”며 “소설 속 배경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경우도 있어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번 분석에 자문을 받은 경희대학교 호텔경영대학의 언어학박사 성백환 교수는 “소설 전체를 살펴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석에 한계가 있지만 이번에 발견된 점들은 명백한 오역” 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비평 작업이 계속 된다면 국내 번역 품질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다빈치 코드의 출판사 베텔스만 코리아 관계자는 “출간 후 오역에 대한 지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이번 조사에서 발견 된 부분 중에는 이미 수정한 것도 있다” 며 “그러나 외국어인 만큼 완벽한 번역은 어렵고 다만 많은 분들이 지적해 주신 부분은 인쇄를 다시 할 때 마다 수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분석을 통해 찾아 본 다빈치 코드 오역 사례 중 일부
* 다음에서 소개하는 ‘본뜻’은 이번 분석을 한 학생과 교사의 번역으로 완벽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번역서 11쪽.

원문: A voice spoke, chillingly close. “Do not move.” On his hands and knees, the curator froze, turning his head slowly.

오역: “움직이지 마시오.” 냉기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소니에르는 손과 무릎이 얼어붙는 것을 느끼며 머리를 천천히 돌렸다.

본뜻: “움직이지 마시오.” 소름 끼칠 정도로 가까이서 목소리가 들렸다.
소니에르는 엎드린 채 꼼짝도 못하고 고개만 천천히 돌렸다.

해설: on (one's) ∼s and knees 넙죽 기어서 (한컴사전 참고)

번역서 12쪽.

원문: The lie he told was one he had rehearsed many times … each time praying he would never have to use it.

오역: 지금 하려는 거짓말은 수없이 연습하던 것이다…… 기도하는 매 순간, 결코 쓸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본뜻: 지금 하려는 거짓말은 수없이 연습하던 것이다…… 매번 연습할 때마다 결코 이 거짓말을 사용할 일이 없기를 기도했다.

번역서 13쪽.

원문: The click of an empty chamber echoed through the corridor.

오역: 빈 화랑에 딸각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본뜻: ① 총의 빈 약실(藥室)에서 나는 딸깍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퍼졌다.
② 빈 권총의 딸깍하는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퍼졌다.

해설: chamber는 그냥 방 또는 실(室)의 의미가 있지만 화랑이라는 뜻은 없다. 또한 딸각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문맥상 총의 딸각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chamber가 가진 뜻 중 총의 약실(藥室)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봐야 한다.

번역서 14쪽.

원문: He was trapped inside the Grand Gallery, and there existed only one person on earth to whom he could pass the torch.

오역: 박물관 대화랑에 갇힌 소니에르는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지상의 유일한 사람이다.

본뜻: 소니에르는 박물관 대화랑에 갇혀있었고, 그가 진리의 횃불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해설: 여기서 말하는 단 한명은 이 책의 주인공 로버트 랭던을 말한다. 그의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 부분이 오역됨으로써 책의 복선(伏線)이 사라져 버렸고 더불어 독자들의 흥미도 반감되었다.

번역서 18쪽.

원문: Tonight, three thousand miles from home, the accolade had resurfaced to haunt him at the lecture he had given.

오역: 집에서 5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이곳에서 가진 오늘 밤 강의는 그에게 또 다른 명예를 안겨주었다.

본뜻: 이곳은 미국에서 5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지만 보스턴 매거진이 그에게 안겨주었던 영예는 이곳까지 쫓아와 오늘 밤 강연에서 랭던 교수를 다시 한번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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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12-22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생각보다 번역본이 빨리 나왔다 했더니 역시 곳곳에 숨은 오역들이..

요것도 가져 갑니다- ^^

조선인 2004-12-22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랬군요. 하지만 다빈치 코드 정도면 약과죠. 읽다가 에게? 싶은 번역이 너무 많아요. 전 민음사의 세라 이야기에도 무척 실망했답니다.
 

1879. 3. 14 독일 뷔르템베르크 울름~1955. 4. 18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



독일의 물리학자.





20세기초의 창조성이 뛰어난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20세기초 15년 동안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단언하고 공간·시간·중력에 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제안한 일련의 이론들을 내놓았다. 그의 상대성 원리와 중력에 관한 이론들은 뉴턴 물리학을 넘어서는 심오한 진전이었고 과학적 탐구와 철학적 탐구에 혁명을 일으켰으며,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사회 정의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열정적 감각'을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명성 덕택으로 평화주의·자유주의·시오니즘과 같은 대의를 지지하는 데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사람이 물질 입자가 엄청난 양의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에너지-질량 방정식 가설로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파괴적인 무기인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창조를 증명했다.





초기생애와 경력



그가 태어난 이듬해 그의 가족은 뮌헨으로 이사하여 아버지 헤르만 아인슈타인과 숙부 야코프 아인슈타인은 조그마한 전기공장을 세우고 전기일을 시작했다. 뮌헨에서 엄격한 학교에 다녔는데, 19세기 독일 교육의 엄하고 현학적인 단체훈련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학생으로서의 능력을 거의 보이지 못하고 무섭고 지루함을 느꼈다. 어머니의 명령으로 음악도 공부하게 되었는데, 생애를 통해 기분전환으로만 연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능숙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무렵 단지 숙부 야코프 체자르 코흐만이 아인슈타인의 수학과 과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시켜주었다. 12세가 된 아인슈타인은 '거시 세계'의 수수께끼를 푸는 데 헌신하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3년 후 역사·지리·어학에서 낮은 점수를 받아 졸업장도 못 받고 학교를 나와 가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로 갔는데,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밀라노로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상태였다.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했는데, 유명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에서 4년간 물리학·수학 공부에 몰두했다.



1900년 봄, 학교를 졸업한 후에 스위스 시민이 되었고 2개월간 수학교사로 일한 후에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 사무소 심사관으로 채용되었다. 새로이 안정을 찾게 되면서 1903년 대학시절의 애인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1905년초에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유명한 월간 학술지〈물리학 연보 Annalen der Physik〉에〈분자 차원의 새로운 결정 A New Determination of Molecular Dimensions〉이라는 논문을 냈는데, 이 논문으로 나중에 취리히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해의〈물리학 연보〉에 4개의 더 중요한 논문을 발표했고 이는 인간의 우주에 대한 견해를 영구히 바꾸어버렸다.



이중에서 첫번째 논문인〈정지 액체 속에 떠 있는 작은 입자들의 (열의 분자운동론에 의한) 운동에 대하여 Über die von der molekularkinetischen Theorie der Wärme geforderte Bewegung von in ruhenden Flüssigkeiten suspendierten Teilchen〉는 브라운 운동에 대해 이론적으로 설명해주었다. 빛의 발생과 변화에 관련된 발견에 도움이 되는 견해에 대하여 Über einen die Erzeugung und Verwandlung des Lichtes betreffenden heuristischen Gesichtspunkt〉에서 빛은 파동적 작용에 더하여 입자에만 고유하게 나타나는 일정한 성질들을 보여주는 개별적 양자(量子:후에 광자로 불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이 한 가지 가정으로 빛 이론에 혁명을 일으켰고 여러 현상들 가운데서 광전효과(光電效果)라고 하는, 빛을 비추었을 때 일어나는 몇몇 고체로부터의 전자(電子) 방출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은〈운동하는 물체의 전기역학에 대하여 Zur Elektrodynamik bewegter Körper〉에 처음으로 실렸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모든 좌표계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고 모든 자연 법칙이 똑같다면, 시간과 물체의 운동은 관찰자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의 수학적 표현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그의 4번째 논문 물체의 관성은 에너지 함량에 의존하는가Ist die Trägheit eines Körpers von seinem Energieinhalt abhängig〉를 썼다. 이 논문에서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를 확립했는데, 이에 따르면 어떤 양의 물질이 갖는 에너지는 그 물질의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값, 즉 E=mc2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알려짐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유럽의 저명한 물리학자 대열에 서게 되었다. 그는 중력 현상을 새로 포함시키려고 이론을 계속 발전시켰다. 특허사무소를 떠나서 처음에는 스위스에서, 그리고 잠시 프라하의 독일대학교에서 정교수로 있었으며, 1912년 겨울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때를 결혼생활에 만족했고 어린 두 아들 한스·에트바르트와 즐거웠던 행복한 시절로 회상했다.



1914년 4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얻었는데, 아카데미 당국은 아인슈타인이 때때로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연구를 계속하도록 허가해주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스위스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베를린으로 돌아올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헤어짐으로 몇 해 뒤에 아인슈타인은 이혼하게 되었다. 그는 전쟁을 혐오했고 일반적으로 순종적인 학자사회에서 독일 군국주의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자가 되었으나,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하는 데 주로 열중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1916년〈물리학 연보〉에〈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Die Grundlagen der allgemeinen Relativitätstheorie〉로 출판되었다. 이 가설의 핵심은 중력이, 뉴턴이 이야기했던 것과 같은 힘이 아니라 시공연속체 속의 질량의 존재에 의해 생긴 굽어진 장(場)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는 별빛이 태양 가까이를 지날 때 별빛의 휘어짐에 의해 증명되거나 반증될 수가 있는 것이었는데, 별빛은 개기 일식 동안에만 볼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2배의 빛의 휘어짐을 예측했다.



그의 새로운 방정식들은 또한 수성의 근일점(近日點)의 당혹스러운 불규칙성(약간의 이동)을 최초로 설명해주었고, 강한 중력장 속의 별들이 약한 장의 별들이 내는 스펙트럼보다 적색에 더 가까운 스펙트럼을 내는 이유를 증명했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이 끝나는 것과 일식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그의 이론이 시험될 기회를 기다리면서, 점차 평화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국제적인 환호



1919년 아인슈타인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 그해에 런던 왕립학회는 기니 만에 있는 프린시페 섬에서 있었던 과학탐사에서 그해 5월 29일의 일식을 사진 찍었고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서의 예측을 검증시킨 계산값들을 내었다고 공표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성이론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기본 가설들은 대단히 혁명적이었으며 과학계는 이 물리학자가 지구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로 환호받은 데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그러한 반응에 깜짝 놀랐고 아주 기분이 상했는데, 왜냐하면 그결과 중단된 그의 연구 때문이었다. 이혼 후 1919년 그의 아버지의 작고한 사촌의 딸로 과부였던 엘자와 재혼했다.



당시 독일의 악화되어가는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국가주의를 공격했고 평화주의 사상을 장려했다. 베를린에서 반유대주의 물결이 거세어지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의 볼셰비키주의자' 범주로 구분되었고, 그가 시오니즘 운동을 대중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하자 우익집단들의 그에 대한 격노가 거세졌다.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 적대를 받았으나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 그에게 요청한 것 때문에 상대성이론을 강의하러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널리 다녔는데, 보통 3등열차를 타고다녔고 늘 바이올린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3년 동안에도 유럽의 수도들뿐만 아니라 동양·중동·남아메리카 등지도 다녔다. 여기에는 실론 섬, 일본, 팔레스타인 등도 포함된다.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당신의 광전법칙과 이론물리학 분야에서의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국제전보를 받게 되었는데, 상대성이론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1920년대의 시끄러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연구, 즉 전자기와 중력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기에 이것은 전자로부터 행성까지의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의 작용을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발견하는 첫 단계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단일한 방정식이나 공식으로 물질과 에너지의 보편적 속성들을 연관시키려고 했는데 이는 나중에 통일장이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나머지 삶을 차지한 성과 없는 질문으로 판명되었다. 아인슈타인의 동료들은 일반적으로 그의 탐구가 실패할 운명을 갖고 있다는 데에 일찍부터 동의했는데, 왜냐하면 급속히 발전하고 있던 양자이론은 입자의 운동에 대한 모든 측정에서의 불확정성원리를 밝혀냈기 때문이다. 단일한 입자의 운동은 그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동시에 측정할 때의 근본적 불확정성 때문에 단순하게 예측될 수가 없었는데, 이는 사실상 원자구성입자 수준의 어떤 물리계의 미래를 예측할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탁월성을 충분히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이 절대적이고 미래의 발견에 대한 더욱 만족스러운 기초로서 일반상대론에 맞설 수 있다는 관념을 거부했다. 그는 정확하게 만들어진 우주에 대한 믿음, 즉 "신은 교묘하지만 심술궂지는 않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대부분의 이론물리학자들과 의견이 상이했다. 외롭게 그의 길을 고집했고 결과적으로 낭비되어버린 노력이었다고 이야기되는 그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이다.



1931년 교환교수로 옥스퍼드대학교를 방문했을 때, 과학을 논의하는 것만큼의 많은 시간을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데 보냈다. 그는 1932년 제네바에서 일정이 잡혀 있었던 세계비무장회의에 대중적 압력을 가하려고 아인슈타인 반전기금을 설립했다. 이 회담이 실패하자 그는 세계 평화와 인간의 이해를 지지해왔던 여러 해의 노력이 아무런 소득이 없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과학적 진리가 인간성과 독립해 있는 타당한 진리로 개념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나의 종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신론을 강하게 반대했는데, "존재하는 것의 조화 안에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스피노자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했다. 그는 네덜란드 레이덴대학교의 물리학자 파울 에렌페스트와 헨드리크 A.로렌츠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공과대학을 몇 차례에 걸쳐 방문했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집권자가 된 후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을 떠났다. 뒤에 그는 프린스턴대학교 고등연구소 수학과정 기초임원이라는 정식자리를 받아들였다. 그결과 나치주의자들은 그가 애용하는 베를린 근처에 있는 여름 별장을 수색하고 그의 배를 압수했다. 그는 독일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확신하고 유럽 자유세계가 방위력을 보충하고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미국에서의 말년



프린스턴에서 아인슈타인은 20년 이상을 거의 변화가 없는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소박한 2층 목조가옥에서 아내와 살았고, 아침마다 산책을 하거나 연구소까지 걸어다녔다. 연구소에서 통일장이론을 연구했고 동료들과 토론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자신을 항상 유럽인으로 생각했다. 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나치 과학자들이 '원자탄'을 최초로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으로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경계를 해야 하며 만일 필요하다면 빠른 조치를 취하라"는 편지를 썼다.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했던 그러한 권고는 맨해튼 계획의 시작을 의미했다.



그는 뉴멕시코 로스알라모스에서의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1945년 히로시마(廣島)가 괴멸될 때까지 핵분열탄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으나 아인슈타인의 이름은 원자시대의 등장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그는 미래의 원자탄 사용을 막을 방법을 찾고 있었던 과학자들과 즉시 합류했고, 그의 긴급한 탄원은 미국·영국·러시아가 기초한 규정 밑에 있는 세계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세계를 괴롭힌 핵공포에 자극받아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단지 의도만 해서는 안 되고, 세계 안전에 필요한 속박된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속시키려는 적극적인 열성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치인과 정치꾼에 의하여 좌절했지만 가장 주요하게 매달렸던 것은 여전히 물리학이었기 때문에 극복할 수 있었다. 1955년 아인슈타인은 프린스턴 병원에서 잠을 자다가 숨을 거두었다. 그의 책상에는 이스라엘 독립일에 대해 씌어진 미완성의 언명들이 적혀 있었는데 부분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내가 성취하고자 추구했던 것은 단지 나의 부족한 능력으로 진리와 아무도 즐겁게 하지 못하는 위험에 대한 정의에 봉사하고자 한 것이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 대한 그의 기여는 비길 데 없으며, 그는 언제나 과학의 거인이었다. 넓게 말해서 인간사에 대한 그의 개혁운동은 지속적인 영향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인슈타인이 "정치는 순간을 위한 것이다. 방정식은 영원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아마도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예견했던 것 같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preview.britannica.co.kr/spotlights/nobel/list/B14a2262b.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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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

 (이)Duca Valentino. duc de Valentinois라고도 함.

 1475/76경 이탈리아 로마(?)~1507 스페인 비아나 근처.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

보르자, 유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로마냐 공작이자 교황군 총사령관으로서, 부친의 권력을 강화하고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의 공국을 세우고자 했다. 그의 정책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그를 새로운 '군주'의 본보기로 인용했다.

 

 

 

 

 

 어린시절과 교육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의 정부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반노차 카타네이가 낳은 아들이었다. 당시 추기경이던 아버지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청 상서 부(副)국장으로서, 다른 애인들과의 사이에 이미 세 자녀를 두고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반노차와 로드리고 사이에 태어난 4명의 자녀(체사레·후안·루크레치아, 조프레) 중에서 맏이었고, 로드리고의 아들 중에서는 둘째였다. 둘째 아들은 성직자가 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그도 관습에 따라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1480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그가 성직을 가질 수 있도록 사생아라는 오명을 벗겨주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의 가족과 문화적 배경은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적이었다. 이복 형인 페드로 루이스는 간디아 공작이었고 그가 초기에 받은 성직령은 모두 스페인에 있었다. 7세 때 체사레는 교황청 서기장 겸 발렌시아 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어린시절에 그를 가르친 가정교사는 파올로 폼필리오와 조반니 베라였는데, 이들은 둘 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출신이었다. 한 관찰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적어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였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총명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1489년에 그는 페루자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피사대학으로 옮겨 유명한 법학자인 필리포 데초 밑에서 공부했고 교회법과 민법으로 학위를 취득했다. 1491년에 그는 팜플로나 주교가 되었으며 아버지가 교황에 즉위한 후인 1492년에는 발렌시아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권력 획득

1492년에 아버지가 교황으로 선출됨으로써 보르자의 운명도 달라졌다. 그는 대주교가 되었을 뿐 아니라, 1493년에는 명의(名義)성당인 산타마리아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주요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정한 종교적 소명의식이 없었다. 교황청에서 그는 성직자의 의무는 지키지 않고 사냥 파티와 호색적인 간통 및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는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1488년에 이복 형 페드로 루이스가 죽자 간디아 공작 칭호는 체사레를 건너뛰어 그의 동생인 후안에게로 넘어갔고, 1496년에 알렉산데르가 반항적 귀족인 오르시니 가문을 쳐부수기 위해 첫번째 원정대를 조직했을 때 교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사람도 후안이었다. 체사레는 동생을 지나치게 질투했다는 평판을 받았고 1497년에 후안이 수상쩍은 상황에서 살해되자 그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그는 그후의 삶에서 입증했듯이 능히 살인을 저지를 만한 인물이었지만 그가 동생(후안은 형 이외에도 많은 적이 있었음)을 죽였다는 증거는 없다. 후안이 죽은 뒤 호전적이고 정치적인 체사레의 성향과 믿을 만한 속세의 참모를 필요로 하는 아버지의 요구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1498년에 그는 추기경의 지위를 포기했다. 그를 유력한 왕족의 딸과 혼인시키려는 계획이 마련되었고, 나폴리 공주 카를로타와의 결혼 시도가 실패한 뒤 그는 나바라 왕의 여동생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다. 이무렵 그는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로부터 발렌티누아 공작 칭호를 받았고 이 칭호에서 발렌티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가 프랑스 왕족과 결혼한 덕분에 그와 그의 아버지는 교황령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하고, 가능하다면 이탈리아의 일부를 떼내어 보르자를 위해 항구적인 보르자 공국을 세운다는 계획에 대해프랑스의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1499년에 보르자는 교황군 총사령관으로서 대규모 프랑스 파견대의 도움을 얻어 준(準)독립적인 교황 대리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로마냐와 레마르케 지방의 도시들을 조직적으로 점령하기 시작했다. 1499년의 원정은 이몰라와 포를리를 정복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1500~01년의 원정으로 리미니·페사로·파엔차를 수중에 넣었으며, 마지막으로 1502년에 우르비노·카메리노·세니갈리아를 점령했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대표로 보르자 진영에 가담해, 이후에 저술한 〈군주론 Il Principe〉에서 그토록 중요하게 묘사한 인물의 행동방식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마지막 원정 때였다.

알렉산데르와 보르자의 원정은 대부분 15세기 교황들이 확립한 본보기를 따른 것이지만 그들의 이런 정복활동은 교황령만이 아니라 다른 이탈리아 국가에서도 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알렉산데르와 보르자를 비난하는 성명이 각처에서 발표되었고 이러한 비난은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했다. 보르자는 아우를 죽인 뒤 아버지의 권력마저 빼앗은 탐욕스럽고 잔인한 괴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보르자 가문의 이 두 사람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한 것처럼 보인다. 알렉산데르는 좀더 빈틈없는 정치가였고 보르자는 가차없는 행동가였다. 야심만만하고 거만한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즉 교황의 정치적·경제적 지원을 빼앗기기 전에 이탈리아의 군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지기로 결심했다. '카이사르가 아니면 무(無)'라는 말은 이 목표에 대한 일념을 나타내기 위해 채택한 그의 좌우명이었다. 수많은 정치적 암살이 그의 탓으로 돌려졌지만 그가 저지른 것이 분명한 범죄는 1500년 8월에 여동생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인 비셸리 공작 알폰소를 죽인 사건이었다. 이는 정치적 동기에 따른 암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 원한을 갚기 위한 보복행위였다. 어쨌든 이 사건은 그에 대한 두려움과 미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

그의 전술을 가장 잘 나타낸 예는 로마냐 원정(1502~03)이었다. 우르비노 공격은 전혀 예상 밖이었고 또한 번개처럼 신속했기 때문에 우르비노는 총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어서 그는 카메리노로 진격했고 이 도시도 곧 굴복했다. 바로 이 단계에서 그의 권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요지휘관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는데 이것이 이른바 마조네 음모였다. 대부분의 군사력을 잃은 보르자는 로마냐에서 방어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의 자금을 아낌없이 사용해 군대를 재건하는 동시에, 음모자들의 동맹을 분쇄하기 위해 외교전선에서 활약했다. 이 동맹을 깨뜨리는 데 성공한 그는 화해하자는 구실로 음모자들 가운데 몇 명과 세니갈리아에서 만났다. 보르자는 음모자들을 그들의 군대와 격리시킨 뒤 그들을 체포해 처형했다(1502. 12). 이제 믿을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게 된 보르자는 행운의 절정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1503년 8월 18일 아버지가 죽을 때 그는 아마 토스카나를 공격해 오랫동안 갈망해 온 독립국가를 손에 넣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을 당시 그 자신도 병에 걸리는 바람에 생존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게다가 뒤이어 보르자 가문의 철천지 원수인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가 교황 율리우스 2세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은 더욱 위태로워졌다. 율리우스는 보르자를 로마냐 공작이나 교황군의 총사령관으로 승인하기를 거부하면서 로마냐의 도시들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체포된 보르자는 도시를 내주기로 동의해 잠시 형 집행을 유예받은 뒤 나폴리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의 반(反)교황 동맹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던 스페인 부왕 곤살로 데 코르도바에게 또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보르자는 그후 스페인으로 압송되어 처음에는 발렌시아 근처의 친치야 성에 갇혀 있다가 메디나델캄포로 옮겨졌는데 그는 1506년에 이곳을 탈출했다. 그러나 당장은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처남인 나바라 왕의 곁에 있다가 1507년 비아나 외곽에서 나바라 반역자들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했다. 그는 비아나의 산타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평가

체사레 보르자는 놀랄 만큼 대조적인 면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는 때로는 과묵해서 속마음조차 드러내지 않지만 수다스러운 허풍장이일 때도 있었다. 신들린 듯한 활동력이 폭발할 때는 밤새도록 작전을 짜고 지시를 내리곤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나태함에 빠져 있을 때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그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측근들한테 다소 냉정하게 대했지만 백성들한테는 매우 관대했고 현지 주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해 씩씩하고 멋진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를 좋아했다. 당시 이탈리아에 그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 영향은 주로 교황의 돈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는 분명 정치적·군사적 책략의 명수였으며, 그가 그토록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그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성과 대담성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인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이 진정으로 시험대에 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짧은 군인 생활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러 본 적이 없지만 이것은 아마 그가 그만큼 뛰어난 계략가임을 나타내는 척도였을 것이다. 그에게는 로마냐 공국의 정부를 조직할 시간이 거의 없었지만, 그가 중앙집권 정부와 효율적인 관료제도를 구상했다는 증거는 남아 있다. 이것은 그가 유능한 행정가였다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그의 관심은 미술보다 과학과 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나 그가 르네상스의 주요후원자로 등장하기에는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잠시 그의 성채들을 점검하는 조사관으로 일했지만 그의 주문을 받아 만들어낸 예술작품은 한 점도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그토록 널리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보르자를 드러내놓고 존경했는데, 이때문에 많은 비평가들은 마키아벨리가 그를 너무 이상적인 존재로 묘사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사실이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결점과 한계를 잘 알고 있었지만 군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몇 가지 자질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그의 호전성, 신속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담성, 기회주의 등은 당시 이탈리아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자질로서 마키아벨리에게 큰 즐거움을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보르자의 성격과 품성을 미화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의 동시대인들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마키아벨리도 그의 성격과 품성에는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M.E. Mallett 글

 

"보르자"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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