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광 ‘낙서문학사’ 자본과 문학의 불륜에 ‘풍자메스’



“시는 시화호처럼 썩었고, 소설은 폭격 맞은 산처럼 황폐해졌고, 수필은 문학이기를 포기했고, 희곡은 연극의 노예가 되었고, 평론은 출판사의 애인이 되었습니다.” 문학에 대한 파산 선고 같다. 이는 곧 출간될 김종광씨(35)의 새 소설집 ‘낙서문학사’(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낙서문학사 창시자편’에 나오는 말. 낙서문학라는 장르를 탄생시킨 ‘유사풀’이란 사람의 발언이다.

이어지는 단편 ‘낙서문학사 발흥자편’과 더불어 작가는 2015년쯤 소위 본격문학을 제치고 문학의 왕좌에 오를 낙서문학의 전사(前史)를 앞당겨 쓰고 있는 것이다. 두 편의 연작소설은 가상 풍자소설 형식으로 쓴 현 단계 문학사회학이라 할 만하다.

작가가 작금의 문학 현실에 대해 반어법과 신랄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대는 이유는 작가·재생산·수용을 둘러싼 모든 게 돈과 권력, 협잡과 공모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어느 판이나 그렇겠지만 문학판도 이전투구란 말요.”(‘낙서문학사 발흥자편’)

예컨대 유사풀은 25살에 요절을 택함으로써 스스로 신화화되고 낙서문학을 살려낸다. 기존 문단에 대한 환멸 또는 기존 문학사에 대한 전복의 의지로 가득찬 그는 등단·데뷔를 ‘자격증 획득’이라 비꼰다.

낙서문학사의 발흥자인 ‘성철호’는 “가난한 놈들의 전유물인 문학”의 현실 속에서 “거절할 수 없는 원고료” 때문에 낙서문학에 입문한다. 낙서문학 전문지는 사재기를 통해 잡지를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언론은 낙서문학을 ‘까는’ 방식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대신해준다. 작품 고유의 ‘그 무엇’보다 문학을 둘러싼 관리와 조작이 문학의 무게를 재는 저울로 기능한다는 비판으로 읽힌다.

소설 속의 영민한 낙서문학 창시자·발흥자는 그런 문학 제도를 역이용해서 신격화된다. “일제시대 작가들을 공부하면서 갖고 있던 심각한 의문 하나가 있었습니다. 작품들이 별로 안좋은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다들 유명하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수 있었을까. 왜 그런지 알겠더군요. 처음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시발자였기 때문에.”(‘낙서문학사 발흥자편’)

이를 두고 문학평론가 최혜실씨는 ‘해설’에서 “문학적 상상력만은 자본의 논리에 포섭되지 않아야 한다는 작가의 진중한 전언”이라고 적었다. 그의 ‘낙서문학사’ 연작은 적어도 낙서가 아닌 문학만큼은 미적 생산의 특수성, 근원적 자율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반어법의 작품이라는 풀이다.

작품의 메시지는 문학 현실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인 것 같다. 낙서문학이 장차 문학의 왕좌 자리를 차지해도 자본의 논리에 포섭된 사이비 문학에 불과하므로 모름지기 이 시대의 작가라면 더더욱 ‘소설적인 그 무엇’에 헌신해야 한다는 자기다짐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는 소설만 써서 먹고 사는 ‘프로 소설가’이자 ‘소설 전사(戰士)’이다.

그렇다면 각 작품들의 ‘발화중심의 다중서사 미학’은 문학사에 대한 그의 도전처럼 여겨진다. 수록작 대부분은 여러 관계자들의 ‘증언’ 형식을 빌려 중심인물의 일대기·행적·풍경의 단면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놓는다. 그 화자(話者)들의 수다는 중심인물의 전모를 재구성한다기보다 오히려 해체시키고 있다.

이에 대해 평론가 최씨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구성된 권력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면, 다양한 가치평가적 악센트를 통해 언어적 의사소통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것도, 전위를 통해 진정한 윤리를 꿈꾸는 자들의 몫이 아닐까”라고 밝혔다.

작품집은 ‘율려 탐방기’ ‘낭만 삼겹살’ ‘김씨네 푸닥거리 약사’ ‘단란주점 스타크래프트’ ‘절멸의 날’ ‘쇠북공기전 망징패조편’ ‘조싼은 헤맨다’로 이어지면서 ‘김종광 상표’의 발랄한 상상력과 걸쭉한 입담을 뽐낸다. ‘경찰서여 안녕’ ‘71년생 다인이’ ‘모내기 블루스’에 이은 그의 네번째 작품집으로 이야기의 힘, 웃음을 빚어내는 풍자가 여전하다.

〈김중식기자 uy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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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세기에 걸쳐 독일의 J.에크하르트와 그의 제자 J.타울러, H.조이제를 중심으로 하여 주창된 신비주의 사상.
본문

N.쿠사누스, J.뵈메를 거쳐 독일 낭만주의 사상의 조류와 합류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신플라톤파()에 뒤이은 신비주의 조류는 중세에도 단절되지 않았는데, 특히 독일에서는 도미니크수도회를 중심으로 12세기 무렵부터 신과의 신비적 합일()을 목표하는 신앙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지도자 속에서 위대한 설교자 에크하르트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는 영혼의 깊숙한 곳에 있는 성역(), 즉 ‘불꽃’에서 신과 하나가 되는 것을 설명하였다. 그의 신비사상은 타울러조이제 등에게 전수되었다.

14세기 말에는 독일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의 데밴터에서 J.로이스부르크. G.그로테 등에 의하여 수도원제도에 따르지 않는 공동생활 형제회가 설립되었다. 이 단체에 속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독일 신비주의가 낳은 대표적 작품이다. 이 단체는 또 ‘표현불능의 신’에 접근하려면 ‘무지의 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가르친 쿠사누스를 배출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도 내면적 신앙을 중시하는 독일 신비주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세속화에 불만을 느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연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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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
위치 유고슬라비아
면적 1만 3812㎢
인구 65만 8000명(2001)

면적은 1만 3812㎢, 인구는 65만 8000명(2001)이다. 수도는 티토그라드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남서부를 차지하며 아드리아해()에 면하고 알바니아와 국경을 접한다.

주민의 90%가 슬라브족의 세르비아계()에 속하는 츠르나고라인이며, 사용 언어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이다. 디나르알프스산맥의 남부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산지·고원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는 후진적인 지역에 속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업개발에 주력하여 공업생산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나, 아직 인구의 3/4이 농업(주로 목양)에 종사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땅이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농경은 일부 하천유역에서만 이루어진다. 새로 개발·건설된 산업으로는 수력발전, 납·아연 광업, 야금·식품가공·목재가공·담배제조 등의 공업이 있다. 12세기 후반까지는 남서부의 체타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독립된 체타 후국()이었으나, 뒤에 세르비아에 편입되었다.

1389년 세르비아가 투르크에 패한 뒤 투르크·알바니아 등의 지배에 저항하다가, 1516년 이후 그리스정교의 대주교를 통치자로 하는 봉건적 신정()를 세웠다. 러시아-투르크 전쟁러시아에 가담하여, 1878년 베를린회의에서 세르비아와 함께 독립국으로 승인되었다. 발칸전쟁 때는 세르비아와 협력하여 투르크와 싸우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세르비아를 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싸웠다.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뒤의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흡수되고, 1946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을 구성하는 6개 공화국의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1992년 1월 연방공화국 중 4개 공화국이 독립하자, 그해 4월 세르비아공화국과 함께 신()유고 연방을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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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부터 79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한 급진 공산주의 단체.

63년 폴포트가 좌익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75년 게릴라전을 통해 권력을 잡아 도시민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는 등 마오쩌둥 이론을 실험하면서 2백만명의 양민을 죽였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야만()과 살상()은 서방에서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전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79년 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캄보디아 공산동맹군에 의해 전복된 후 타이 국경 지대에 본거지를 두고 게릴라전을 전개하다 90년 베트남군이 철수하자 다시 주요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집권 세력과의 알력 끝에 92년 다시 정글로 돌아갔고 폴포트 사망 이후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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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잉글랜드 더비셔주()에 있는 도시.

위치 영국 잉글랜드 더비셔주()
면적 66㎢
인구 9만 8852명(2001)

면적은 66㎢, 인구는 9만 8852명(2001)이다. 히퍼강()과 로더강()이 만나는 곳에 있다. 1777년에 체스터필드에서 트렌트강()을 연결한 운하가 생기고, 1841년에 미들랜드철도가 건설되면서 공업화되기 시작하였다. 로더강() 근처에서 로마군대와 민간인 점령지의 범위를 확증할 수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로마시대의 도로인 라이크넬드로()의 명칭이 로마시대 이전부터 사용되어오던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기관차 제작자 겸 철도기관사인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은 이곳에 매장된 철광석과 석탄을 이용하면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했다. 1900년 이후에 철도회사 세 군데에서 이곳에 기차역을 설치하였다. 현재 산업의 중심지로 채광장비·금속제품·유리제품·도자기 등을 주로 생산한다. 14세기에 건설된 성모 마리아와 모든 성인들에게 봉헌한 교회에는 높이가 69m인 납을 입힌 나무 첨탑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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