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자고로... 읽을 때, 생각이 떠오를 때 바로바로 정리해 두는 게 좋다. 나도 아는데. 그대로 잘 안되고. 새로운 책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오고, 작은 생각 덩어리는 어제의 눈송이처럼 여기저기 떠돌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어제의 눈송이는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파묻힌 여성><세계 그 자체> 페이퍼는 그대로 남겨져.

 

 

무성애를 정면으로 다룬 이 책을 읽다가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내 로맨스 소설 인생의 시작점인 <The Love Hypothesis> (<사랑의 가설>)을 떠올렸는데, 상황은 이랬다.

 


애덤과 올리브는 장소, 시간, 감정의 3박자가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특정한 시점에 도달했다. 진한 키스 후 섹스 직전의 상황인데, 자꾸 머뭇거리는 올리브의 기색을 눈치채고 애덤이 말한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사귀는 사이 아니어서 섹스가 좀 그렇다면, 안 해도 돼. 이런 당연한멘트를 날리는 남자가 신사라고 대접받는 사회. 애덤은 신사다. 올리브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데, 그 대사가 참 길고 자세하고 구체적이다. 나한테는 성적 끌림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다. 근데 나는 널 정말 좋아하고, 또 너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너랑.... (이하 생략)

 

그렇다면 성적 '끌림은 특정인을 향한 혹은 특정인에 의해 유발된 꼴림이다. 그 파트너와 성적으로 엮이고 싶은 욕망이다. 표적이 있는 리비도. 음식에 비유하면 이렇다. 사람은 허기를 느끼면서도 먹고 싶은 특정한 음식이 없을 수 있다. 생리적 허기가 성적 충동과 비슷하고, 성적 끌림이 특정요리를 향한 갈망과 가깝다. 사람마다 성적 충동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하는 성적 끌림의 정도도 다르다. (44)

 


경험하는 성적 끌림의 정도는 다르다. 당연히 어떤 대상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냐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테고.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건 왜 모든 사람이 성적 끌림을 느낄 거라고 생각하는냐는 것이다. 당연히 떠오르는 필립 로스. 남녀 사이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섹스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말을 통해 그렇게 말하는 필립 로스를 5초간 생각한다. 저자는 이를 이렇게 비판한다.


 

강제적 섹슈얼리티의 연장인 섹스 신화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빤하다섹스는 어디에나 있고, 노래 가사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지나 립스틱이 발린 채 햄버거를 먹는 여자들의 입과 그 목을 타고 흐르는 육즙을 클로즈업한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거기에 푹 절어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섹스가 더 특별하고 더 중요하며,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보다도 더 강력한 짜릿함과 완벽한 쾌락을 선사한다는 믿음이다. 섹스하지 않는 건 쾌락도, 혹은 쾌락을 즐길 능력도 없다는 뜻이다. (71)

 


그럴까. 섹스는 정말 인간의 어떤 행위보다도 더 강렬한 짜릿함과 완벽한 쾌락을 주는 행위일까. 그 쾌락의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일까. 인간이 누리는 쾌락의 속성상, 동일한 상대와의 동일한 행위가 쾌락의 강도를 보장해 주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면 그건 모르는 상대와의 미지의 경험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이 평생 가장 우선시되고 추구되어야만 하는 중요하고 소중한 가치일까.

 




내가 이해하는 한에서 성적 끌림은 육체적 이유로 특정인과 섹스하고 싶다는 욕망이다. 성적 끌림은 순간적이고,내 뜻과 무관할 수 있다. 의식의 고양, 신체의 각성에 정신의 바람이 합쳐진 것이다. 내 유성애자 친구들은 방금 만난 사람에게, 같이 있어도 즐겁지 않은 사람에게, 좋아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멋지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적 끌림을 느낀다고 한다. - P42

‘강제적 섹슈얼리티’라는 말이 친숙하게 들리는 건 시인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의 강제적 이성애compulsory het-erosexuality 개념을 빌린 말이기 때문이다. 리치는 1980년 에세이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al-ity and Lesbian Existence」에서 이성애란 그저 어쩌다 대다수의 지향이 된 성적 지향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성애는 학습되고 조건화되고 강화된 정치적 제도다. - P68

성 정치학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 페미니즘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활동가 캐서린 매키넌Catha-rine MacKinnon과 앤드리아 드워킨Andrea Dworkin이 훗날 성 부정 페미니즘으로 알려질 운동을 이끌었다. 이성애 섹스는 불균형한 권력 역학 안에서 이루어지며 그렇지 않을 때가 없기에 섹스에 대해 진정한 동의를 이루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 기본 논지다. 이들의 구조 분석은 가부장제 아래의 섹스란 어쩔 수 없이 손상되며 자유롭지 않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런 전통에서 등장한 활동 단체는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 성 노동에 반대했고 이 모두를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고 상처 입히는 착취의 방식으로 봤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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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1-29 11: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사랑의 가설에서 올리브가 그랬죠.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가 이 페이퍼 읽으면서, 아 맞아 그랬지! 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게 뭐든, 책을 읽는 것은 어떻게든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로맨스 소설을 비하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그들이 그 책으로부터 가져가는 게 없어서라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 어떤 책이든 그 안에서 뭔가 건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어도 가져올 게 있지요. <에이스> 읽으며 <사랑의 가설> 가져오는 단발님, 진짜 이 세상 멋짐이 아니네요. 제가 감탄합니다. 그런데,

저는 왜 에이스 읽기 싫죠? 손이 안가네요. 동물성애처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ㅠㅠ

잠자냥 2023-11-29 12:32   좋아요 3 | URL
그런데 왜 샀죠?

단발머리 2023-11-29 13:20   좋아요 3 | URL
다락방님 / 어떤 책이든 그 안에서 뭔가 건질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어도 가져올 게 있지요.

라는 다락방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버섯 책이 그랬고, 코스모스가 그랬죠!! 특히 저는 소설이 ‘쉽게 읽히는‘ 그 ‘용이함‘ 너머에 가르치고 전달하는 많은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소설이 최고에요!!

에이스 쉽게 쭉쭉 읽힙니다. 섹스의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깨우침이.... 찬찬히 이어집니다. 저는 반 정도 읽었어요.

잠자냥님 / 곧 읽으실 예정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곧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1-29 13:51   좋아요 2 | URL
그런데 왜 샀죠? ㅋㅋㅋㅋ

다락방 2023-11-29 14:46   좋아요 3 | URL
아니 얘들아, 있어봐. 읽을 거야. 읽을 거라고.. 읽기 싫을 뿐이야. 읽긴 읽을 거라고..

잠자냥 2023-11-29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나는 너랑.... (이하 생략)˝

좀 궁금하네요. ㅋㅋㅋ

단발머리 2023-11-29 12:34   좋아요 1 | URL
잠자냥님이니까 특별히 알려드리는 거에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마요.

˝그래서 나는 너랑... 하고 싶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29 12:35   좋아요 1 | URL
아.........

단발머리 2023-11-29 12:40   좋아요 0 | URL
앗?!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3-11-29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님도 <에이스> 읽고 계시군요! 저도 다락방님과 비슷한 이유로 별로 안 끌리는 책인데..(저도 단연코 유성애자라 ㅋㅋ) 읽어야하나.. 다들 잘 정리해주시니 안 읽어도 되나... 그러고 있네요 ㅎㅎ

잠자냥 2023-11-29 14:23   좋아요 4 | URL
지독한 유성애자 다락방
단연코 유성애자 독서괭
아이코 반성애자 잠자냥
완전한 무성애자 은바오

다락방 2023-11-29 14:47   좋아요 2 | URL
독서괭 님, 사랑해요 ♡

독서괭 2023-11-29 15:00   좋아요 1 | URL
아잉♥️ 우린 또 지독한, 단연코 이성애자 ㅋㅋㅋ

햇살과함께 2023-11-29 15:56   좋아요 0 | URL
전 유성에서 무성으로 변태 중이라.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단발머리 2023-12-02 08:54   좋아요 0 | URL
독서괭님 / 저도 물론 그랬는데요. (어디에서 그랬는지는 안 밝힘 ㅋㅋㅋㅋㅋ) 이걸 소수자 문제로 읽을수도 있잖아요. 제게도 겹치고 생각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곧 페이퍼로 돌아올게요. (제가 정말 쓰지도 않고 쓰겠다 공언한 페이퍼가 벌써 몇 개인가요... 한숨.... )

잠자냥님 / 이 깔끔한 정리에 박수를 보냅니다. 누가 제일 느긋한가 ㅋㅋㅋㅋㅋㅋ 전 그게 궁금하네요.

다락방님 / 두 분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햇살과함께님 /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현재는 아니지만 그 쪽으로 조금씩 가고 있는듯하고요. 햇살과함께님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거에요. 저는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수이 2023-12-01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향이 나오네요 으흠, 흥미로운. 저도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가부장제를 벗어나서 섹스를 해야 하는데 남성이랑 하는 이성애 섹스는 모두 가부장제 안으로 포괄되는 거죠?

단발머리 2023-12-02 08:51   좋아요 1 | URL
남성이랑 하는 이성애 섹스가 가부장제 안으로 포괄되는 게 맞을 수도 아닐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이런 방식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섹스를 안 하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게 바로 그런 거지요. 섹스 없는 세상.... 생각보다 훨씬 진지하고 재미있습니다.

수이 2023-12-02 09:47   좋아요 2 | URL
난 시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2-03 16:14   좋아요 0 | URL
수이님의 ‘시러‘를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푸핫!!

얄라알라 2023-12-0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단에서 격하게 공감하다가....마치 신문기사인양 제 3자인양 느껴지게 표현하신데서 푸흐흣^^ 웃고갑니다.

글자체는 정갈한 신사임당체, 글은 ^^ <사랑의가설>부터 전 읽어야겠는데요~~에이스는 그 후!

단발머리 2023-12-05 15:49   좋아요 1 | URL
사랑의 가설을 읽고 나시면 에이스가 좀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을거 같아요.
얄라알라님의 뜨거운(?) 리뷰 기대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소고기미역국을 끓였고 점심 식사 후 우리 여전도회가 식사 당번이라 설거지를 실컷, 맘껏, 양껏 해치웠다. 오후 예배 반주자가 기도 순서를 맡아서 그 자리를 땜빵해주고 부모님 모시고 동네 깐풍기 맛집에 다녀왔다. 집에 돌아와 또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재활용을 하고 와서.


자리에 앉았다.


10분 내로 취침해야 정상인데 책이 재미있어서 아직 쌩쌩하다. 바로 이 책이다.









견디다 못한 헨리는 끝내 가을에 나와 헤어졌고 그건 마땅한 일이었다. 헨리는 떠났지만, 나는 우리가 개방 연애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놓고 나눴던 끝없는 대화를 이해하려고 계속 골몰했다. 남자에게는 언제나 딴 길로 새려는 마음이있고 그게 자연스러운 거라던, 일대일 관계에 목을 매는 건 구식이고 내가 진짜로 노력하면, 정말 조금만 더 노력하면 그 욕망을 누를 수 있으리라던 헨리의 말. - P28

‘무성애’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지 10년 만에 나는 전에 뭘 잘못 이해했는지를 알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 주제로 돌아갔다. 성적 끌림과 성적 행동이 같지 않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를 꼭 제한하지는 않는다는 건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성적 행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으나 성적끌림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동성애자 남성이나 이성애자 여성이 여성과 섹스해도 끌림의 상대는 그대로 남성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무성애는 성적 끌림이 없는 것, 비성관계*는 성적 행동이 없는 것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 P31

중요한 문제다. 언어는 권력의 한 형태이므로. 언어는 세계를 해석하기 위한 범주를 만들며, 언어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개념은 사고 과정 자체에서 흔히 간과된다. 언어가 없으면 경험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지지만 어휘가 공유되면 개념에 접근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분리가 가능해진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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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11-26 2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제가 에이스인지 분석 좀 해주세요.

공쟝쟝 2023-11-27 16:20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어제 댓글에 깜빡했는 데요. 저기 과자 에이스 있잖아요. 그거. 말입니다? 단발머리님이 알아봐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제가 방금 눈치챘거든요? 혹시 사진찍으면서 기도하셨나요? 카를로 로벨리 신작이 알림이 왔습니다..... 아직 시간이 흐르지 않음을 해명하지 못하였으며.. 보이는 세상이 실재가 아님도 다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하.. 책임져롸....

단발머리 2023-11-27 21:07   좋아요 0 | URL
그건 제가 이 책 좀 읽고 분석을 할지 말지 생각해 볼게요.
카를로 로벨리 신작 보았습니다. 아, 바빠.... <세계그잡채> 리뷰 쓰고 나서 읽어야하는데, 쩝....

수이 2023-11-27 09: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벌써 시작하셨군요!

단발머리 2023-11-27 21:08   좋아요 1 | URL
네네네! 그렇습니다! 무성애 세계가 이렇게 재미있다니요! 1독을 권합니다 ㅋㅋㅋㅋㅋ
 


 













큰아이는 기숙사에서 3, 집에서 4일을 잔다. 멀기도 하고 오가는 길이 고생스러운데도 클릭 작전을 통해 그렇게 시간표를 짰다. 집이 그렇게 좋냐, 아무리 놀려도 1년이 한결같다.

 


자다가 눈을 번쩍 뜨니 사방이 캄캄하다. , 그대로 잠들었나? 몇 시에 쓰러진 것이냐. 그러니까 어제저녁 퇴근 1 (직장)과 퇴근 2 (빨래 돌려놓고 저녁 먹고 치우기)를 마친 후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앉아있으니, 다리가 자꾸 부어서 이런 자세로 앉아 책을 읽었다.

 

 




아.... 정확히 이렇게는 아니고 이런 자세를 추구하면서... 바닥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마음의 미래>에서 기억나는 문구는 단연 실리콘 의식인데, 컴퓨터 의식에 관련된 글이니 얼마나 흥미롭겠나. 그러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운동하며 책을 읽겠다던 나는 10분도 못 되어 고개를 떨구고 말았으니. 방으로 들어가라는 남편의 성화에 꿋꿋하게 버텨 보았지만, 큰애의 다정한 안내에 이끌려 (안방) 입실 취침 - 새벽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차게 회전하는 허리케인을 이해할 때는 개별적 공기 분자의 관점이 아니라 수 세제곱킬로미터에 걸쳐 있는 공기 덩어리의 관점을 취한다. 이런 식으로 더 큰 척도에서 현상을 구별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어느 물리학자에게나 당연한 절차다. 이러한 현상을 '창발emergence'이라고 부른다. 미시적 요소를 지배하는 단순한 기본 법칙으로부터 거시적 척도의 복잡한 과정이 생겨날 수 있다는 뜻이다. (152-3)

 

원래 아침에는 책 안 읽는데. 책 안 읽고 핸드폰 보는데 오늘 아침에는 어제 너무 일찍 잠들어서 책을 읽었다. 153, 여기까지 읽었다. 창발. . . 이러면서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밥이 어중간해 쌀을 씻는다. 냄비에 물을 받아 자연한알을 두 알 넣고 물을 끓인다. 아침마다 새 밥, 새 국을 해주셨다는 친구 엄마를 생각한다. 자식이 넷, 부부 두 사람에 시아버지 내외분, 객식구 플러스 마이너스 2명이면, 최대 10명의 식사를 매일 준비하는 그런 아침에 대해 생각한다. 작은 식당이라고 할 수 있겠구먼. 냉장고를 열어 외삼촌 김치를 꺼낸다. 작은외삼촌(외숙모 아님, 외삼촌임)이 막내 이모 드시라고 만들어 보내주신 김치를 이모가 엄마 드리고, 엄마가 내게도 조금 나눠주셔서 우리 집에 도착한 외삼촌 김치를 한 접시 내어놓는다. 우리 집은 원래 된장국에 호박을 안 넣고, 감자는 지금 없다. 양파 넣어야 하는데 껍질 벗길 시간이 없다. 대파를 꺼내 껍질을 벗기고 가위로 쓱쓱 자른다. 한살림 유부를 역시 가위로 잘라 넣고, 뚜껑을 닫는다. 어젯밤에 나 잘 때, 샌드위치를 맛나게 먹었다는 둘째는 배가 부를 테니, 밥을 안 먹을 것 같지만, 그래도 아침엔 밥이지. 밥통의 밥을 꺼내 유부초밥을 만든다. 다른 야채 없이 그냥 포장에 들어있는 대로 만드는 거지만, 아무튼 유부초밥을 만들어 접시에 올려둔다. 반찬 가게에서 사 온 돈까스를 잘라 전자레인지에 45초 데운다. 식구들을 깨운다.

 

 


나는 과학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그 오만함이 잘못된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자주,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좀 더 정교하게 나만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은 두괄식이다. 핵심 주장이 첫 번째 페이지에 나온다.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기계가 아니고, 우리 머리 밖에는 수학이 존재하지 않고, 실재하는 세계는 시뮬레이션이 아니고, 컴퓨터는 생각하지 못하고, 의식은 환각이 아니고,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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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4 12: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아침에 출근 전에 유부초밥 된장국 돈까스를 한다고요?! *놀랄만두*
저는 냥이들 간식만 좀 챙겨주고 물 갈아주고 나오는 것도 벅찬데 ㅋㅋㅋㅋ

판다곰에 좀 흠칫하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3-11-24 15:53   좋아요 3 | URL
돈까스는 데운거니까요. (접시에 담고 자르기는 했네요. 생색내는 중 ㅋㅋㅋㅋ)
근데 잠자냥님도 아침에 솔찬히 바쁘시네요. 하긴 딸린 냥들이 6마리나 되다보니....

그거 아세요? 요즘 알라딘에 판다 유행이래요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4 1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침상에 유부를 올리면서 만두를 빼다닛!!!

단발머리 2023-11-24 15:54   좋아요 0 | URL
만두를 찌거나 튀길 팬이 ㅋㅋㅋㅋㅋㅋㅋㅋ 팬이 없었습니다, 오늘 아침에요 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3-11-24 12: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은 된장국에 양파 안 넣고 호박은 머스트 아이템. ㅋㅋㅋ 집마다 달라서 재밌다! 요 며칠은 뭇국 큰 통으로 끓여놔서 든든하구요.

단발머리 2023-11-24 15:55   좋아요 0 | URL
아.. 호박을 꼭 넣으신다니.... 호박은 금방 무르고 상해서 금방 요리해야지요.
역시 달인의 기운을 느낍니다.
뭇국 맛있게 끓이는 비법 있나요? 우리집 뭇국은 왜케 아무 맛도 안 나고 그러죠?
열 번 끓여서 열 번 실패합니다 ㅠㅠ

hnine 2023-11-24 22: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학은 죄가 없어요.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이용하는 인간이 문제라면 모를까 ㅠㅠ
저자는 왜 저 사실을 ‘비밀‘이라고 했을까요? 궁금해요.

창발...어려운 개념이네요. 아주 모르지도 않고 어렴풋하게 이해는 되지만 그게 더 위험한 단계라서요. 안다고 착각하기 쉬운.


단발머리 2023-11-24 15:58   좋아요 0 | URL
비밀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읽으라는... 그런 뜻으로 전 받아들였어요 ㅋㅋㅋㅋ

저도 창발이라는 개념이 신기하기는 했는데 알듯 모를듯 그런 마음이 아직까지는 강합니다 .제가 함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독서괭 2023-11-24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된장국에 돈까스가 있는데 밥까지 유부초밥으로 만드는 정성이라닛!? 저희집은 아침에는 누룽지-계란밥-사골국(녹여 데우기만 하면 됨)으로 연명중입니다만..
쿵푸판다 ㅋㅋㅋㅋㅋ 저 자세로 책을 읽는데도 졸리다면 그냥 자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ㅋㅋㅋ

단발머리 2023-11-24 16:00   좋아요 2 | URL
오늘 페이퍼 쓰기 정말 잘했어요. 다른 때는 그냥 컵스프에 냉장고에서 뭐 간단히 꺼내주고 그러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은 된장국에 유부초밥 만들었다는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님 계란밥 맛있을거 같아요. 원래 어린이들이 입맛이 예민해서 맛 없으면 안 먹거든요.

공쟝쟝 2023-11-24 17: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사과에 땅콩잼을 찍어먹었어요. (최화정언니 레시피인데 맛도리입니다 ㅋㅋㅋ) 거기에 삶은 달걀 하나랑 아메리카노랑! ㅋㅋㅋㅋ
내가 제일 먼저 샀는데 세계그잡채….ㅠㅠ (요즘 아침에 감정의 문화정치 한페이지씩 씹어먹는 중인 사람)

단발머리 2023-11-24 18:03   좋아요 1 | URL
정말 좋아요! 집에 사과도 땅콩잼도 있다는 소식입니다. 🍎🥜 당장 먹어볼게요!
그리고... 걱정말아요, 그대... 194쪽까지 읽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소식입니다😳😳😳

자목련 2023-11-27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모든 게 아침에 가능하다니. 단발머리 님은 팔이 몇 개일까요, 로봇 팔은 아닐까 의심스러운...

단발머리 2023-11-27 21:11   좋아요 0 | URL
아이구, 부끄럽네요. 제가 전날 워낙 일찍 잠들어서 그날 아침에 에너지가 만땅이었어요. 저는 인간팔을 가진 인간으로서 ㅋㅋㅋㅋㅋㅋ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기 위한 노력은, 쉼이 없다.




















선사학은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신생 학문이다. 해당 분야 최초의 교과서에서 설명된 남녀의 역할은 실제 선사시대의 상황을 반영하기보다는 19세기의 시대적 상황과 더 관련있어 보인다. 당시는 의학 이론과 종교 경전이 한창 서로 결합하던 시기였다. 그리해서 이제 여성은 ‘신의 뜻ordre de dieu‘으로 뿐 아니라 ‘본질nature‘적으로도 열등한 존재라고 시달리게 되었다. - P13

1950년대에 제시되었던 ‘남성사냥꾼homme chasseur‘ 모델에 따르면, 집단에 먹을거리를 가져다주고 혁신적인 기술을 고안해낸 것은 남성이었다. 남성이 인류의 진화와 인간화humanisation * 에 중요한 촉매제가 되었을것이라는 이론이다. - P15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다. 그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가려는 것일까? 양성의 관계가 지배를 기반으로 하는, 강간, 납치, 잔혹함이 규칙이던 먼 옛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야만성이 선사사회의 중심이 된다는 이러한 시각은 지금까지도 우리의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 P25

초기 선사학자들이 접근했던 방식과 여기에서 파생된 선사시대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는 두 가지 편견과 연결되어있다. 첫 번째 편견은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이고, 두 번째 편견은 인류 역사가 단일한 경로를 따라 진화하고 발달했다는 생각이다. - P26

‘프랑스 민족학의 아버지‘ 마르셀 모스(1872~1950)는, 이른바 ‘원시적‘ 사회에서 선물 교환 시스템은 영속적인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주고 대립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는 연구자들은 구석기시대 여성의 교환으로 집단 간의 결합이 다져지고 넓은 지역에 흩어져서 살고 있던 소규모 집단이 생존을 위해필요한 동맹을 형성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주장한다. - P34

클로드레비스트로스(1908~2009)가 여성의 교환을 ‘긍정적인 거래‘라고 불렀다면, 프랑수아즈 에리티에는 남성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고 여성의 가치가 낮게 평가된 것으로 본다. "지구상의 여러 곳에서, 성격이 서로 다른 집단이, 남성이 여성을 교환한다. 이 때문에 나는 인류의 시작부터, 그리고 구석기시대가 시작했을 때부터 성에 따른 차별적 가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35

주요 종교의 기본 경전 전체를 놓고 봐도 여성은 항상 열등하게 다뤄졌으며, 결코 주체가 된 적이 없다. 구약성서‘와신약성서의 구절은 마치 남자들이 남자들을 위해 쓴 것처럼, 남자들에게만 말을 건넨다. 특히 바울의 글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서 다시 평가되어야 하겠지만, 이 구절들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여성의종속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했다. 여성에게 부여된 이 열등한 지위는 남자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신앙의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 P42

중세연구가 자크 르 고프(1924~ 2014)가 보고한 것처럼, 13세기의 기독교 사회는 유대인 남성은 생리를 한다면서 여성화를 시켜버렸다. 이것은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가지고 있던 이른바 부정한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는 여자의 성을 억압함으로써 많은 가부장적 사회를 견고하게 하는 역할을 했는데, 남자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은 매춘부로 여겨지곤 했다. - P71

의사이자 사회심리학자였던 르 봉은 "우월한 인종"에 속하더라도, 여성의 뇌는 "더 발달한 남자의 뇌보다 고릴라의 뇌 크기에 가깝다"고 했다. 이러한 열등함은 워낙 명백해서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기껏해야 토론의 주제가 될 정도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자들을 교육해봤자 소용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 P90

그러다가 구석기시대가 끝나갈 무렵부터 던지는 종류의 무기는 남성만 사용하도록 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 P168

《제2의 성》(1949)의 <역사>에서 보부아르는 고고학 자료를 전혀 참고하지 않고 생물학적 결정주의에 함몰되어, 농업 이전의 선사시대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이들의 ‘본성 nature‘ 때문에 소외되었다고 기술했다. 여성이 출산과 아이 양육 때문에 지식과 전문 기술을 만들어내는 데 적합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역할을 과소평가하고 남성의 역할이 가치 있다고 했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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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11-23 20: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좀 쉬어라!!

단발머리 2023-11-24 08:41   좋아요 1 | URL
모든 분야의 남자들이 이 일에 열성적일 때, 그 때 (이미 알고는 있지만) 더 좌절되기는 해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법, 종교, 과학, 연예, 스포츠..... 아닌데가 없는 듯.
좀....... 쉬어라, 쫌!

잠자냥 2023-11-24 13: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곰탱이왈

얄라알라 2023-12-04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an the hunter를 요렇게 불어로 써 놓으니, 갑자기 남자 운전수란 단어가 떠올랐어요^^:;; 맥락도 없이

homme chasseur

인용된 학자들을 보니, 저 책을 함께 읽으려 시도 안했음이 급 후회됩니다!

단발머리 2023-12-05 15:50   좋아요 1 | URL
저 남자 운전수 이렇게 쓰는 거 오늘 처음 봤어요! 얄라알라님, 불어가 가능하신 분이군요!!!
멋짐 폭발입니다!! @@

얄라알라 2023-12-07 0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아니옵니다!!! 불어를 눈으로만 공부했더니, 지우개로 지우듯 싸악 지워져서 제가 불어책을 읽었던 적이 꿈인가 싶을 정도입니다. 고고학에서 ˝man the hunter˝를 하도 많이 듣다보니 불어로 표기해 놓은 게 신기하다는 뜼이었어요^^; 남성 운전수 단어를 저도 모릅니다. 단발머리님께 혼란을 드려 죄송해진 마음^^;;

단발머리 2023-12-08 15:34   좋아요 1 | URL
혼란스러웠던 건 저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는 그런 혼란을 좋아하구요.
눈으로만 공부했다해도 공부한 언어가 불어라는 건 참 근사한 일이에요. 불어를 사랑하는 단발머리입니다!!
 
감사라아메드😘


 











 

 

지난 콘서트 무비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난밤(토요일)의 공연은 '싱어롱' 컨셉이라 걱정이 많았다. 나는 테일러 노래 4-5개 밖에 모르는데. 그것도 가사 없으면 부르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위치에 오른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내가 말했다. 지난번에 다녀와서 글 쓰려고 했는데 못 썼어. 제목은 정했는데. <테일러는 되고, 힐러리는 안 되고>. 같이 가는 사람, 테일러 하얀 가디건에 테일러 빨간 목도리를 두른 사람, 싱어롱 표를 예매해 준 사람, 일본 공연 예매에 실패해 안타까운 마음을 영화관 가는 것으로 간신히 달래고 있는 테일러 왕팬이 답했다. 스위프트니까 가능한 거고, 클린턴이어서 안 된 거예요. 그래? 힐러리는 클린턴이잖아요. 테일러는 스위프트고. 힐러리 결혼 전 성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나는 아는데, 힐러리 결혼 전 성은 로뎀이야. 띠리링. 대화가 종료되었습니다.

 

 



스위프트가 올해 3월부터 미국 20여개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 중인 이 콘서트는 현재까지 300만여 관객을 동원하며 1조 원이 넘는 티켓 수입을 올렸다.

 

콘서트가 인기를 끌며 공연을 여는 지역마다 식당과 호텔 수요가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자 테일러노믹스(Taylornomics)’라는 신조어가 탄생하기도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에 미국 경제 들썩콘서트 실황 역대 최대 수입, 문화일보, 2023-09-02>

 


테일러노믹스, 스위프트노믹스는 예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미소지니(mysogyny)를 근간으로 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특별히 여성의 성 상품화가 당연시되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여성이 이만큼 성공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하얀 피부에 파란 눈, 금발, 큰 키, 모델 같은 몸매를 갖추고 있지만 동시에 가수이면서 과하게 춤을 못 추고, 섹시함에 목매달지 않아 오히려 부모들이 더 좋아한다는 단정한 옷차림의 그녀. 이 여성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테일러 왕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테일러가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그리고 아이 없는 미혼 여성이라는 점이 그녀의 성공 비결 어쩌면 모두 다 알고 있는 성공 비밀일 수 있겠다.

 


내가 좋아하는 곡은 <Blank Space><No Body No Crime>, <Lover> 등인데 이번에 꽂힌 곡은 <The Man>이다. 다른 분 블로그에 있는 가사와 해석 일부를 빌려온다.

 

<The Man>

 

They'd say I hustled, put in the work

다들 내가 노력파라고, 일을 열심히 한다며 떠받들었겠지

 

They wouldn't shake their heads and question

아무도 비난하지도, 의구심을 품지도 않았을 텐데

 

How much of this I deserve

내가 얻어낸 이 지위와 대우에 대해서 말이야

 

What I was wearing, if I was rude

내가 뭘 입든, 성격이 개같든

 

Could all be separated

모두 별개로 취급될 수 있었을 텐데

 

From my good ideas and power moves

내 좋은 아이디어들과 영향력 등과는 말이지

 

I'm so sick of running as fast as I can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건 지긋지긋해

 

Wondering if I'd get there quicker if I was a man

내가 남자였다면, 더 쉽고 빠르게 이 지위를 얻었을까 궁금해하곤 해

 

And I'm so sick of them coming at me again

또 매일 빠짐없이 나한테 뭐라고 하는 것들도 지긋지긋해

 

'Cause if I was a man, then I'd be the man

내가 남자였다면, 난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I'd be the man

그런 사람이었을 거야

 

I'd be the man

그런 사람이었을 거라고

 

[출처] [가사해석] 테일러 스위프트가 남자였다면? ‘The Man’|작성자 Onika Swift

 

 

연예인 혹은 셀럽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들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폭력이 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관심, 언론의 주목이 인기의 동력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세간의 다양한 평판이 성에 따라 확연히 구별된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가 될 텐데, 많은 여성과의 염문설이 또 하나의 커리어로 인정되는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과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이미지 추락을 각오해야만 한다. 여성의 성취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평가절하된다. ‘실력으로 승부하라는 말이 정당한 듯 들리는 세상에서, 재능 있는 여성이 각고의 노력으로 남성들이 이룬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을 때조차 여성의 노력과 재능은 폄하되기 일쑤다. 페미니즘을 알기 전에 내가 식상하다고 생각했던 표현 그대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다. 예술을 다루는 분야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은 길을 걷다가 갑자기 떠오르는 작은 조각들을 단순히 모으는 일이 아니다. 만들고 고치고 다듬고 다시 고치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다. 자신의 시도를 확인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것이 어떻게 확정되는지 살피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출산과 육아와 나누어 쓴다고?

 


나는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그녀가 결혼했는지를 검색했다. 나는 궁금했다.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나는 그게 궁금했다. 아이 다섯을 키우며 소설가로서 자신의 세상을 완성한 박완선 선생님 같은 분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분은 천상계다. 보통의 여성, 보통의 인간들이 따라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소설가 한강도 그 일을 해냈구나. 밥을 짓고,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청소기를 돌리고... 그 후에, 그 남은 시간에...

 

 


최근 알라딘의 이웃님 서재에서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아니라 진지한 패대기사건이 있었다.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5058265) 한나 아렌트를 많이 읽지 않아도 안다. 그녀가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라고 말하고 있음을 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그렇게 말했던 유대인 아렌트는 어떤 사람인가. 잠시였지만 시온주의자들과 협력했고, 급박한 유럽의 환경 변화 속에서 지하조직에서 유대계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일했던 사람이다. 그 일로 인해 집중 조사를 받았고 자신만의 기지로 스스로 그 위기에서 걸어 나온 사람이다. 그가, 그랬던 그가,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야 합니다.

 


여성만이 그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가부장제 5천년 미소지니의 역사 속에서 온갖 특혜를 누리고 살아왔던 인간 종이라면, 그에 대한 적정한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갑자기 생각나서 정희진의 오디오 매거진 인생은 상실, <너와 나>’의 조현철 감독 부분을 발췌해본다.

 

정희진() : ... 그건 감독님의 매력인 거 같아요.

조현철() : 저는 친구들한테 항상 그러거든요. 올려 치지 말라고. 특히나 남자들은 올려 치지 말라고. 흐흐.

: 그게 뭔 말이에요? 무슨 뜻이에요, 그게?

: 올려 친다는 거죠.

: 비행기 태운다고요?

: 네네, 그런. 특히나 남성들은 너무 오냐오냐 자랐기 때문에.

: 으하하하하. 하하하. 저는 저대로 굉장히 제 노선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말은 또, 못 합니다. 나름 까다로워요.

: 네네. .

: 저는 올려 친다는게 때린다는 건 줄 알았어요. 이렇게 젠더 방언이 있다니... 그런 이야기를 친구들한테 많이 전파해 주세요.

: , 친구들은 익히 알고 있어서.

: 감독님 주변의 남성분들은, 훌륭하다고 믿어도 될까요?

: .... 일단 그런 근본적인 의문이 드는데, 과연... 남성이 훌륭할 수 있을까 생각...

: 흐흐....

: 그냥 조용히 자신을 좀, 죽이면서 살아야 그나마, 훌륭한 남성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 남성들의 가장 큰 문제는 나대는 거잖아요.

: 네네네, 그렇죠. 그게 다 올려 쳐서 버릇이 그렇게 잘못 든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는 테일러로 하자. 지하철 쩍벌남 잘생긴 그 남자가 바로 테일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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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1-22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잉 테일러 스위프트 성공 비결! 저만 몰랐군요! 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11-22 13:32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 비밀 알았으니 실천하면 되는데 말이죠. 전 늦은거 같아요. 쪼금 아니고 많이 늦었음요 ㅋ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3-11-22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글에 무슨 일이 있었다가 지워진 거였나보네요.. 전 늦게 봤더니 뭔지 잘 몰랐는데
어쨌든 공쟝쟝님이 문제를 제기하고 단발머리님은 친절하게 풀어주시고. 참 좋습니다.

테일러의 성공 비결.. 저도 잘 몰랐는데 애초에 그 영역은 그들이 내어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

그나저나 한강 작가가 결혼은 그렇다치고... 자녀가 있는 지는 몰랐네요. 조금 놀랍습니다.

단발머리 2023-11-22 13:42   좋아요 2 | URL
참 좋은 알라딘 세상 ㅎㅎㅎ

전 뭐랄까… 테일러가 남자였다면 덜 노력하고 더 성공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위의 가사처럼요.

참… 한강 작가님 남편분은 알려진 분이지만 자녀는 미공개라고 나오더라구요. 전 자녀가 둘일거라고 추측했습니다. 자녀 비공개… 이렇게 나와서요 ㅎㅎ

햇살과함께 2023-11-22 23:21   좋아요 2 | URL
오 전 한강 작가님 당연히 결혼했을거라 생각했어요! 그러니 채식주의자 같은 소설이 나오는 거 아닐까…

건수하 2023-11-23 06:00   좋아요 2 | URL
햇살님/ 오 그러고보니…. 그렇네요? 그래서 자녀 부분에 더 놀랐나봅니다 ^^;

건수하 2023-11-23 06:02   좋아요 2 | URL
/ 단발머리님

테일러가 남자였다면 뭐.. 그렇겠죠. 그렇지만 지금처럼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 지도요 :)

단발머리 2023-11-23 09:24   좋아요 3 | URL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테일러도 자신의 경험, 특히 부당했던 일들을 가사로 풀어냈거든요. 위의 노래도 그런 쪽으로 많이 풀이되곤 하던데요.
저도 생각해보니 테일러가 여자인 것이, 그 위치였던 것이 그녀를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준거 같아요.
저는 그런 거 싫어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아픈만큼 성숙해지고....

은오 2023-11-22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음 생엔 임영웅으로 태어난다!
아이유보단 임영웅이 낫겠어...

단발머리 2023-11-22 20:40   좋아요 2 | URL
어쩜 이렇게 핵심을 잘 짚어내는가. 내 말이 그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3-11-22 21:35   좋아요 3 | URL
반출생주의자가 뭘 또 태어나….

단발머리 2023-11-22 21:40   좋아요 1 | URL
😅😅😅🤪🤪🤪

건수하 2023-11-23 06:03   좋아요 2 | URL
전 그래도 임영웅보단 아이유 😼

단발머리 2023-11-23 09:25   좋아요 2 | URL
인생 살기는 임영웅이 엄청 편하겠죠.
근데 저도 아이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은오 2023-11-23 20:24   좋아요 2 | URL
핵심을 짚기 위한 댓글이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전 이재용의 삶도 싫어요! 한번이면 족하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