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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평점 :
대체 소설집의 제목을 '안녕 주정뱅이'라고 짓다니!
권여선 작가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단편집인데 그런 제목의 단편도 없다.
보통 표제작으로 하나를 골라서 그걸 제목으로 삼는데.
창비에서 2016년 5월에 출간된 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는
봄밤 / 삼인행 / 이모 / 카메라 / 역광 / 실내화 한켤레 / 층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주인공들이 술 마시는 장면이 대부분 나온다.
이 중에 <봄밤>은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대표 소설로 단독 출간되었고
<삼인행>은 제61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에,
<이모>는 제15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려 있다.
이 세 편은 읽어보았기에, 다른 네 편을 후다닥 읽었다.
권여선 작가 특유의 '약간 어긋나고 불행하지만 뭔가 웃음이 나는 상황' 묘사가 기막히다.
문장들은 유려하고 술에 대한 묘사들은 참 압권이다.
읽어보시라. 맨 마지막 작가의 말은 술꾼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당신이 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때까지, 꼭 한번 같이 마셔드리고 싶어졌다.
표지는 '봄밤'에 나오는 인물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화려한 보라빛 색박을 넣어 꽃과 알콜과 환자복의 분위기를 잘 살려냈다.
"죄송하지만," 이윽고 그가 말을 꺼냈다. "저와 함께 낮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선생님?" 그녀는 그가 우연히 날아들어온 새 때문에 빚어진 자신과의 인연을 다시는 못 볼 찰나의 스침으로 여기고 보들레르처럼 거기에 미혹되려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그녀는 점심식사 후에 소주를 마실 참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정말 이래도 저래도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소풍을 온 연인들처럼 점심식사를 2층 공용 발코니로 가져가 술과 함께 먹기로 했다. 그날의 반찬은 안주로 손색이 없었다. 그녀는 김치전과 두부조림과 돼지불고기를 넉넉히 담고 국과 밥과 열무김치는 적당히 담았다. 163p
"이를 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해가 한잔의 쨍한 높이에서 서쪽으로 기우는 속도로 숲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들은 주종을 소주에서 맥주로 바꾸었고 안주로는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진한 커피를 음미하듯 물고 있다 마셨다. 아주 가까이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렸다. 168p
그가 그녀에게 위스키를 마셔도 좋을 만큼 충분히 어두워진 것 같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는 변압기처럼 아주 적절한 순간에 술의 종류와 도수를 바꾸었고 그녀는 기꺼이 그의 제안에 따랐다. 그가 자신의 방에서 아이스버킷을 가져왔다. 171p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가 물었다. "강도처럼 내게서 차분한 체념과 적요를 빼앗으려는 당신은 누굽니까? 은은한 알코올 냄새를 풍기면서 내 곁을 맴돌고 내 뒤를 따르는, 새파랗게 젊은 주정뱅이 아가씨는 대체 누굽니까?" 놀란 그녀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는 놓아주지 않았다. "신도 없는데 이런 나쁜 친절은 어디서 온 겁니까?" 그리고 그는 무엇을 기다리는 듯 아니면 뭔가를 음미하는 듯 잠시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1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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