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맥도날드의 <소름>은 휴양지에서 신혼여행 중 사라진 아내를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은 탐정 루 아처에서 시작된다. 줄을 당기면 계속해서 덩굴 속에 숨어 있던 속사정이 끝도 없이 나오는 격이랄까. 아처가 주변 인물들을 탐문해 나가는 과정이 곧, 플롯이다. 
하드보일드로 분류되지만 탐정이 쓸데없이 과한 포즈를 짓지 않는 점이 매력이다. 인간의 내면과 욕망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치정 스릴러물 정도 되려나. 
로스 맥도날드 작품을 좀더 읽고 싶어 찾아보니  <블랙머니>, <소름> 제외하고는 동서문화사(번역이 정말이지 괴로워 못 읽겠다)에서 몇 권 나온 게 전부여서 한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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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
최윤아 지음 / 마음의숲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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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이 지금처럼 환대를 받았던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도 사실. <남편은 내가 집에서 논다고 말했다>는 기자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저자의 에세이다. 돈을 벌 때와 다르게 남편의 수입에 의존해 살면서 은근히 시댁의 눈치를 더 보게 되고 가사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된, 그러면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글쓰기라는 제 2의 잡을 만들어나가는 82년생 세대의 이야기다. 제목을 보고 끌렸고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책의 완성도는 오락가락 하는 느낌이다. 발랄한 일상 에세이로 읽기는 재미가 부족하고, 철학서로 읽기에는 깊이가 부족하다. 저자만의 특수한 일상을 늘어놓는 느낌도 들고, 아이를 키우지 않는 전업주부로서의 외침에는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 제목을 잘 지었다. 요즘 단행본 시장은 제목 전쟁인 듯.  

 

가사 노동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증발한다. 기껏 낑낑대며 온 집안에 청소기를 돌려도 창문 몇 시간 열어두면 다시 원점이다. 가사 노동의 흔적은 예외 없이 가족의 흔적에 덮인다. 가사 노동의 꽃, 요리도 예외는 아니다.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고, 인터넷 상 수만 가지 레시피 중 가장 믿음직스런 하나를 고르고,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찌고 데우고... 이 복잡다단한 단계를 거친 결과물은 가족의 젓가락질 몇 번이면 사라진다. 더 지독한 건 끼니때가 오면 이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메뉴를 정하는 건 생각보다 난이도 있는 작업이다. 어릴 때 저녁마다 뭐 먹고 싶냐고 묻던 엄마에게 ‘또 그 질문이냐‘며 핀잔을 주곤 했었는데, 주부가 되고서야 엄마의 고충이 이해가 갔다.
76p

그래서 나는 가사 노동을 대충한다. 그게 가사 노동의 휘발 속도를 늦춰주기 때문이다. 가사 노동은 안 해야 그 존재가 드러난다. 단 며칠만 하지 않아도 집안은 불결하고, 불편해진다. 당연하게만 여기던 집안 상태가 주부의 가사 노동으로 유지된 거였다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 그제야 증명된다. 그렇기에 가사 노동을 대하는 가장 적절한 태도는 완벽주의가 아니라 ‘적당주의‘다. 적당히 설렁설렁해야 내 노동이 귀한 줄 안다. 조직에서나 가정에서나 ‘일한 티‘를 내야 대접받는다는 게 조금 서글프지만 말이다.
79p

경제활동을 중단한 내가 가계에 보탬이 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끼는 것‘ 뿐이다. 돈을 아끼려면 시간을 써야 하고, 시간을 아끼려면 돈을 써야 한다. 직장에 메어 있지 않은 나의 경우 시간은 풍족했지만 돈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돈 대신 시간을 썼다. 시간은 내게 허락된 유일한 자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전업주부는 시간 부족에 허덕인다. 돈 대신 시간 자본을 쓰려 하기 때문이다.
1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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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 콘스탄틴, 마지막 패리시부인 : 다른 사람의 부유한 인생을 훔치려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대중적 문법으로 그린 스릴러.
카렌 디온느, 마쉬왕의 딸 :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키워진 딸이 아버지를 추격하는 미국 스릴러.
나카야마 시치리, 연쇄살인마 개구리남자 : 제목이 엽기적인데 '심신상실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소설이라고.
히가시노 게이고, 기린의 날개 : 워낙 다작인 작가라 자 챙겨읽지는 못해도 가끔 하나씩은 봐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신파지만 잘 읽힌다.
오스틴 라이트, 토니와 수잔 :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의 원작으로 부부 간의 갈등을 그린 미국 스릴러물.
아키요시 리카코, 성모 : 모성애와 아동 살해 사건을 다루었는데 반전이 대단하다는 평.
히라노 게이치로, 투명한 미궁 : 난해한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이번 단편집은 대중적 필치로 그렸대서 궁금.
마이 셰발/페르 발뢰, 로재나 : 북유럽 경찰소설의 원점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1권. 가끔 고전추리물도 읽어줘야지.

겨울이라 그런가.
장르소설이 불현듯 몰아 읽고 싶던 어느 날, 알라딘에서 주문하고 스누피 밀크머그 2개를 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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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쓰여 있었다 -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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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다 미리의 에세이집 <그렇게 쓰여 있었다>의 표지에는 흐린 글씨로 이렇게 써있다. '어렸을 적이라는 말은 아직 쓰고 싶지 않아, 일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왠지 이 책의 성격을 잘 설명해주는 문구라고 생각한다.
마스다 미리의 만화를 더 애정하긴 하지만  에세이도 나쁘지 않다, 정도의 감상.

 

어른.
‘어른이 되면 반드시 마음이 더러워진다.‘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기에 나는 절대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잘 모르겠다. 나도 결국 더러워진 걸까?
(중략)
그렇다. 언제라도 내게는 내가 있다. 더러워진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사실을 한밤중에 확인하고, 그만 자기로 한다.
1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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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쇼핑을 좋아해 쏜살 문고
무라카미 류 지음, 권남희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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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류를 한때 좋아했던 기억, 거기에 쇼핑 이야기라니 재미있을 것 같아 구입. 도착한 책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시집 사이즈지만 일단 민음사의 감각적인 디자인과 컬러는 만족.

이 책은 주로 류가 이탈리아, 유럽 등지에서 셔츠를 쇼핑하는 어찌 보면 한심한 이야기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셔츠를 자주 입지는 못하지만 마음에 두는 셔츠를 잔뜩 쟁여두고 쳐다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그 마음도 이해된다. 약간의 대리만족도 있고.

식재료 쇼핑도 즐겨 하는데 보기만 해도 가슴이 떨린다고.

 거의 다 좋아하는 식재료인 데다 가슴이 떨리는 것도 나랑 같다.
무라카미 류를 좋아한 적이 있고, 쇼핑에 관심이 많다면 특히 남자라면 읽어볼 만한 책.

 

 

집 근처 세이조이시이에 장을 보러 가서 모차렐라나 블루치즈, 커피, 요쿠르트, 꿀, 고기만두와 쿠키를 보고 있기만 해도 가슴이 조용히 떨린다. 75p

모 고급 식재료점 사이트에서 하코네 슈퍼에는 없는 식재료를 샀다. 플레인요구르트와 올리브절임과 건포도, 모차렐라, 록포르 등의 치즈류, 올리브유와 발사믹, 살라미소시지와 햄과 베이컨,
그리고 셰리주를 샀다. 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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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12-07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다 있군요. 깜찍해요. 담아갑니다. ^^

베쯔 2017-12-07 09:25   좋아요 0 | URL
네. 귀여운 사이즈에 귀여운 내용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