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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 1 ㅣ 소설 조선왕조실록 1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재(宰)란 무엇인가. 재제(宰制)함이다. 백관의 상이한 직책과 만민의 상이한 직업을 두루 관장하며 공평하게 처결하는 것이다. 상(相)이란 무엇인가. 보상(輔相)함이다. 왕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명령에는 순종하고 추한 명령은 바로잡는다.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을 막는다. 이를 통해 왕을 대중(大中)에 들게 만드는 것이다. 송나라의 대학자로 <대학연의>를 지은 진덕수가 강조하지 않았던가. 재상은 자신을 바르게 한 다음 왕을 바르게 하며, 인재를 뽑고 업무를 훌륭하게 처결해야 한다. (중략) 재상에게 너무 많은 권세가 얹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누군가가 권세를 쥐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천지만물의 움직임과 국방의 엄중함에 무관심한 왕이 아니라 풍부한 지식과 탁월한 식견을 지닌 재상이다. 권세만큼 업무도 막중하니 재상은 단 한순간도 사사로움을 추구할 틈이 없다. 과거에 재상의 업을 능히 다한 이는 이윤(伊尹), 부열(傅說), 주공(周公)이었고, 지금 이 나라에서 재상의 소임을 거뜬히 할 이는 두 사람뿐이다. 포은 정몽주 그리고 나 정도전. (pp.238-41)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의 원작 소설을 쓴 우리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 김탁환이 돌아왔다. 그것도 장장 60여 권에 이를 예정일 <소설 조선왕조실록> 시리즈와 함께. <노서아가비>, <리심, 파리의 조선 궁녀>를 읽고 그의 팬이 된 나로서는 적어도 몇 년은 고대하며 읽을 시리즈가 시작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안 그래도 한국사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조선의 역사를 좋아하는데, 김탁환 선생님 특유의 유려한 문장과 섬세한 묘사로 조선 왕조 오백년의 역사를 돌아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혁명 -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부터 정몽주가 암살당하기까지 18일을 그린다. 조선 건국 전후를 아우르는 줄거리는 아니지만, 저자는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역사적 사실보다는, 고려 왕조의 신하로서 새 왕조의 건국을 구상해야 하는 얄궂은 운명에 처한 정도전의 인간적인 고뇌와 그가 이성계, 이방원, 정몽주 등과 대립하며 갈등하는 모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데 비중을 두었다. 특히 나는 정도전이 하루라도 빨리 정몽주를 치고 새왕조 개창에 박차를 가하려고 하는 이방원과 대립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이제까지 나는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성향의 정도전이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정몽주를 제거하는 데에도 앞장섰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에서 보니 정도전은 오히려 이방원을 말렸고,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학(同學)이자 은인인 정몽주를 쳐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구 왕조의 마지막 재상을 치고 새 왕조의 첫 재상이 되었을 때 정도전의 기분은 어땠을까. 혁명의 무게가 더욱 뼈와 살에 사무쳤으리라.
그런데 왜 지금 정도전일까? '혁명과 건국에 성공한 외국 혁명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우리 혁명가로는 정도전이 유일했다'(2권 참고 문헌 p.249)는 저자의 말대로 정도전은 우리 나라 역사상 최고의 혁명가이자, 고려라는 구체제를 종식시키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체제, 신 패러다임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혁신성, 대담성, 치밀함은 근대 또는 냉전 패러다임으로부터 아직도 벗어나고 있지 못한 우리사회에 새로운 자극을 줄 만한 위인이자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왕조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조사에 따르면 요즘 청소년들은 조선을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망국(亡國)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이지만, 이것이 조선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조선은 유교에 기초한 인문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해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정치 및 사회체제를 형성했으며, 중국과 일본 등 이웃나라의 혼란과 침략 속에서도 굳건하게 오백년이나 유지된 왕조다. 정도전,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다시 보는 데 <혁명>과 <소설 조선왕조실록>이 많은 기여를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