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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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는다는 것. 어려서부터 시력이 안 좋았고 지금도 안 좋은 나에게는 가까운 미래에라도 일어날 법한 일 중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 자체에 대해서나 시각장애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일단은 앞이 보이니까, 아직은 시각장애인이 아니니까, 라는 경솔하고 오만한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2023년 샘터 문예공모전 생활수필 부문 대상을 받은 시각장애인 에세이스트 조승리의 첫 산문집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를 읽으며 장애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의 경우 열다섯 살 때부터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병원에 갔더니 앞으로 10년 정도 계속 시력이 떨어져서 완전히 실명하게 될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의사의 진단을 믿을 수 없다며 다른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고 민간 요법을 찾기도 했지만, 당사자인 저자는 담담히 장애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준비했다. 시각장애인 고등학교에 진학해 안마 기술을 배우고, 줄어드는 시력에 의지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지금은 마사지사이자 작가로, 때로는 여행을 다니고 탱고를 배우며 즐거운 삼십 대를 보내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저자의 첫 타이완 여행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저자는 여행 팟캐스트 방송을 듣고 여행 블로그를 읽으며 공부한 끝에 시각장애인 친구 둘과 타이완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비장애인 동행 없이 불가능할 거라고 모두가 말렸지만, 철저한 준비와 위기의 순간마다 등장한 귀인들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어떤 한국인 여행자들은 "앞도 못 보면서 여길 힘들게 뭐 하러 왔누!"라고 혀를 끌끌 차며 말했지만, 여행을 하는 방법은 눈으로 보는 것만이 아니다. 타이베이 시내의 거리에서 에릭 사티의 음악을 듣는 기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도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한다.


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다. (15쪽)


책에는 도시화가 시작된 농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엄마와의 불화가 끊이지 않았던 십 대 시절, 마사지사로 일하면서 손님들의 몸의 피로를 풀어주고 마음 깊은 곳에 담겨 있던 이야기를 듣는 요즘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이 담겨 있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 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라는 저자의 결심이 오래오래 이어져 좋은 글과 책들로 결실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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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니를 뽑다
제시카 앤드루스 지음, 김희용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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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럽 드라마를 보면 식이장애가 소재로 빈번하게 나온다. 식이장애 트리거를 경고하는 문구나 장면도 심심치 않게 본다. 그에 반해 한국에서는 아직 식이장애에 대한 경각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아직도 여성 연예인들의 마른 몸을 칭송하며 의사들이 나서서 다이어트 약 광고를 한다. 대체 왜 여자들은 마른 몸을 원할까. 남자들은 왜 마른 몸의 여자를 원할까. ​

영국의 소설가 제시카 앤드루스의 신작 장편 소설 <젖니를 뽑다>의 주인공인 런던에 사는 28세 여성 '나'는 오래전부터 식이장애를 앓고 있다. 음식물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극도의 허기를 느낄 때조차 포만감을 느낄 정도로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자신을 심하게 책망하며 거울 속 자신의 몸을 노려보거나 살을 꼬집는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

소설은 '나'의 생일날 '나'가 처음으로 ('당신'으로 지칭되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날 이후 '나'와 남자친구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만, 대학원생인 남자친구가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바르셀로나에 있는 대학의 연구원으로 채용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남자친구는 '나'가 자신과 함께 바르셀로나로 가기를 원하지만, 변변한 학위도 직업도 없는 '나'로서는 무리한 부탁으로 느껴진다.

​현재의 고민은 '나'를 자꾸만 과거로 밀어낸다. '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정신이 불안정했던 아버지와 그런 남편에게 경제력을 의존해야 했던 어머니, 두 사람의 불화와 이혼이라는 불우한 추억과 만난다. 제2차 성징을 겪으며 이성애자 여성으로서 자연스럽게 남성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남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욕구를 느꼈지만, 자신의 몸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고 때로는 희롱과 추행을 일삼는 남성들 때문에 스스로의 욕구를 검열하고 억제해야 했던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우리가 동경하는 여성들은 깡마르고 아름답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섹스와 마약에 대한 그들의 욕구를 과시했고, 너무 많이 먹지만 않는다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차지할 수 있을 정도로 놀기 좋아하는 젊은 여자들이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움과 현란한 클럽 조명을 위해 맛과 포만감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쾌락에 이르고 손을 뻗어 그것을 움켜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욕구를 참는 법을 배웠다. (91쪽)

종종 내가 젊은 여성이 아니라면 세상을 헤쳐 나가는 인생 항로가 달랐을지, 또는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을지, 또는 더 많은 힘을 가졌을지 궁금해지곤 했다. 덜 의식하고, 거의 생각하지도 않고, 단지 내 일부일 뿐인 육체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 보려 노력했다. (156쪽)


소설 초반에 '나'는 남자친구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정확히 알고 있고 그에 맞춰 진로를 착착 진행하는 것에 대해 부러움을 넘어 질투를 느낀다. 그가 함께 바르셀로나에 가서 살자고 말했을 때에도 호의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는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나타내는 신호라고 느낀다. 하지만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못한 처지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의지와 능력으로 원하는 삶을 이뤄낸 걸 보면서 '나'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역시 사람은 일을 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밝은 결말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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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적 낙관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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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식물을 돌보는 '식집사'는 아니지만, 식집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한다. 이유가 뭘까 곰곰 생각해 봤는데, 대상의 안녕을 바라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 애정과 노력을 들이는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소설가 김금희의 두 번째 산문집 <식물적 낙관>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저자는 출간 직후 공개한 네이버 오디오클립 '김금희 라디오'에서 칠십 개의 식물을 키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칠십 개라니. 하루 한 번씩 물만 줘도 보통 일이 아닐 것 같은데, 그걸 몇 년째 '하는' 마음이 대단하다.


저자가 식물에 빠져든 시기는 마음이 힘들었던 때와 거의 비슷하다. 전업 작가가 되기 전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던 저자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사무실에 있는 식물들에게 물을 줬다. 팬데믹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전보다 심한 고독과 우울, 무기력을 느낄 때에도 식물들을 보면서 큰 위로를 받았다. 식물을 키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열심히 돌본다 해도 모든 식물이 뜻대로 잘 자라지는 않는다. 잘 자라고 있는 식물도 부분적으로 상해서 잎을 떼거나 줄기를 잘라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니 힘들다고 비관적인 생각에 지지 말고 낙관적인 생각을 더욱더 움켜쥘 것. 이것이 저자가 식물을 돌보면서 배운 지혜다. 


책에는 저자가 돌보는 식물에 대한 이야기 외에 식물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 이야기, 저자처럼 식물을 좋아한 작가 이야기(헤르만 헤세, 버지니아 울프 등), 어떤 나무나 꽃을 보고 연상한 추억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의 뒷마당에 심어져 있던 목련나무를 추억하는 글이 특히 좋았다. 뒷마당이라고 해도 어른 두 명이 겨우 설 수 있을 만큼 좁은 곳이라서 어떻게 보면 나무로서는 갇혀 있는 셈이었는데, 그런데도 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불화, 장래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을 잊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저자는 이때부터 식물이 주는 낙관의 기운을 알았던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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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의 말 - 상상의 세계를 쌓아 올리는 SF 거장의 글쓰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어슐러 K. 르 귄.데이비드 네이먼 지음, 이수현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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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 특히 여성 작가를 발견하는 데 있어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만큼 유용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어슐러 르 귄의 말>의 주인공 어슐러 르 귄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았지만,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이를테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기 전 나름 오랜 무명 기간을 겪었다는 것, 도교와 불교 등 동양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불교의 경전인 <금강경>을 번역하기도 했다) 등이다.


이 책은 작가 데이비드 네이먼이 어슐러 르 귄을 총 세 번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각의 인터뷰는 어슐러 르 귄의 소설, 시, 논픽션을 주제로 한다. 어슐러 르 귄이 소설과 에세이를 쓴 건 알았지만 시를 쓴 건 전혀 몰랐다. 어슐러 르 귄에 따르면 작가의 스타일은 리듬으로 만들어지며, 리듬을 학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다. 언어는 결국 소리이므로, 소리의 특성을 무시하는 글은 좋은 글이 되기 어렵다.


작가에게 있어 문법은 중요하지만, 문법이 곧 당위성 또는 도덕성인 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문장 수준에서 여성이 지워지는 문제다. 가령 영어에서 남성을 의미하는 단어 man은 사람, 인간을 가리키는 단어로도 쓰이지만,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 woman은 그렇지 않다. 어슐러 르 귄이 1968년 고정된 성 개념이 없는 행성을 무대로 한 소설 <어둠의 왼손>을 발표했을 때 주어를 he로는 쓸 수 있지만 she로는 쓸 수 없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he나 she로 지칭할 수 없는 개인을 they로 지칭할 수 있게 된 요즘은 해당 작품의 주어를 they로 하여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어슐러 르 귄은 정치적으로 전쟁과 폭력에 반대할 뿐 아니라 창작에 있어서도 전쟁이나 폭력과 관계된 표현을 지양한다. '갈등이 창조를 낳는다', '삶은 전쟁이다' 같은 상투적인 표현도 갈등을 당연시하고 전쟁을 미화한다고 보아 경계한다. SF와 판타지 문학을 하나의 장르로 평가절하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문학은 원래 신화, 전설, 민담 같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니 어떤 작품을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깎아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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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아 만든 천국
심너울 지음 / 래빗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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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후기에 '(MBTI) N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판타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즐기고 나서 이에 푹 빠져 현실 세계에 마법이 진짜 있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걸 읽고 '그래서 내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나 게임에 좀처럼 몰입을 못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MBTI상 N의 반대인 S성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S라서든 아니든 판타지 설정에 좀처럼 공감하지 못하는 나지만, 이 소설은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마법과 마력이 존재한다는 설정만 제외하면, 이 소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사회상을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명목상의 계급은 없지만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서울 사는 사람과 지방 사는 사람, 고학력자와 저학력자 등 다양한 기준으로 사람들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차별하고 혐오하는 모습이 특히 그렇다. 

허무한은 이런 세상에서 A-등급의 마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2001년 창원 출신. 바닷가에서 회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를 둔 자식으로서는 과분한 스펙이다. 이 스펙으로 한국에서 제일 이름난 대학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무한은 입학식을 치르기도 전에 좌절한다. 마력만 따지면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이들이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아서 자신과 같은 학교 같은 과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신과 다르게 돈 걱정 없이 사는 동기들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무한은 자신의 마력이 엄청난 상품 가치를 지녔다는 걸 알고 위험한 선택을 내린다. 이 밖에도 마력 때문에 위기에 빠진 2군 야구 선수,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력을 연구하는 연구원인 딸, 마력을 상쇄하는 힘을 가졌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여자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된 형태로 이어진다. 판타지의 힘을 빌려 현재의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이런 소설이라면, S인 나도 앞으로 얼마든지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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