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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눈 1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2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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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설을 읽으면 작가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렇게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다. 어떤 유년기와 청소년기, 청년기를 보내면 이와 같은 문제 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지도 알고 싶어진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읽을 때가 그랬다. 작품이 너무 좋아서 작가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읽은 책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자전적인 소설 <고양이 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한 1940년대 중반. 여덟 살 소녀 일레인은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서 가족 전체가 캐나다 북쪽의 황무지를 떠돌아 다니며 살아온 통에 또래 여자 아이들과 어울린 경험이 거의 없다. 아버지의 직장이 토론토로 정해지면서 마침내 정착하는 삶을 살게 된 일레인은 같은 동네에 사는 또래 여자애들(코딜리어, 캐럴, 그레이스)과 어울려 다니지만 그들의 문화나 관습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다. 이들은 무리에서 겉도는 일레인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괴롭히고, 견디다 못한 일레인은 그들과 다른 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들에게서 벗어난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좀처럼 동성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2004년에 공개된 헐리웃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연상케 한다. 이 영화에서 동물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에서 성장한 주인공 케이디(린제이 로한 분)는 미국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또래 여자애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우는데 하필이면 그 여자애들이 학교 퀸카인 레지나(레이첼 맥아담스 분)의 무리다. 비슷한 나이대의 동성 친구를 사귀어본 적 없는 케이디는 레지나가 시키는 대로 하다가 레지나의 진의를 뒤늦게 깨닫고 레지나와 반목한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여적여' 서사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는 건, 어른이 된 일레인의 회고와 통찰 때문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화가가 된 일레인은 자신의 과거를 끝없이 반추한다. 그 아이들이 자신을 괴롭힌 건 분명 나쁜 일이고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생각해 보면 그 아이들이 처해 있던 상황 역시 좋지 않았다. 그들의 부모는 요즘의 부모들보다 훨씬 더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며 속물적이었다. 그러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타인에게 비슷한 행위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폭력에 더 많이, 더 자주 노출되는 여성들이 동성인 여성을 증오하게 되면서 차선책으로서 남성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일레인은 동성보다 이성을 대하는 게 훨씬 더 편하다고 느끼는데, 정서적 친밀감을 요구하는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자신에게 육체적 관계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치 않은 임신과 결혼을 경험하며 일레인은 남성들이 내세우는 단순하고 간편한 관계의 다른 이름이 이기심과 착취라는 것을 깨닫는다. 아울러 기혼 유자녀 여성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남성 예술가로 사는 것에 비해 몇 배는 더 어렵고, 자신이 얼마나 힘든 상황에서 처절하게 예술을 하고 있는지 공감해주고 지지해주는 것은 결국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여성들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 이르러 일레인은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며 어릴 때는 코딜리어가 가해자이고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안 좋은 상황에 놓인 코딜리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거절했던 일을 떠올리며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가해자이고 코딜리어가 피해자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때는 코딜리어를 나를 괴롭힌 가해자, 나와 상관없는 타인으로 여기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했지만, 만약 자신이 코딜리어와 무관한 제 3자였다 해도 그런 거절을 정당화 할 수 있었을지 자문하며 자책한다.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것. 일레인은 해냈지만 나라면 절대 못할 것 같은 일이다. 어쩌면 일레인이 코딜리어 이후에 더 나쁜 사람들(남자들)을 많이 만나서 코딜리어의 죄가 상대적으로 더 작게 보였던 건 아닐까. 코딜리어가 잘 살기는커녕 일레인보다 훨씬 안 좋은 삶을 살아서 측은지심을 느낀 건 아닐까. 코딜리어를 만나지 않았다면 일레인의 삶은 어땠을까. 트라우마 없이 순탄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비슷한 여자애들을 만나서 비슷하게 힘든 삶을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일레인이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게 코딜리어만의 잘못일까. 다양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