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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테
차학경 지음, 김경년 옮김 / 문학사상 / 2024년 11월
평점 :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는 책 자체도 좋았지만, 나에게 테레사 학경 차, 한국 이름 차학경이라는 한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에 대해 알려준 책이라서도 고맙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 여성 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차학경의 생애와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 소개한다. 차학경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나 1962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가톨릭계 여학교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UC버클리에서 비교문학과 미술을 전공했다. 문학과 미술뿐 아니라 영화, 연기, 공연 등에도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82년 첫 책 <딕테>가 출간된 지 3일 후에 뉴욕에서 괴한에게 강간, 살해당했다.
어떤 사람의 생애를 죽음만으로 단정할 순 없고 어떤 작가의 예술 세계를 유작만으로 평가하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차학경의 경우에는 그의 죽음이 그의 삶과, 그의 유작이 그의 작품 활동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의 첫 책이자 유작이 된 <딕테>를 보면 한국의 유관순, 프랑스의 잔 다르크처럼 이른 나이에 의롭게 죽음(순교)으로써 불멸의 존재가 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오고, 신화 속 여신들과 성서 속 성녀들처럼 실존 여부와 무관하게 텍스트를 통해 영생을 얻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제 치하와 한국 전쟁, 군부 독재 같은 환난을 겪으면서도 가족들을 건사한 어머니의 생애와 계속되는 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영속한 여성의 역사, 한민족의 역사를 호명한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 책의 제목인 '딕테'는 프랑스어로 '받아쓰기'를 의미하는데, 받아쓰기의 방점은 '받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에 있다. 저자에게 있어 타인 또는 타자는 저자를 점령하고 정복하고 채우려고 하는 존재다. 그것들을 '받되' 글로 '씀'으로써 저자는 저항할 수 있고 해방될 수 있으며, 채워진 것을 비움으로써 자유로워진다. 저자가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간도 용정촌 출신인 어머니의 경험과 관련이 있다. 일제가 점령한 간도에서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중에 어떤 언어를 발설하는지에 따라 살 수도 죽을 수도 있었다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자는 언어가 문자 그대로 삶과 직결된다고 느꼈고, 자신의 삶이 될 언어를 개발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백인과 남성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시, 산문, 영상 등 자기만의 언어를 개발해 표현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저자의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 또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삶에 대한 글을 쓰거나 영상을 만드는 (이민진, 캐시 박 홍, 이창래, 폴 윤, 에드워드 리, 코코나다 같은) 후대 창작자들의 이야기와도 연결된다. 저자가 살아서 이들의 활약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수록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