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 문학동네 청소년 76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군가 "십 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아니오."다. 하루 중 몇 시간을 공부하는 지가 대학 간판을 결정한다 같은 말에 세뇌되어 당장 하고 싶은 일, 그때 아니면 못할 일을 포기하거나 대학 입학 이후로 미뤄야 했던 그 시절을 반복한다는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오! 사랑>, <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 등을 쓴 조우리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모든 골목의 끝에, 첼시 호텔>의 주인공 심락영을 보면서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고등학교 2학년인 락영은 학급 반장에 서울대를 목표로 할 정도로 공부도 잘한다. 락영이 이렇게 일찍부터 자기 앞가림을 잘하는 아이로 자란 건, 몽상가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 때문에 꿈을 포기한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젊은 시절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아버지는 현재 서울 종로의 뒷골목에서 '첼시 호텔'이라는 이름의 LP 바를 운영하며 여전히 음악에 빠져 살고 있다. 벌이가 시원치 않은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공무원으로 일하며 세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고, 락영은 그런 부모를 보면서 자신은 가능한 한 좋은 대학에 들어가 좋은 직장에 입사해 하루 빨리 경제적 안정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날인데도 공부를 하려고 스터디카페에 간 락영은 같은 반 아이인 정지유와 마주친다. 같은 스터디카페에 다닌다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같이 편의점에 가고 커피우유를 나눠 마시면서 급속도로 친해진다. 그런데 며칠 후 누군가 지유의 책상에 긴 지렁이 같은 벌레 수십 마리를 놓고 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지유의 친구이자 학급 반장으로서 책임감을 느낀 락영은 앞장서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지만, 담임 교사는 쓸데 없는 일에 정신 팔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한다. 이때 같은 반 남학생 김도영이 두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이 소설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된다. 하나는 락영이 친구 지유, 도영과 함께 '연쇄 벌레 테러'를 일으킨 범인을 찾으러 다니는 과정이고, 다른 하나는 락영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첼시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그동안 입시 공부와 학종 관리를 하느라 친구들과 마음 편히 어울리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못했던 락영은 지유, 도영과 범인을 찾으러 다니면서 비로소 십 대 청소년다운 나날을 보낸다. 이 과정에서 세 사람 사이에 다양한 감정이 생겨나는데, 각자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고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끝까지 긴장을 놓지 않고 봐주었으면 좋겠다.


첼시 호텔 또한 락영의 성장에 있어서 중요한 공간이다. 락영은 내심 첼시 호텔을 운영하는 아버지와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한심하게 보았다. 남들은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음악이나 듣고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는 게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락영 자신이 정신적으로 위기 상태에 놓였을 때(번아웃이 아닌가 싶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예전과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첼시 호텔에 오는 사람들은 세상을 피해 도망 와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마침내 이곳에 도착한 거라고. 이런 깨우침을 주는 공간이 십 대 시절의 나에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에게 첼시 호텔 같은 공간에서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시는 취미는 없지만, 비슷한 효과를 주는 시간은 있다. 바로 책을 읽는 시간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현재의 우울이나 미래의 불안을 잊을 수 있다. 아무 책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 재미있는 책을 만나면 그 효과가 더 크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돈이 되거나 미래를 보장해주는 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쓸데없는 정도를 넘어 퇴행적인 취미로도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시간이 없으면 다른 시간을 버틸 힘이 안 생긴다. 첼시 호텔을 찾는 사람들에게 첼시 호텔이 꼭 그런 존재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이 재미있다. 계절이 네 개인데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라니. 그러면 그냥 계절 중에 제일 싫어한다는 말 아닌가, 라고 생각한 걸 반성하게 되는 글이 이 책에 있다.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8월 7일 <조금 사랑하기> 중에서) 싫다고 말하는 건 쉽다. 싫다 대신 조금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애써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인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꽃이 필 정도로 완연한 봄이지만 아직은 긴소매 옷을 입는 게 당연한 날씨다. 그러나 외출해서 걷다 보면 반팔 차림이 그리워질 만큼 더운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나는 여름이 곧 다가올 거라는 생각에 미리 괴롭고 이내 울적하다(그렇다. 내게도 여름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여름 아닌 계절에 이 책을 읽으니, 다가오는 여름은 조금에서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이 쓴 책이지만 사슴, 멧돼지, 솔개, 매미, 고양이, 개 등 동물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좋았고, 나의 더위, 나의 추위만 살피지 말고 나보다 더 덥거나 추운 존재들이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정한 친구는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우산을 가져다 주는 친구가 아니라 나와 함께 비를 맞아주는 친구라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는 '그러면 그냥 비 맞은 사람 둘이 되는 거 아닌가?'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손해 볼 걸 알면서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을 만나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라는 걸 안다. 친구든 연인이든 간에 그런 사람은 드물다. 드물기에 귀하다.


한강 작가가 201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었다. 이 소설에는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나온다. 여자는 남편과 이혼하고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까지 빼앗긴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할 수 없게 된 상태다. 오래 전 처음 말을 잃었을 때 낯선 프랑스어 단어를 듣고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기억해낸 여자는, 그저 배울 수 있는 언어 중에 가장 낯설다는 이유로 희랍어를 택해 강의를 듣는다. 남자는 한국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인생의 절반을 보내고 서른 살 후반이 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희랍어 강사다. 그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중인데, 이런 사정을 아는 이는 독일에 있는 가족 외에는 없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각각 희랍어를 가르치는 강사와 희랍어를 배우는 학생으로 한 교실에서 만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몇 회의 수업이 지나도록 서로의 존재는 알지만 서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다. 남자에게 여자는 그저 말수가 없는 학생이고, 여자에게 남자는 그저 낯선 언어를 가르치는 강사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상대방이 중요한 감각 하나를 잃었거나 잃어가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되고, 어떤 감각인지가 다를 뿐 세상을 인식하고 주변 사람들과 연결되는 수단 하나를 잃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한 처지라는 걸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 나는 여자가 남자의 눈이 되고 남자가 여자의 입이 되는 전개를 예상했다. 실제로 그런 전개가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공감하는 건, 여자가 눈을 감고 남자가 입을 닫는 때부터다. 볼 수 없는 건 볼 수 없는 것만이 아니고 말할 수 없는 건 말할 수 없는 것만이 아니다. 비를 맞아본 적 없는 사람은 비에 젖어본 사람의 기분을 알지 못하듯이, 볼 수 없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세상이 있고 말할 수 없음으로서 말해지는 감정이 있다. 2016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잃어온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한 마을 청호리
배명은 지음 / 네오북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등학생인 미주는 어릴 때부터 귀신을 보았다. 사람들은 귀신을 본다는 이유로 미주를 배척하고, 귀신들은 자신들이 보인다는 이유로 미주를 좋아해서 미주는 어디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이삼 년마다 이사를 다녀야 했다. 더는 이사할 일이 없기를 바라며 이번에 이사를 간 곳은 충청도 거천시 근처의 작은 마을인 청호리. 엄마의 고향이자 외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청호리에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 첫째는 마을 바깥의 것을 탐내지 말 것. 둘째는 14세 이상의 남녀 청소년은 한자리에 있거나 대화하지 말 것. 셋째는 '선녀님'의 존재를 마을 외부에 절대 발설하지 말 것.


이상한 규칙들 때문에 미주는 청호리가 사이비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곳은 아닌지 의문을 품기도 하지만, 엄마의 고향이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과 학교 친구들이 대체로 친절하게 대해줘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적응한다. 하지만 마을에서 처음 사귄 친구인 연희가 같은 동아리에 들자고 하도 떼를 써서 들어간 오컬트 동아리 '그믐' 활동을 하면서 마을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하나둘 알게 되고, 보기와 달리 이 마을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느끼게 된다. 급기야 연희가 마을에서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미주가 느끼는 공포는 극에 달한다.


<이상한 마을 청호리>는 장편소설 <수상한 한의원>, 단편소설 <계화의 여름> 등을 쓰고 앤솔러지 <절망과 열정의 시대>, <영원히 행복하게, 그러나>, <괴이 학원>, <우리가 다른 귀신을 불러오나니> 등을 쓴 소설가 배명은의 신작이다. 소설 맨앞에 '변재천녀(변재선녀)'에 관한 설명이 나오는데, 처음 접하는 단어라서 뜻에 대해 좀 더 찾아보니 불교에서 모시는 최고의 여성신으로 <삼국유사>에도 언급된다고 한다. 청호리 사람들이 모시는 '선녀님'이 바로 이 변재천녀(변재선녀)이며, 소설은 선녀님이 깃들어 계시다고 여겨지는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에 문제가 생기면서 벌어진 일을 그린다.


이 소설의 장점은 평범한 오컬트 소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두가 현실에 적용해 볼 수 있는(봐야 하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청호리는 이상한 규칙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일견 평화롭고 풍족하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 규칙이야말로 청호리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인 동시에, 청호리 사람들이 간과하거나 무시하는 진실(혹은 비밀)을 담고 있다. 미주는 외부인의 시각과 귀신을 보는 능력, 그리고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청호리 사람들이 오랫동안 쉬쉬했던 문제를 밝혀낸다. 미주의 이런 끈기와 용기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에도 꼭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생활은 계속된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그 후로 14년이 지난 2025년 4월 10일 현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12차 방류가 시작되었고, 올해만 5차례 더 방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걱정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니 분명 (나를 포함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있을 것이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고. 하지만 뉴스나 신문 같은 매스 미디어에서는 오염수를 방류했다, 같은 뉴스를 기계적으로 내보낼 뿐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부작용을 걱정하는 보도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 이상 원전 건설을 하지 않고 기존 원전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전력 사용량을 줄여야 할 테지만 요원한 일이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책 <그리고 생활은 계속한다>는 아사히신문 기자로 이십여 년 간 재직한 저자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스스로 전기 사용을 줄이며 탈원전 생활을 실천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마흔 살 때 퇴사를 결심하고 퇴사 이후의 삶에 대비해 지출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 내용은 저자의 첫 책 <퇴사하겠습니다>에 자세히 나온다.) 한 달 지출 중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생활비를 줄이는 과정에서 전기 사용료를 줄이기로 결심했는데 생각 외로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 "10퍼센트를 줄이는 게 어려우면 50퍼센트를 줄이라"는 파나소닉 창업자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말에 힌트를 얻어 냉장고, 세탁기, 청소기 같은 전기제품 자체를 처분해 버렸다. 그 결과 전기 사용료가 줄어든 건 물론이고 생활도 대폭 간소해졌다.


냉장고 없이, 세탁기 없이, 청소기 없이 어떻게 살아? 싶겠지만, 저자가 해보니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냉장고가 없으니 장 볼 때 식재료를 덜 사게 되고, 식재료를 덜 사니 요리를 많이 안 하게 되어서 요리에 쓰는 시간이 줄었다. 반찬 수도 줄었지만, 사실 반찬은 한두 가지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나는 그렇다). 세탁기도 없으니까 옷을 덜 사게 되고, 사더라고 세탁이 쉬운 옷만 사게 되고, 세탁이 쉬운 옷만 사니까 세탁하는 시간이 얼마 안 걸린다. 청소기 대신 빗자루와 걸레로 청소하니 청소할 때마다 거슬렸던 청소기 소음을 안 들어서 좋다. 이 밖에도 전자레인지, 헤어 드라이어 등 당연하게 사용했던 전기제품이 의외로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귀가 팔랑팔랑... 나도 없애볼까?


저자가 처분한 전기제품 중에서 나라면 그래도 이건 처분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물건은 냉장고다. 겨울에는 몰라도 여름에는 어떻게 하려고... 근데 저자의 경험에 따르면 여름은 여름대로 냉장고 없이 살 만하다. 무청(시래기)을 햇볕에 말려서 무쳐 먹고 끓여 먹고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듯이, 다양한 채소들을 햇볕에 말려서 먹을 수 있고 맛도 영양도 더 좋다. 저자가 냉장고 없이 살면서 요리의 달인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후속작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에 자세히 나온다(지금 읽고 있다). 채식, 자연식물식 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