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부터 이제까지 일본에 수십 번 넘게 다녀왔지만 홋카이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딱히 흥미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십 대의 어느 날, 오지은의 <홋카이도 보통열차>를 읽고, 홋카이도에 가게 된다면 그 때는 무조건 보통열차를 투고 홋카이도를 한 바퀴 빙 도는 여행을 해보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기차 여행, 그것도 보통열차를 타고 하는 기차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홋카이도에 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몇 주 전 엄마와,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계기는 언제나처럼 홈쇼핑 채널을 보던 엄마가 홋카이도 여행 상품이 저렴한 가격에 나왔다며 나와 여동생을 꼬드긴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돈 없고 시간 없다고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엄마가 말한 가격이 내 생각에도 너무 괜찮아서 가겠다고 하고 며칠 안에 여행사와 계약하고 결제까지 마쳤다. 홋카이도 여행 하면 무조건 기차 여행이라는 내 결심이 너무도 간단히 무너진 것은 아쉽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가볼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모처럼 효녀 노릇도 해보자 싶었다.
문제는 여행 시작 이틀을 앞두고 엄마가 이런 말을 꺼내면서 벌어졌다. "2박 3일은 너무 짧은 것 같지 않니? 이왕 가는 거 3일 정도 더 있다 왔음 좋겠는데... " 동생은 프리랜서이고 나는 며칠 더 휴가를 쓸 예정이었기에 3일 정도 일정을 늘려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행기 티켓 구하고, 3일 더 묵을 숙소를 구했는데... 오.마.이.갓!!! 하필이면 우리의 일정과 아라시 삿포로 돔 콘서트 일정이 기가 막히게 겹쳐버렸다(참고로 아라시는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 내년에 은퇴한다고 전격 발표한 터라 콘서트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덕분에 삿포로 시내는 물론 근교의 숙소까지 가격이 평소 3~4배로 올라서 돈은 돈대로 깨지고,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서 여행 직전까지 엄마랑 공항에서 노숙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이 때부터 불안한 징조를 감지했어야 했는데...
여행 첫째 날. 새벽 다섯 시에 공항에서 가이드 만나 미팅하고 일곱 시에 출국하는 일정이라서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네 시에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참고로 이 전날 밤에도, 새벽에도, 아고다에서 숙소 잡느라 동생이나 나나 잠을 못 잤다.
인천공항을 떠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로 오타루에 갔다. 오타루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흐렸지만, 내게 오타루는 '눈(雪)'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환하고 쨍한 날씨보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오타루 운하를 산책하는 동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큰 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타루는 항구 도시답게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는데 여행사에서 준비해준 식사는 그닥 맛있지 않았다(한국에서 먹는 일반적인 스타일의 초밥 정식 정도?).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음식점 수배해서 먹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타루의 명물인 오르골당 앞에는 르타오를 비롯한 카페, 디저트 맛집 거리가 있다. 오르골당을 구경하고 나온 우리는 르타오를 시작으로 눈에 보이는 카페, 디저트 맛집마다 들어가 봤는데 대략 6~70퍼센트의 확률로 시식 행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초콜릿, 쿠키, 케이크 등 오타루의 유명한 디저트는 거의 다 공짜로 맛본 듯하다 ㅎㅎㅎ (엄마 왈,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ㅎㅎㅎ)
가이드가 엄청 유명한 커피집이 있다고 해서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해 마셨는데 엄청 맛있지는 않았다(차라리 그 돈으로 스벅 커피를 마실 걸...). 이후 가이드 때문에 바가지 쓴 일이 몇 번인가 더 있었는데(가이드가 추천해서 구입한 요거트가 돈키호테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든가, 면세점에서 엄마가 구입한 약을 환불해주지 않겠다고 한다든가... -> 결국 환불 받았다), 안 그래도 패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데 엄마 등쌀을 못 이기고 억지로 갔던 나로서는 이 또한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었다.
저녁은 여행사에서 천엔씩 돌려주고 삿포로 시내에서 각자 먹으라고 해서 호텔 주변에서 먹을 만한 곳을 찾아봤다. 삿포로에서 유명한 음식은 미소라멘, 징기스칸, 수프커리, 해산물 요리 등등인데 엄마가 징기스칸, 수프커리는 낯설어서 싫어하시고, 해산물 요리는 점심에 먹어서 싫다고 하셨다. 엄마는 우동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삿포로는 우동이 유명한 동네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 흔한 마루가메, 하나마루 우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텔 근처의 라멘집에 들어갔는데, 여기가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유명한 집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동생은 맛나게 먹었는데 엄마는 짜다고 하셔서 아쉬웠다.
둘째 날에는 노보리베츠, 쇼와신잔, 도야호수 등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도시를 떠나 자연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나무도 풀도 서울과 다른 느낌. 일본 본토와도 달랐다. 전날과 달리 날씨도 엄청 엄청 좋았다. 햇빛의 강도도 서울과 달랐다. 덕분에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여행 내내 두드러기가 올라오기도 했다(햇빛 알레르기 있는 분들은 선크림 꼭 바르고 긴팔 옷 챙기세요).
노보리베츠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온천 지대라는데 족욕 한 번 못해봐서 아쉬움이 남는다(일정상 족욕탕 근처까지밖에 못 가봤다). 쇼와신잔이나 도야호수도 잠깐 보고 사진 찍고 지나가는 정도. 패키지 여행이 이렇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는데, 막상 내 돈 내고 경험하니 속이 많이 쓰렸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가이드가 마유 크림을 권해서 귀얇은 엄마가 한 통을 샀다. 그거 바르면 화상도 낫고 물집도 낫고 온갖 피부 증상은 다 낫는다고 해서 여행 내내 열심히 발랐는데 딱히 효과는 못 봤다.
이 날 식사는 호텔에서 먹은 조식 뷔페를 제외하고 다 별로였다. 점심은 쇼와신잔 앞 휴게소에서 무슨 볶음 요리 같은 걸 먹고, 저녁에는 대게 뷔페라는 데에 갔는데 내가 생각한 대게 뷔페가 아니었다. 살도 없고 맛없고 질기고... (대게가 싫다고 처음부터 튀김이나 샐러드를 가져다 먹었던 내 동생이 위너...!) 밤에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가 젤 맛났다. 홋카이도 한정 삿포로 맥주였던가(삿포로 맥주 박물관에나 가볼 걸!).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패키지 여행이지만, 그래도 연로한 부모님들 모시고 다닐 때에는 패키지 여행이 좋기도 하다. 일단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편이고, 출국할 때부터 입국할 때까지 가이드가 책임지고 인솔해준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일정 내내 버스로 이동해서 체력 부담이 줄고, 캐리어 가지고 다니느라 힘 뺄 필요도 없고. 아는 것 많고 말 잘하는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 내내 지루하지 않기도 하다(이번에 만난 가이드 분도 입담이 대단했다 ㅎㅎㅎ).
낯선 사람들과 몇 날 며칠 같이 다니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딱히 부담스런 일도 아니고, 의외로 내 또래나 나보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신선했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할 때는 패키지 여행도 괜찮겠다.
여행사에서 마련해준 식사는 하나같이 별로였지만, 숙소는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삿포로 오도리 공원 인근에 위치한 삿포로 프린스 호텔이라는 곳이었는데, 위치도 좋고 객실 상태도 좋고 조식 뷔페도 훌륭했다. 노천 온천이 있어서 저녁에 엄마, 여동생과 셋이서 온천하면서 피로를 푼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근처에 오도리 공원이 있어서 도착한 날부터 오도리 공원을 열심히 산책했다. 마침 오도리 공원에서 라일락 축제를 하고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숙소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기분이다.
여행 셋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삿포로에서 머물렀다. 여행 셋째날은 패키지 여행을 마무리하고 자유 여행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는데,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면세점 쇼핑을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야겠다고 사정을 하셨다(면세점에서 나눠주는 마유 비누를 꼭 받아야겠다고 하셨던가...). 그래서 면세점까지 따라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면세점에서 엄마가 가이드와 면세점 직원의 말에 홀랑 넘어가 거액의 쇼핑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키지 여행 팀과 인사하고 우리끼리 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니조 시장에서 카이센돈 먹고 시내 구경하다가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꺼내셨다. 오늘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 전부 환불하고 싶다고. 그 때부터 나와 동생은 면세점에 전화하고, 면세점에서 환불이 안 된다고 해서 왜 안 되냐고 따지고, 어찌어찌 상급자랑 통화가 되어 폐점 시간까지 오면 환불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폐점 20분 전에 호텔에서 택시 타고 면세점까지 가서(택시 기사가 면세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구글맵을 보여주며 사정사정을 했다...) 폐점 직전에 면세점에 도착했다. 이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다리가 떨린다. 환불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와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이튿날인 여행 넷째날. 오전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경하고 오후에는 삿포로 역 쇼핑몰을 구경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돌연 여행온 걸 후회한다고 말해서 나와 동생 모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야말로 엄마가 오고 싶다고해서 무리해서 온 건데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삿포로에 며칠씩 있는 것도 지겹고 돈도 너무 많이 드는 것 같다고 했다. 나야말로 엄마 때문에 일부러 휴가내고, 잠 못자고 여행 준비하고, 엄마 위주로 일정 짜고 여행하는 건데 이런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고 눈물이 났다. 대체 왜 온 거니...ㅠㅠㅠ
그 밤 이후로는 엄마와 나, 여동생 모두 서로 폭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은 일정을 해냈다. 삿포로역 쇼핑몰에서 엄마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우동도 사드리고, 호텔 근처에 예쁜 공원이 있어서 밤낮으로 산책하고, 엄마가 힘들다, 재미없다 하면 숙소로 모셔다 드리고 나와 동생만 따로 나와서 둘이 여행했다(진작 이럴 걸).
사실 몇 년 전에도 엄마,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교토, 오사카 여행을 한 적이 있고 그 때도 비슷한 트러블이 있기는 했다. 그 때는 셋이서 하는 해외 여행이 처음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이번엔 트러블 없이 잘해내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니 엄마와 다시 여행하는 일이 있을까 싶고(엄마가 나랑 여행하고 싶을까? 나는 엄마랑 여행하고 싶을까?), 행여라도 엄마와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싶다.
* 나만 엄마와 여행하고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닌가 보다.
곽민지 작가가 부모님과 여행하고 쓴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책이 있는데
제목부터 공감대잔치다.
아무튼 나는 저렴한 가격에 혹해 오랫동안 품어온 로망 하나를 포기한 죄(!)로 여태껏 기술한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했고, 이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홋카이도에 다시 다녀오리라는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안 좋은 기억 때문에 두 번 다시 안 가기에는 홋카이도가 너무 공기 좋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론 그 때는 엄마도 여동생도 동반하지 않고 나 혼자 가야지. 그 때는 오지은 작가처럼 혼자서 홋카이도 보통열차 타고 여행해야지. 게살이 듬뿍 들어 있는 에키벤도 먹어보고 오비히로의 디저트 가게를 누비며 스탬프 투어도 해봐야지.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도 묵어보고, 세상의 끝 같은 해안가에 서서 다시 이곳에 오게 해달라고 손을 모아 기도해야지.
이렇게 써놓고 엄마가 또 여행 상품 저렴한 거 나왔다고 하면 통장 깨고 엄마랑 패키지 여행 갈지도 몰라, 나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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