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2030세대가 책 사는 데 쓰는 비용이 한 달에 1만 원도 안 된다는데(9천 원이라던가), 나는 며칠이 멀다 하고 책을 사고 또 샀다(내 텅장 눈 감아). 9월 초에도 몇 권 산 것 같은데, 이 글에는 9월 중순~하순에 산 책들을 소개해본다. 





이번 주에 2023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가들을 보다가 여성 작가인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와 찬쉐가 눈에 들어와 앞으로 쭉 따라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설 <소네치카, 스페이드의 여왕>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4권으로 출간되었기에 구입해봤다.​


영국 작가 중에는 줄리언 반스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해서 읽어보는 편이다. 최근에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을 읽었는데, 마침 이언 매큐언의 SF 소설 <나 같은 기계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기에 구입해봤다.

 




아니 에르노의 책 중에 국내에 출간된 책들은 다 읽었다고 기뻐하기가 무섭게, 아니 에르노의 책이 세 권이나 더 출간되었다. 일단 열린책들에서 출간된 <밖의 삶>과 <바깥 일기>를 구입했다. (남은 한 권은 사람의집에서 출간된 <아니 에르노>다). 책 디자인이 마음에 든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강화길 작가의 <풀업>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한정현 작가의 <쿄코와 쿄지>도 구입했다. 두 분 다 좋아하는 작가님이라서 매우 기대된다. 어제 윤고은 작가님 신간도 예약 구매 완료함. 팟캐스트 <책읽아웃> 최은미 작가님 편 듣고 <마주>도 장바구니에 넣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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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미라클 모닝을 하게 된 결과인지, 어젯밤에는 평소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그 덕분인지 오늘 아침도 평소 기상 시간보다 두 시간 빠른 5시에 기상. 그래도 뭔가 일찍 침대에서 빠져나오기가 아쉬워서, 어젯밤에 읽다 만 책을 읽었다. 


그 책은 바로바로 독일 작가 카르스텐 두세의 <명상 살인>.



















예전에는 추리소설, 범죄소설만 읽는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 장르의 책을 많이 읽었는데, 요즘에는 일 년에 다섯 권 읽을까 말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은 건, 어디선가 재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고, 세 권이나 나올 정도면 작품성은 몰라도 대중성은 보장된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지... 작가 이력이 특이한데, 작가 카르스텐 두세는 독일 본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라고 한다. 변호사가 범죄 소설을 쓰는 일은 종종 있지... 근데 이 작가, 변호사로만 일한 게 아니라 방송 작가로도 일했다. 주 장르는 시사, 범죄 이런 거 아니고 무려 코미디. 심지어 독일 방송계의 오스카상이라고 불리는 '그림메 상' 후보에도 올랐고, 독일 텔레비전 상과 코미디 상은 여러 번 수상했다고...(독일인의 코미디, 궁금하네...)


<명상 살인>은 카르스텐 두세의 첫 소설로, 출간되자마자 독일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고, 지금도 상위권에 있다고 한다. 높은 인기에 힘입어 2권, 3권도 나왔고, 한국에도 출간된 상태. 이야기는 살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평범한 남자가, 아내의 권유로 명상을 배우게 되면서 살인에 눈을 뜨는 그런 내용이다. 아직 도입부만 읽어서(주인공이 명상 스승과 만난 상태. 완전 초반이다) 앞으로의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지 무척 궁금하다. 무엇보다 소설 중간중간에 나오는 명상 관련 잠언들이 참 좋다. 가령,


당신이 문 앞에 서 있다면, 그것은 그저 서 있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부인과 다툰다면, 오로지 다툼에 몰두한다. 그것이 명상이다.

만약 당신이 문 앞에서 기다리는 시간을 부인과의 언쟁을 떠올리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저 멍청한 짓에 불과하다. - 요쉬카 브라이트너, <추월 차선에서 감속하기 - 명상의 매력>


하고자 하는 일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강박에 사로잡힌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일을 그냥 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유로운 자다. - 같은 책



이런 문장들이 참 좋았다. 요새 읽고 있는 또 다른 책


















제니 오델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이 생각나기도 했고. 이 책은 너무 좋아서 밑줄을 치다 치다 치는 게 지겨워졌을 정도. 지금 책 뒷면을 봤는데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가 삶을 더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삶을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장소에서 사색하는 것, 새들의 세계를 알아차리는 것, 아무것도 할 필요없이 그저 앉아 있는 것. 이러한 크고 작은 퇴거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알아차린다. 인식이 확장되면 더 많은 것들을 온전히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다. 트라이앵글 소리 정도로 들리던 세상이 실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합주였음을 깨닫게 된다. - 김보라, 영화감독



위 글을 쓴 김보라 감독님은 명상 마니아로도 유명하다. 영화기자 김혜리 님이 진행하는 팟빵 매거진 <즐거운 생활>에 출연해 명상의 매력에 대해 설명하신 적도 있다(오랜만에 그 방송 다시 찾아 들어봐야겠다.) 감독님에 따르면, 명상의 핵심이자 정수는 '알아차림'이다.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기. 이게 말로는 쉬워보이는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명상 살인>에서 인용한 문장처럼, 누구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기다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아내와의 말다툼을 생각하고, 아내와 말다툼을 하는 동안에도 그 순간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할 일을 떠올리는 식으로, 우리는 순간을 살지 못하고 그 전이나 그 후를 산다.


그래서 최근에 나는 가능한 한 멀티태스킹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하는 일을 줄이고, 해야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가능한 한 하지 않는 쪽으로 하고 있다. 이게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시대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삶의 자세와는 정반대라서(해야 하는 일은 꼭 해라, 하고 싶은 일도 해라, 하기 싫어도 해라 해라 해라!!!) 죄악감이 들 때도 있는데, 대체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이득을 보는 게 누구인지를 생각하라는 내용도 이 책에 나온다. 잘생긴 나무는 사람들의 가구로 쓰일 뿐이고, 못생긴 나무는 산을 지키고, 뭐 이런 내용도 나오고... 아아 집중력 떨어진다. 커피 마시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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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야 때문인지 불면증 때문인지 아니면 둘이 겹친 것인지, 새벽 세 시에 눈이 떠진 후로 잠을 다시 이루지 못했다. 덕분에 요즘 유행하는(벌써 한물 간 유행이 되었으려나) 미라클 모닝을 어쩌다 보니 하게 되었다. 수면 시간 3시간인 상태로는 하루 일과를 제대로 소화하기 힘들 것 같아서, 책을 읽으며 다시 잠을 청했는데 오히려 점점 더 정신이 말짱해지고 눈이 떠져서 책 두 권을 읽어치운 거 실화냐... (설마 불면증이 재발하는 건 아니겠지)

















새벽에 읽은 책 두 권 중 첫 번째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 낯선 이야기의 편지>이다. 오래 전에 최민석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듣고 궁금해서 구입했으나 왠지 손이 안 가서 안 읽었는데 책장에서 눈에 띄었지 뭐야...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을 읽은 건 두 번째인데, 전에 읽은 책이 그닥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이 책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너무 재밌었다. 


특히 <체스 이야기>가 그랬다. 초반에 체스 챔피언 나오는 부분은 <퀸스 갬빗>처럼 흥미진진한데, 중반 이후로 소설의 분위기가 확 바뀌더니 결말은 이게 뭐야? 싶었다. 근데 평론가 님의 해설을 읽고나서 소설을 다시 읽으니... 와 어떻게 이런 내용을 이런 형식으로 구현했나 싶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소설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두 번째로 읽은 책은 사진작가 케이채 님의 여행 산문집 <케이채의 모험>이다. 이 책은 예전에 케이채 님이 트위터에서 재고가 얼마 안 남았다고 하셔서 부랴부랴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제목 그대로 저자의 모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여행이 아니라 모험이라고 할 만한 게, 저자가 가본 나라(지역)들이 주로 아마존(브라질), 파키스탄, 가나, 수단, 남수단, 남극 등등 사람들이 웬만해선 잘 가지 않는 곳들이다. 


대왕 모기가 가득한 숙소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잔 이야기, 입국할 때 실수로 도장을 안 받아서 고생한 이야기 등등도 있지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어떤 우연, 어떤 인연을 만나 최고의 한 장을 찍게 되었는지로 맺어지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종국엔 감동적이었다. 좋은 사진은 "찍는" 게 아니라 "찾는" 거라는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케이채 님은 현재 그린란드를 여행 중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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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알라딘 서재의 달인 / 북플 마니아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로써 2012년부터 2021년까지 "10년 연속" 알라딘 서재의 달인으로 선정되었네요! (알라딘 서재 고인물?? ㅎㅎ) 

서재의 달인으로 선정되면, 예전에는 알라딘 달력도 주고 다이어리도 주고 머그컵도 줬는데 
요새는 선물을 많이 안 줘서 아쉬워요 ㅠㅠ 

그래도 한 해 동안 제 알라딘 서재를 찾아주시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정되신 분들 모두 축하드리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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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12-17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10년 연속이라니 굉장하십니다! 10개 모으신 분들에겐 뭐 특별한 거 안 주나요? 암튼 축하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1-12-17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키치님 서재의 달인 축하드려요!^^:)

바람돌이 2021-12-17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이 말이 쉽지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뭔가를 열심히 하는건 진짜 안 쉬운데.....
대단한 키치님 축하드려요. ^^
 




















대학생 때부터 이제까지 일본에 수십 번 넘게 다녀왔지만 홋카이도만큼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딱히 흥미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십 대의 어느 날, 오지은의 <홋카이도 보통열차>를 읽고, 홋카이도에 가게 된다면 그 때는 무조건 보통열차를 투고 홋카이도를 한 바퀴 빙 도는 여행을 해보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이다. 기차 여행, 그것도 보통열차를 타고 하는 기차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면 홋카이도에 갈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몇 주 전 엄마와,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홋카이도에 다녀왔다. 계기는 언제나처럼 홈쇼핑 채널을 보던 엄마가 홋카이도 여행 상품이 저렴한 가격에 나왔다며 나와 여동생을 꼬드긴 것이었다. 평소 같으면 돈 없고 시간 없다고 안 간다고 했을 텐데, 엄마가 말한 가격이 내 생각에도 너무 괜찮아서 가겠다고 하고 며칠 안에 여행사와 계약하고 결제까지 마쳤다. 홋카이도 여행 하면 무조건 기차 여행이라는 내 결심이 너무도 간단히 무너진 것은 아쉽지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평생 가볼 기회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모처럼 효녀 노릇도 해보자 싶었다.




문제는 여행 시작 이틀을 앞두고 엄마가 이런 말을 꺼내면서 벌어졌다. "2박 3일은 너무 짧은 것 같지 않니? 이왕 가는 거 3일 정도 더 있다 왔음 좋겠는데... " 동생은 프리랜서이고 나는 며칠 더 휴가를 쓸 예정이었기에 3일 정도 일정을 늘려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부랴부랴 비행기 티켓 구하고, 3일 더 묵을 숙소를 구했는데... 오.마.이.갓!!! 하필이면 우리의 일정과 아라시 삿포로 돔 콘서트 일정이 기가 막히게 겹쳐버렸다(참고로 아라시는 일본의 국민 아이돌 그룹. 내년에 은퇴한다고 전격 발표한 터라 콘서트 열기가 장난이 아니다). 


덕분에 삿포로 시내는 물론 근교의 숙소까지 가격이 평소 3~4배로 올라서 돈은 돈대로 깨지고, 그나마도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서 여행 직전까지 엄마랑 공항에서 노숙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이 때부터 불안한 징조를 감지했어야 했는데...





여행 첫째 날. 새벽 다섯 시에 공항에서 가이드 만나 미팅하고 일곱 시에 출국하는 일정이라서 새벽 세 시에 일어나 네 시에 공항버스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참고로 이 전날 밤에도, 새벽에도, 아고다에서 숙소 잡느라 동생이나 나나 잠을 못 잤다.


인천공항을 떠나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로 오타루에 갔다. 오타루는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흐렸지만, 내게 오타루는 '눈(雪)'의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환하고 쨍한 날씨보다 잔뜩 찌푸린 날씨가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오타루 운하를 산책하는 동안 가는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했는데 큰 비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타루는 항구 도시답게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는데 여행사에서 준비해준 식사는 그닥 맛있지 않았다(한국에서 먹는 일반적인 스타일의 초밥 정식 정도?).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음식점 수배해서 먹었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타루의 명물인 오르골당 앞에는 르타오를 비롯한 카페, 디저트 맛집 거리가 있다. 오르골당을 구경하고 나온 우리는 르타오를 시작으로 눈에 보이는 카페, 디저트 맛집마다 들어가 봤는데 대략 6~70퍼센트의 확률로 시식 행사를 하고 있었다. 덕분에 초콜릿, 쿠키, 케이크 등 오타루의 유명한 디저트는 거의 다 공짜로 맛본 듯하다 ㅎㅎㅎ (엄마 왈, 여행 중 가장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ㅎㅎㅎ) 


가이드가 엄청 유명한 커피집이 있다고 해서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해 마셨는데 엄청 맛있지는 않았다(차라리 그 돈으로 스벅 커피를 마실 걸...). 이후 가이드 때문에 바가지 쓴 일이 몇 번인가 더 있었는데(가이드가 추천해서 구입한 요거트가 돈키호테에서 훨씬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든가, 면세점에서 엄마가 구입한 약을 환불해주지 않겠다고 한다든가... -> 결국 환불 받았다), 안 그래도 패키지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데 엄마 등쌀을 못 이기고 억지로 갔던 나로서는 이 또한 참으로 실망스런 일이었다.


저녁은 여행사에서 천엔씩 돌려주고 삿포로 시내에서 각자 먹으라고 해서 호텔 주변에서 먹을 만한 곳을 찾아봤다. 삿포로에서 유명한 음식은 미소라멘, 징기스칸, 수프커리, 해산물 요리 등등인데 엄마가 징기스칸, 수프커리는 낯설어서 싫어하시고, 해산물 요리는 점심에 먹어서 싫다고 하셨다. 엄마는 우동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삿포로는 우동이 유명한 동네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 흔한 마루가메, 하나마루 우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호텔 근처의 라멘집에 들어갔는데, 여기가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유명한 집이었던 모양이다. 나와 동생은 맛나게 먹었는데 엄마는 짜다고 하셔서 아쉬웠다.






둘째 날에는 노보리베츠, 쇼와신잔, 도야호수 등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도시를 떠나 자연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나무도 풀도 서울과 다른 느낌. 일본 본토와도 달랐다. 전날과 달리 날씨도 엄청 엄청 좋았다. 햇빛의 강도도 서울과 달랐다. 덕분에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나는 여행 내내 두드러기가 올라오기도 했다(햇빛 알레르기 있는 분들은 선크림 꼭 바르고 긴팔 옷 챙기세요). 


노보리베츠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온천 지대라는데 족욕 한 번 못해봐서 아쉬움이 남는다(일정상 족욕탕 근처까지밖에 못 가봤다). 쇼와신잔이나 도야호수도 잠깐 보고 사진 찍고 지나가는 정도. 패키지 여행이 이렇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는데, 막상 내 돈 내고 경험하니 속이 많이 쓰렸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렀는데 가이드가 마유 크림을 권해서 귀얇은 엄마가 한 통을 샀다. 그거 바르면 화상도 낫고 물집도 낫고 온갖 피부 증상은 다 낫는다고 해서 여행 내내 열심히 발랐는데 딱히 효과는 못 봤다.


이 날 식사는 호텔에서 먹은 조식 뷔페를 제외하고 다 별로였다. 점심은 쇼와신잔 앞 휴게소에서 무슨 볶음 요리 같은 걸 먹고, 저녁에는 대게 뷔페라는 데에 갔는데 내가 생각한 대게 뷔페가 아니었다. 살도 없고 맛없고 질기고... (대게가 싫다고 처음부터 튀김이나 샐러드를 가져다 먹었던 내 동생이 위너...!) 밤에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가 젤 맛났다. 홋카이도 한정 삿포로 맥주였던가(삿포로 맥주 박물관에나 가볼 걸!).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많은 패키지 여행이지만, 그래도 연로한 부모님들 모시고 다닐 때에는 패키지 여행이 좋기도 하다. 일단 가격이 상당히 저렴한 편이고, 출국할 때부터 입국할 때까지 가이드가 책임지고 인솔해준다는 것도 좋은 점이다. 일정 내내 버스로 이동해서 체력 부담이 줄고, 캐리어 가지고 다니느라 힘 뺄 필요도 없고. 아는 것 많고 말 잘하는 가이드를 만나면 여행 내내 지루하지 않기도 하다(이번에 만난 가이드 분도 입담이 대단했다 ㅎㅎㅎ).


낯선 사람들과 몇 날 며칠 같이 다니는 것도 상당히 부담스런 일이었는데, 막상 해보니 딱히 부담스런 일도 아니고, 의외로 내 또래나 나보다 젊은 사람들도 많이 있어서 신선했다. 언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를 여행할 때는 패키지 여행도 괜찮겠다.


여행사에서 마련해준 식사는 하나같이 별로였지만, 숙소는 정말 기막히게 좋았다. 삿포로 오도리 공원 인근에 위치한 삿포로 프린스 호텔이라는 곳이었는데, 위치도 좋고 객실 상태도 좋고 조식 뷔페도 훌륭했다. 노천 온천이 있어서 저녁에 엄마, 여동생과 셋이서 온천하면서 피로를 푼 것도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근처에 오도리 공원이 있어서 도착한 날부터 오도리 공원을 열심히 산책했다. 마침 오도리 공원에서 라일락 축제를 하고 있어서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숙소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기분이다.






여행 셋째날부터 마지막 날까지는 삿포로에서 머물렀다. 여행 셋째날은 패키지 여행을 마무리하고 자유 여행을 시작하는 일정이었는데, 패키지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면세점 쇼핑을 엄마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해야겠다고 사정을 하셨다(면세점에서 나눠주는 마유 비누를 꼭 받아야겠다고 하셨던가...). 그래서 면세점까지 따라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면세점에서 엄마가 가이드와 면세점 직원의 말에 홀랑 넘어가 거액의 쇼핑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키지 여행 팀과 인사하고 우리끼리 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온 것까지는 좋았는데,


니조 시장에서 카이센돈 먹고 시내 구경하다가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엄마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꺼내셨다. 오늘 면세점에서 산 물건들 전부 환불하고 싶다고. 그 때부터 나와 동생은 면세점에 전화하고, 면세점에서 환불이 안 된다고 해서 왜 안 되냐고 따지고, 어찌어찌 상급자랑 통화가 되어 폐점 시간까지 오면 환불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받아내고, 폐점 20분 전에 호텔에서 택시 타고 면세점까지 가서(택시 기사가 면세점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구글맵을 보여주며 사정사정을 했다...) 폐점 직전에 면세점에 도착했다. 이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다리가 떨린다. 환불에 성공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와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라고 했지만...


이튿날인 여행 넷째날. 오전에는 홋카이도 대학 구경하고 오후에는 삿포로 역 쇼핑몰을 구경했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왔는데 엄마가 돌연 여행온 걸 후회한다고 말해서 나와 동생 모두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우리야말로 엄마가 오고 싶다고해서 무리해서 온 건데 엄마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고 했더니, 엄마는 삿포로에 며칠씩 있는 것도 지겹고 돈도 너무 많이 드는 것 같다고 했다. 나야말로 엄마 때문에 일부러 휴가내고, 잠 못자고 여행 준비하고, 엄마 위주로 일정 짜고 여행하는 건데 이런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고 눈물이 났다. 대체 왜 온 거니...ㅠㅠㅠ



   



그 밤 이후로는 엄마와 나, 여동생 모두 서로 폭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남은 일정을 해냈다. 삿포로역 쇼핑몰에서 엄마가 그렇게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우동도 사드리고, 호텔 근처에 예쁜 공원이 있어서 밤낮으로 산책하고, 엄마가 힘들다, 재미없다 하면 숙소로 모셔다 드리고 나와 동생만 따로 나와서 둘이 여행했다(진작 이럴 걸). 


사실 몇 년 전에도 엄마, 나, 여동생 이렇게 셋이서 교토, 오사카 여행을 한 적이 있고 그 때도 비슷한 트러블이 있기는 했다. 그 때는 셋이서 하는 해외 여행이 처음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이번엔 트러블 없이 잘해내고 싶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어버리니 엄마와 다시 여행하는 일이 있을까 싶고(엄마가 나랑 여행하고 싶을까? 나는 엄마랑 여행하고 싶을까?), 행여라도 엄마와 다시 여행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어떤 대책을 마련해야 하나 싶다.




* 나만 엄마와 여행하고 트라우마가 생긴 게 아닌가 보다.

곽민지 작가가 부모님과 여행하고 쓴 <걸어서 환장 속으로>라는 책이 있는데

제목부터 공감대잔치다.










아무튼 나는 저렴한 가격에 혹해 오랫동안 품어온 로망 하나를 포기한 죄(!)로 여태껏 기술한 몸 고생, 마음 고생을 했고, 이 죄를 씻기 위해서라도 조만간 홋카이도에 다시 다녀오리라는 새로운 로망이 생겼다(안 좋은 기억 때문에 두 번 다시 안 가기에는 홋카이도가 너무 공기 좋고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물론 그 때는 엄마도 여동생도 동반하지 않고 나 혼자 가야지. 그 때는 오지은 작가처럼 혼자서 홋카이도 보통열차 타고 여행해야지. 게살이 듬뿍 들어 있는 에키벤도 먹어보고 오비히로의 디저트 가게를 누비며 스탬프 투어도 해봐야지. 밤하늘의 별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에도 묵어보고, 세상의 끝 같은 해안가에 서서 다시 이곳에 오게 해달라고 손을 모아 기도해야지.



이렇게 써놓고 엄마가 또 여행 상품 저렴한 거 나왔다고 하면 통장 깨고 엄마랑 패키지 여행 갈지도 몰라, 나란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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