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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ㅣ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요즘 나는 오후가 되면 조깅 슈즈를 신고 로마 거리로 나선다. 조깅이 목적이 아니라 지도를 한 손에 들고 현대의 로마를 걸으면서 고대의 로마 거리를 머릿속에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다 우연히 일본인 노부부를 만났다. (중략) 내가 가르쳐준 길을 찾아 멀어져가는 노부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부러웠다. '저런 행복도 맛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어딘가에 소중한 것을 버려두고 온 듯한 슬픈 기분이 들었다. 다만, 멀어지는 노부부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뒤를 따라가다가 내 눈의 초점은 점점 넓어져갔다. 노부부도 다른 관광객도 현대 로마의 사람들도 모두 사라지고, 그 대신에 하얀 장의 또는 형형색생의 단의를 걸치고 회당과 신전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2천 년 전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명(天命)을 안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저 불가능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뜻이 아닐까. (pp.337-8)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역사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인생이 영화로 시작되었다? 전문 분야인 역사나 정치가 아닌 영화에서 그녀의 삶이 출발했다니, 어쩐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199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2년에 출간된 에세이집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를 읽어보니 진짜였다. 열두살 때 영화배우 게리 쿠퍼의 팬이 된 그녀는 고등학교 때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 <율리시즈>를 읽게 되었고, 그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대학 졸업과 함께 이탈리아로 건너가 역사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그녀의 삶을 바꾼 건 영화라고 봐도 부족함이 없다. 아니, 영화가 그녀의 삶을 바꾼 게 맞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에는 시오노 나나미가 평생에 걸쳐 가장 사랑한 배우 게리 쿠퍼를 비롯해 마를렌 디트리히, 오드리 헵번, 리처드 기어 등 영화배우와 펠리니를 비롯한 영화 감독, 그리고 그들의 영화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다. 오래된 영화들이라서 보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글을 읽는 재미가 워낙 좋아서 끝까지 즐겁게 읽었다. 영화를 고대 로마사에, 국제정치에, 이탈리아 사회 등등에 빗대가며 설명하는 그녀의 솜씨가 나는 너무나도 좋다. 어디 영화뿐인가. 어떤 책에서는 패션에, 또다른 책에서는 축구나 농구같은 스포츠에 빗대기도 한다. 대체 얼마나 관심사가 다양하고 박식하면 이처럼 지성과 위트가 적절히 어우러진 글을 쓸 수 있는 것일까. 게다가 1937년생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이란. 동년배들과 다른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역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나는 간간히 나오는 그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참 좋았다. 그녀의 옛 연인들에 대한 이야기, 아들에 대한 이야기, 유년 시절의 추억 등등이 이따금씩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나는 그녀가 여자로서 평범한 삶을 살지 않은 대가와 그 대신 특별한 삶을 택해 얻은 기쁨을 이야기한 마지막 글이 가장 좋았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며 화려하게 살았지만, 사적으로는 이탈리아인 남편과의 이혼 후 아들 하나를 키우며 싱글맘으로 살았다. 그녀라고 괴롭지 않고 외롭지 않은 순간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동년배 여성들, 적어도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들처럼 평이한 선택을 하면서 살았더라면 남편과 손을 잡고 해외여행을 하는 꿈 정도는 가볍게 이루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없이 부러운 풍경을 떠나보낸 뒤 그 위에 떠오르는 자신의 세계를 보면서 그녀는 천명을 느꼈다. 나에게 불가능한 것, 허락되지 않은 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훨씬 심플해지고, 비범의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를 보며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