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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지옥 紙屋 - 신청곡 안 틀어 드립니다
윤성현 지음 / 바다봄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내 삶에서 뗄려야 뗄 수 없는 매체 두 개를 고르라면 책과 라디오를 들 수 있다. 둘 다 아주 어릴 때부터 즐긴 취미이자, 지식의 통로이자,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의 장소이자, 세상을 보는 가치관을 형성해준 학교같은 존재다. 특히 라디오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컴퓨터를 지금처럼 자유롭게 즐길 수 없었던 학창시절에 누릴 수 있었던 유일하다시피 한 유흥이자 세상과의 통로였다. 공부를 하면서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라디오는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듣는 취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어졌는데, 그 시절 애청한 라디오 프로그램은 단연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이었다. 대학생이 되니 (공부든 데이트든 술자리든) 밤에 하는 일이 많아져 라디오를 듣는 시간도 자연히 심야로 옮겨졌는데, '라천'은 방송 초창기부터 끝까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꾸준히 들었다. 요즘도 라디오를 즐겨 듣는데, 심야 시간대에는 아직 라천을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인 프로그램이 없는 것 같다. 라천에서 활약한 유희열, 정재형, 임경선, 이동진 같은 분들이 다른 매체에서 활약하시는 걸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지만, 언젠가 컴백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라디오 지옥>은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을 만든 윤성현 프로듀서가 쓴 책이다. 라디오 PD가 쓴 책이라고 하면 어쩐지 나긋나긋하고 희망적인 내용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이 책은 대체로 냉소적이고 때때로 소신 있는 발언이 이어진다. 예를 들면 '서른 즈음에'는 죽어도 안 틀어 준다든가, 아이돌 음악은 틀지 말라고 해도 틀 거라든가, 방송에서 일본 음악을 틀 수 없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겠다든가, 주말에는 라디오를 듣지 말라든가 등등... 이런 소신이 라천같은 전무후무, 기상천외한 방송을 만들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기분 나쁘지 않았고 오히려 멋지게 보였다(그런 분이 <웃어라 동해야>의 열혈 시청자였다니 믿어지는가ㅋㅋㅋ). 이밖에도 라디오 PD가 하는 일이 소개되어 있고(생각보다 하는 일이 굉장히 많았다), 방송 최초의 사이버 DJ 윌슨과 <심야식당>의 탄생 비화, G드래곤 사건(?)의 전말 등 방송에서는 말하지 못한 후일담이 나와 있어 라디오 애청자로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자는 좋은 DJ의 조건으로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 방송도 잘 한다'는 것을 들었는데(p.86), 이는 비단 DJ뿐 아니라 방송을 만드는 프로듀서에게도 적용되는 것 같다. 저자가 이렇게 재치있으면서도 시크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라비엥 로즈', '낭만다방'처럼 포복절도하리만큼 유쾌한 코너가, '헉소리 상담소', '피플아 피플'같은 심야 방송답지 않게 정신이 확 드는 코너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여기에 '언제나 영화처럼', '일요야설무대'같은 감성 그득한 코너까지 있었던 것을 보면, 저자의 냉소와 소신이라는 지옥 너머에는 끝없는 낭만의 천국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