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악마들 - 십대 자녀 교육 지침서
케빈 리먼 지음, 김세영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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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느날인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갑자기 변했다. 혼자 자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무서워서 같이 자던 녀석이. 친구들과 밖에서 놀러 나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친구들과 만나 패스트푸드점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방 문을 닫고 무엇인가를 하기도 한다. 연예인의 사진이 방을 덮기도 한다. 묻는 말에 답이 짧을 때가 많아진다. 함께 가자는 이야기에 싫다는 대답이 훨씬 많아진다. 

 

대화가 쌍방통행이 아니고 일방통행이라고 느낄 때가 생긴다. 자신이 잘 한 것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잘한것마냥 행동을 한다. 이러한, 행동이 사춘기 아이에게 생긴다. 아이가 생길 때 아무런 대처나 준비도 없이 생긴것처럼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날부터 아이는 훌쩍 자라버렸다. 자신은 이제 아이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고 부지불식간에 자란 키만큼이나 어른인 나와 맞짱(??)을 뜬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사춘기가 빨리 온다고 한다. 초등학생만 되어도 사춘기가 온다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보니 차라리 초등학교를 다닐때 사춘기가 오는 것이 낫지 않나 싶기도 하다. 중학생때보다는 그래도 아직까지는 어린 아이의 나이로 느껴지니 상대적으로 다루기(??) 쉽다. 사춘기가 지나면 다시 내 자녀로 돌아온다는 이야기도 하는데 지금은 조심히 잘 바라봐야 할 대상이 되었다. 아이도 넘치는 호르몬과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어 그렇겠지만 부모도 마찬가지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제, 겨우 한 명의 사춘기 소녀가 있다. 앞으로 2명의 사춘기 아이들이 새롭게 생길 듯 하다. 늘 그렇듯이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서로 힘들다. 둘째, 셋째로 간다고 하여 딱히 더 슬기롭게 대처하지는 않겠지만 경험한 바에 근거하여 대처할 수 있는 정도는 생길 듯 하다. 자아가 형성되어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하는 어른이 되려는 아이와 어른이 된 아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부모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조금씩 적응을 해 나가는 단계이다. 아이도, 엄마, 아빠도. 남매들끼리는 원래 그러니 적응이고 뭐고 그런 것은 없는 듯 하다만.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어떤 행동과 말이 가장 현명하고 올바른 지혜로 이 상황을 잘 헤쳐나가 잘 자라는 자녀가 될 것인지의 여부는 모른다. 정답이 없는 삶에서 정답을 찾는 것만큼 멍청한 짓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 꼭두가시가 아닌 자녀지만 부모로써 적당한 가이드라인정도는 알려줘야 하는 것도 부모로써의 역할일 것이다.

이런 저런 루트를 통해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대부분, 자녀들이 위대한 성인이 된 부모들의 이야기라서 솔직히 별로 와 닿지 않는다. 우리 아이가 위대하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거창한 느낌이 들어서다. 어딘지,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루트를 따라 걸어가게 만든 부모의 이야기인데 그 부모도 사실 상당히 대단한 부모라서 말이다. 어딘지 아이를 스스로 자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조정한 듯 한 느낌이 들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갑자기 변한 아이들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한다. 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어쩌면 사춘기 아이와 부모의 어려움이 아닐까 한다. 특히, 넘치는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발산하는 방법이 잘못되었을 때의 대가는 상당히 크다. 이미 늦어 버린 경우도 있다. 부모로써 올바르게 인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런데, 표현 방법이 올바르지 못해 시행착오를 거치고 잠시 삐뚫어질 수는 있어도 결국 부모가 올바른 인생과 삶을 살고 있다면 아이는 원래 제 자리로 찾아가는 듯 하다.

 

책은 5일만에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정상으로 만들어준다고 한다. 이럴 때 대부분 청개구리처럼 말도 안된다면 싫어하기는 하지만 읽는다.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책은 내가 볼 때 원칙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와 자녀가 원칙을 정했으면 그 원칙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부모가 지키도록 한다. 단, 원칙을 지킨다면 그 이외에 것은 자녀를 믿고 의심하거나 따지지 않는다. 자녀는 끊임없이 부모를 테스트한다. 요 정도는 해도 괜찮은지에 대해서 말이나 행동으로 시험을 하고 부모의 반응을 살핀다. 이럴 때 부모는 정한 원칙을 지키도록 한다.

 

원칙을 지킨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물론, 자녀가 스스로 할 수 있게 해야한다. 도와달라고 도와주면 안 된다. 자녀는 할 수 있는 것도 빠르고 편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모를 이용한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면 사춘기 아이들은 더더욱 부모로부터 멀리 달아난다. 이용하려고만 한다. 쉽지 않다는 것은 안다. 부모는 내리사랑이라는 표현처럼 자녀가 조금이라도 어려워하면 자신도 모르게 도와주려고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아빠에 비해 엄마는 이런 점에서 더욱 심한 편이다.

 

모든 자녀의 문제는 부모에게서 나온다. 부모가 올바른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살아간다면 잠시 호기심에 일탈을 경험하는 자녀들도 중심에서 기다리는 부모에게로 다시 돌아온다. 부모가 올바르지 못하면 자녀에게 자신의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주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조차도 모르고 아이에게 잘못된 충고를 해 준다. 자녀는 부모도 제대로 못하면서 자신에게 지시한다는 반발심이 생긴다. 부모가 올바르다는 것은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을 다녔거나 좋은 회사를 다녀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루종일 집에서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더구나, 언제나 자녀를 받아줄 넉넉함도 갖고 있어야 한다. 말과 행동으로 자녀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과연 자녀가 나를 보고 제대로 잘랄 것인지도 생각해야 한다. 자..자..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자녀 키우는 것이 힘들다. 나 자신도 잘 못하는 데 말이다. 그래도, 사춘기 자녀는 폭발하고 있다. 함께 폭발하면 망할 수 있다. 그래서, 원칙을 세워 자녀에게 지키도록 하고 자신도 지키도록 해야 서로 합의점이 생겨 선이 유지될 수 있다. 젠장, 내 앞가림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렵다.

 

그래도 자녀를 둔 부모라면 - 부모라는 이름만 듣는 부모말고 - 어쩌겠는가? 사춘기 자녀도 내 아이고 내가 함께 가야할 식구인데. 이런 책을 읽어보면 뻔하다고 할 수 있어도(인간관계 책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결국 부모와 자녀관계도 인간관계라 상대방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읽으면서 도움을 받고 실천을 했는데 자녀와의 관계가 더 좋아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못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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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을 입은 원시인 - 진화심리학으로 바라본 인간의 비이성과 원시 논리
행크 데이비스 지음, 김소희 옮김 / 지와사랑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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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이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유신론자로써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싫어 그런 것이 아니라 이미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익히 알고 있었기에 굳이 더이상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몇 권의 책을 읽고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이제는 대략 감이 왔기에 그에 대한 더이상의 논증이나 증명을 알려고 한다는 것이 오히려 시간 낭비에 속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유신자로써 무신을 배척하고 무신을 무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유신은 믿음의 영역이라는 것은 깨달았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는 표현처럼 믿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무용지물이다. 믿으면 된다는 표현에는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필요없게 만드는 영적인 측면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없는 것이 아니고 증명이 되지 않고 비과학적이는 논리로는 풀리지 않는 것이 바로 믿음의 영역이다.


하지만, 유신이라고 하여 모든 것을 다 믿지는 않는다. 유신이라는 이름하에 벌어지는 엄청나게 패악무도한 일들이 버젓이 저질러지는 일들에 대해 기가 차지도 않는 심정을 갖고 있다. 또한, 너무나 말도 안되는 일을 갖고 종교라는 이름과 영적이라는 표현으로 전부 무마하는 것에 대해서도 믿지 않는다. 초능력을 재미삼아 보기는 하지만 믿지는 않는 것과 같다. 일단, 가면 갈수록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눈에 보여도 제반사항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치부될 수 있어도 사람들이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이 가장 대표적으로 행하는 것이 논리적인 증명이나 증거를 전부 무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분명히 그럴 수 있다고 보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 선에서 되어야 하는데 너무 많이 안되는 것을 그저 믿으라고 한다고 믿는 것이 과연 믿음일까에 대한 의문이 든다.


현대는 과학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과학이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다. 과학이 종교가 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정확하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과학적이지 못한 행동들이라 할 수 있지만. 과학이 발달한 것은 모든 것을 증명하고 밝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왜 그런지에 대한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반대상황까지 감안해서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보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논리적으로 왜 그런지에 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증명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과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럴 것이라는 논리는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증거가 없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학에 비해 비논리적인 미신과 영적인 것들은 증거가 없어도 받아들이라고 한다. 아니, 믿으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고대에부터 인류에게 벌어진 행동이다. 인류는 자신이 증명하지 못하는 것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만들어 믿음으로 대체를 한다. 워낙 알고 있는 것이 없다보니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증거를 제시할 수 없는 시대에는 이런 것들이 오히려 자연스러웠지만 현대처럼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과거와 같은 패턴을 답습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상식이라는 것이 풍부하지 못한 시절에는 지구는 평평하고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웠지만 이제는 누구도 그걸 믿지 않는다. 아니, 이제는 그걸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상식이라고 표현한다. 과거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인데 말이다. 이토록 과거와 달리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예전과는 달리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비과학적인 일들이라 지칭하는 초자연스러운 일과 초능력, 미신, 영매등등이 전부 말도 안되어야 할 텐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것들을 믿는다.


책에서는 지구의 역사가 몇 천년이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에 반하는 내용이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보다는 편리하게 이해하기 쉬운 것을 믿는 편이라 몇 천년이라고 아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보니 그렇게 사람들은 믿는다고 한다. 인간은 여전히 홍적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부분이 세상에 알려지고 과학으로 비밀이 풀렸다고 해도 똑같이 이성보다는 믿음을 택한다고 한다.


특히, 여러 책에서 언급한것처럼 인간이 생존하는데 중요했던 패턴을 짓는 것이 아직도 인간의 본능에 남아 우연이 반복될 때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고 필연이라 생각하고 신의 뜻이라 규정한다. 이를테면, 동전을 50번 던지면 확률상 25번은 앞면, 25번은 뒷면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40번이 앞 면이 나올 수 있다. 1000번을 던져도 700번이 앞면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은 확률상 반반이라 훨씬 더 많은 데이터가 쌓이지 않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만 인간은 그런 확률까지는 계산하거나 예측하지 않고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우연이라 치부하거나 제대로 된 지식이 없다보니 무엇인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이를 그때까지 알고 있는 인간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밝혀내지 못하다보니 무엇인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과학적이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할 수 있는 공감대를 찾아낸 것이다.


문제는 이제 과학이 발달하여 많은 미지의 것들이 밝혀졌고 과거에 믿었던 믿음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고 증거를 찾아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믿는다. 또는 믿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무신론자들과 유신론자들은 싸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종교라는 이름과 믿음으로 벌어지고 자행되는 수많은 살인과 맹목적인 복종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 봐야 한다고 본다.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 타인을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 것은 분명히 잘 못 된 것이고 나와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그를 핍박하고 처단하는 것은 더더욱 잘 못 된 것이라 본다. 책에서 언급처럼 종교의 신들은 인간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인간이 상상할 수 있을 정도까지만의 신이란 말인가? 신이라면 완전히 다른 관점도 있어야 할텐데 말이다. 인류 최대의 히트상품이 신이라는 비아냥이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책에는 리처드 도킨스와 칼 세이건이 엄청나게 자주 언급이 된다. 차라리, 그 두 사람의 책을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실제로도 좀 더 풍부한 예화를 들어 설명하고 이해하고 읽기 쉬운 것은 칼 세이건이였고 리처드 도킨스는 너무 똑똑해서인지 읽기 쉽지는 않았다. 여하튼,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동한다면 좋겠지만 인간이라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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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 - 컬럼비아대학교 인간성향 대탐구
하이디 그랜트 할버슨.토리 히긴스 지음, 강유리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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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행동경제학은 심리학에서 출발했다. 심리학은 철학에서 출발했다. 철학을 알면 심리학을 알고 행동경제학을 파악할 수 있느냐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라고 답변해야 할 듯 하다. 철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학문은 인류 역사를 돌아 볼 때 얼마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존의 학문의 바탕을 두고 과학과 통계의 발달로 폭발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다. 미처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에.

 

인간의 행동을 밝혀내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을 밝혀냈다. 그 무의식은 의식의 집합체이다.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모르고 한다고 해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인 경험과 지식과 인격의 총합체가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지구에 사는 수십억 인구가 모두들 똑같이 행동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해도 특정한 조건하에 인간의 행동은 몇가지 특성을 보인다.

 

이런 특성들을 구별해서 몇 가지 특징들로 구분해서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에는 없었던 새로운 분야이다. 현재로써는 재미삼아 볼 수도 있지만 어느정도 인간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밝혀내는데 있어 큰 진전이 있었다. 나조차도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몰랐는데 새롭게 제시되는 이 분야의 글을 읽으면서 '아하!'하게 된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하는 것들도 누군가 나에게 슬쩍 '넛지'를 들이밀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안다고 해도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최소한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분명히 큰 힘이 될 것이라 본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해 더 연구한 분야가 행동경제학이라 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결정들은 돈과 연결되어 있고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버젓이 저지르는 우둔한 행동을 밝혀내어 그 무서움을 알려주었다. 혹자는 부자들은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을 하는 글을 내기도 했지만 부자라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다. 똑같은 인간이라는 전제는 달라지지 않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행동경제학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전파(?)되었고 사례등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어 새로운 것보다는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부분과 어떻게 연결해서 알려주느냐가 책마다 다소 다른데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는 드디어 행동경제학에서도 더 세부적이고 색다른 접근과 시도를 통해 인간의 행동을 규명하는 작업이 진전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는 알려준다.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솔직히 그런 점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눠져 있는데 1부에서는 주구장창이야기하는게 바로 성취지향과 안정지향에 대한 이야기다. 성취지향은 사람과 안정지향인 사람은 어떻게 다른지를 알려준다. 성취지향이 좋은 것이고 안정지향은 나쁜것이 아니라 이 두 성향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너무 장황하다 싶을 정도로 길고 세부적으로 설명한다.

 

단어로 인한 착각때문인지 성취지향은 긍정적이고 안전지향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성향에 따라 성취지향인 사람도 있고 안전지향인 사람도 있다. 더구나, 성취지향인 사람도 안전지향인 행동을 할 때가 있고 안전지향인 사람도 성취 지향인 행동을 할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달랑 두가지 성향으로 구분하고 규정할 수는 없다. 다만, 이 두가지 성향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변별하기 위한 필터링으로 보는 것이다.

 

책 초반에 자신이 성취 지향인지 안전 지향인지에 대한 테스트가 있다. 당연히, 나는 안전지향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고 테스트도 안전지향으로 나올 것이로 여겼는데 막상 해 보니 1점이 더 성취지향으로 나왔다. 다소 의외였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1점 차이라 두가지 성향이 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평소에 이랬다 저랬다하는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럴때 흔히 중도라는 표현을 쓰는데 생각해보면 정치적이나 사회적이나 투자적인 측면을 따져볼 때 성취쪽으로 갈 때도 안전쪽으로 갈 때도 있는 것을 보면 맞게 나왔다고 할 수 있지만 몇 개 되지도 않는 질문에 따른 결과라 재미로 봐야 할 듯 하다.

 

성취지향이냐 안전지향이냐에 따라 설득하는 방법이 다르고 제안하는 방법이 다르다. 무조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상대방의 성향을 알고나서 그에 따른 작전을 짜 설득을 한다면 그만큼 상대방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최선을 다해서 설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잘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안전지향인 사람에게 진취적인 미래를 제시하면 안되고 성취지향인 사람에게 안전한 점을 부각하면 설득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성취지향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얻을 수 있는 점을 부각해야 하고 안전지향인 사람에게는 손해보지 않는 점을 부각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이런 방법이 아니라 성취지향인 사람에게 손해 보지 않는 점을 이야기하거나 안전지향인 사람에게 무엇인가 얻는 것을 이야기하면 힘들다. 한편으로는 성취할 수 있는 부분에는 얻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고 보수적인 성향에는 손해보지 않는 점에 포커스를 맞춰서 설득하는 방법을 펼쳐야만 된다.

 

기존에 행동경제학에서 실험했던 사례들은 인간의 행동이 특정 환경에서 대부분 사람이 비슷한 행동을 한다고 결과를 발표하며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이 책 후반부의 이야기이자 이 책의 제목인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가 부제로 달려있는데 기존 행동경제학에서 한 실험에서 부족한 것은 각자의 성향에 따른 행동을 설명하지 않아 불안전하다는 것이다.

 

반쪽짜리 실험이 되었고 그에 따른 결과도 부족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어보니 일견 맞는 말이다. 성취지향이냐 안정지향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현재의 환경이 성취지향이나 안전지향이냐에 따라 결과가 미세하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설득되었다. 솔직히, 기존 행동경제학의 설명에 대해서도 의문이나 의구심은 전혀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새롭게 다른 관점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세부적으로 심리학도 들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큰 집단으로 묶을 수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각자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예측불가능인데 그걸 몇 몇으로 규정짓고 한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존재할텐데 이렇게 약간만 조건을 달리해도 다른 의견 - 기존의 실험과 결과가 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이 나올 수 있다. 인간이란 참으로 심오하고 대단한 존재라는 느낌마저 든다. 물론, 한편으로는 이미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정한 후에 그에 맞는 실험과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비판도 할 수 있을 듯 하다.

 

책에 나온 설명을 실생활에서 적용하면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상대방에게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인간이란 복합적인 사념의 덩어리라 예측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어도 이런 것을 알고 사람을 만나고 협상을 하고 설득한다면 엄청나게 다른, 아니 미세하게라도 다른 차이를 이끌어 낼 것이라 본다. 도대체, 인간의 행동을 파악하고 그 원인까지 파고 들어간다는 것은 참 재미있지만 무서운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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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수업 -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법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데이비드 케슬러 지음, 김소향 옮김 / 인빅투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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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래 되어 기억도 나지 않지만 저자의 전작인 '인생수업'을 읽었다. 나름 자기계발류 서적들을 읽어나가면서 확장할 때 '행복한 이기주의자'을 비롯하여 그런 종류의 책을 함께 읽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하면 그런 책들은 전부 나라는 사람에게 좀 더 집중하는 책이였고 타인보다 내가 더 우선이라는 책이였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지금이나 그때나 나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는 타인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그 책들을 읽었다는 기억만 있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히 나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한편으로는 나중에 누군가 - 아마도, 세이노였던 듯 - 그런 책은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이 읽어야 하는 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달려가야 하는 시기에 그런 책을 읽으면 아무래도 목표에 집중하고 달려가기보다는 멈추게되니 말이다.

 

이번에 '상실수업'을 읽기 전에 저자가 죽었는지 몰랐다. 더구나, 이 책을 집필하고 있을 때 이미 투병중에 썼던 것이고 어느정도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하니 이 책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어야 하는 방법을 알려준 책이라 할 수 도 있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음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부정 - 분노 - 타협 - 절망 - 수용 이 다섯 단계를 통해 식구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다섯 단계로 나눠져 있지만 단계별로 차례 차례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단계가 갑자기 나타나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특정 감정이 뜬금없이 나타난 다음에 다른 감정은 겪지 않고 인정하는 단계로 곧장 직진할 수도 있다. 인간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노력을 할 수는 있겠지만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데는 각자 자신만의 방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 질 수 있다. 나이와 함께 주변 사람들이 어느날 갑자기 사망소식을 듣게 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다행히도 지금까지 내 주변에 정말로 친한 사람중에는 아직까지 돌아가신 분이 없다. 책에서 언급되는 식구들만을 - 친구들이나 가까운 지인들도 있지만 - 한정했을 때처럼 식구들중에 나보다 먼저 돌아가신 분이 아직 없다. 축복이라고 하면 축복일 수 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말고는 내가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경우가 없어 솔직히 그 감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른다. 어떤 감정인지. 평생 알고 싶지 않는 감정이지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굳이 미리 예측하고 감정을 대처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때가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감정에 대처하면 될 것이라 본다.

 

그렇다 해도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만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도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라서 점점 의미있는 분들의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의외로 담담하기도 한 면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정말 친한 친구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친척형이 갑자기 죽고(고등학교때라) 교회에 식구들을 다 알고 있는 녀석이 자살을 했을 때도 딱히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그런 자리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에 대해 곤란해 했지만 곧장 수용이라는 단계로 넘어간 듯 하다. 또는 부정이라는 단계에서 생각이라는 것을 깊게 하고 싶지 않으니 수용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내 인생에 있어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이 아직까지 늘 내곁에 있기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본다. 사실,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미리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한다. 한편으로는 곧장 수용할 것 같다. 내 성격상.

 

엄청난 상실을 겪게 되는 것이다. 식구의 죽음은. 식구의 죽음이 아니라도 엄청난 상실을 겪게 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이런, 상실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책에서는 소개하고 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사례가 소개된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준비하고 맞이한 사람들은 그나마 괜찮은데 뜻하지 않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식구들은 감정을 준비하고 대처할 틈도 없이 사실만이 나에게 온다. 이럴 때 바로 부정, 분노, 타협, 절망중에 하나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억지로 극복하려고 하지 말고 그 감정에 바닥까지 가서 충분히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느낀 후에야 비로소 다음 감정으로 넘어가거나 수용이라는 최종단계에 갈 수 있다. 억지로 이겨내려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고 제대로 감정의 치유가 되지 않아 평생 감정의 찌꺼기가 남아 인생에 있어서도 잘못된 길로 가게 만들 수 있다.

 

뜻하지 않은 죽음을 맞이한 당사자는 몰라도 남은 사람들은 온갖 잡념에 빠져든다. 더 잘해줄껄.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하필 그 시간에 보내거나 만나자고 했을까?등등.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듯 싶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 이해를 할 수 없다. 이런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칠 때 주변 사람들은 어정쩡하게 어설픈 도움을 주려하기보다는 차분히 기다려주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 보인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 주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한다. 나같은 경우에도 그런 경우에 할 말도 없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편인데 고맙게도 그런 경우에 나중에 나에게 그런 행동에 대해 감사를 표할때 오히려 내가 놀랄 때도 있다.

 

나같은 경우에는 대부분 곧장 인정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분노하고 부정하고 그외의 감정들이나 생각을 한다고 상황이 변할 것이 없다고 보기에 인정을 하는데 다행히도 감정의 찌꺼기는 남지 않았는데 책에서 언급된 것처럼 뜻하지 않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정말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없어 어떻게 그런 상황이 나에게 왔을 때 받아들이고 대처할 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현재, 상실을 겪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머리에 남지도 않을 것이다. 상실은 준비하고 예측해서 나에게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내 의지와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찾아온다. 책은 분명하게 영혼의 존재를 믿는다. 그렇기에 그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이라고 외면하기보다는 책을 읽어 미리 대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또는 내 주변의 사람에게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내가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하는지 100% 부합할 수는 없어도 비슷하게라도 마음가짐을 갖고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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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
게르트 기거렌처 지음, 황승식.전현우 옮김 / 살림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번역 된 책을 볼 때는 항상 출판된 년도를 보는 습관이 있다. 우리나라에 들어 온 시기가 아니라 이 책이 외국에서 출판 된 년도를 보면서 이 책에 대한 내용이 언제 세상에 나와 사람들에게 선택을 받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출판된 해가 오래되었으면 충분히 다른 책을 통해 비슷한 내용이 이미 우리나라에 전파되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왜 이제서야 이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게 된다. 좋은 책이라면 지금까지 번역되어 출판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도 들고.

 

책이 출판되고 10년이 넘어 우리나라에 선을 보였다. 그 기간동안 충분히 다른 책을 통해 비슷한 사례가 전달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뒤 늦게라도 번역된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중에 하나가 저자가 독일인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책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았던 시기였고 최근에는 제법 많이 번역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내용을 읽다보니 비록 독일 사람이 지은 책이지만 미국 사례 중심으로 되어있고 저자도 주로 활동한 것이 미국이였다. 약간의 아이러니한 배신감을 느낀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숫자가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숫자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진실은 분명히 하나인데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사람마다 천차만별이 나온다. 책에서도 언급한 죽음과 세금외에 확실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벤자민 플랭클린이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세금도 확실하지는 않다. 세금을 믿고 내면 안 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험으로 아는 것처럼 말이다. 피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실이지만.

 

세금마저도 확실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어떤 방법으로 숫자를 제시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람들은 숫자를 보고 거짓말을 믿고 진실이라 여긴다. 숫자를 어떤 식으로 가공해서 전달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같은 현상과 숫자를 보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 숫자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통계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 어렴풋이 아는 것에 대해 명확한 상징을 보여주지만 통계가 바로 사람들을 속이는데 이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통계는 결코 사실은 아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숫자를 대입해서 통계를 가공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에게 믿고 싶은 바를 믿게 만들어 주거나 믿음을 깨는 역할을 한다. 어느 누구도 그 통계가 사실인지 여부까지 따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당연히 맞을 것이라 단순하게 믿는다.

 

통계를 함축해서 표현할 때 사람들은 더더욱 구체적인 것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통계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만 그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되거나 배제되고 이야기하기 나름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지적을 받아도 얼마든지 빠져나갈 방법이 이미 그 통계안에 포함되어 있어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믿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광고가 있다. '한국인 3명 중에 2명은 암으로 사망한다.' 신뢰할 수 있는 공인된 협회에서 발표한 자료를 갖고 광고한다. 여기에는 생략된 것이 있다는 사실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는다. 한국인을 65세 정도로 나눈 후에 65세 전에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3명중에 2명이 될까? 65세 이후에 암으로 사망하는 사람은 2명이 넘을까? 또한, 65세 전에 사망하는 사람이 3명중에 2명이 될까? 

 

의료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65세 전에 사망하는 사람이 3명 중에 2명이 되었을 것이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그런 경우는 갈수록 희박하다. 65세 이후에 암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의료기술의 발달로 최근에야 알게 된 사실일 것이다. 이처럼 '한국인 3명 중에 2명은 암으로 사망한다'는 진실이지만 너무 많은 것을 생략한 상태이다. 흔히 말하는 공포마케팅을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숫자로 속이는 행위인 것이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을지라도 숫자를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백분율 자체는 결코 사람들을 속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백분율로 무엇인가를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와 더불어 사고가 경직되면서 생각을 멈추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곧이 곧대로 믿어버린다. 백분율을 계산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믿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고 숫자로 나타낸다는 것은 믿음을 주는 행동이다.

 

문제는 백분율을 다루는 사람들조차도 백분율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 이용하지 않고 자신에게 온 백분율의 숫자를 믿고 더이상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하기 쉽게 백분율이 아닌 숫자로 표기하면 된다. 100명 중에 10% 사람이라는 표현보다는 100명 중에 10명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할 때 듣는 사람이나 표현하는 사람들이나 명확하게 머리속에 인식되고 계산할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2002년도인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명확한 숫자로 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숫자를 보여줘서 사람들에게 신뢰도를 쌓고 믿음을 심어준다. 어느 누구도 직접 계산하려 하지 않는다. 골치 아픈 숫자로 다가온 통계는 숫자 자체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지만 이용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사람들을 이용하기 편하면서도 설득하기 좋은 방법이 되어 버린다. 단순한 것을 단순하게 보여주기 위해 통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을 복잡하고 어렵게 보여주기 위해 통계를 이용하는 것이다.

 

개념에 대한 정의와 방법과 주장에는 큰 공감과 동의를 하면서 책을 읽게 되지만 이를 서술하는 방법은 다소 지겹고 장황하다. 약간은 번역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지만 - 이것도 책에서 언급한 바로 그 이야기일수도 있다 - 핵심만 이야기하면서 넘어가도 될 부분을 너무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반복해서 이야기를 하다보니 좀 지겹다. 이미 알려줄 것은 다 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반복해서 언급하고 주장하고 검증하다보니 읽는 것에 대해 인내심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유방암과 에이즈라는 두개의 큰 카테고리로 책의 3분의 2를 채워 넣으면서 서술되다보니 이미 답은 나와있고 그 이유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되돌이처럼 이야기되지만 그나마 남은 3분의 1은 간단하게 핵심적인 내용만 알려주고 있어 머리에 더 쏙쏙 들어온다. 극단적으로 본다면 1부와 3부만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인가를 권하는 사람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숫자로 권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숫자를 믿는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알기 쉬운 표현 방법을 통해 숫자를 이야기하면 서로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확실하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상태에서 결정을 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표현한다면 일단 의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엇인가 감추기 위해 어렵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그게 바로 숫자의 비밀이고 진실이며 확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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