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세번째 밀란 쿤데라의 책이다. <무의식의 축제>,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보다 좋았다.
그러니 인정하시라. 당신을 유배 보내거나 사형할 태세인 이들과 같이 산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그들과 아주 친해지기가, 그들을 사랑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p133
인간에게 상처입었을 때의 가장 큰 부작용은 모든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잊는다는 점이다.
감시탑의 탐조등, 저녁 무렵 몇 번의 개 짖는 소리, 이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어린 중대장. -p179
문장이 좋았다. 역시 필력이 대단한 작가시다.
루드비크의 말을 들으며 우리의 감정은 감탄과 반감이 뒤섞였다. 그가 너무 자신만만한 것이 거슬렸다. 그는 그 시절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과시하고 다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미래 자체와 어떤 비밀 협약을 맺어 그 이름으로 행동할 위임장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우리 신경에 거슬렸던 것은 어쩌면 그가 갑자기 예전에 우리가 알았던 그 청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략)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을 끌었다. 그의 생각들은 가장 깊숙이 감추어진 우리의 꿈과 만나고 있었다. 그 생각들은 갑자기 우리를 위대한 역사의 차원으로 높이 올려놓고 있었다. -p236~237
체제비판적인 내용이 많은 소설이다. 이 소설은 출간 후 금서로 정해졌다.
공산당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조하려고 애썼다. 그들은 스탈린이 새로운 예술에 대해서 내린 그 유명한 정의, 즉 민족적 형식 속에 담긴 사회주의적 내용이라는 정의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었다. -p241
정권이 만들어낸 예술은 매력적이지 않다. 예술은 개인에게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이다. 정권을 찬양한 예술은 그 정권이 허물면 같이 사라진다. 정권을 비판한 예술은 오랜 시간 살아남는다.
이렇게 민속 노래 가사를 통해 밝혀진 그녀의 모습을 알아보고 나자 마치 내가 이전에 천번은 되풀이되었던 사랑을 그대로 다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득히 먼 옛날의 악보를 연주하고 있는 것만 같기도 했다. -p247
문장이 좋았다. 소설 속에서 전통 혼례 장면이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옛날 우리의 전통, '함 사세요.' 가 생각났다. 가족, 친구,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린 축제, 연극 같았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친애하는 족장 어른,
이 진실된 구혼자는 왜 이 진실된 아가씨를 신부로 맞이하려 하는지요.
꽃을 위해서인가요, 열매를 위해서인가요?
족장은 답했다.
누구나 달 알지요,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은 피어나고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
하지만 꽃은 달아나고
열매가 오지요.
그러니 우리가 신부를 맞이함은 절대 꽃 때문이 아니라 열매 때문이라오.
열매는 우리의 양식이니까. -p250
꽃, 열매의 상징이 좋았다.
여자의 생각을 다루는 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다. 이성으로 여자를 설득하려 하거나, 아주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여자의 의견을 반박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없다. 여자가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이미지(원치이나 이상, 신념 같은 것)을 파악하고, 우리가 바라는 그녀의 행동과 그 이미지가 조화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궤변을 동원하여) 노력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 -p307
꼭 여자 뿐 아니라 설득, 협상의 원칙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죽음과 정면으로 대면했습니다. 그들은 쩨쩨하고 치사한 사람들이 아니죠. 내 엽서를 읽었다면 아마 웃었을 겁니다!" -p325
이 구절을 보면서 PC주의가 생각났다. PC주의 신봉자들은 성소수자, 장애인 등을 피해자, 보호하고 신경써야 할 사람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본인의 불편함, 피해의식을 투영한 것에 불과하다. 본인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어리광일 수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 -p404
코스트카라는 인물의 말이다. 저자가 코스트카를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위 구절은 저자가 반대하는 의견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p456
멋지고 공감가는 문장이다.
그리고 만일 역사가 장난을 한다면?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p483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닌가 싶다.
생각할 것도 많고 다양한 상징도 많은 훌륭한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