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손놓고 있던 책을 어제 다시 들었습니다. <다시 , 역사의 쓸모> 역시 재밌게 쑥쑥 읽히더군요. 최태성님의 책은 더 많이 보고 싶습니다.
동성동본금혼을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좋은 풍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부에서도 이처럼 반대 의견이 많으니 결국 국회는 1957년 동성동본인 혈족 사이에 혼인하지 못한다는 법안을 가결했습니다. 동성동본금혼은 우리의 미풍양속이므로 파괴할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법은 1958년 2월 22일에 공표됩니다. 그리고 무려 47년간 유지가 돼요. -p241
글을 읽으면서 참 화가 났습니다. 물론 제가 현재 시대의 사람이라 과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제가 과연 1957년에 살았다면 저 법을 어떻게 생각했을지 알 수 없겠지요.
동성동본금혼은 조선 시대 전통입니다. 명나라 법을 따른 것입니다. 사대주의로 인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이미 1908년에 같은 성씨끼리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폐지되어있는데 우리나라는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없어진 것이지요.
이 법 때문에 불행한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동성동본이라는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해 동반자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이세돌씨가 알파고를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절대 두지 말라고 배운 수들을 알파고는 서슴없이 둡니다. 어렸을 때부터 바둑을 배우고 교육을 받은 인간들은 금기시 되는 수입니다. 좋지 않은 수, 불리한 수로 한 번 배우고 나면 의문을 가지지 않습니다. 전통도 이와 같습니다. 과거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시대가 흐르면 오히려 악습일 수도 있습니다.
불행한 사건이 이어지자 동성동본금혼에 관한 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여성계를 비롯한 각종 시민단체, 그리고 정치권에서도 여러 번 이 법을 폐지하려고 했어요.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도 상당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림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 역시 강력해서 번번이 무산되었지요. -p243
과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유림이 동성동본금혼을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책 제목이 더욱 공감이 갑니다. 항간에 듣기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을 쓴 학자는 굉장한 고초를 겪었다고 합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가면 욕을 먹게 됩니다.
결국 1997년 헌법재판소는 동성동본금혼을 명시한 민법이 헌법에 위한된다 판결하였습니다. 그리고 10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2005년에 민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제사 지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면서 특히 장남의 권한이 세졌습니다. 제사 지내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장남에게 상속을 많이 하게 돼요. 그러면서 집안이 점점 더 남성 중심, 그중에서도 장남 중심으로 편합니다. 성리학은 정통을 굉장히 따지는데, 남자가 정통, 그중에서도 장남이 정통이라는 거지요. -p250
장남 중심의 체제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남녀 차이가 없고, 태어난 순서에 따는 차이도 크기 않았습니다. 시집가는 것보다 장가가는 역사가 훨씬 깁니다. 시집가는 건 조선 후기에 굳어진 관습이지만, 장가가는 건 고구려 때도 있었습니다.
남존여비사상, 장남 중심 등 모든 게 다 성리학, 제사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 시대에는 일견 합당합니다. 제사 지내는 비용이 만만치 않고 장남은 노부모와 함께 살며 모셔야 한다는 책임이 있었습니다.
너무 화나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특히 서서평의 이야기가 인상깊습니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미국에서 선교사로 온 간호사였습니다. 본명은 엘리자베스 요한나 셰핑입니다. 이름도 아름답습니다.
이처럼 뜻깊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쉴 새 없이 일하던 서서평은 1934년 여름에 숨을 거두고 맙니다. 광주는 물론, 제주도까지 돌면서 봉사에 매진한 나머지 지나치게 쇠약해진 거예요. 매일 최소한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남은 생활비는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썼던 서서평의 사인은 안타깝게도 영양실조였습니다.
장례식이 진행된 날, 소복을 입은 여성들이 통곡을 하며 운구행렬을 따랐습니다. 서서평의 유품은 담요 한 장이었습니다. 사실, 한 장이 아니라 반 장이었어요. 가지고 있던 담요 한 장도 어려운 사람에게 절반 찢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서서평이 남긴 것은 담요 반 장외에 동전 몇 개와 옥수수가 전부였습니다. 죽기 직전 자신의 시신까지 병원에 기부했어요. 의악 연구에 쓰여 더 많은 환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서서평의 침대 머리맡에는 이런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Not Success But Service (성공이 아닌 섬김으로)."
-p262~263
이처럼 훌륭한 분인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중 하나는 다채로운 감정을 갖기 위해서예요. 마음이 말랑해지는 거라고 해야 할까요? -p263
역사 속 따뜻한 이야기들을 보면 마음이 말랑해집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추사는 명필이지만, 붓을 엄청나게 가렸어요. 음식이나 의복과 마찬가지로 붓도 최고급만 썼습니다. -p273
재밌었습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최고들은 항상 최고의 제품만 쓰는 거 같습니다. 물론 최고의 제품이 아니더라도 남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여주겠지만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부부와 자식과 손주가 모여있는 곳이다. -p279
젊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추사 김정희가 말년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젊어서 산해진미도 먹어봤지만 결국 소박하고 다정한 것이 진짜 행복인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세계 최고의 쉐프들도 마지막에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라면 평범하고 소박한 음식을 고르더군요.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성공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