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마침내 연준이 결정을 내렸다. 5월부터 해온 준비가 마무리된 후 FOMC는 금리는 현 상태를 유지하며 "경제가 안정되고 있다는 더 많은 증거들이 나올 때까지" 현행 이율로 채권 매입도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지난 5월 이후 시장을 긴장시켜온 연준 대차대조표 축소에 대한 논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만일 연준이 조급하고 갑작스러운 금리 인상으로 인한 중단 없이 느리지만 확실하게 미국 경제를 회복하는 일에만 전념하려 했다면 통화 부양책의 축소에 대해 채권시장이 얼마나 격렬하게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찰활동과 통화스와프는 전혀 다른 문제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능적 권력과 행정적 효율성만큼은 어떤 공식적인 정치적 권한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사찰과 통화스와프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위치와 미국 내에서는 물론 미국과 정치적, 그리고 사업적으로 얽힌 국가들 안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또 다른 권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과 오스트레일리아, 그리고 일본과 베트남을 미국이 생각하는 지리경제학적 동맹체제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히 손쉬운 일이었다. 이들 국가가 중국을 막아내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다만 미국이 아시아에서 이런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면 해당 지역에서의 상황이 복잡해지는 동시에 갈등을 부추길 위험이 있었고 그것은 미국의 국익에도 부합하지 않았다.

국경 서쪽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서는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극빈층은 국가가 지급하는 연금과 에너지 보조금으로 겨우 연명했고 여기에만 GDP의 17퍼센트가 쓰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유럽연합 가입을 약속했다. 우크라이나 국영 언론은 유럽연합 협약 참여가 유럽연합과 유로존의 정식 회원이 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선전했다. 유럽연합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언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서방측 언론들은 빌뉴스 정상회담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빼내와 유럽연합에 편입시키려는 6년간의 노력"의 최종 단계라고 공개적으로 보도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위협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제재위협도 여전히 큰 문제였다. 우크라이나 수출의 25퍼센트는 유럽연합으로 들어갔지만 러시아 수출 규모도 26퍼센트나 되었다.

유럽연합은 연장된 이행기를 의도했지만 사태는 혁명적 전복으로 진행되었다. 율리아 티모셴코의 조국당과 일부 혁명세력이 이끄는 임시정부는 선거를 기다리지 않고 새로운 체제 수립에 나섰다. 지난 11월 있었던 야누코비치의 갑작스러운 결정을 뒤집어 러시아와 확실하게 선을 긋고 러시아가 아닌 IMF, 그리고 유럽연합과 새로운 금융 협정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서방측의 이해관계도 위기에 처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러시아는 세계시장에서 2위에 해당하는 원유 및 천연가스 공급국이었다. 신흥시장국가 경제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한 시점에서 미국은 원자재 시장에서 더는 긴장상태가 불거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전쟁을 원하는 강경파들은 절망했지만 미국 정부는 자제력을 발휘하며 결코 전면적인 경제제재라는 무기를 사용하려 들지 않았다.

2008년 조지아에서 벌어진 대리전에서 예고되었던 서방측과 러시아 사이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인 전면 충돌은 이제 한층 더 심각한 단계로 발전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수호 문제가 위기에 처하자 2014년 4월 13일 우크라이나 임시정부는 도네츠크를 포함하는 이른바 돈바스(Donbass)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대테러" 작전을 개시했다.

러시아 정부는 좀 더 고전적인 보복을 시작했다. 서방측으로 향하는 가스 공급을 차단하는 대신 유럽에서 들어오는 농산물 수입을 금지시켰고 동시에 돈바스 반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늘려갔다. 반군은 8월 23일에서 24일 사이 처절한 반격을 시작했다. 전황이 어려워지자 우크라이나 정부는 어쩔 수 없이 9월 5일 민스크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중재 아래 휴전협정을 받아들인다.

유럽 전역에 걸쳐 시행된 여론조사를 보면 과거에는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을 지지했던 국가들에서조차 그 지지도가 급격하게 추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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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5월 유럽연합 의회 선거가 다가왔다. 선거 결과는 유럽의 정치시스템을 뒤흔들어놓았다. 유럽통합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중심 정당들이 대거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럽 정치의 변방에 있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분노 자체는 비록 위기에 대한 각 정부의 미숙한 대처로 인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지지세력을 끌어모았다고는 하지만 사실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새롭게 부각된 것은 좌파들의 응집력이었다

그렇지만 2015년 1월 25일의 선거에서는 그리스 유권자들의 본심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젊은 학생운동권 출신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이끄는 시리자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 정부와 유럽연합 본부의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기대를 배신이라도 하듯 연정 상대로 중도파이자 친유럽 성향의 포타미당이 아닌 극우민족주의 성향의 독립그리스인당(ANEL)을 택한 것이다. ANEL은 종교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그리 복잡한 견해를 갖고 있는 정당은 아니었지만 유럽연합과의 대결에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할 가능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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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민간 부문 채무를 정리하는 대신 정부가 유럽연합과 IMF로부터 받은 대출로 민간 부채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어쨌든 정치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높은 수익률을 노리고 그리스 국채에 도박을 걸었던 민간 투자자들의 불만도 불만이었지만 보수적인 북유럽의 납세자들이 유럽연합에 비협조적인 그리스 좌파 정부를 위해 또다시 큰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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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과 행성의 생성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성 과정에서 동시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즉, 별이 행성을 갖는 것은 예외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일 수 있다는 주장의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태양 같은 별 주위에서뿐 아니라 태양보다 질량이 큰 별 주변이나 갈색왜성같이 질량이 작은 별 주변에서도 외계행성이 발견되고 있는 것도 행성이 형성되는 현상의 보편성을 강화하는 관측 결과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음모론자들이 이 같은 이야기를 날조하려 했던 이유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이 주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증거로 제시한 것은 날조된 그림과 영화 장면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워런 위원회를 부정할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면 그것을 제시했을 것이며, 워런 위원회 보고서를 왜곡하려 애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ew Brezinski의 말처럼 "역사는 음모보다는 혼돈의 산물이다." 역사의 궤도는 각기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집단과 분파 간의 경쟁,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개인의 행동에 의해 좋은 방향 혹은 나쁜 방향으로 수정되곤 한다.

구석기 다이어트 추종자는 고대인의 건강을 열망하지만, 비극적이게도 이미 잃어버린 것은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털북숭이 매머드가 기적적으로 부활하지 않는 한, 구석기 선조들이 먹던 대로 먹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다."라고 《알파 남성이 되기 위한 도전Alpha Male Challenge》도 인정했다

구석기 다이어트는 이상적인 몸을 되찾는 과정을 구체화하고 평가하도록 돕고, 신체적 변화가 사회적 변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와 다르다. 이 다이어트는 동굴이라는 인류 공통의 기원, 비만의 유행이라는 집단의 문제, 모두의 건강이라는 공동 목표 등 사회적 이상을 추구한다. 2013년 출판된 《원시인 선언문Paleo Manifesto》은 이 다이어트법이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고, 현재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완벽하므로 완벽한 실재는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성 안셀무스St. Anselm의 존재론적 논증에 관해서, 도킨스는 "순수한 사유와 사물들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는 없다."라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칸트Kant에 영향을 받은)을 인용한다. 도킨스는 신이 완벽하고 전지전능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은 인류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며, ‘온건한’ 종교적 신앙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해리스는 "종교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그 결과 전 세계가 폭력에 휩싸인다고 주장한다.

히친스는 세계 3대 경전을 검토하며 "우상 숭배와 미신의 오랜 터전이었던 중동의 불모지에서 등장한 유사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계시"가 가진 모순을 검토했다. 구약성서는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강간에 대해서는 신이 강간을 허용하는 경우만을 언급할 뿐이며, 노예제도와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신이 노예를 부리고 대량학살을 저지르는 상황만을 다룬다. 십계명 이야기는 모순으로 가득한 완전한 허구로서, 도덕적인 관점에서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해리스, 데닛, 도킨스, 히친스의 공통된 입장은 종교가 다른 형태의 앎으로 간주됨에 따라 종교적 믿음들이 정당화되는 상황을 더 이상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가 너무 오랫동안 성역으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주장과 사상 들이 이성과 과학적 방법은 고사하고 상식의 시험대에도 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저자 중 일부는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영역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의 ‘비중첩 영역NOMA: non-overlapping magisteria’ 개념을 언급하며, 나름의 의문들과 방법론 및 논제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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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5 - 테아이테토스 / 필레보스 / 티마이오스 / 크리티아스 / 파르메니데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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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b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논의에 대한 그대의 열성은 감탄받아 마땅하오. 말해보시오. 형상들 자체를 형상들에 관여하는 사물들과 구분하는 이런 구분법은 그대 자신이 생각해 낸 것인가요? 그대는 또한 우리가 갖고 있는 같음과는 별도로 같음 자체 같은 것이 있으며, 그 점에서는 하나와 여럿과 방금 그대가 제논한테서 들은 모든 것이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나요?"... c "소크라테스, 다음과 같은 것들은 어떻소? 머리털이나 진흙이나 먼지나 그 밖에 더없이 무가치하고 하찮은 것처럼 가소로워 보이는 것들 말이오. 그대는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도 우리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과 다른 별도의 형상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처한가요?" "아니요" 하고 소크라테스가 대답했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이며, 그런 것들의 형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하겠지요."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83


 플라톤(Platon, BCE 428 ? ~ BCE 348 ? )의 <파르메니데스 : 형상에 관하여 Parmenides>는 여러 면에서 인상적인 대화편이다. 다른 대화편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대화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특기인 산파술(Socratic method)을 통해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몰아세우던 소크라테스(Socrates, BCE 470 ~ BCE 399)지만, 이번 대화편에서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BCE 546~ BCE 501)를 만나 시종일관 끌려다니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플라톤 철학의 사상적 기반인 이데아(Idea)론 자체가 흔들리는 충격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131b "아니지요" 하고 소크라테스가 말했답니다. "그것(형상)은 하나이자 같은 것이고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지만 그 자체에서 분리되지 않는 날(日)과 같으니까요. 그처럼 각각의 형상은 하나이자 같은 것으로서 모든 것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어요."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84


 형상(形相)의 세계인 이데아들과 이들의 모방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세계.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으로 파르메니데스에게 이데아론을 펼치지만, 오히려 관여의 딜레마, 가분성(可分性)의 역설, 구분과 불가지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무엇이 형상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懷疑)가 제기된다. 그렇다면, 이데아의 존재는 부정되어야 하는가? 파르메니데스는 이에 대해서도 긍정하지 않는다. 이데아를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패러독스(paradox). 


135a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형상들에는 이런 문제점들과 그밖에도 수많은 문제점이 내포될 수밖에 없소. 만약 사물들의 그런 형상들이 존재하고 누가 각각의 형상을 '어떤 것 자체'로 구별한다면 말이오.... b "그러나 소크라테스" 하고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답니다. "만약 누가 방금 언급한 문제점들이나 그와 같은 다른 문제점들에 주목한 나머지 사물들에는 형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개개의 사물을 위해 형상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사유가 향할 곳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494


 이런 상황에 대해 이후 대화편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청년 아리스토텔레스(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른 인물)를 상대로 하나(一者)의 특성에 대해 보다 깊은 논의를 이어간다. 


141e "따라서 하나는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존재하지 않네. 그렇다면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에 관여할 테니까. 그러나 하나는 분명 존재하지도 않고 하나도 아닐세. 이런 논의가 믿을 만한 것이라면. 142a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자기에게 속하거나 딸린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나는 이름도 없고 설명될 수도 없으며, 지식이나 감각적 지각이나 의견의 대상이 될 수도 없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13


 파르메니데스는 대화를 끌고 가면서 하나의 가설에 대해 여러가지의 연역(演繹)을 시도한다. 이러한 연역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가설의 참, 거짓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一者)안에 포함된 여러 모순이 드러나면서 더 혼란에 빠지게 된다.


162a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하나는 존재하는 것 같네. 만약 존재하지 않는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 어떻게든 자기 존재의 일부라도 포기한다면 그것은 곧바로 존재하는 것일테니까. 따라서 하나가 존재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려면, 자신이 존재하지 않도록 강제할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를 가져야 하네. 이는 존재하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려면 존재하지 않음의 존재하지 않음을 가져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그래야만 존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도 존재하지 않을 걸세. 존재하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려면, 존재하는 것의 존재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에는 관여하지 않을테니까. 한편 존재하지 않는 것이 완전하게 존재하지 않으려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위해 존재하지 않음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위해 존재함에 관여할 걸세.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음에 관여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존재함에 관여함으로,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만큼 존재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존재함에 관여할 걸세."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69


  대화편을 읽다보면 느껴지지만, 이데아론의 가장 큰 문제는 모든 개념의 형상화다. '없음'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통해 비로소 '부재(不在)'가 될 수 있다는 설명 구조 속에서 모든 것은 언어로 표현될 수 있고, 언어로 표현되었다는 자체로 존재성을 얻으며, 이러한 존재성이 명사/주어로 나타나는 이데아의 세계에서 심지어는 대립되는 술어(術語)마저 흡수하면서 이데아론의 취약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165d "따라서 만약 하나는 존재하지 않고 여럿이 존재한다면, 여럿은 반드시 같기도 하고 서로 다르기도 하며, 접촉하기도 하고 서로 떨어져 있기도 하며, 온갖 운동을 하기도 하고 온갖 방법으로 정지해 있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며, 생성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텐데, 그런 것들을 빠짐없이 일일이 열거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는 쉬운 일일 것세."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79


 <파르메니데스>는 이처럼 플라톤 핵심 사상인 이데아론이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러한 약점이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가 파르메니데스와 대화를 통해 드러났다는 점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다른 대화편에서 늙은 소크라테스는 젊은 제자들과 대화를 통해 이들을 불멸의 형상, 이데아 세계로 이끈다. 과거 자신이 인정했던 이데아론의 약점을 감추고서.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강조한 플라톤 사상 자체가 서양철학사 전반의 거대한 지적 사기극이라고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역시 시간 안에 존재하면서도 시간 밖에서도 존재하는 이데아의 모순이 소크라테스에게도 투영된 작가의 의도적 노림수라고 읽어야 할까. 여러 면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할 거리와 함께 혼란을 주는 텍스트임이 분명하다.


 152e "따라서 하나는 자신과 같은 동안 생성되기도 하고 존재하기도 하므로 자신보다 더 젋지도 더 늙지도 않으며, 자신보다 더 젊어지지도 않고 더 늙어가지도 않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44


 155c "이 모든 것에 따르면 하나 자체는 자신이나 다른 것들보다 더 늙기도 하고 더 젊기도 하며 더 늙어가기도 하고 더 젊어지기도 하는가 하면, 자신이나 다른 것들보다 더 늙지도 더 젊지도 않으며 더 늙어가지도 더 젊어지지도 않네. 그러나 하나는 시간에 관여하여 더 늙어가기도 하고 더 젊어지기도 하므로 반드시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관여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하나는 존재하고 존재했고 존재할 것이며, 생성되었고 생성되고 있고 생성될 것이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50


 마지막으로, <파르메니데스>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 ~ 1976)의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의 연결 지점이라 생각될 수 있는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글을 갈무리하려 한다. 존재를 통해 과거, 현재, 미래에 관여하는 하나(一者),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은 하나(一者). 이러한 모순된 성격이 시간 속에서 동시에 공존하는 지점이 '찰나'라면, 하이데거는 그 '찰나'를 바로 현재에 미래를 향해 기투하는 그 시점에서 포착한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존재와 시간>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이로써 <테아이테토스> vs 러셀, <파르메니데스> vs 하이데거의 대진표가 짜여졌다.


 156d "그것이 변할 때 그 안에 있음직한 이 이상한 것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찰나 to exaiphnes 말일세. '찰나'는 거기서부터 두 상태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 같으니까. 어떤 것이 정지해 있는 동안에는 정지해 있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움직이는 상태에서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 대신 찰나라는 이 이상한 성질은 운동과 정지 사이에 잠복해 있고 어떤 시간 안에도 없네. 그래서 그것 안으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움직이는 것은 정지해 있는 상태로 변하고, 정지해 있는 것은 움직이는 상태로 변한다네." _ 플라톤, <파르메니데스> , p553

166c "그렇다면 한 마디로 ‘만약 하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옳은 말을 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기로 하세. 하나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하나도 다른 것들도 자신들과 관련해서든 서로와 관련해서든 온갖 방법으로 모두 다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며,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같기도 하다고 말일세." - P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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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이기숙 옮김, 나주리 해제 / 마티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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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흐의 칸타타는 그의 여타 장르의 작품들, 특히 기악 작품들에 비해 더 강력하게 당대에 속해 있다. 300여 년 전 독일 루터파 교회의 예배와 전통, 바로크 궁정의 음악문화에 깊이 발을 딛고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서도 양적, 질적으로 중요한 영역을 이루는 교회 칸타타는 수년 동안 중단되기를 반복하면서 세 시기에 중점적으로 작곡되었다. 성실한 직업음악가이자 교회음악가의 교회 칸타타는 그의 창작전체에서 어느 모로 보나 특별하고 월등한 위상을 점한다. 바흐 작품 번호(Bach-Werke-Verzeichnis : BWV)가 교회 칸타타로 시작하는 이유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55


 이기숙, 나주리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J.S. Bach Die Kantaten>은 제목 그대로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 ~ 1750)의 교회 칸타타 작품 전반에 대한 설명과 곡들의 가사를 번역한 책이다. 기독교 전례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성탄절, 사순절 등 교회 전례력에 맞춰 정리된 목차를 통해 개별 작품들이 1년의 교회력 안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곡의 분위기와 흐름을 어느정도 짐작하게 도움을 준다. 


 개인적으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를 통해서 개신교 교회 음악에 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 많아 큰 도움이 되었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가톨릭의 미사곡이라 여겨지는데, 개신교 예배와 가톨릭 미사 전례 특성이 곡의 형식과 흐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칸타타 해설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가톨릭 미사의 특징은 재현((Mimesis)이라 생각다.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로 이어지는 예식의 큰 흐름은 과거 사실의 반복이며, 반복을 통한 확인, 성찰과 다짐의 방향으로 진행되며 그 과정에서 제의, 제기 등이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며 예식을 하나의 극(劇)으로 만든다. 마치 오페라(opera)와 같이 진행되는 시각, 청각적인 효과 속에서 미사곡들은 큰 흐름을 진행하기 위한 것으로 자비송(Kyrie), 대영광송(Gloria) 등의 곡들은 전례라는 전체에 대해 부분으로 기능한다. 반면, 바흐의 칸타타는 이와는 다른 곡이 표현하는 세계가 있다.


바흐의 칸타타들이 내재하는 세계는 우리의 세계와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이다. 바흐의 칸타타들이 울리며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할 때에도 여전히 그것들은 우리에게 낯선 세상에 속해 있다. 그 낯선 세상이란 300여 년 전 독일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이고 전통이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9

 

 가톨릭 전례에 익숙한 이들에게 바흐의 칸타타는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마치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를 떠올리게 하는 코랄(Choral), 아리아(Aria), 레치타티보(Recitativo)는 가톨릭 미사 전례의 주제를 하나의 곡(曲)안에 담아낸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미사는 사제에 의해 주도되는 현재 안에서 반복되는 과거 사실이라면, 칸타타의 세계는 관념적이고 텍스트적이면서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코로스의 역할처럼, 신도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는 전례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해설 속에서 이런 느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오페라와 달리 칸타타는 흔히 관조적이거나 성찰적인 주제를 취하므로, 칸타타의 레치타티보는 특정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문제, 감정에 대해 설명하는 가사로 확대되곤 한다. 그리고 그 상황이나 문제, 감정은 일반적으로 레치타티보의 뒤를 잇는 아리아에 의해 해석되거나 심화된다. 아리오소는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중간 즈음에 놓인 것으로 아리아보다 레치타티보에 가까울 때가 더 많다. 바흐의 교회 칸타타는 (루터교 '찬송가'인) 코랄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잦은데, 코랄은 흔히 신도들을 상징한다. 그렇게 신도들은 코랄을 통해 가사의 상황에 동참하게 된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8


 해설을 통해 신교 분리 이후 성경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돌아가라는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방침은 전례에도 반영되었고, 설교를 보완하기 위한 음악적 도구로서 칸타타는 그 형식이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흐는 이러한 교회의 방침에 맞는 곡을 만들면서도, 전례가 지나치게 엄숙해지거나 지루해지지 않도록 칸타타의 형식 내에서 보다 풍부한 음악적 효과를 담아내기 위해 종합예술인 오페라적인 요소를 가져왔음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칸타타를 듣는다면 단순한 찬송가 이상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의 의의를 여기서 찾고 싶다.


 루터파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예배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성경의 하나님 말씀을 공포하는 설교였다. 설교를 가장 위대한 예비(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여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46)의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설교는 한 시간가량 행해졌고, 칸타타는 설교 전에, 그러니까 복음서 봉독과 신앙고백 사이에서 연주되며 설교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다. 칸타타는 다채로운 음악적 표현을 통해 봉독된 성경 구절을 풀이하거나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이 경건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또 무엇보다 설교를 듣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이렇게 일요일 예배와 축일 예배에서 칸타타는 확고한 자리와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다.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19


 이처럼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는 바흐의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보다 친숙하게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풍부한 설명을 통해 독자들, 청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본문에는 모든 칸타타 곡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를 감상하는 것은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이 중에서 한 곡의 영상과 해석을 소개하는 것으로 리뷰를 갈무리한다...



 BWV 111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내 하나님의 뜻대로 늘 이루어지기 원하네


1. Coro 합창(코랄)


Was mein Gott will, das g'scheh allzeit,

Sein Will, der ist der beste;

Zu helfen den'n er ist bereit,

Die an ihn glauben feste.

Er hilft aus Not, der fromme Gott,

Und zuchtiget mit Maßen:

Wer Gott vertraut, fest auf ihn baut,

Den will er nicht verlassen.


내 하나님의 뜻대로 늘 이루어지기 원하네

그의 뜻이 최선이라네.

굳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그는 늘 도우시려 하네.

거룩한 하나님, 그는 고통에 처한 우리를 도우시고

온화하게 우리를 꾸짖으시네.

하나님을 믿고 굳게 의지하는 사람을

그는 버리지 않으시네.


 2. Aria B 아리아 : 베이스


Entsetze dich, mein Herze, nicht,

Gott ist dein Trost und Zuversicht

Und deiner Seele Leben.

    Ja, was sein weiser Rat bedacht,

    Dem kann die Welt und Menschenmacht

    Unmoglich widerstreben.


놀라지 마라, 내 마음이여

하나님은 너의 위로요 확신이고

네 영혼의 생명이로다.

   그의 지혜로운 충고가 결정하는 것에

   세상과 인간의 힘은

   맞서지 못하리라.


3. Recitativo A 레치타티보 : 알토


O Torichter! der sich von Gott entzieht

Und wie ein Jonas dort

Vor Gottes Angesichte flieht;

Auch unser Denken ist ihm offenbar,

Und unsers Hauptes Haar

Hat er gezahlet.

Wohl dem, der diesen Schutz erwahlet

Im glaubigen Vertrauen,

Auf dessen Schluss und Wort

Mit Hoffnung und Geduld zu schauen.


오,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

그 옛날 요나처럼

하나님의 면전에서 달아나는 자.

그분은 우리의 생각도 훤히 아시고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셨도다.

행복하여라, 그의 보호하심을 택한 자

희망과 인내로 

그의 뜻과 말씀을 우러러보려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자.


4. Aria (Duetto) A T 아리아(이중창) : 알토, 테너


So geh ich mit beherzten Schritten,

Auch wenn mich Gott zum Grabe fuhrt.

    Gott hat die Tage aufgeschrieben,

    So wird, wenn seine Hand mich ruhrt,

    Des Todes Bitterkeit vertrieben.


나는 담대한 발걸음으로 걷네

비록 하나님이 나를 무덤으로 이끌어도,

   그가 나의 모든 날을 세셨으니

   그의 손이 내게 닿을 때

   죽음의 고통은 내쫓기리라.


5. Recitativo S 레치타티보 : 소프라노


Drum wenn der Tod zuletzt den Geist

Noch mit Gewalt aus seinem Korper reißt,

So nimm ihn, Gott, in treue Vaterhande!

Wenn Teufel, Tod und Sunde mich bekriegt

Und meine Sterbekissen

Ein Kampfplatz werden mussen,

So hilf, damit in dir mein Glaube siegt!

O seliges, gewunschtes Ende!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이

내 몸에서 억지로 영혼을 꺼낼 때

하나님, 그것을 아버지 당신의 신실한 손으로 받아주소서!

악마와 죽음과 죄악이 나를 공격하고

내 임종의 베개가

전쟁터가 될 때

나를 도와 내 믿음이 당신 안에서 승리하게 하소서!

오 내가 소망하는 복된 종말이여!


6. Choral 코랄


Noch eins, Herr, will ich bitten dich,

Du wirst mir's nicht versagen:

Wenn mich der bose Geist anficht,

Lass mich doch nicht verzagen.

Hilf, steur und wehr, ach Gott, mein Herr,

Zu Ehren deinem Namen.

Wer das begehrt, dem wird's gewahrt;

Drauf sprech ich frohlich: Amen.


주님, 또 하나 간청하오니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겠지요?

악한 영이 나를 시험할 때

내가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주님, 나를 돕고 이끌고 막아주소서.

당신의 이름에 영광이 되도록

이를 간절히 바라는 자에게 그대로 주어지리니

내가 기쁘게 말하나이다. 아멘. _ 이기숙, 나주리,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교회 칸타타> , p251

음악의 측면에서 보자면, 바흐의 바이마르 칸타타들은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에 가까이 다가서 있다. 이탈리아 오페라 풍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교회 칸타타가 이렇게 세속음악을 좇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루터는 예배 형식의 유연성과 시대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는 칸타타에도 유효했으니, 당대의 음악을 주도한 오페라, 그리고 그 오페라의 유행을 따르는 것은 루터교 예배에서 금지될 일이 아니었다. - P27

바흐가 살았던 18세기 전반기, 오페라의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는 이미 한 세기의 발전 과정을 거친 뒤였다. 레치타티보는 이제 사건의 전개를 진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또 아리아는 사건 진행 중에 야기되는 분노, 증오, 슬픔, 사랑 등의 감정을 섬세하게 음악으로 옮겨 청자의 공감을 얻어내며 오페라에서 견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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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부모에게 녹봉으로 봉양하는 영화[祿養之榮]를 누리게 해드리는 것을 아주 중요한 효도의 법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왕이면 큰 고을의 수령으로 나갔을 때를 기다려 성대하게 수연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다. 출세하여 지위가 고귀하게 된 뒤에 연로한 부모를 연석宴席에 모시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맹자는 ‘군자에게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 왕이 되는 것은 그 속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대개 왕이 되어 천하를 소유하는 것은 사람의 큰 소망인데 저것을 가지고 이것과 바꾸지 않으니 세 가지 즐거움이 천하보다 큰 점이 어떠하겠는가.

근경의 중층 누각 건물은 서대문을 표시한 것으로 보이고, 원산에는 도성의 성가퀴 일부가 보인다. 실제로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장소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구름이나 안개를 이용해 임의적으로 거리를 축소한 뒤 멀리 있는 경물을 화면 안에 끌어다 놓는 것은 기록화에서 흔히 쓰인 표현 기법이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매화나무, 푸르른 소나무와 대나무, 화분의 큼직한 괴석, 시동이 들고 오는 거문고 등 사대부를 표상하는 여러 장치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데 제1폭과 반대로 화면 왼편에 무게를 두어 두 그림을 나란히 배치했을 때 대칭의 구도를 형성하게끔 고려하였다.

경수연에 앞서 수친계의 결성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은 경수연의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자 그림 제작의 직접적인 동기로 작용했다. 아울러 수친계를 기반으로 열린 행사의 기념화였으므로 그림의 내용, 제작 및 분배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1603년의 수연은 이거의 노모를 위한 개인 집안 차원의 사적인 설행이었지만, 1605년의 경수연은 수친계 계원이 주축이 된 수연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공적인 성격이 강했다. 아울러 그림도 참석 집안 수대로 여러 건을 제작하여 하나씩 나누어 가졌다.

특히 모란 병풍, 복식의 장식, 화병과 그릇의 문양 등이 모두 강렬한데, 바닥 전체에 무늬를 넣는 것은 배경 전체를 꽃무늬로 처리한 〈하연 부부 초상〉과 상통하는 19세기 후반적인 요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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