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자 쿠엔틴 스미스Quentin Smith는 쿤에게 ‘무’를 마치 ‘무언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라고 지적했다. 즉 "무가 있을지도 모른다There might have been nothing"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 존재가 가능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쿤은 스미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있음There is’은 ‘무언가가 있음something is’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가 있다there is nothing’는 것은 ‘무언가가 무다something is nothing’라는 의미가 되어 논리적 모순이 된다. 그는 ‘무’라는 용어를 제거하고 ‘무언가가 아님not something’ 또는 ‘아무것도 아님not anything’으로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신의 존재에 관한 모든 논증은 설명이 필요한 무언가의 존재를 가정한다. 무nothing가 아니라 무언가something가 존재하는 이유를 묻는 논거는 다른 모든 논증의 기저를 이루는, 인지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존재자는 자기자신(내세에 대한 믿음의 인지적 토대가 되는)뿐만 아니라 애당초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t existing를 도저히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에는 진정한 진보가 존재한다. 과학의 진보를 팽창하는 지식의 구sphere라고 생각해보라. 알려진 지식의 구가 미지의 영역에서 팽창할 때면 지식의 구를 덮고 있는 무지ignorance의 면적도 늘어난다.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구의 비유로 돌아가, 구의 반경이 증가할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생각해보라. 표면적의 증가는 반경의 제곱에 비례하는 것에 비하여 부피의 증가는 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 즉, 과학적 지식의 구가 팽창하면 무지의 면적은 제곱의 속도로 증가하는 것에 비해 알려진 지식의 부피는 세제곱의 속도로 늘어난다. 더 많이 알수록 더 넓은 무지의 영역이 앎의 영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과학의 역사에서 진정한 진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지식과 무지 사이의 경계 지역에서 일어난다.

달리 말해 순유전학의 핵심 과제가 DNA라는 블랙박스 안에 들어 있는 유전자를 찾아내는 데에 있었다면, 포스트 게놈 시대의 주요 과제는 DNA의 서열이 밝혀지면서 등장하게 된 기능과 역할이 불분명한 수많은 유전자에 대한 주석달기annotation가 되었다. 이러한 역유전학을 수행하려면 표적 유전자의 활성을 조절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보존에는 돈이 든다. 물리적으로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구상 생명체는 양성자(H+) 농도 차로 ATP를 생산하여 에너지로 사용한다. 막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양성자를 농축시켜 두었다가 댐이 수문을 열 듯 양성자 흐름의 물꼬를 터서 그 동력으로 ATP를 합성한다

21억 년 전 어느 날 원핵생물 하나가 또 다른 원핵생물인 미토콘드리아d를 집어삼켰다. 이유는 모르지만 미토콘드리아는 소화되지 않고 원핵생물 내에 살아남았다. 미토콘드리아 입장에서 보면 원핵생물 내부에 있는 것이 안전했다. 원핵생물 입장에서도 내부의 미토콘드리아는 유용했다. 당시 산소 농도가 증가하고 있었는데 산소는 반응성이 강한 원자다. 쉽게 말해 독毒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산소호흡으로 에너지를 생산한다. 내부의 미토콘드리아가 산소도 제거해주고 에너지도 만들어주니 일석이조라 할 만하다.

공생설의 중요한 증거 중 하나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 모두 고유의 DNA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한때는 자체적으로 복제를 했던 존재라는 증거다. 진핵세포 내부에서 공생하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가 죽었을 때, 그 DNA가 진핵세포 내에 흩어졌을 것이다. 이런 쓰레기 DNA와 숙주의 DNA가 한동안 뒤섞였다는 증거가 진핵세포의 DNA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결국 숙주가 자신의 DNA를 지키기 위해 핵막을 진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핵막으로 둘러싸인 핵은 진핵세포와 원핵세포를 구분 짓는 특성으로 세포 내에서 DNA를 격리해 보관하는 특별창고다.

대기 중 산소의 농도가 높아졌을 때 다세포생물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산소는 독이다. 산소의 독성을 피해 단세포생물들이 떼 지어 뭉치는 바람에 다세포생물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집단을 이루면 표면의 세포들만 산소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 산소를 상대하는 것은 허파다. 몸 안으로 들어온 산소는 적혈구라는 특별 호송 열차에 실려 몸의 각 부분으로 조심스럽게 이동된다. 이래저래 산소가 핵심이다.

"이 세계관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다. 생명의 힘은 애초에 단 하나의 생물에 불어넣어졌을 것이다. 지구가 단순하고 변하지 않는 중력의 법칙에 따라 지질학적 순환을 하는 동안, 생명의 세계에서는 단순한 최초의 생명체로부터 아름답고 놀라운 생명체들이 무수히 진화했고 또 진화해가고 있다." - 찰스 다윈,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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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바흐는 개별적인 성서적 사건을 생생한 드라마가 주입된 방식으로 다루며 더
큰 화폭으로 확장시키는데, 이는 슐츠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대순으로 다뤄지는 이 사건들은 최고로 생생한 음악적 비유를 동반하는데, 그러면서도 훗날 에마누엘이 언급했듯이 ‘조화는 가장 순수한 그대로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뒤에 그의 칸타타와 수난곡들을 논하면서 살펴보겠지만, 그는 항상 책에서 발견한 뻔한 관능적 이미지를 가사로 선택해서 교회 예배에 우의적으로 사용했다. 이 전통은 오리게네스(기원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의 저술에서는 교회가 남녀 간의 사랑을 예수와 개인의 기독교 영혼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황홀경에 빠져 쓰러질 것 같은 새색시는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을 절실히 갈망하는 영혼을 나타낸다.

크리스토프의 음악은 폴리포니와 화성의 균형을 어떻게 이루는지, 음악적 단락을 어떻게 구성하는지, 그리고 우선권을 다투는 가사와 음악 사이에서 어떻게 신중하게 접근할 것인지 바흐에게 표본을 제시했다. 이는 풍성한 재능의 씨앗들을
비옥하게 발아시켜 하나로 합치는, 본성과 양육의 완벽한 사례로 보인다.

루터교가 잔뜩 스며든 인생관부터 기본적인 음악 교육에 이르기까지 헨델은 동갑내기 바흐와 많은 부분을 공유했지만, 그가 이 단계에서 지닌 더욱 코스모폴리탄적이고 세속적인 관점은 바흐보다 한 수 위였다.

이 시점에 바흐가 받은 아주 특별한 훈련은 루터교가 강조하는 바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전망과 집착, 기대는 동시대 작곡가들과 어긋나 있었으며, 그는 가는 길마다 엄청난 괴리와 마주쳤을 것이다.

1600년 분열된 교회 양쪽 모두는 세속적인 연극의 옷을 빌려 종교에 입히는 데 불안감을 느꼈다. 이 불안감의 근원은 그 성직자들이 자신들이 느끼던 시각적, 청각적 자극이 서로 충돌함을 무의식중에 눈치챈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과 예배 안으로 ‘오페라’ 테크닉이 침입해오는 데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다. 당대 음악가들은 늘 그래왔듯 이처럼 고지식하고 기능적인 카테고리를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틀과 디자인, 표현 양식과 관련해서 그들은 적절하다 싶을 만큼 얄팍하고 형식적인 겉치레만 유지한 채 마음에 드는
것들만 까마귀처럼 골라서 취했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으로 향하는 길목을 제공하는 모차르트
오페라는 바흐 칸타타나 수난곡보다 확실히 더 부드럽고 골치 아픈 문제가 덜하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흥미진진한 스토리, 볼만한 장면, 희극과 드라마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비록 도덕적으로 모호한 일부 등장인물들은 즐거운 딜레마를 제기하긴 하지만). 이 모든 요소는 마찬가지로 바흐의 작품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은밀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의 대본은 부드럽게 통합된 극적 양식을 구현하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피날레 장면처럼 늘 하나로 통합되지만은 않는다. 후기 칸타타
중 상당수는 나병에 걸린 죄인과 고름, 종기와 같은 충격적인 이미지를 잔뜩 싣고 있다. 복잡하게 신학과 함께 뭉쳐 있는 이 이미지들은 그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을 상대로, 바흐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길을 잃은 바로 그 지점에서 넘을 수 없는 장벽으로 남는다.

바흐 교회음악의 인간적인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서, 복음주의 루터 신자들은 20세기 내내 음악을 (푹신한 극장 의자 대신 차가운 교회의 신도석을 선택하며) 고유의 전례적 맥락에서만 접근해왔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견해다. 다만 예배 중 그 음악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그 작품을 작곡한 작곡가와 그 음악을 위촉한 교회 성직자의 본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그 둘의 목적이 늘 일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바흐가 음악과 가사 사이에 구축한 독특한 변증법적 관계(이 점은 12장에서 심도 있게 논할 것이다)는 알아둘 필요가 있다.

루터가 정의하였듯이 음악의 구체적 의무는 성경 텍스트를 표현하고 거기에 감동을 더하는 것이었다. 음표는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다(Die Noten machen den Text lebendig).*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선물인 언어와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분의 힘을 구축하며, 텍스트가 주로 지성(뿐 아니라 열정)에 호소하는 반면 음악은 주로 열정(뿐
아니라 지력)에 말을 건다.)* 루터는 음악이 없다면 사람은 돌덩어리와 다름없지만, 음악이 있다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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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오브 드래곤>의 인물들은 내적 욕망이 만드는 논리에 따라서 행동하고,
<왕좌의 게임> 외에 어떤 쇼도 포착하지 못하는 묘한 현실감을 띤다. 판타지이면서도 인간사회의 정치학을 가장 극명하게 묘사하고, 숭고하든 비천하는 인물의 특성은 인간성격의 단면을 보여준다. 여기에 삶의 시시한 희극과 거대한 비극이 동시에 공존한다. 대표적으로 8화 "조수의 영주" 편에서 이제 늙고 쇠잔하여 죽음을 앞둔 비세리스가 사랑하는 딸 라에니라를 지지하기 위해 힘겹게 철왕좌로 걸음을 떼는 장면이 그렇다. 그의행진은 우스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에는 비극적 엄숙함이 있다. 이런 장면들이 모여서 <하우스 오브 드래곤>을 만든다.
- P16

여름철 과일은 폭우에 대비해 수확 시기를 당겨 맛이 들지 않고, 바람과구름만 봐도 날씨를 예측해온 어르신들의 지혜도 기후 패턴이 변화하는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타격이 큰 이들은 바로 무가온 비닐하우스 하나 없이 노지에서 농사짓는 이들 기후의 영향은비단 기온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날씨가 바뀐다는 건작물의 생리가 바뀌는 일이고, 벌레가 달라지는 일이며,
공기와 땅이 바뀌는 일이다. 30년 넘게 노지 농사를 지어온 한 농민은 "기후가 바뀌는 동안 노지에서 기르던 콩마늘, 양파 농사를 접어야 했는데, 올해 폭우를 겪으며 고추마저 접어야 하나 고민 중이다."라고 했다.  - P21

심지어는 ‘흙 없이 깨끗한 농산물‘이라는 홍보 문구를 내세워 판매하고 있다.
언제부터 흙이 더러운 존재가 된 걸까. 일부 엽채류는 흙없이 키울 수 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작물은 토양에 뿌리를 뻗고 살아간다. 흙은 농산물을 키워내는 동시에 곤충과 미생물이 사는 터전이다. 그들은 생태계의 분해자와 작물의 매개자가 되어 다시 작물을 키울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내고 작물의 생장과 수정을 돕는다. 모든 자연을 차단한 채 물과 필수영양소만 공급하면 작물을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이다.  - P22

기록의 과정을 지켜보니 그들에게 동네에 대한 애정을 넘어선 또 다른 의미가 생겼을지 궁금해졌다. 둔촌주공아파트를 기록한 분이 말했듯, 반포주공아파트라는 곳이단순히 어린 시절을 보낸 살았던 공간이 아니라 ‘고향의로 인식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은 또다른 정의를 내렸을까? 분명 아파트 단지인데 ‘동네‘라고표현된 문장을 보면서, 중요한 건 물리적 형태가 아니라는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기록의 대상은 아파트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파트를 통해 느낀 사계절의 변화, 주변 환경, 사람들, 풍경, 자연과 같이 다양한요소들이 전하는 기억과 감정을 함께 포함한 것이었다. 주택의 기록, 아파트의 기록이라고 별도로 구분하는 행위가무의미한 것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사라지는 무언가를기록하는 일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다시금 되새겨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P48

이에 대해서는 마블과 DC의 상황이 묘하게 같으면서도 다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쉽게 망가지지 않고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존재하는 것들의절반을 날려버리려 시도했던 타노스가 굳건하게 버티고있었기 때문이다. 꺾어야 할 절대적 존재야말로 히어로의존재 이유니까. 타노스가 부재한 지금의 MCU 상황을 보자, 히어로들이 멀티버스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게 모두 반드시 꺾어야 할 절대적 존재, 매력적인 빌런이없어서다. - P55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블랙 아담>은 <조커>의 리얼리티 전략을 취하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장르적으로 한데 섞이기 어려워 보이는 DCEU의 여러 캐릭터들, 즉 ‘저스티스 리그‘와
‘수어사이드 스쿼드‘라는 다소 이질적인 팀의 접목을 꾀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 P56

돈의 개념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생각하는가?
부유층은 개인 소유 자산으로 사회를 장악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부유한 개인이 존재하려면, 교통 네트워크와 교육체계, 의료복지시설, 법치주의 등을 포함한 사회기반시설이 필요하다. 법이 없다면재산도 존재할 수 없다. 재산은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는것이 아니다. 법의 통치에 따라 존재한다. 부의 축적에 필요한 기반 시설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책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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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0
하인리히 뵐 지음, 김연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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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장에서 언급된 남자들의 치근거림이 처음에는 조서에 다정함으로, 즉 "신사들이 다정하게 대했다"라는 식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 카타리나 블룸은 몹시 분노하며 있는 힘을 다해 반대했다. 개념 정의를 두고 그녀와 검사들 혹은 그녀와 바이츠메네 사이에 본격적인 논쟁이 벌어졌다. 카타리나는, 다정함은 양쪽에서 원하는 것이고 치근거림은 일방적인 행위인데 항상 후자의 경우였노라 주장했다. 심문에 참여한 신사들이, 그런 것은 모두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심문이 보통보다 더 오래 걸리면 그건 그녀 탓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치근거림 대신 다정함이라고 쓰여 있는 조서에는 절대 서명할 수 없다고 했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15/92

하인리히 뵐 (Heinrich Boll, 1917 ~ 1985)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Die Verlorene Ehre Der Katharina Blum>에서 카타리나는 은행강도 괴텐의 도주를 도와준 혐의로 인해 검찰의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 신문 과정에서 괴텐과의 연관성을 찾으려는 검사들과의 빚어지는 갈등도 카타리나를 힘들게 하지만, 정작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언론사 <차이퉁>의 악의적인 보도다.

이 순간에야 비로소 카타리나는 이틀 치 <차이퉁>을 핸드백에서 꺼내 보고, 국가가 이런 오욕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 주고 그녀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지 물었다. 심문할 때 거론된 세세한 사항들을 어떻게 <차이퉁>이 알게 되었는지, 게다가 어떻게 하나같이 왜곡되고 오도된 진술로 알게 되었는지 그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에서 하흐 검사가 끼어들어 당연히 괴텐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지대한 터라 언론의 보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직 기자 회견은 없었지만 카타리나의 도움 때문에 가능했던 괴텐의 도주로 인해 이제 불가피하게도 두려움과 격분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모욕적이고 어쩌면 중상일 수 있는 언론보도의 세부 사항들에 대해서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으며 수사 당국 내부에 '허술한 부분'이 있다고 밝혀지는 경우에는 당국이 그에 대해 소송을 걸고 그녀의 권리를 위해 도울 거라고도 했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31/92

검찰과의 다툼이 조서에 사용될 언어에 관한 것으로 작은 싸움이라면, 언론사와의 다툼은 인과관계라는 보다 큰 싸움이었다. 그녀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런 사람이었기에 은행강도의 공범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는 언론이 짜놓은 프레임 속에서 그녀를 둘러싼 모든 과거와 관계들은 그녀를 공범으로 적시하는 근거로 재정립되버렸다.

'공공의 이익'과 '알 권리'를 위해 한 개인의 삶이 무참하게 파괴되면서, 개인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피의자로 의심하는 다른 기관인 국가의 도움을 받아 왜곡 보도를 시정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이 카타리나 블룸이 처한 소설 안의 현실이다. 언론사 <차이퉁>에 의해 의도를 가지고 편집된 사실관계가 연일 계속되는 보도로 진실로 대중에게 인식되면서 주위는 물론, 자신마저도 자신 안에 숨겨졌을지 모를 의도를 의심해야 하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취한 행동은 과연 범죄인가, 정당방위인가?

먼지 하나 없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는데도 갑자기 자신의 서재가 몹시 지저분하게, 거의 뒤죽박죽이고 더러운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저 빨간색 가죽 의자가, 거기에 앉아 많은 일을 잘 풀어 나갔고 허물없는 대화를 나누었으며 정말 편안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저 빨간색 가죽 의자가 갑자기 그리도 거슬리는가, 무엇 때문에 책꽂이조차 역겹게 느껴지고 벽에 걸린, 자필 사인이 있는 샤갈 그림이 마치 화가 자신에 의해 조작된 모조품인 듯한 의심이 드는가? 재떨이, 라이터, 위스키 병. 비싸긴 해도 해로운 것은 아닌 이 대상들에 대해 반감을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48/92

분명 소속 기자 퇴트게스의 잘못으로 카타리나의 어머니를 사망케 한 <차이퉁> 사는 이제 <존탁스차이퉁>에서 카타리나가 어머니의 사망에 책임이 있다고 묘사하고,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슈트로입레더의 두 번째 집, 즉 별장 열쇠를 훔친 혐의까지 뒤집어씌웠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경우에는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차이퉁>의 모든 비방, 거짓말, 왜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62/92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여러 면에서 19세기 말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을 떠올리게 한다. 1871년 보불전쟁의 패배로 인해 악화된 국내 정세를 뒤집기 위해 유태계 장교인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 씌워 벌어진 드레퓌스 사건. 카타리나 블룸의 사건에 이러한 국내 정세가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드레퓌스 사건 당시 극우언론에 의한 사실왜곡과 차이퉁에 의한 편파/왜곡 보도는 카타리나 블룸의 사건과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언론에 의한 관계 왜곡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다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렇지는 못한 듯하다.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통해 독자들은 현대 사회에서 언론이 가진 막강한 권력에 대해 절실하게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언론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진실을 밝게 비춘다는 언론. 그렇지만, 언론으로부터 비춰지는 사실보도라는 조명이, 언론지형에 따라 다르게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론이 해야할 바는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논조'라는 빛을 줄이고, 대상으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흐릿한 형체를 보다 확대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빌어먹을 사실들, <차이퉁>의 사실들 말이다.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 주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놓여 있고, <차이퉁>은 늘 거짓말을 해 대는 파괴적인 초강력 주둥이로 경찰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거나 경찰에서 정보를 입수하면서, 헤드라인, 혐의, 비방, 비열함을 마구 내휘두른다. _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p7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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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14 15: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제가 얼마 전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해서 찜해놓고 있어서인지 반갑네요. 언론의 오보 행태하면 저는 가장 먼저 모스크바 3상회의 때 동아일보 오보 사건이 떠오르네요^^ 이후 국내는 그야말로 좌우분열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말죠. 언론의 잘못된 보도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 그야말로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던;
SNS가 활성화되고 가짜 뉴스가 쉽게 기사화로 이용되는 지금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언론이 있을까 점점 더 의문이 드는 요즘입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4 15:43   좋아요 3 | URL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동아일보에 의한 신탁통치 오보 사건은 현대사를 바꾼 사건 중 하나라 여겨집니다. 가깝게는 세월호의 전원 구조 오보 건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주요 언론사에 의한 의도적인 또는 실수에 의한 오보가 미치는 폐해는 어떠면 개인 SNS에 의해 조금은 완화되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기사에 대한 의문도 허용되지 않았다면, 이를 통해 기사의 사실성과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그 전제가 대중들의 폭넓은 관심과 팩트체크를 할 수 있는 권위가 있어야 하겠지요... 이 부분이 참 어렵다 생각됩니다. 거리의화가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바람돌이 2022-11-14 16: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을 드레퓌스 사건과도 연결할 수 있군요. 언젠가는 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못보고 있는데 꼭 봐야겟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뉴스 기사 보면 열폭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언론이 왜 이렇게까지 처참해졌나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22-11-14 16:31   좋아요 3 | URL
바람돌이님의 말씀처럼 판치는 가짜뉴스와 이에 대항하지 못하는, 어쩌면 가짜뉴스 생산지로서 주류 언론을 보는 요즘 현실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다만, 이런 폐해에 대해 보다 많은 이들이 공감하게 되었다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mini74 2022-11-14 17: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저 이 책 열받으며 읽다가 무섭단 생각들었어요. 너무 현실적이라서요 ㅠㅠ

겨울호랑이 2022-11-14 17:48   좋아요 1 | URL
민주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기둥 중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지만, 이러한 권력의 남용이 미니님께서 지적하신 바처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네요...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체로 바라본 플라톤의 통찰이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미니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

얄라알라 2022-11-14 19: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선별하시는 능력은,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 시기, [카타리나...]를 소개해주신 것도 다 이유가 있으신...항상 감사드립니다

겨울호랑이 2022-11-14 22:12   좋아요 1 | URL
에고, 아닙니다... 그저 상황에 맞는 책을 골라 읽고 정리하다보니, 얄라얄라님께서 좋게 봐주신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얄라얄라님 평안한 밤 되세요! ^^:)
 

재난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응답까지도 포함하는것이다. 그것은 사라진 이들의 입장에서, 사라진 이들을 대신하여, 사라진이들과 함께 잘못을 바로잡는 행동에 나설 것을 우리에게 촉구한다. 누가그들에게서 삶을 빼앗았는지 책임을 묻지 않고서는 재난이 기억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가와 사회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라진 이들의 희생에는 억울함 이상의 의미가 부여되기 어렵다. 이러한 의미에서 재난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라진 이들과 관계를 맺고 잘못을바로잡기 위해 함께 행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P3

그날 구호 활동에 나섰던 모두는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구조 현장에서 지켜본 일선 경찰들의 통제, 소방의 구조 지휘와 통솔은 있는 조건하에서 최선을 다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구호 활동 뒤에는그들의 노력이 숨어 있다. 경찰, 소방 모두 한계를 넘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 그이상을 하려고 노력했다. - P13

경찰과 소방이 더 많이, 더 가까운거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부족했던 소방과 구급대원의 손이 더 빨리 모일 수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존재만으로도 통제와 질서유지 역할을 하는 경찰관이 배치돼 있었다면 참사 직후 진입이 더 빠르지 않았을까. 애초에 인파가 뒤섞이는 일 자체를 예방할 수 있지 않았을까. - P13

참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무엇보다 남겨진 유가족과 생존자, 현장을 목격하며 구조에 동참한 시민들의 충격이 여전히 남아 있다.  - P20

특히 이번 참사는 언론 보도보다 SNS영상을 통한 전파가 빨랐다. 각종 영상 기록으로 전해진 참사 현장의 모습은 현장에 없던 시민들에게도 큰 충격과 트라우마를 남겼다. 소셜미디어로 연결망이 강화된 까닭에 사회 전체가 집단 트라우마현상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 P20

참사이후 <뉴욕타임스>가 던진 질문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이제, 목격자들은 과학적으로 군중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가젊은 참석자들이 모이는 1년 중 가장 바쁜 밤, 어떻게 그렇게 비참하게 실패할 수있는지 묻고 있다."  - P25

2012년 발표된 힐즈버러 독립 패널조보고서는 이 참사에 대하여 팬들의 책임프은 없으며 사건의 주된 원인이 경찰의 통제 실패라고 재차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사망자 중 41명은 좀 더 적절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증인진술서 중 상당수가 경찰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없애기 위해 수정되었고, 경찰 및 해당 지역의 보수당 의원이 사실이 아닌 정보를 <더 선>을 포함한언론에 흘렸다고 밝혔다.  - P29

세월호 참사 때는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분노를 유발했다면 지금은 중앙집권적인 지침으로 애도를 유도하고있어서 반발심을 일으키고 있다. 교육청에 조기 게양을 하도록 공문이 내려오고극장들은 일방적으로 문을 닫아야 했다. 애도를 위해 국가가 할 일은 큰 틀을 갖춰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각자의 방식으로 애도할 수 있도록 존중해줘야 한다. - P33

국립중앙의료원 주영수 원장은 "일종의 마약 같은 효과"였다고 말했다. 단기적으로 공공병원에 수익을 안겨줬지만그동안 병원으로서의 기능이 크게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정부 지시에 따른 것이지만, 감염병 전담병원으로서 오로지 코로나19 진료만 남겨두니 다른 진료 과목의 의사들이 하나둘 공공병원을 떠났다.
특히 수술을 하는 외과계 전문의들의 유출이 두드러졌다. - P48

건강하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다가 가끔 듣게 되는 의사의 경고가 귀에 거슬리는 것처럼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다는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는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들추며 불어대는 호루라기 소리 또한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는 아니다.
그러나 공익신고자의 호루라기 소리에 귀를 닫아버릴 때 우리는 참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태원 참사 직전 공익 신고가묵살된 것이 그저 ‘일개 경찰 담당자‘의 일탈이 아니라 공익 신고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주소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 P54

룰라는 화려한 복귀에 성공했지만,
앞으로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가야 한다의회와 지방권력을 장악한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싸우며 국민통합을 성사시키고브라질 경제의 성장을 위한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 남아메리카 ‘핑크색 진보주의‘
의 미래가 그의 양어깨에 달려 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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