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거에 왕을 선출하는 과정에 몇 번 참가했었지만, 새로 정해진 선거인단에서 빠지면서 신성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헌정 문서에서 누락되었다. 카를 4세는 의회의 향후 회합에 대비하여 직접 마련한 좌석 배치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을 선제후들과 고위 성직자들, 제국의 고관대작들 다음인 두 번째 열에 배치함으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위가 강등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알브레히트가 오스트리아에 장기간 머문 덕분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당시의 어느 연대기 작가로부터 "오스트리아인들"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오스트리아인들이라는 용어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가리키는 데에 쓰인 첫 번째 사례였다. 과거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섭정을 통해서 오스트리아를 다스렸지만, 이제는 슈바벤의 영지 덕분에 총독을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돌프의 업적은 한층 더 미묘한 것이었다. 루돌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들에게 역사의식과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덕분에 그들은 단순한 혈족 집단을 뛰어넘게 되었다.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과거를 상상으로 꾸며내고 대공의 관과 대공이라는 칭호를 창안한 데에 힘입어 후계자들 사이에서 연대감과 목적의식이 생겼고, 연대감과 목적의식은 각 세대를 거치는 동안 그들의 마음에 더 깊숙이 각인되었다. 다른 가문 사람들은 당대의 황제 덕택에 선제후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힘입어, 그리고 역대 황제들이 몇 세기에 걸쳐 인정해준 특권에 힘입어 높은 지위에 올랐다.

영주의 통치권은 정치적 공동체 의식을 유발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각 영지에서 피지배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이 출현했다. 이러한 정치 공동체들은 14세기 말엽부터 의회를 열어서 통치자와 정책을 토론했고, 증세를 둘러싼 권리를 증진시켜달라고 요구했다. 상속권 문제를 둘러싼 다툼이 일어나면 의회는 합의를 종용했고, 당사자들의 주장을 중재하기 위한 위원들을 임명했다.

AEIOU라는 두문자어와 성 게오르크 예배당 서쪽 벽의 문장, 그리고 급성장세의 연대기 문학은 모두 동일한 주제를 가리켰다. 오스트리아는 그저 하나의 지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의 통치자들은 위대해질, 그리고 사람들을 다스릴 운명을 타고난 자들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바로 그런 땅이었다. 사실, 오스트리아는 땅이 아니라 제국, 사명, 상속, 운명 같은 여러 주제들이 한데 모인 후천적 구성물이었다. 브란덴부르크나 작센처럼 다른 통치자들이 속한 가문의 이름은 주요 영토의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달랐다. 오스트리아는 지리적 요인과는 별개로 성립된 통치 가문을 향한 일련의 믿음이 특징인 곳이었다.

15세기 초엽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제의 옥좌에 도전할 가문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493년에 프리드리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이미 55년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자들로 군림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황실처럼 보였다. 그들은 역사를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바야흐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과 신화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은 위대함을 향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1437년, 프리드리히가 세계 제패의 뜻을 담아 비망록에 남긴 AEIOU는 허영심이 묻어날 뿐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1490년대에 이르러 그것은 믿을 만했고, 실현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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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 천상의 음악
존 엘리엇 가디너 지음, 노승림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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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칸타타, 모테트, 오라토리오 및 미사곡과 수난곡을 통해서 바흐가 자신의 폭넓은 세계관뿐 아니라 자신의 사고방식과 선호하는 기질(하필 그 가사를 선택한 이유로 들 수 있는)을 얼마나 명확하게 드러냈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7/518


 존 엘리엇 가디너 (John Eliot Gardiner, 1943 ~ )는 <바흐 : 천상의 음악 Bach: Music in the Castle of Heaven>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지휘자인 저자가 바라본 바흐의 생애와 작품들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본문에서 저자는 칸타타와 수난곡에 음악에 담긴 서사와 곡의 감상포인트 등 자칫 놓치기 쉬운 핵심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곡이 연주되는 단조로운 시간 속에서 청각만으로 작곡가가 만든 세계를 시각적으로 떠올린다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분명 쉽지 않은 부분이다. 그렇지만, 해당 곡과 함께 작가의 해설을 들으면 어렴풋하게나마 마치 샌드아트(Sand Art)처럼 바흐의 의도가 스쳐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여전히 뚜렷하진 않지만...)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 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이 같은 통일된 페이스는 <마태 수난곡>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45/518


 작가는 바흐의 음악세계를 소개하면서 결론적으로 바흐의 음악세계를 '변용(變容)'으로 표현한다. 저자 뿐 아니라 바흐의 곡을 가장 독창적으로 잘 소화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글렌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 ~ 1982) 역시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주제의식을 바흐음악의 특성으로 꼽는 것을 보면 바흐의 음악특성은 '변화(變化)' 또는 '음악표현의 다양성'이라 생각된다. 이처럼 바흐 음악의 대가(大家)들이 말하는 음악표현의 다양성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그 어느 것도 바흐 음악이 지닌 압도적인 변용의 힘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할 수 없다. 그의 칸타타가 기독교인과 비신도에게 똑같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힘 때문이다. 우리가 이 음악에 담긴 생각과 감정을 다른 경우보다 훨씬 솔직하고 명료하며 깊이 있게 표현한다면, 이 음악은 커다란 위안을 안겨준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84/518


 글렌 굴드가 말했듯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위법의 전제조건은 선율적 정체성을 선험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으로, 이 정체성은 일부 전적으로 새롭지만 완전히 조화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순서를 뒤바꾸거나 도치시키거나, 역행하거나, 혹은 리듬적으로 변형이 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지널 주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80/518


 저자는 바흐 음악에 담긴 변용안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 ~ 1564)의 정신과 음악론을 발견한다. 루터에 따르면 <성경> 텍스트에 담긴 이성(logos)과 음악이 표현하는 열정(passion)은 인간에게 내려진 신의 두 선물이다. 바흐는 이러한 루터의 교리에 따라 교회 칸타타를 교회 전례력에 맞춰 로고스를 담고, 다양한 기악과 성악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열정을 그의 곡에 담아냈다. 글렌 굴드가 말한 다양한 변화 속의 오리지널한 주제는 바로 곡에 담긴 로고스이며, 이것은 수학적이며 절제된 열정으로 음악이 재현되는 순간 청중과 연주자에 의해 매번 다르게 변주될 것이다. 


 루터가 정의하였듯이 음악의 구체적 의무는 성경 텍스트를 표현하고 거기에 감동을 더하는 것이었다. 음표는 언어에 생명을 부여한다(Die Noten Machen den Text lebendig).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강력한 두 가지 선물인 언어와 음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분의 힘을 구축하며, 텍스트가 주로 지성(뿐만 아니라 열정)에 호소하는 반면 음악은 주로 열정(뿐 아니라 지력)에 말을 건다. 루터는 음악이 없다면 사람은 돌덩어리와 다름없지만, 음악이 있다면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26/518


 의도적으로 절제된 표현들 속에는 음악 기호가 암시하는 해석상의 문제들이 가득 차 있다. 이것들은 악보에 직접 적어 넣을 수 없는 내용이다. 그 음악이 곧 터지기 일보직전의 화성적 잠재력으로 치장되어 있음을, 이러한 표현들의 본질적 뼈대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잠재력으로 인해 청중은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즉 어떤 화음이 숨어 있는지 몰라서 애태우게 된다. 바흐의 화성적 움직임을 파악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연주자와 청중 양쪽 모두가 참여해서 그러한 창조적 행위를 완성시킬 필요가 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99/518


 물론, 모든 음악이 재현되는 순간마다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바흐의 음악이 보다 특별하다면, 로고스의 패션의 결합, 언어와 음악의 결합이 다른 음악작품들 보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순간의 예술을 통한 영원한 작품 세계의 구현, 바흐 작품 목록(BWV; Bach Werke Verzeichnis)으로 이름지어진 개별 곡들의 조합이 만들어낸 전례력과 시간의 순환을 통한 영원한 신의 시간을 만들어낸 바흐의  세계. 그것은 작품 내에서는 대위법(對位法)을 통해 자연스러운 질서로서 표현되면서 청중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존 엘리엇 가디너는 <바흐 : 천상의 음악>을 통해 독자들에게 바흐 음악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의 작품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정신과 전반적인 특성을 분명하게 각인시켜 준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헨델(Georg Friedrich Handel, 1685 ~ 1759)과는 또 다른 면에서 바로크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바흐의 음악세계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면서 리뷰를 갈무리한다...


 바흐의 음악은 내러티브와 해설, 성서 연대기와 신학적으로 형상화된 시적 텍스트가 서로 맞물려 있었으며, 이처럼 정교하게 음악적 깊이를 따라 잡을 수 있는 이 또한 아무도 없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05/518


 무언(無言)의 음악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은 '언어'가 모든 면에서 우세했던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획기적이고도 새로운 전략이었다. 이것은 바흐가 기악 '언어' 안에 더욱 정확한 로고스(logos)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직감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내재된 기악 언어는 성서나 종교적 언어와 관련된 음악만큼 강력하게 신을 찬미하고 신의 세계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135/518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한다. 바흐의 음악 중 사실상 가사에 순응하는 소위 '타협'의 영역과, 가사에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충돌'의 영역 사이에는, 유사한 맥락에서 발터 베냐민이 언급한 '소리와 대본의 이분법'과 비슷한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는 가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논하고, 확장하고, 사색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시에 대해 음악은 물감을 한 겹 더 덧칠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의 물리적 실재를 더 두껍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음악은 메타포에 상응한다. 음악은 말의 흐름과 암송된 시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서로 다르게 구성된 리듬과 템포 속에 시를 배치한다. 작곡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언어에 청중이 함께 참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_ 존 엘리엇 가디너, <바흐 : 천상의 음악> , p372/518

지금까지 보아왔듯 바흐는 음악과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음악이나 언어를 따로따로 다루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음악이 때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음악의 힘은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의 편견과 유해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원죄와 구원, 악이나 회개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여전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에 의지할 수 있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모든 추잡함과 공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금언에 더 집중하게 된다. - P400

바흐 성악곡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그가 루터교 종말신학의 본질을 표현하며 이룩한 특별한 성취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확신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전통적인 종교나 정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바흐 서재를 채우고 있던 17세기 루터 신학자들이 구상한 ‘영원한 미래‘라는 중심 교리다. - P400

여기에 실험적으로 사용되는 새롭고 오래된 음악적 테크닉은 바흐의 경우 성서적 사건에 생기를 주며, 헨델의 경우는 시편 텍스트 수면 바로 아래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정한 힘을 묘사한다. 두 작품 모두 작센의 젋은이들이 돌연변이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심오하고도 혁신적인 역할을 이어갈 것인지 시음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시점에서 헨델은 사랑, 분노, 충성과 권력에, 바흐는 삶과 죽음, 신과 영원성에 매달릴 것을 암시하며 장래 이 두 거인의 집착이 어떻게 갈라질 것인지 보여준다. - P133

무엇보다 바흐는 헨델처럼 상습적인 모방꾼은 아니었다. 헨델이야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점화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싯돌로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문학과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바흐의 방식은 늘 고전적이었다. 우선 모델이 될 만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그들을 베낀 뒤, 거기에 서문이나 주석을 추가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에 정통한 어휘를 일거에 습득했다. 이는 모든 것을 최대한 포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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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농업혁명은 문명으로 가는 첫 단추라고 생각되지만, 알고 보면 거대한 사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우선 초기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작물의 양과 질이 모두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혈연관계가 아닌 이들과 조화롭게 사는 방법은 수많은 허구를 믿고 따르는 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왕이라고 불리는 사람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했고, 사제가 붉은 옷이 불경하다고 하면 입지 말아야 했고, 헝겊으로 가슴부터 무릎까지의 신체부위를 가리는 것이 예의라고 하면 따라야 했다.

농업혁명이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결과는 천문학의 탄생이다. 농사는 식물의 생활주기에 맞춰 진행된다. 농부는 하늘의 운행주기를 알아야 했다. 이는 태양, 달, 별들의 움직임과 관련된다. 이제 사제는 동굴에 벽화를 그리는 대신, 별의 움직임을 예측해야 했다. 훗날 천문학은 물리학의 탄생으로 이어져 인류를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이끌게 된다.

대중은 주기적으로 마음을 바꾸는 듯한 과학의 행태에 불만을 느낀다. 종종 사람들은 이를 과학의 결점으로 여긴다. 하지만 사실 바로 이런 부분이 과학의 강점이다. 새롭고 더 나은 증거의 등장으로 과학 공동체는 진실에 가까운 더 정확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면 과학과 이성, 진실이 모두 파괴되어 결국 혹독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보면 포스트모던은 17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에 이르는 모더니즘 시대 이후를 일컫는다. 계몽적 가치를 제외하고는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를 정의할 마땅한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계몽적 가치를 섣불리 받아들이길 거부한 사람들을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부르게 된 것이다.

트럼프가 하고 싶은 말은 정체성 정치론자들이 사회가 특권층 위주로 짜여진다고 지적하면서 주장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즉, 트럼프의 속내는 언론이 자신들이 가진 편견을 진실이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메타서사를 장악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4

정치적, 문화적 메타서사에 의구심을 표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사회적 분열은 계속적으로 촉진되고 있다. 사회의 결집 또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근본적인 서사에 대한 합의가 사라지면 우리의 위대한 사회는 결국 붕괴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일이 발생하기 직전의 시기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절정’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지도의 유용성은 예측 능력과 설명 능력에서 기인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지도를 바탕으로 행동할 수 있고 그렇게 행동해야 한다. 하지만 그 지도를 그것이 나타내는 지형(궁극적인 실재)과 혼동하거나 더 새롭고 더 정확한 지도는 불가능하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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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당은 하염없이 추락하는 정권과 당의 지지율을 더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인디언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으로 대영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인도혈통의 젊은 정치인을 제사장으로 뽑았다. 펀자브 지방에 뿌리를 둔 인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수낵은 부와 명예를 겸비한 초엘리트계층에 속하지만, 힌두교 성인 바가바드기타』를 들고 의원선서를 한 힌두교도이기도 하다. 전 세계를 호령했던 대영제국의 국민들은 인도계 출신 제사장이 출구 없는 극심한경제불황인 이른바 인디안 서머를 끝내주길 바라지만, 마른하늘에서 단비는 쉽게 내릴 것 같지는 않다. - P13

하지만 그로부터 30년 뒤, 모든 것이 사실로 판명됐다. 신자유주의‘ 세력이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이다. 마크롱 정권과 더불어 신자유주의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신자유주의는 이 정권과 함께 유례없는성장을 이룩했다. 덕분에 임금 체계가 무너지고 공직 사회가 붕괴했으며, 직업에 대한 소명 의식도 사라졌다. 공공서비스는 물론 그에 대한 애착도 이젠 볼 수 없는 세상이 됐고, 직업에 대한 애정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사회를 지탱하던 뼈대도 흔들리고,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따르지 않던 그 모든 형태의 공공 조직이 허물어졌다.  - P17

에너지 위기에 더해 팬데믹 이후에 계속된 충격으로 여러 산업분야(화학업, 철강공업, 에너지 산업이나 제지업 분야)가 침체를 겪거나 폐업했다. 에너지 소비가 너무 많아서수익성이 나빠진 것이다. 일부 기업은 생산시설을 베트남이나 북아프리카 지역, 심지어 미국으로 옮기고 싶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미국은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를 대체하고자 공급을 63% 늘리고 유럽과 영국에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루프트한자와 알디, 프레제니우스, 지멘스 등 생산시설 일부를 이전하려는 독일 기업 60곳은 미국 오클라호마의 구애를받았다.  - P23

IAEA는 러시아군과 한 공간에서 생활하는 우크라이나 기술자들의 근로 조건에 대해서도우려를 표명했다.
자포리자는 핵안보 중심지이자, 지정학적 요충지다.
러시아 점령전 자포리자 원전의 원자로 6기는 우크라이나전체 전력의 20%를 생산했다. 따라서 이번 갈등의 이면에는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독립 문제, 특히 원전의 전력공급문제가 있다. IAEA의 원전 사찰단은 러시아가 일부 점령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동부와 연결된 고압 전력선, 배전반, 변압기에 폭격이 집중된 사실을 확인했다.  - P27

크름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열강에 견줘 얼마나 통신, 교통등 분야에서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는지, 러시아 군대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취약하고 병사들의 신체적 상태도 심각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3월 농노제도를 폐지하는 등 각종 개혁을 실시했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도 1854년 영국·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의거해 일련의 정치·사회 개혁에 착수했다. - P34

전시에 일어난 강간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현대전에서 강간은 조직적인 전쟁무기가 돼버렸다. 정치·군사 당국은 상대를 모욕하고, 파괴하고, 지배하기 위한 전략적인 수단으로 강간을 사용한다. 강간이 전쟁무기가 된것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부터다. 전쟁무기가 된 강간은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구 유고슬라비아국제형사재판소(ICTY, 2001년)는 반인륜 범죄를 처벌한 첫 사례, 르완다특별재판소(1998년)는 집단학살을 처벌한 첫 사례일 것이다.
강간과 성폭력은 2002년부터 국제형사재판소(ICC)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 P41

시대의 징조로, 하메네이 최고지도자는 9월 20일 로하니 전 대통령을 포함해 서구에 극히 호의적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국정조정위원회(Expediency Discernment Council)‘에서 해임했다.
이 운동이 어디까지 가든, 이미 그 성과는 매우 중요해졌다. 이란의 청년들, 특히 젊은 여성들은 변화를 원한다. 도덕경찰은 해체되거나, 최소한 기존의 폭력적인 특권을 잃을수 있다. 히잡 착용 의무화가 폐지될 수는 있지만, 더 큰 정치적 개방성을 위한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라 장담할 수는없다.  - P57

19세기 말 시작된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그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는서구의 세계 정복 운동과 맞물려 있다. 프랑스의 유대인 동양학자 막심 로댕송은 1967년 전쟁 발발 당시 <레 탕 모데른느(Les Temps Modernes)>에 발표한 ‘이스라엘은 식민국가인가?‘라는 제목의 유명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이스라엘 국가 형성이, 19~20세기 유럽-미국의 대대적인 팽창 운동과 완전히 맞물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는 타민족을 경제적·정치적으로지배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 당시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일례로, 그는 남아프리카의 영국인 정복자중 한 명인 세실 로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계획은 식민화 계획‘이라고 썼다." - P75

그런데 NFT는 진본성과 소유권이라는 까다로운 문제를 철저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보장해준다. 예술품 투기 시장이 줄기차게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투명성이다. 사실NFT 작품을 구매하면 그 작품의 유일성을 보장해주는 보증서도 함께 구매하는 것과 같다. 구매자는 작품에 접근하기위해 일련의 암호를 입력해야 하는데, 그러면 동시에 원본인증서에도 함께 접근이 가능하다. - P103

NFT의 미래는 밝아 보인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점이있다. 암호화폐는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해 생산된다는 점에서 환경문제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가령 일론 머스크도 비트코인 투자 계획을 요란하게 발표한 지 3개월 후, 느닷없이친환경적 생산방식이 개발되기 전까지 비트코인 결제 허용방침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바람에 비트코인 시세가급추락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중앙은행을 비롯한 글로벌규제기관들이 암호화폐에 회의적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암호화폐가 극도로 불안정하며, 사기나 위조 등에 취약하다고판단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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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운임이다. 낮은 운임은 화물차 운전자를 과로와 과속으로 내몬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2020년부터 교통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운임을 정하고 이보다 낮은 운임을 주면 과태료에 처하는 안전운임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올해 말이면 운영이 종료된다(일몰제), 안전운임제를 계속 시행하려면 법 개정이 필요한데, 국회 논의는 더디다. 11월14일 화물연대가 파업을 예고하고 나선 이유다. - P4

화물운송 노동시장은 사고가 나기 매우 쉬운 구조다. 화물차 기사 입장에서 안전 운행을 할 유인은 없고 과로·과속과적 운행을 할 동기는 차고 넘친다. 영업용일반화물 (5t 이상) 트럭의 92.5%는 지입제로 운행된다(2021년 화물운송 시장동향 연간보고서). 해외 많은 국가에서는화물차 운전자가 일반 회사원처럼 운송회사에 고용돼 노동법의 보호를 받으며회사 소유의 트럭을 몬다. 한국은 대부분의 화물차주들이 개인이 소유한 화물차량을 통해 화주와 개별 운송계약을 맺는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여러 단계에서 지입넘버 (영업 화물차번호판)‘ 판매나 일감 주선 등의 명목으로 수수료를 떼어가는 중간 운수업체가 많은 것도 다른나라와의 차이점이다. - P19

안전운임제는 현재 수출입 컨테이너,
그리고 벌크 시멘트를 나르는 상업용 특수화물차 등 약 2만6000대에 적용된다.
전체 상업용 화물차 42만 대의 6%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그나마도 3년이라는기한이 끝나는 올해 말이면 해가 지듯 운영이 종료되는 ‘일몰제‘다. 화물연대는 일몰제를 폐지해 안전운임제를 계속 시행하고, 적용 품목도 철강재 · 위험물·자동차·곡물·택배(지·간선) 등으로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선 법 개정이필요한데 국회 논의는 더디다.  - P22

화물차 운전자들은 특수고용 노동자다. 현재 일부 품목(수출입 컨테이너·시멘트 · 철강재 · 위험물질·자동차·곡물 등)운송 차주만 제한적으로 산재·고용보험가입이 가능하다. 그 외에는 노동법상의각종 보호도, 최저임금도 적용받지 못한다. 지입제 구조하에서 거액의 빚을 지고번호판과 차를 산다. 쉴새없이 달려야겨우 적자를 면하고, 쉬려고 해도 휴게소에 주차공간조차 부족하다.  - P25

물론 검찰과 법원이 국민의 생명권과관련된 참사에 대해서는 더 엄정한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바뀌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형사처벌 만능주의에서 벗어날필요도 있다. 참사의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말단이 아닌 윗선의 변화가 필수적이고, 이들의 역할을 묻는 재난 조사가 수사에 앞서 또는 동시에 행해져야 한다. 재난조사는 범죄 구성요건을 성립하게 만드는 수사와는 질문의 내용과 초점이 다르다.  - P34

왜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인가? 뉴라이트 계열 학자로 꼽히는 이명희 교수(공주대 역사교육과)에게 물었다. 이 교수는 2011년에도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넣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여타 민주주의‘와 구분하기 위해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의 나라다. 원래(교과서 속) 민주주의란 용어도 당연히자유민주주의라는 뜻으로 쓰였다. 언젠가부터 민중민주주의나 인민민주주의와같은 개념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었다.
이런 것들과 구별하기 위해 자유민주주의라고 써야 한다." 이 교수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정체성에는 "반공 정책을통해 체제를 지켜온 역사도 포함된다. - P39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은 한국에서만, 그것도 한국사 교과서에서만 등장한다. 윤세병 교수에 따르면 "어느 나라도교과서에 자국 체제가 ‘자유민주주의‘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그냥 민주주의‘ ‘민주적‘이라고 쓴다."  - P40

전술핵 사용을 결정할 권한은 전적으로 미국에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나토식 핵 공유‘도 마찬가지다. 미국과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는 핵정책을 논의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배치 수량과 타격 요건 등 결정적 사안은사실상 미국 정부가 정한다.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한국이 직접 ‘몽둥이‘를 휘두를수 있다는 여권 인사들의 주장과 현실은꽤 거리가 있다.
전술핵 재배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럼에도 미국의 의지를 의심한다.  - P43

미국채는 수많은 다른 채권들의 벤치마크가 된다. 이를테면 회사채 등 채권수익률이 미국채 수익률보다 얼마나 더 높은지는 채권 선택이나 투자평가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또 채권수익률이 충분히커지는 경우라면 주식시장에서 대규모의자금이 채권시장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미국채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이처럼 수많은 금융거래의 중요한 연결고리인 미국채 가격이 폭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 P46

특히 눈길을 끄는 건 외상치유가 상담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게아니라는 사실이다. 허먼은 트라우마를유발하는 사건이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사회, 사람의 소중함을 잊은 공동체에서비롯되었기에 피해자의 회복을 위해선전문적 치료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모두의 뼈아픈 자각과 애도, 따스한위로와 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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