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머에 따르면 세이건의 주장은 반증할 수 없는 대상을 지식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입장에 반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반증될 수 있기에 ‘반증 가능성’이 자연의 경험적 대상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반증 가능성은 모순이 있거나 내적 일관성이 부족한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셔머는 감응적 존재sentient being에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는 것을 악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악이란 말은 더 깊은 철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적 악과 도덕적 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전자는 자연재해나 질병 같은 것이며, 후자는 누군가의 나쁜 행동이 초래한 고통 또는 피해와 관련된다. 셔머와 나는 토네이도 같은 대상이 그 자체로 악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재해에 따른 파괴와 죽음은 악이다(비록 셔머는 도덕의 문제를 위하여 ‘악’이라는 용어를 아껴두었지만 말이다.).

내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만약 신이 우주의 창조자라면, 그는 창조의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도덕성은 창조의 속성이므로, 신은 도덕적 속성을 가지지 않는다. 즉, 그는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내 말의 정확한 의미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는 신이 악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그가 도덕적 유형의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나는 신이 선하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의 선함이 무엇을 의미하든 그것이 특정한 행동의 결과라는 점을 거부한다.

물리학자에게 우주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여기서 철학적 논쟁을 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관측된다면 존재하는 것이다

뉴턴은 시간과 공간을 정의하지 않았다. 그냥 자명하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철학자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란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내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사고의 틀이라고 생각했다. 즉, 시공간은 기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뜻이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가 좌표계에 상관없이 같다면(맥스웰 방정식이 옳다면), 뉴턴의 운동법칙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특수상대성이론이 탄생했다.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르면 한 정지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가 움직이는 좌표계에서 측정된 시간과 길이와 같지 않다. 이래야 전자기학의 법칙이 좌표계와 상관없이 성립한다

시공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리학은 답할 수 없다. 물리학이 답할 수 있는 것은 측정된 시간과 측정된 거리뿐이고,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시공간이다. 이제 우리는 시간과 거리가 변한다는 말 대신 시공간이 변형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좌표계만을 대상으로 한다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속도가 변하는 모든 좌표계를 대상으로 한다. 이런 좌표계를 가속 좌표계accelerating coordinate system라고 한다.

지능의 잃어버린 유전율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효과가 작거나 빈도가 낮은 지능과 연관된 변이들을 찾아낼 수 있는 통계적인 힘이 필요했다. 그 힘은 지능을 계측한 수십 만명의 유전체 정보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지능에 대한 유전학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에게 불편하면서도 복잡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지능은 ‘어느 정도’ 유전이 된다. 하지만 지능에 연관된 변이는 매우 많으며 각각의 효과는 대부분 아주 작다. 즉, 물려 받으면 무조건 높은 지능을 부여받는 그런 ‘천재 유전 변이’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선 지능의 유전율은 100%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즉,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더 중요한 점은 유전율과 유전 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현재 아는 생명체 탄생의 핵심 조건은 액체 상태인 물의 존재 여부다. 그 결과 물이 있는 행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가늠하는 것이 n
e
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렇듯 n
e
에서 말하는 별, 행성, 생명체 등의 의미가 계속 변하고 있다.

서양 학문의 전통에서 감각 경험은 이성에 비해 상당히 오랫동안 외면되어 왔는데, 감각 중에서도 미각은 가장 원초적이고 저속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일반 원리를 찾기에 맛은 너무나도 주관적이어서 도저히 철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질 수 없었다.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미각은 과학의 영역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지난 50년 동안 액상 과당high-fructose corn syrup은 전례 없을 정도로 음식에 스며들었다. 1970년대 미국에서 옥수수 재배가 크게 늘어나는 농업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 시기부터 미국인의 비만 및 대사 질환도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역학적 변화에는 액상 과당의 소비량 증가가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52 문제는 인류의 역사에서 우리 몸이 다량의 과당에 노출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과당을 처리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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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태평양 세계)는 바다 때문에 고립된 게 아니라 바다를 통해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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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날 김대기 비서실장이 남긴다른 발언은 이상민 장관 유임의 진짜 이유를 추측하게 한다. 김 비서실장은 이날실무적인 이유를 언급하며 "지금 사람을바꾸고 하는 것도 중요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또 청문회 열고, 뭐 하면 두 달이 또 흘러가고,
행정 공백이 또 생기고"라고 말했다. 청문회 같은 임명 절차의 부담, 내각 공백을다시 맞닥뜨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을 내비친 것이다. - P13

참사 이전까지 윤석열 정부의 가장 큰 약점은 인사였다. 국정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시점마다 인사 난맥이 이어졌고,
제대로 된 정책 어젠다를 부각시키기도 어려웠다. 더욱이 이상민 장관은 집권 초경찰 내부 반발을 무마하면서까지 행안부 산하 경찰국을 신설한 윤석열 정부의핵심 인사다. 윤석열 대통령이 선뜻 ‘장관문책‘을 꺼내들기 어려운 이유다. - P14

30% 지지층을 단단하게 엮어주는 것은 북한이다. KBS-한국리서치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의 국정운영을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 중 39.8%가
‘대북 강경 대응‘을 평가의 이유로 꼽았다. 이태원 참사 이후에도 미사일 발사를계속하고 있는 북한의 위협과 대북관계불안이 대형 참사에도 불구하고 강성 보수층을 결집시키고 있다는 의미다. 이상민 장관이 ‘버티는‘ 원동력이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이 고위층 문책을 계속 회피할수 있는 원동력은 대북 강경 모드를 통한보수층의 결집이다. - P15

경찰은 알고 있었다. 핼러윈 기간 이태원거리에 수많은 인파가 별도의 주최자 없이 몰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고든 사건이든 돌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주고받았다. 예년과 비교한 상황 분석과 대응방향, 세부계획을 담아 종합대책을 만들었다. 참사4시간 전부터는 ‘압사‘를 암시한 112 신고가 빗발쳤다. 그러나 참사 이전에도, 직후에도 현장에 경찰은 부족했고 대응은 부실했다. - P18

그를 쫓는 것은 시간이다. 화물차 기사 스스로 예측하고 재단할 수 없는 ‘화물‘의 타임라인이다. 화주와 주선업체의사정, 도로 상황과 상·하차 대기시간, 물동량의 많고 적음과 물류 경기의 오르내림을, 화물차 바퀴를 굴려 맞춰야 한다.
그 불확실성 속에서 김씨가 바꿀 수 있는건 차량 주행속도뿐이다. 때로는 잠자는시간, 먹는 시간, 쉬는 시간을 포기한다.
화물 차량의 과속, 기사들의 과로와 졸음운전이 바로 이런 구조에서 발생한다. - P31

‘이거 벌려고 이 고생을 하나‘ 싶어 일을 조금 쉬거나 줄일라치면 바로 생계가위태로워진다. "나가는 돈은 똑같은데,
들어오는 돈은 쉬는 만큼 탁탁 깎이기 때문"이다. 트럭 할부금이 한 달에 314만원씩 나간다. 할부가 두 달 밀리면 바로 신용불량자가 된다. 여기에 지입료, 보험료,
유류비, 수리비, 통행료 등 한 달 매출의70% 이상이 꼬박꼬박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물가가 오르면서 지출액은 함께 늘어나는데 화주가 책정하는 운임료는 제자리걸음이다. 주선업체가 가져가는 수수료는 정확히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 P33

이로써 이른바 ‘흥국생명 사태‘는 일단 진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길이험난하다. 개별 금융기업으로선 지극히합리적이고 합법적인 의사결정이 국가차원의 외화 조달 상황을 삽시간에 극도로 악화시킬 수 있을 만큼 국내외 금융환경이 취약하다는 점이 이번 사태로 입증되었다. 지금처럼 불안정한 금융시장에서는 ‘내가 실제로 지급력을 갖고 있다‘보다 ‘내가 지급력을 가진 것으로 남에게 보이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신뢰보다는 불신이 재산을 지킬 수 있는 수단으로 선호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 P43

우선 이번 선거의 최대 이슈 가운데하나인 임신중지권(낙태권) 문제로 친공화당 주에서 여성유권자들의 이탈이 많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공화당의 대승 기류는 올해 6월 연방대법원이 지난 50년간 유지돼온 임신중지권인정 판결을 번복하면서 여성들, 특히 전통적으로 친공화당 성향이던 백인 여성유권자들의 이탈을 불러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 P54

중간선거 결과로 인해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각종 국정 과제가 차질을 빚게 생겼다. 바이든이취임 후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기후위기관련 입법에도 제동이 걸릴 게 확실하다.
특히 공화당은 인플레이션의 주원인으로 바이든 행정부의 방대한 재정지출을 지목한 만큼 대대적 삭감을 밀어붙일 전망이다. 이를 위해 공화당은 내년 초 한도에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연방정부의 부채한도 상한액 문제를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할 수 있는 절호의 카드로 본다.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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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모테트가 보여주는 빛나는 자유, 자신의 창조주를 찬양하며 보여주는 우아한 기쁨, 그리고 죽음을 명상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그의 완벽한 확신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의 운명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응답이다.

이 바흐 성악곡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면 그가 루터교 종말신학의 본질을 표현하며 이룩한 특별한 성취를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말로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영겁에 대한 아이디어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호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음악이 만들어내는 확신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확신은 전통적인 종교나 정치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물론 멘델스존이 1829년 「마태 수난곡」을 리바이벌할 때처럼, 지금보다 이른 시기 바흐 음악에 대한 반응도 지금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것은 바흐 서재를 채우고 있던 17세기 루터 신학자들이 구상한 ‘영원한 미래’라는 중심 교리다.

지금까지 보아왔듯 바흐는 음악과 언어를 함께 사용하며 기념비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이는 음악이나 언어를 따로따로 다루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음악이 때때로 글이나 말로 표현된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한 음악의 힘은 의식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서 사람들의 편견과 유해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우리는 원죄와 구원, 악이나 회개에 대한 깨우침을 위해 여전히 그의 칸타타와 모테트에 의지할 수 있다. 이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푸는 유일한 해결책을 기독교에서 찾고’ ‘모든 인류 안에 있는
화산 분화구를 열었던’* 도스토옙스키 같은 19세기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사실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 세상의 모든 추잡함과 공포보다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금언에 더 집중하게 된다.

바흐는 여기서 가사, 혹은 그 이면의 의미들을 투명하게 표현하고자 많은 공을 들인다. 이러한 시도는 여러 유리한 시점에 그 자신이 고안한 고도로 개성적인 양식으로 청중에게 들려온다. 그는 동시대 오페라 레치타티보에서 들을 수 있는 기계적인 재잘거림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중요하게 고조된 순간에 아리오소를 노래하고, 언어의 이미지를 피웠다 지울 수 있을 만큼 유연하게 음악적 표현을 전개한다.

글렌 굴드가 말했듯 ‘그 어떤 작곡가보다도 바흐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위법의 전제조건은 선율적 정체성을 선험적으로 구상하는 능력으로, 이 정체성은 일부 전적으로 새롭지만 완전히 조화로운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순서를 뒤바꾸거나 도치시키거나, 역행하거나, 혹은 리듬적으로 변형이 되었을 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지널 주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바흐를 신학자로만 보고 이 대부분의 칸타타들을 신학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앞서 보았듯이 신학은 주로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반면, 바흐가 표현한 자연스러운
양식과 음악적 전개는 고유의 논리를 가진다.

아놀드 토인비는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죽음이 가하는 고통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산 자와 죽은 자)로 나뉜다. 그리고 고통을 분담하는 과정에서 생존자는 가장 큰 타격을 받는다’* 바흐는 선량한 루터 신자답게 양쪽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즉 죽은 자는 축복의 잠에 빠지고 그 유족들은 끝없는 죽음의 결실 속에 영적인 평안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의 전략은 죽음에 대한 진실을 날것 그대로 알리는 렘브란트의 〈검은 웃음의 광풍 속에〉*보다도 공감이 간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늘 한결같지만은 않은데, 그 이유는 칸타타처럼 시인이나 작사가와 공동 작업을 하면서 절충 과정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이 모테트들은 코랄?(우리가 아는 한) 남의 간섭 없이 작곡가 본인이 직접 선택하고 수정한?과 결합한 압축된 경구 위주의 성경 문장에 의지한다. 덕분에 그는 화성을 만족스러울 만큼 통일성 있게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통일성은 다양한 텍스트와 다소 한쪽으로 치우친 형식을 사용한 교회 칸타타에서는 성취하기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지닌 비전의 범위 안에서, 바흐는 조화로운 전체로서의 우주적 개념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하고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하던 시점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사회 통합이 와해되고 종교라는 낡은 산물이 빠르게 붕괴되던 때였다.

침울한 참회의 장면 위로 막은 내려오자마자 다시 올라간다. 우리는 천상에서 천사들이 양치기들 앞에 내려오는 장면을 그린 새로운 예술 작품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작품이 헨델의 「메시아」다. ‘주께 영광’에서 한 무리의 천사들은 저 멀리에서 내려와 메시지를 전달한 뒤 하늘로 다시 날아간다. 그 모습은 순진무구하고 극적이며 고도로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바흐의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에서 바흐의 천사 합창단은 대위법에 완전히 통달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세속 춤곡으로 이루어진 「글로리아」를 외치며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루터 달력은 단식일에 못지않게 많은 축제일을 가지고 있으며, 바흐는 절기와 기독교 달력에 포함된 이교도 축제를 위한 칸타타를 여러 차례 작곡한 바 있다. 하지만 그중에는 이에 해당되지 않는, 즉 공식적으로 승인되지 않은 기념일을 위한 곡도 있었는데, 세례요한축일(6월 24일-옮긴이)이 그날이다. 이날은 카니발 스타일로 기념하는데 ‘그 방종함은 완전히 이교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거의 전(前) 기독교적이라 할 수
있다.’16)* 이 마지막 마디에서 바흐가 만들어내는 대위법적 묘미?그로 인해 우리에게 선사하는 기쁨?는 어마어마하다. 그 마법 중 일부는, 한 마디에 있는 12개의 16분음표를 나눈 교차 리듬 패턴과 당김음을 포함한 다양한 연주 방식에서 비롯된다.

무엇보다 바흐는 헨델처럼 상습적인 모방꾼은 아니었다.
헨델이야말로 자신의 상상력을 점화하기 위해서 다른 작곡가의 아이디어를 부싯돌로 사용하기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18세기 문학 및 음악 관습상 표절은 널리 허용되긴 했지만, 헨델과 달리 바흐는 다이아몬드를 만들기 위해 다른 사람의 거친 조약돌을 가져다 쓸 필요가 없었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바흐의 방식은 늘 고전적이었다. 우선 모델이 될 만한 작품들을 공부하고, 그들을 베낀 뒤, 거기에 서문이나 주석을 추가해서 자신만의 창의적인 방식으로 결합시켰다. 이를 통해 그는 다양한 테크닉과 스타일에 정통한 어휘를 일거에 습득했다. 이는
모든 것을 최대한 포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과정이었다.

헤르더는 인간의 창조적이고 정신적인 활동이 개인의 삶의 비전을 표현하는 데 이른다는 중요한 생각을 깨달았다. 이는 공감적 통찰에 의해서만 이해가 가능한데, 타인의 염원과 관심에 ‘스스로 감정을 이입하는’ 능력이다. 그는 바흐 성악곡들이 지닌 가장 고결한 가치를 이해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단순히 대상이나 예술품으로써가 아니라 한 개인의 비전으로서,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과 소통하는 귀중한 형식으로서 말이다. 바흐가 남긴 유산이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작곡가들의 그것과 다른 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월한 가문과 혈통을 타고났음에도, 바흐의 압도적인 인상은 자기 안으로만 몰입하고, 부모를 잃은 후 처음에는 학업에, 그 다음에는 음악에 모든 힘을 쏟아 붓는 지극히 사적인 개인이다. 그의 삶에 끊임없이 존재했던 죽음?부모, 형제, 그의 첫 번째 아내, 그 이후 여러 자식들?은 감정적인 은둔 내지 경계심으로 이어졌다. 이는 지극한 애정은 상실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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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1-22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후덜덜...... ^^;;;

겨울호랑이 2022-11-22 20:06   좋아요 0 | URL
책을 읽으며, 바흐의 음악은 정말 깊이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골드문트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
 

「마태 수난곡」은 특히 그러하다. 「요한 수난곡」에 대한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고 이 작품에 접근하다가는 길을 잃거나 당황하기 십상이며 심지어 그 작품으로부터 배척당하는
기분까지 느껴진다. 듣는 입장에서 우선 관심을 끄는 점은 이야기의 진행이다. 사건 순서대로 순차적으로 진행되던 이야기에는 확장된 묵상 악장들이 끼어들며 훼방을 놓는다. 그렇게 이야기의 전달과 응답이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쌍둥이 시간대가 번갈아 등장한다

바흐의 스트럭처를 풀어내는 실마리 중 하나가 바로 그처럼 변화하는 속도감이 주는 효과다. 그 효과는 「요한 수난곡」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장중하고 신중하다. 이런 음악을 제대로 해석하는지 여부는 연주 중 극적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속도감에 부응하는 ?또는 되풀이하는? 정도에 달려 있다.

「요한 수난곡」에서 즐길 수 있었던 생생한 장면 묘사와 거침없는 극적 추진력이 감소되는 대신 이 「마태 수난곡」에서는 정교하게 의인화된 다양한 ‘음성들’ 드라마 자체(바흐가 주로 대화를 통해서만 진행시키는)에 개입되어 있을 뿐 아니라 아리아도 부르는 우화적인 요소들과, 생산적인 긴장 상태에서 연속적이면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시간
변화를 유지하는 방식을 즐길 수 있다. 이 같은 통일된 페이스는 「마태 수난곡」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 중 하나다.

앞서 작곡한 수난곡에서 작품에 신빙성과 날카로운 통렬함을 선사했던 것은 요한이라는 특정한 목격자의 설명이었다. 여기에 불규칙하게 등장하던 아리아와 코랄은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돋우었다. 이러한 효과가 마태오의 버전에서는 더 많은 출연진과 ‘한 인간의 슬픔’으로 대변되는 예수의 인간적인 파토스가 추가되며 나타난다. 본질적으로 사람들이 한눈에 알아보는 원초적 소재를
가지고 만든 끝없는 투쟁과 도전, 배신과 용서, 사랑과 희생, 동정과 연민의 휴먼 드라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할 수는 없다. 바흐의 음악은 때때로 이야기의 뼈와 피에 거의 물리적으로 직접 관여하면서 마태오의 이야기와 상상 속의 관망자들의 충격적인 반응 양쪽 모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로 인해 우리는 ‘전율하고, 냉담해지고, 눈물을 흘리고, 심장이 박동하고, 거의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되는 것이다.’

강렬한 휴먼 드라마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처럼 설득력 있고 애틋한 방식으로 표현한 도덕적 딜레마라는 점에서, 바흐의 두 편의 수난곡에 필적하는 작품은 내가 연구하거나 지휘해본 당대 오페라 세리아 중에는 단 하나도 없다.

음악과 언어의 관계는 언어와 생각과의 관계만큼이나 복잡하다. 언어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전달 과정에서 감수성이 떨어질 수 있다. 반면 음악은 연주를 통해 생각과 감수성을 완전히 자유롭게 전달할 수 있다. 이 같은 표현 방식을 일상적 교류에 사용하는 것은 그리 적절치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음악으로 표현된 생각들은 언어로 표현된 그것보다 훨씬 분명하고 충만하게 전달된다.

시에 대해 음악은 물감을 한 겹 더 덧칠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한다. 즉, 의미를 전달하는 단어들의 물리적 실재를 더 두껍게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소리다. 음악은 메타포에 상응한다. 음악은 말의 흐름과 암송된 시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 서로 다르게 구성된 리듬과 템포 속에 시를 배치한다. 작곡가 자신이 읽어내려가는 언어에 청중이 함께 참여한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바흐는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었다. 용인되던 취향의 범위, 더 많은
형식적·표현적 어휘를 수용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 인간의 감정을 전달하고 신에게 기도하고 이웃을 교화시킬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더 확장시키고자 했고, 이전에 자신이 무엇을 성취했든 늘 그 이상을 원했다.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언어를 흔히 ‘메타언어’라고 한다. 바흐의 음악 중 사실상 가사에 순응하는 소위 ‘타협’의 영역과, 가사에 직접적으로 상충하는 ‘충돌’의 영역 사이에는, 유사한 맥락에서 발터 베냐민이 언급한 ‘소리와 대본의 이분법’과 비슷한 중간 지대가 존재한다. 이 중간 지대에서는 가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논하고, 확장하고, 사색할 수 있으며, 그에 동의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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