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측 입장에서 보면 WTO는 주요 무역 세력 사이에서 중재의 장을 마련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미국은 불공정한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국가에 대해 언제든 필요한 만큼 보복할 수 있어야 했다. 그렇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WTO의 역할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긍정적인 방향에서 제안하기보다는 공화당이 미국 의회에서 효과를 거두었던 방법을 사용했다. 미국은 WTO 위원단이 새로운 중재자들을 선임하는 것을 거부했고 대신 지원을 끊겠다고 위협을 가하면서 WTO가 점점 더 제 기능을 못하고 불법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었다.

굳이 중국의 이른바 국가자본주의를 언급하지 않아도 조세 감면과 보조금, 그리고 수출 지원 시스템 등을 통해 세계 무역은 점점 더 기업의 가치사슬뿐만 아니라 국가 개입의 영향을 받았다. 미국이 감당하고 있는 막대한 규모의 무역수지 적자의 대부분은 중국이 실시하는 차별적 조치뿐만 아니라 역외 조세피난처를 통해 사라지고 있는 수출 수익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었고 이런 조세피난처는 비단 카리브해 연안뿐만 아니라 유럽연합 안에도 있었다.

지난 2008년 위기의 진앙지는 바로 미국이었다.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글로벌 금융시스템의 기능에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했다. 미국과 나머지 G20 국가들은 전대미문의 노력을 기울여 "미국의 자유로운 정치와 경제 시스템" 그리고 세계 경제 모두를 안정화시켰다.

2017년에 미국의 경제성장은 꾸준하게 진행되었고 실업률은 금융위기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시장은 호황으로 돌아섰고 유럽 경제는 마침내 반등을 시작했다. 당장 어떤 위기가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가 대서양 양안 세계화의 오랜 중심지인 미국이나 유럽이 아닌 세계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중국과 신흥시장으로 관심을 돌린다면 질문이 갖는 진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중국과 신흥시장국가에서는 2017년 이전 몇 년이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코노미스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정부가 자본을 통제하면서 상당 부분이 각 지역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먼저 대도시를 중심으로 주택 가격이 치솟기 시작했다. 소형 자동차에 대한 판매세는 반으로 줄었다. 어쨌든 이런 정부의 개입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다.

지난 2008년에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풀어 미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한 주제였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지금, 중국 경제가 세계 경제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중국 당국은 자국의 주식시장을 안정화하고 외환 유출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달러를 푸는 것과 상관없이 미연준이 위안화를 안정시키려는 중국의 노력에 어떻게 협조할 것인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 것이다.

자본주의 안정화 노력의 일환으로 미국 재무부와 연준이 공동으로 실시한 대응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목표는 은행들의 생존능력 회복이었고 이를 위해 유럽과 신흥시장국가들까지 포함한 모든 달러화 기반 금융시스템에 엄청난 유동성과 통화부양 조치가 동시에 제공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건 이런 노력을 정치적 자산으로 이끌어내지 못했던 민주당의 무능이었다.

유럽중앙은행과 독일, 프랑스가 효과적인 위기 탈출 전략을 함께 수립하는 데 실패하면서 2010년과 2015년 사이에 유로화는 오히려 세계 경제의 위험과 불안정의 근원이 되어버렸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미국과 유럽 대륙의 관계는 물론 경제 문제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는 않으며 문화와 정치, 외교와 군사 문제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그런 관계가 적어도 유럽연합과 NATO 가입을 간절히 바라는 동유럽까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아시아의 경우 미국과의 동맹 체제는 언제나 그보다는 좀 더 느슨한 관계였다. 그리고 냉전에서 서방측의 승리는 결코 완벽하게 마무리된 것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축적해놓은 외환보유고 덕분에 서방측 제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국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과 자금을 보유하고 있다. 어쩌면 중국은 미국의 연준과 중국인민은행 사이의 밀접한 협조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국이 그렇게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자랑한 건 결국 서방측이 그토록 오랜 세월 비판을 가해온 금융 규제와 외환관리 시스템의 결과였다. 중국에서 외화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었던 힘 뒤에는 더 새롭게 강화된 그런 통제정책들이 자리하고 있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중국 국내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세력과 국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세력 사이의 알력도 문제가 되며 또한 엄청난 금융 위험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정치라는 존재를 의미 없게 만들어버리는 이런 시스템들의 작동방식은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 관련된 역사에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 하면 결국 그런 설명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선택과 이념, 매개체 등은 대단히 결정적인 결과들과 함께 이런 설명 전반에 자리하고 있다. 단지 복잡한 요소로서가 아니라 금융공학이라는 거대한 "시스템"과 "작동장치", 그리고 기구의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엄청난 변수와 우발적 사태들에 대한 실질적인 반응으로서 말이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여러 혼란스러웠던 순간들을 생각해보면 21세기 초반은 여러 가지 사건들이 100주년이 되는 시점들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해야 할 시점이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이 되는 2014년이다. 지난 2014년에는 전 세계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많은 기념식은 물론 토론도 진행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20세기 최대의 사건이자 충격으로 기억한다. 우크라이나와 동아시아의 갈등 상황을 통해 1914년의 교훈을 특별히 더 중요하게 떠올린 이유도 그에 한몫한다. 좀 더 비유적으로 말하면 1914년은 2008년 금융위기가 제시한 역사적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좋은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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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는 진정 ‘중심에 위치한 태양으로 음악의 모든 지혜는 그로부터 나왔다.’

작곡가로서 바흐의 순수한 위상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정상인이 성취할 수 있는 스케일을 넘어서 있다. 그를 신격화하거나 초인(超人)으로 추앙하는 경향은 바로 이 때문이다. 누구나 천재를 흠모하고 싶어 한다.

바흐의 인간성은 그의 음악 사상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발전되고 다듬어져 왔다. 그의 실제 행동 패턴은 부차적인 문제였고, 어떤 경우는 음악가로서의 삶과 일상적인 삶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해석됐다. 바흐 음악의 작곡 및 연주 과정을 이중으로 들여다봄으로써, 작곡가 자신의 인간다운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인상은
오늘날 재창조와 재연의 경험을 통해서만 농후해질 수 있다.

하지만 왜 위대한 음악은 위대한 인간에게서만 탄생한다고 가정하는 것일까? 음악은 우리에게 영감과 행복을 주겠지만, 그렇다고 그 작곡가가 반드시
영감을 주는 (영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 보장하지는 않는다. 아마 그런 경우도 때로는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굳이 전제할 필요는 없다. ‘이야기꾼이 이야기보다 훨씬 빈약하거나 매력이 부족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다른 많은 작곡가도 그렇지만 특히 바흐의 경우는 창의적인 표현 핵심을 처음부터 정의하거나 관통하기보다는 장인처럼 음악 재료를 시간을 들여 다듬고 변형시키는 절차를 추적하는 편이 훨씬 더
용이하다.

연주는 애매한 태도를 취할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온전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견해와 해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전달하고자 한다. 그 느낌은 음악을 움직이는 모터와 춤곡 리듬에 연결되어 있고, 일련의 화성과 복잡한 대위법 소리망에, 그들의 공간 관계에, 만화경처럼 시시각각 바뀌는 기악과 성악(함께 연주되어 서로 충돌할 뿐 아니라 제각기 연주될 때)의 변화에 휘말려 있다.

바흐의 모든 선율이 성악가에게 친절하지만은 않고, 퍼셀이나 슈베르트처럼 듣기 좋은 것도 아니다. 종종 모가 나 있고, 프레이즈는 불편할 정도로 길며, 작은 소용돌이와 장식음을 계속 퍼붓고, 노래를 제대로 시작하기 전부터 요구하는 바가 많으며, 이 요구들은 강철 같은 호흡 조절을 필요로 한다. 이는 비단 성악뿐 아니라 기악 파트에도 해당되는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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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의 위기 동안 동유럽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정부에도 해주지 않았던 양보를 그리스 극좌파 정부에 해준다면 그 결과로 돌아올 건 재앙뿐이었다. 그리스 국민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은 유로존의 더 광범위한 경제적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 싸움은 독일 정부의 보수적 글로벌리스트들이 생각하는 대로 더 광범위한 정치적 원칙과 권위에 대한 문제이며 장기적인 경제적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했다.

만일 그리스가 이 채권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지급불이행을 선언한다면 유럽중앙은행은 심각한 손실을 입을 것이며 채권 매입에 대한 위험성이 강조되고 또 어떤 식으로든 독일 우파들이 양적완화 조치의 적법성에 대한 의문을 다시 재기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유로존 위기의 결과로 한 국가의 경제정책은 국제적인 합의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유로그룹 입장에서 그리스 채무 관련 협약은 하나의 기준점이었고 그리스 정부의 입장과는 전혀 상관없이 협약은 지켜져야만 했다. 협약 자체는 변동이 없었지만 신경전이 시작되었고 야니스 바루파키스와 네덜란드의 예룬 데이셀블룸이 거의 주먹다짐까지 갔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재정승수(fiscal multiplier)와 같은 문제에는 IMF도 좀 더 "진보적인" 관점을 갖고 있었지만 장기적인 경제성장에 대해서는 오랜 관습을 고수했다. 성장률을 끌어올리기 위해 그리스는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고 사업 인허가 제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세하고 철저한 "공급자 중심의 개혁"이 필요했다. 또한 그리스 정부는 민영화 과정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수도 있었다. 이런 조치들을 실행하는 건 어느 정부나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시리자 같은 좌파들의 연합체로서는 정치적인 자살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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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돌연변이 매와 돌연변이 찌르레기가 더 잘 날았기에 생존에 보다 유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개선이 이루어지려면 알맞은 돌연변이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알맞은 ‘고독한 천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화가 이루어지는 방식이 아니다. 인류의 혁신이 반드시 고독한 천재를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진화에서 새로운 ‘착상’의 궁극적인 원천이 돌연변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유성 생식은 유전자들을 뒤섞어서 많은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 내며, 그것들은 자연 선택의 대상이 된다. 공학자의 착상처럼, 유전자도 뒤섞이고 재조합된 뒤에 검사를 받는다. 탁월한 돌연변이(즉, 고독한 천재)가 출현할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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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설계와 진화적 설계의 최종 산물은 양쪽 다 아주 좋으며, 매우 잘 날기에 우리는 두 개선 과정이 얼마나 다른지를 그냥 편리하게 잊곤 한다. 이 망각은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도 드러난다. 독자는 이 책에서 내가 일종의 축약언어를 써 왔다는 점을 눈치챘을 수도 있다. 나는 새와 박쥐, 익룡과 곤충이 우리 인간 공학자들이 하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비행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고 썼다. 마치 다윈 자연 선택이 아니라 새 자신이 문제를 푼다는 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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