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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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은 사랑, 정확하게는 젊은 연인(戀人)들간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모습은 '욕망'에 다름아니다. 내가 느끼는 '욕망'과  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 이를 인식하는 '결핍한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이를 채워주는 상대로서의 ''난 널 사랑해 Je-t-aime'의 '너', 그리고 욕망을 매개하는 언어(sinifiant).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단상>의 배경이 된다.


 마음은 욕망의 기관이다. 마치 상상계의 영역 안에 사로잡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은 내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바로 거기에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마음의 모든 '문제점'이 집결되는 불안이 있다.(p85)... 내가 실제로 충족될까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 해도 괜찮다). 오직 파괴될 수 없는 충족에의 의지만이 찬연히 빛난다.(p89) <사랑의 단상> 中


 욕구불만의 문형은 현존일 것이다.(p34)... 그런데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욕망(desir)이 욕구(besoin)에 짓눌린다. 바로 거기에 사랑의 감정의 집요한 사실이 있다.(p35)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사랑하는 나'는 '욕망의 주체'가 될 것이고, 상대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와 대상은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言語)를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담긴 언어 행위를 통해 사랑은 이루어지기도, 깨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intraitalbe) 것을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p13) <사랑의 단상> 中


 이런 담론의 파편들을 우리는 문형(fingure)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생동감 넘치는, 즉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아닌 행동하는 상태에서 포착된 몸짓이다.(p14)... 우리를 스쳐가는 담론 속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 즉 언젠가 읽고 듣고 느꼈던 것에 의해 문형은 차려진다...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안내자 외에는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p15) <사랑의 단상> 中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p7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에서 낱말이 중요하지 않다. 낱말과 낱말이 모여 만들어낸 문장. 그리고,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 행위의 시간 속에서 오가는 감정을 저자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등과 같은 고전의 지지를 받는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p30)... 하나의 (고전적인)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한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남여양성겸유자(androgyne)의 두 반쪽은 서로를 갈망한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Hiimeros)'가.)(p33) <사랑의 단상> 中


 육체의 모든 주름(plis)에 대해 나는 '근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근사해란, 그것은 유일하기 때문에 내 욕망이야란 뜻이다... 그렇지만 내 욕망의 특이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이름짓기는 힘들어진다. 과녁의 정확함에 이름의 흔들림이 대응한다. 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p41)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은 연애와 관련한 여러 모습이 담겨 있다. 떠난 이에 대한 아쉬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과 상황. 만남에서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과정에서 중심은 내 자신이며, 사랑은 '욕망'으로 표현된다. '욕망'을 통해 연애의 사랑을 쫓아가는 <사랑의 단상>의 접근법은 연애 경험이 있는 또는 연애중인 이들에게 추억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단상>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렇지만, 만약<사랑의 단상>의 사랑에 대한 접근법에 동감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충족시키고(충족되고), 축적한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여분(trop)을 만들어 내며, 바로 이 여분 속에서 충족이 내도한다.(p87)... 모든 '만족감(satisfaction)'을 뒤로 한 채, 과음(soul)이나 포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포만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겨움, 구역질, 취기 대신에 일치(Coincidence)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침'이 나를 알맍은 것으로 인도한다.(p88)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실의 범주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이다.(p97)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첫 고백 이후 모든 언어 행동은 무의미하다. 이미 '사랑'의 뜻은 전해졌으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받고 싶기에,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또한, 말을 하는 이 역시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일종의 '자기 강화'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어를 단순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번 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 널 사랑해 Je-t-aime'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 말을 그것의 관여성(pertinence) 여부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되풀이할 따름이다. 그것은 언어에서 나와 어디로 배회할 것인지?(p21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p197) <사랑의 단상> 中


 또한, 우리가 사랑할수록 더 모호함에 빠진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보자.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알아가지만, 또한 우리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연인의 이데아(idea)를 깨나가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짝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할수록 자기 자신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함에 빠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내면에 있는 비밀이 사랑을 통해 외부로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비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체험이겠지만.


 정보 제공자는 나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하나의 비밀을 드러나게 한다. 이 비밀은 심오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에게 감추어졌던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이 외부이다. 막은 거꾸로 열린다. 내밀한 장면이 아닌 관중석에서,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p203)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인내심은 그 출발부터 자체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이나 자제력, 속임수,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격심해도 닮지 않는 그런 불행이다.(p20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사랑이 좋은 결실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닐것이다. 변하지 않고 바래지 않는 '영원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욕망하고 그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거나, 그것을 가질 수 있어서(욕망의 충족) 행복하다는 것은 말그대로 사랑의 단면(斷面)이라 여겨진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p213) <사랑의 단상> 中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 한 편의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면, 헤어짐 역시 완성된 사랑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해석을 믿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말은 모두 진실의 기호로 받아들여, 내가 말할 때 그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지 어떤지는 의문시하지 않으련다. 바로 여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무엇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야만 하고, 또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p307) <사랑의 단상> 中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는 약속이다. 이 말에 담겨진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의 무게는 현재가 아닌 미래(未來)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라본다면, 연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사랑을 알고 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유한한 인간 삶을 통해 궂은 일, 좋은 일을 함께 겪고 '영원(永遠)의 상' 아래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단상>이 대상으로 하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림] Prince and princess(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65564531992133/)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대부분의 동화가 위와 같은 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결혼식 이후'부터 시작된다. 아쉽게도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에서의 사랑과 욕망.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범위의 한계라 여겨진다.


 사람과 관련한 많은 예술 작품이 있지만, 그 안의 어느 작품도 온전하게 사랑을 담지 못하고, 담아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하는 사랑 역시 그런 점에서 사랑의 일부일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해 일관점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오랜 추억으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단상>은 좋은 책임을 확인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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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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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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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16: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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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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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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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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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5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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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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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그때 당시에도 알 수 있을까? 사랑은 우리의 아픈 이별 이야기를 아름답게 표백시킨 다른 표현이 아닐런지... 사랑에 대한 여러 물음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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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4-14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정독한 사람입니다. 페이퍼로 쓰기도 했죠.

아마도 이별하고 나면 정확히 상대에 대한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러나 이건 또한 착각일 수 있죠. ㅋ

겨울호랑이 2019-04-14 18:33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페크님 말씀처럼 많은 것이 불분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만은 명확해진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2019-04-14 16: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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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8: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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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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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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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서간집」저자 강의가 오후에 있어 미리 훑어본 자료를 올려 봅니다. 강의 후 내용 정리와 함께 본문에 대한 리뷰를 올릴 계획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이해가 되어야할텐데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추운 주말이지만, 이웃분들 모두 건강한 하루 되세요!






스피노자의 사상은 요컨대 철학적 논의에 막대한 양분을 제공 하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논쟁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 이 논쟁은 형이상학과 더불어 윤리학, 즉 삶의 구체적 방향을 결정지을 수 있기 때문에 피상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것이다.(p428)

 스피노자가 인정하는 신의 개념은 어떠한 것인가? 그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다. 목적성을 가진 창조, 혹은 무로부터의창조(creatio ex nihilo)는 인격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지성을 통해 창조할 세계를 구상하고 의지와 힘을 통해 세계를 현존케 하는 신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이 창조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인격신 개념에서 신 안에서의 간극과 결여 및 불완전성을 보고 있기 때문에 세계가 지성에 의해 미리 구상되고 의지나 힘에 의해 나중에 실현되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p439)

이 세계는 여러 세계들 가운데 선택된 세계가 아니라 유일한 전체일 뿐이다. 이 세계는 어떤 지성에 의해 미리 생각되고 창조된 것이 아니라, 계획과 실현 간의 그 어떠한 간극도 없이 그 자체로 영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신이 바로 이 세계이다.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 을 표현하는 "신 즉 자연(Deus sive Natura)"이 바로 이런 의미이다. 자연이라는 자연주의적 존재론을 확립하고 인간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이 존재론의 토대 위에 그리는 것이 스피노자 윤리학의 골자이다.

인간의 본질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욕망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욕망의 윤리학이다. 존재를 보존하고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현존자의 유일한 규범이고 목표이다. 원초적 힘과 욕망이 인간의 근본을 이룬다. 이런 근원적 존재 보존 노력이, 스피노자가 코나투스(conatus)라 명명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힘의 증진, 더 큰 완전성의 획득, 즉 기쁨으로 향한다.(p441)

스피노자의 욕망의 윤리학은 실존적이고 행복주의이다. 욕망의 윤리학은 인식이고 여정이며, 구조이고 지혜이며, 엄격함이고 기쁨이다. 욕망의 완성은 완전한 기쁨이며 극도의 존재 의식이다. 이런 욕망의 여정은 지극히 험준하지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드문 만큼 어려운 것이다. (Sed omnia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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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1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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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6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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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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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7 09: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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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잇 2019-01-26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간집이라해서 한번 읽어볼까 하다가.. 당시는 편지에 논문 수준의 글을 써서 보냈다니,
포기했습니다. 입문서부터 봐야 할 처지라..
나중에 좋은 글 올려주세요.

겨울호랑이 2019-01-26 13:48   좋아요 0 | URL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에티카」보다는 읽기 편한 것 같습니다. 다른 입문서는 못 읽어봤지만, 스피노자 철학 분위기를 익히기에는 좋은 책이라 여겨집니다. 제 생각으로는 포스트잇님께서 지금 바로 읽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지음, 서정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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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히테에게는 모든 존재와 의식의 근원은 곧 절대적 자아의 자기 정립 활동이다. 규정된 모든 현상계의 절대 근거인 '자유로운 활동적 자아'가 피히테 지식학의 중심인 것이다. 바로 이 자유로운 활동적 주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학자의 사명도 논할 수 있다.(p125)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는 제목 그대로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 ~ 1814)가 정의한 학자의 사명과 관련한 다섯 가지 강의를 모은 책이다.  본문에서 피히테는 다섯 가지 강의를 진행하면서, 학자의 사명에 대해 말하기 전 '학자란 무엇인가?', '사회 속에서 신분의 차이란 무엇인가?', '사회 속에서 인간의 사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자신의 사명이란 무엇인가?'등의 질문을 제기한다. 인간의 사명부터 학자의 사명으로 점차 질문의 범위를 좁혀가면서 본질(本質)을 찾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피히테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강의는 첫 번째 강의라 생각하기에, 이번 리뷰에서는 첫 번째 강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강의에서 저자는 먼저 인간을 독립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순수 자아가 비아 das Nicht Ich(非我)의 산물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자아 외부에 있으며 자아와 구별되고 자아에 대립되는 모든 것을 저는 비아라 부릅니다. 그리고 순수 자아가 비아의 산물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p23)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인간 자체를 독립적으로 고찰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와 동등한 다른 이성적 존재자와 맺는 관계를 우선은 고려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를 고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을 이렇게 규정할 경우 인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p24)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피히테는 이처럼 자아(自我)는 비아와 독립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러한 주장을 펼쳤을까? 피히테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 스스로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피히테의 논의에서 우리는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사상의 영향을 발견하게 된다.


 자아는 이처럼 외적 사물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규정해야만 하며 결코 낯선 것에 의해 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따라서 모든 유한한 이성적 존재자의 최종 사명은 절대적 일치성, 항구적인 동일성,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합치입니다. 이러한 절대적 동일성이 순수 자아의 형식이자 유일하게 참된 형식입니다.(p27)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그토록 확실하게 인간에게 이성이 있다면 인간이 인간 자신의 고유한 목적이다. 즉 어떤 다른 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지 않고, 인간은 인간이 있기 때문에 단적으로 있다. 인간의 단적인 존재는 인간 존재의 최종 목적이며, 동시에 우리는 모순 없이는 인간 존재의 어떤 목적에 대해서도 물음을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가 존재하므로 존재합니다. 인간이 단적으로 이성적 존재자로 고찰되는 한, 절대적 존재, 즉 자기 자신으로 인한 존재의 이러한 특성이 인간의 특성이자 사명입니다.(p25)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칸트 사상의 영향을 짙게 받은 다음의 문단을 통해 인간의 존재 목적은 이성(理性)이 있기 때문이며, 이에 대해서는 더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다. 이 부분에 대해 역자는 해제(解題) 속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피히테에 따르면 우리가 가장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동일률의 명제, 즉 'A는 A이다'라는 것이다. 피히테는 이 동일률을 'A가 존재한다면'이라는 A를 가정하는 측면과 'A가 존재한다'라는 A를 정립하는 측면의 결합, 즉 사유의 측면과 존재의 측면이 결합된 것으로 해석한다.(p124)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A=A' 라는 항등식은 A를 다른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표현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좌항의 A와 우항의 A의 형태를 띤 대표적인 명제를 <성경 聖經>에서 찾을 수 있다.


  "나는 있는 나다 Ego sum qui sum" <탈출 3, 13~ 14> 영어로 "I am who I am"로 번역되는 이 명제를 충족하는 존재는,  칸트의 최고선(最高善). 도덕과 행복이 결합된 완벽한 존재인 신(God)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인간이 그 자체로 존재 목적이 된다는 피히테가 말한 의미는 인간이 이성을 통해 최고선과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뜻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완전히 일치해야 하고, 이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과 일치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 외의 모든 사물과 그 사물들에 대한 필연적인 실천적 개념들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치는, 대체로 칸트가 최고선 das hochste Gut라고 칭했던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고선은 이성적 존재자의 자기 자신과의 완전한 일치입니다.(p30)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그렇지만, 인간은 동시에 감성(感性)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최고선과 결코 같아질 수 없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정 사물을 감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감성은 인간을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은 존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어떤 것인 한, 인간은 감성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동시에 이성적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은 감성에 의해 지양되지 않으며, 감성과 이성이라는 이 양자는 서로 양립해야 합니다. 앞에서 말한 '인간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명제는 감성과 이성의 이러한 결합에서 다음과 같은 명제, 즉 '인간은 단적으로 그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그 어떤 것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라는 명제로 바뀌게 됩니다.(p26)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순수한 물이 100도에서 끓는다면, 불순물이 섞인 물의 온도는 이보다 더 높게 된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 최고선과 일치를 이를 수 있다면, 감성이라는 불순물을 가진 인간은 최고선과 일치를 이루기위해 더 많은 노력을 투입해야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의 사명은 이해되어야 하며, 피히테의 학자의 사명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논의 된다.


 인간이 최종적인 목표에 이를 수 없으며 그 목표를 향한 도정(道程)이 끝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바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 내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최종적인 목표에 이르는 것 자체가 인간의 사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목표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으며 다가가야만 합니다.(p31)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 中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는 제목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많은 내용을 다룬 글은 아니지만, 피히테의 논리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칸트 철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 또한, 피히테가 그의 유명한 저서 <독일 민족에게 고함 Reden an die deutsche Nation> 속에서 교육(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그가 말한 학자의 사명은 단순한 사명이 아니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책에서 말한 인간의 사명의 실천과 관련하여 막스 베스(Max Weber,1864 ~ 1920)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이, <학자의 사명에 관한 몇 차례의 강의>는 단순한 직업 윤리나 사명감을 강조하는 내용의 책이 아니라, 독일 관념론(觀念論 idealism) 철학을 개략적으로나마 알려준다는 점에서 일독(一讀)할만한 책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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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7 0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7 1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 - 르네상스와 한 책 사냥꾼 이야기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 이혜원 옮김 / 까치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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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 못지않게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창조뿐만 아니라 해체까지 수용한다는 비교적 폭넓은 미와 향수(享受)는 몽테뉴의 모든 움직이는 물질에 대한 쉼 없는 고찰, 세르반테스가 쓴 미친 기사의 이야기, 미켈란젤로의 벗겨진 피부에 대한 묘사, 레오나르도가 스케치한 소용돌이, 카라바조가 세밀하게 묘사한 그리스도 발치의 더러운 흙더미 등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르네상스 시대였다.(p17)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1417년, 근대의 탄생>은 한 권의 책과 그 책이 연 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 한 권의 책은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 BC 99 ~ BC 55)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이며, 이 책이 연 한 시기는 르네상스(Renaissance)다.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스크립토르(scriptor)가 찾고자 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과연 어떤 책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한 그리스 철학자를 먼저 만날 필요가 있다. 바로, 에피쿠로스(Epikouros, BC 341 ~ BC 271)다.


[사진] 에피쿠로스(출처 : 위키백과)


 에피쿠로스의 설명에 따르면, 원자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충돌하고 특정한 상황에서는 서로 결합하여 더 큰 물체를 이루기도 한다.(p95)... 설령 자연의 질서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그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보편적인 법칙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실제로 그런 이해야말로 인간의 삶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쾌락의 하나이다. (p96)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神性)이라는 개념이 매우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이 우주의 창조자도 파괴자도 아니며 아마 자신의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p125)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세계가 오직 원자와 진공(void)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보다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윤리적 가치관이었다. 즉 최고의 선은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경감에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주된 문제였다.(p129)... 쾌락의 추구에 대한 혐오와 신의 정당한 분노의 현현. 이로써 에피쿠로스 사상에 대한 조종이 울렸다.(p130)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에피쿠로스 사상에서 후대에 큰 영향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의 원자(原子, atom)론과 쾌락(快樂)주의였다. 물질계를 구성하는 요소를 원자로 파악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원칙을 쾌락의 관점에서 파악한 에피쿠로스의 사상은 로마 시대에 루크레티우스가 계승한다. 이들은 모두 후대에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이 비판받게 된 이유는 달랐다. 에피쿠로스가 신(神) 중심의 중세(中世)에 윤리학의 관점에서 비판받았다면, 중세 말 재발견된 루크레티우스의 시(詩)는 원자론으로 인해 비판받게 된 점에서 이들에 대한 비판점은 차이가 있다.


 루크레티우스가 가져온 질병에 붙일 수 있는 다른 단순한 병명은 이른바 무신론(atheismus, atheism)이다. 그러나 실제로 루크레티우스 본인은 무신론자가 아니었으며, 신의 존재를 믿었다. 다만 신이라는 존재는 아마도 인간 존재 자체나 인간이 하는 여러 짓거리에는 무관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p230)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그러나 무신론 - 보다 엄밀하게는 신의 무관심 - 은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문제점이 아니었다. 정작 가장 주요한 쟁점이자 대단히 불온한 논쟁의 시발점이 된 것은 바로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물질계였다. 이 논쟁의 가공할 만한 위력은 수많은 이들 -마키아벨리, 브루노, 갈릴레오 등 -을 매료시켜서 기묘한 일련의 사상적 조류를 형성했다.(p232) <1417년, 근대의 탄생> 中 


  원자론과 무신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철학자인 이들 두 철학자들은 같은 내용을 주장했으나, 윤리학으로 단죄받은 에피쿠로스는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 반면, 자연학으로 비판받은 루크레티우스의 저서는 후대 자연과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일단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세상에 다시 발을 들여놓자, 인간의 경험을 환성적으로 그려낸 시인의 글귀가 르네상스 시대의 여러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 강력한 힘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시인으로서의 루크레티우스의 재능이 그의 급진적인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처럼,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되었던 것처럼, 이탈리아 인문주의자 집단과 직간접적으로 접촉이 있던 예술가들에 의해서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은 통제하기 힘든 형태로 변환되었다.(p303)<1417년, 근대의 탄생> 中


  특히,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는 루크레티우스의 우주론을 이어받은 인물로 브루노를 언급되고 있다.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를 통해 기존의 우주관을 뒤엎은 브루노는 1600년에 화형으로 인해 사망했으나, 그 뒤를 이은 갈릴레오(Galileo Galilei, 1564 ~ 1642), 뉴턴(Sir Isaac Newton, 1643 ~ 1727)로 인해 과학(科學, science) 시대가 열리는 계기가 되었음을 책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


[사진] 조르다노 브루노(출처 : 위키백과)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이 불러일으킨 충격을 더 멀리 끌고 나갔다. 브루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닌 것처럼 태양도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한마디로 말해서  우주에는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를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복수(複數)의 세계가 존재하며 그곳에서도 무수히 존재하는 만물의 씨앗들이 결합하여 다른 종류의 인간, 다른 종류의 생명체들을 만들 것이라고 썼다.(p299)<1417년, 근대의 탄생> 中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이처럼 중세 말, 한 권의 책을 찾는 책 사냥꾼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책의 주인공은 그가 아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의 진정한 주인공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잊혀졌던 철학자 에피쿠로스이며, 우리는 한때 잊혀졌는던 이들이 후대에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가를 생생하게 확인하게 된다.  


 물론, 한 권의 책만으로 한 시대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큰 영향력을 미친 책이라 할 지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 초기 에피쿠로스가 받아들여지지 않은 반면, 중세 말 루크레티우스가 받아들여진 것으로부터도 확인된다. 그런 면에서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 그리고 있는 르네상스에 미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의 영향은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절대적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1417년, 근대의 탄생>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지기 위한 사회적 토대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이러한 기반 위에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같은 작은 불쏘시개가 일으킨 거대한 화염이 한 시대를 바꾸는 가능성 역시 지켜볼 수 있었다. 이처럼, 비록 지난 시대의 유물일지라도 여건이 갖추어지면 변혁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가 끊임없이 과거를 돌아봐야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1417년, 근대의 탄생>은 그 이유를 충분히 보여준다는 면에서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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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9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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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9 1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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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29 13: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송년인사를 드렸나 안 드렸나 기억이...... 제가 이렇습니다.

겨울호랑이님, 2018년도 덕분에 시야도 넓히고 겸손도 배우는 한 해였어요.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많이 배우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9 14:05   좋아요 0 | URL
^^:) 저 역시 syo님을 만나 즐겁고 유쾌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또, 바쁜 중에도 시간을 쪼개 독서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배운 바가 많은 한 해 였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oren 2018-12-29 17: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몽테뉴의 수상록을 맨 처음 읽을 때 생각이 납니다. 그 책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던 인용문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이었는데, 도대체 그 사람이 어떤 시인이었길래 이토록 오묘한 세상의 이치를 모두 꿰뚫고 있을까, 싶은 생각밖에 안 들더군요. 몽테뉴의 책을 처음 읽을 땐 인터넷이 없어서 ‘루크레티우스‘라는 인물을 손쉽게 검색해 볼 수도 없었고, 그저 막연히 그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 하기만 했는데, 뒤늦게나마 루크레티우스의 그 유명한 책도 번역되어 나오고, 그 책이 먼지더미 속에서 발굴되기 까지의 과정을 다룬 책까지 나오는 걸 보니, 이제와서 새삼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몽테뉴-갈릴레이-뉴튼 등등으로 이어지는 위인들의 정신적 교감의 계보가 흥미롭기도 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12-29 18:24   좋아요 3 | URL
「1417년, 근대의 탄생」에서는 oren님 말씀처럼 루크레티우스가 몽테뉴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사상이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서로 교차되어 문명이라는 하나의 직물로 만들어진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보입니다. oren님 편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

레삭매냐 2019-01-01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흥미롭게 본 책이긴 한데,
스티븐 그린블랫이 아무래도 좀 튀긴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그래도 미시적인 접근이 상당히 인
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1-02 08:01   좋아요 0 | URL
^^:) 저도 좀 그렇게 생각됩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이 책으로 모든 르네상스 혁명을 설명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그럼에도, 이 책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해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쓴 책이라는 점에서의미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AgalmA 2019-01-02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읽을 때 진짜 대단한 책이라는 걸 절감했지요. 인용이 많이 되는 책이지만 플라톤 계보에 비하면 존재감 파워는 없어서 마이너 세계에서 유명한 저서겠거니 했는데 그 정도로 영향력 있었던 책인 건 몰랐네요. 궁금하던 『1417년, 근대의 탄생』리뷰를 이렇게 빨리 보게 돼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01-02 07:5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리뷰에서는 많이 생략되어 있지만, 본문에서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 대한 내용 요약도 잘 되어 있어, 예술에 관심있는 분들은 <1417년, 근대의 탄생>의 미적 영향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아요. AgalmA님께서 칸트를 읽으신 후 보시면 더 좋은 리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