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와 기호들 들뢰즈의 창 4
질 들뢰즈 지음, 서동욱.이충민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곧 진리 찾기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까닭은 진리란 본질적으로 시간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p39)... 누가 진실을 찾는가? 바로 애인의 거짓말 때문에 고통받는 질투에 빠진 남자이다. 찾기를 강요하고 우리에게서 평화를 빼앗아 가는 어떤 기호의 폭력이 늘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p4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6-07 1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7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7 2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6-07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금요일 보내셨나요.
즐겁고 기분좋은 주말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9-06-07 23:2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
 
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지음, 윤진 옮김 / 이제이북스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도가 성체의 신비를 통하여 물질이 되는 것처럼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물질이 된다. 노동은 죽음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죽음을 겪어야 하며 이 세계의 중력을 견뎌 내야 한다.(p296)... 인간의 사유는 과거와 미래에 매달리지 못하고 매순간 다음 순간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복종이다.(p297)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빈자리를 견뎌 내는 것,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과 같은 곳에 있다.(p26)

창조는 중력의 하강 활동, 은총의 상승 활동, 그리고 제2의 힘이 행하는 은총의 하강 활동으로 이루어진다. 은총은 하강 활동의 법칙이다.(p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한 철학사전 민음 생각 3
볼테르 지음, 사이에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볼테르(Voltaire, Francois-Marie Arouet,1694 ~ 1778)의 <불온한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은 백과사전처럼 구성된 책으로 다양한 주제의 짧은 글을 통해 계몽주의자인 저자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 중 이전 시기와 비교해 특징적인 몇 개의 주제(자연, 인간, 사회, 신/종교)를 통해 볼테르의 생각을 들여다 보도록 하자.


[그림] 볼테르(사진 출처 : 위키백과)


1. 자연 : 인간에게 본성을 준 존재


 볼테르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본성(本性)을 부여한 존재다. <불온한 철학사전>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성격, 운명 등은 인간의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 자신에 의해 좌우될 수 없는 외재 요인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들 요인은 자연 또는 절대자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불변의 법칙(法則)에 의해 작동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법 Lois 자연이 인간을 만들 때 몇 가지 본성을 부여했다. 자신의 보존을 위한 자기애, 타인의 보존을 위한 자비심, 다른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사랑, 그리고 어떤 동물보다도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재능이 그것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우리 몫을 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알아서 해!"(p416) <불온한 철학사전> 中


 성격 Caractere 성격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으로 형성된다. 그런데 감정도 생각도 자신이 자신에게 주는 게 아님이 충분히 입증됐다. 따라서 우리의 성격은 우리에게 달린 것일 수 없다.(p156) <불온한 철학사전> 中


 운명 Destin 세계는 그 자체의 본성, 그 물리법칙에 따라 존속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 어떤 절대자가 자신의 지고한 법칙에 의거해 창조했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세계에 내재하는 법칙은 불변이다. 어느 경우이든 세계에 내재하는 법칙은 불변이다.(p212) <불온한 철학사전> 中


2. 인간 : 이성을 가진 피조물


 자연으로부터 본성을 부여받은 것은 인간만은 아니다. 다른 동식물 또한 자연으로부터 본성을 부여받아 만들어졌는데, 이들과 인간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볼테르는 그것을 스스로 완성해 가는 재능, 이성(理性)이라고 파악했다. 


 사랑 Amour 짝짓기를 할 때 동물은 대부분 오로지 한 가지 감각으로만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 모든 것이 사그라진다. 인간을 제외하면 그 어떤 동물도 포옹을 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이 허락한 것을 누리며 스스로 완성해 나갈 수 있는 재능을 부여받았다. 바로 그런 재능으로 인간은 사랑을 완성했다.(p44) <불온한 철학사전> 中


전쟁 Guerre 모든 동물은 끊임없이 전쟁 중이다. 모든 종이 저마다 다른 종의 포식자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으니, 이 이성은 인간이 동물을 흉내 내는 수준으로 타락하지 말라고 경고해 주어야 마땅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동족을 죽일 무기도, 그들의 피를 빨려는 본능도 부여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러하다.(p331) <불온한 철학사전> 中

 

 이 땅을 혐오와 비열로 더럽힌 그 증오스러운 재앙을 보면 자연이 스스로 만든 작품을 경멸하고, 스스로의 계획을 부정하며, 스스로의 의도에 반대되는 일은 하지 않느냐고 비난하게 된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 최상의 세상일까?(p45) <불온한 철학사전> 中


  저자는 비록 다른 생물들과 구분되는 인간만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재 인간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은 곳이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정말 악인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고 말한다. 적은 수의 악인이 재앙을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가장 큰 악은 동족간에 서로 죽이는 행위다. 인간이 자신의 권한을 넘는 행위인 동족을 죽이는 행위가 볼테르 관점에서는 가장 나쁜 행위다.


 악인 Mechant 결과적으로 세상에는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사악한 존재가 많지 않다. 물론 여전히 나쁜 사람이 많고, 여전히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불평하고 과장하면서 얻는 기쁨이 너무 큰 나머지 자그만 상처에도 세상에 피가 넘쳐흐른다고 비명을 지른다.(p427) <불온한 철학사전> 中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악(惡)은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것이다. 우리가 죽은 이후에 살을 구워 먹든 양초를 만들든 그것은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선량한 인간은 자기가 죽은 이후에 무언가에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에 화를 낼 리 없기 때문이다.(p59) <불온한 철학사전> 中


 <불온한 철학사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내용 연결을 위해 몇몇 내용을 첨가해본다.  사회는 인간이 이러한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이들을 통치할 권력이 필요하며 그 결과로 여러 형태의 정체(政體 Etatas, Gouvernements)가 수립되었다는 내용으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권한이 왕권신수설로 연결된다면 홉스(Thomas Hobbes, 1588 ~ 1679)의 이론을, 사회계약론으로 연결된다면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 ~ 1778)사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 부분은 다음에 다시 정리하도록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3. 사회


 볼테르는 <불온한 철학사전>의 여러 곳에서 정체에 대해 언급한다. 여러 체제의 정체가 있지만, 저자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 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처럼 최선의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은 자신들이 처한 처지에 따라 다른 정체를 원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또한, 권력자와 민중의 다툼은 항상 발생하지만, 결국은 민중의 복속으로 끝난다는 말을 통해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 현상을 설명한다.


 민주 정치 Democratie 민주 정치는 아주 작은 나라이면서 또한 지정학적 위치가 좋을 경우에만 적합한 정치체제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공화정이 군주정보다 더 좋은 정치체제인가? 이것은 늘 되풀이되는 질문이다. 이 논쟁의 끝은 매번 동일한데, 즉 인간을 통치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p210) <불온한 철학사전> 中


 조국, 고향 Patrie 당신의 조국이 왕정 국가인 것과 공화정 국가인 것 중 어느 쪽이 낫겠는가? 해법을 부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모두 귀족 정치를 선호한다. 서민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민주 정치를 원한다. 왕정을 선호하는 것은 왕들뿐이다... 지상의 거의 모든 곳이 군주들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것은 인간이 자치를 할 만한 그릇인 경우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p451) <불온한 철학사전> 中


 평등 Egalite 가난한 자들 모두가 절대적으로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대다수는 태어날 때부터 가난한 상태로 태어나는데, 끊임없는 노동에 쫓기다 보면 자신들의 처지를 깊이 느낄 여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처지를 인식하는 순간 계층 간에 싸움이 일어난다... 이런 싸움들은 길든 짧든 결국 모두 민중의 복속으로 결말이 난다. 왜냐하면 강자들에게는 금전이 있고, 이 금전이야말로 한 나라 안에서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p227) ... 인간이라는 종은, 본래의 성향 그대로라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로 노동력을 제공할 수밖에 없는 무한한 수효의 인간이 있지 않은 한 존속할 수 없다.(p228) <불온한 철학사전> 中


4. 신/종교


 <불온한 철학사전>에서 볼테르는 종교(宗敎)에 대해 매우 비판한다. 종교가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말,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내용,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는 저자의 글을 통해 종교(특히 기독교)에 대한 저자의 비판적 자세를 확인할 수 있다. 


 종교재판 Inquisition 종교재판은 교황과 성직자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위선의 왕국을 공고히하는, 매우 경이롭고 매우 기독교적인 발명품이다.(p383)... 종교재판은 우리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박해를 견뎌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신성함이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괴물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p388) <불온한 철학사전> 中


 기도 Piere 한 마디로, 우리가 신에게 기도하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우리 모습대로 신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신을 마치 도발하거나 달래거나 할 수 있는 무슨 파샤나 술탄인 양 취급한다. 요컨대, 모든 백성들은 신에게 기도한다. 현자들은 체념하고 신에게 복종한다.(p482) <불온한 철학사전> 中


 종교 Religion 한마디로 그리스도교 아닌 이교도의 종교는 거의 사람 피를 흘리지 않았는데 정작 우리의 종교는 세상을 피로 적시다시피 한 것이다. 우리 종교는 아마도 유일하게 훌륭한 종교이고 유일하게 진실한 종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종교의 방편을 쓰면서 너무도 많은 악을 저질렀기에 다른 종교에 대해 얘기할 때는 겸손해야 한다.(p497) <불온한 철학사전> 中


 이처럼 <불온한 철학사전>을 통해 우리는 종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바라보고 새로운 자세로 인간을 탐구하려는 계몽주의(啓蒙主義  Lumieres) 지식인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우리가 과학(科學 science)라 부르는 방법을 활용해 인간과 자연을 알아가고자 노력한 계몽주의자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영혼 Ame 지적 능력을 갖춘 영혼은 정신일까, 물질일까? 그리고 우리보다 앞서 창조되었을까, 아니면 무(無) 속에 있다가 우리가 태어날 때 같이 나올까?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영혼은 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영원히 살아갈까? 전부 훌륭해 보이는 질문들이다. 하지만 이 질문들은 모두 맹인이 다른 맹인에게 빛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p27) <불온한 철학사전> 中


 그렇지만, <불온한 철학사전>에서 이러한 계몽주의의 새로운 흐름과 동시에 우리는 한계도 확인할 수 있다. 영혼과 같이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는데 있어 아직은 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18세기 당대 지식인의 인식과 한계를 느끼게 된다.


 당신이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영혼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초자연적인 계시의 도움 없이 당신 혼자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곤, 당신 안에 당신이 알지 못하는 능력이 있어서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p36)... 그대의 미약한 이성만으로는 또 다른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우리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고, 나머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신이 그 섭리를 통해 우리에게 비물질적인 영원한 영혼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면 모를까, 우리 스스로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할 것이다.(p37) <불온한 철학사전> 中


 <불온한 철학사전>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에세이(essay) 형식으로 쓴 글이다. 책 곳곳에 나타난 저자의 재치와 유머는 자칫 무겁게 나갈 수 있는 책의 무게를 덜어준다. 그러면서도,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인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독(一讀)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22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2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2 18: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23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삶은 갓 태어난 아기를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품에 안는 어머니처럼 여전히 다감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는다.˝(p63)

˝나타나기만 하면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지는 요정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자기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p99)

우리는 살아가며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잊는다. 우리가 기술복제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과거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지만, 해결과 동시에 또다른 문제를 불만스럽게 바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본이 잃어버린 아우라는 기술 탓이 아니라 우리의 망각 때문은 아닐런지. 「베를린의 어린 시절」을 떠오른 짧은 생각을 적다.

˝카이저 파노라마관에서 볼 수 있는 여행 사진들의 커다란 매력 중의 하나는 어느 것부터 보기 시작해도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p69)...[후일] 영화를 통한 여행을 왠지 맥 빠진 것으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음악이 카이저 파노라마에는 없었다.˝(p70)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지 2019-05-15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술탓이 아니라 망각 탓이다, 굉장히 와닿네요. 물질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겨울호랑이 2019-05-15 14:37   좋아요 1 | URL
저 역시 힘들면 앉으려 하고, 앉으면 누우려 하는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갱지님 감사합니다.^^:)
 
사랑의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78
롤랑 바르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동문선 / 200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롤랑 바르트(Roland Gerard Barthes, 1915 ~ 1980)의 <사랑의 단상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은 사랑, 정확하게는 젊은 연인(戀人)들간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을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되는 사랑의 모습은 '욕망'에 다름아니다. 내가 느끼는 '욕망'과  이를 채워주지 못하는 ''현실'. 이를 인식하는 '결핍한 욕망의 주체'로서 나와 이를 채워주는 상대로서의 ''난 널 사랑해 Je-t-aime'의 '너', 그리고 욕망을 매개하는 언어(sinifiant). 이들의 관계가 <사랑의 단상>의 배경이 된다.


 마음은 욕망의 기관이다. 마치 상상계의 영역 안에 사로잡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람들은 혹은 그 사람은 내 욕망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걸까? 바로 거기에 마음의 모든 움직임이, 마음의 모든 '문제점'이 집결되는 불안이 있다.(p85)... 내가 실제로 충족될까 하는 것은 별로 중요치 않다.(그럴 가망이 전혀 없다 해도 괜찮다). 오직 파괴될 수 없는 충족에의 의지만이 찬연히 빛난다.(p89) <사랑의 단상> 中


 욕구불만의 문형은 현존일 것이다.(p34)... 그런데 부재는 결핍의 문형이다. 나는 동시에 욕망하며 욕구한다. 욕망(desir)이 욕구(besoin)에 짓눌린다. 바로 거기에 사랑의 감정의 집요한 사실이 있다.(p35)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욕망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사랑하는 나'는 '욕망의 주체'가 될 것이고, 상대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욕망의 주체와 대상은 <사랑의 단상>에서 언어(言語)를 통해 연결된다. 그리고, 사랑의 감정이 담긴 언어 행위를 통해 사랑은 이루어지기도, 깨어지기도 한다.


 모든 것은 다음과 같은 원칙에서 출발하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단순히 어떤 증세가 있는 환자로 환원시켜서는 안되며, 오히려 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비실제적인 것, 다시 말하면 다루기 힘든(intraitalbe) 것을 들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이렇게 하여 사례를 들지 않고 오로지 일차 언어의(메타 언어가 아닌) 행위에만 의존하는 '극적인' 방법이 선택되었다.(p13) <사랑의 단상> 中


 이런 담론의 파편들을 우리는 문형(fingure)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보다 생동감 넘치는, 즉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아닌 행동하는 상태에서 포착된 몸짓이다.(p14)... 우리를 스쳐가는 담론 속에서 우리가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것, 즉 언젠가 읽고 듣고 느꼈던 것에 의해 문형은 차려진다... 문형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안내자 외에는 그 무엇도 필요치 않다.(p15) <사랑의 단상> 中


 언어의 힘, 나는 내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내 몸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 버린다. 메시지는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그럴 수 없다. 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든간에, 그 사람은 내 목소리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p7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에서 낱말이 중요하지 않다. 낱말과 낱말이 모여 만들어낸 문장. 그리고, 문장을 통해 이루어지는 언어 행위의 시간 속에서 오가는 감정을 저자는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저자의 분석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등과 같은 고전의 지지를 받는다.


 부재에는 항상 그 사람만의 부재만이 존재한다.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며, 남아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 사람은 끊임없이 출발, 여행의 상태에 있다.(p30)... 하나의 (고전적인) 단어가 육체로부터 우러나와 부재의 감동을 말해 준다. 즉 갈망한다(soupirer)란 단어가,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현존을 갈망하는' 것을 뜻한다. 남여양성겸유자(androgyne)의 두 반쪽은 서로를 갈망한다. 그리스어에는 욕망에 대한 두 단어가 있다. 부재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포토스(Pothos)'가, 현존하는 이에 대한 욕망에는 보다 격렬한 '히메로스(Hiimeros)'가.)(p33) <사랑의 단상> 中


 육체의 모든 주름(plis)에 대해 나는 '근사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근사해란, 그것은 유일하기 때문에 내 욕망이야란 뜻이다... 그렇지만 내 욕망의 특이함을 느끼면 느낄 수록 이름짓기는 힘들어진다. 과녁의 정확함에 이름의 흔들림이 대응한다. 욕망의 속성은 부정확한 언표만을 만드는 데 있다.(p41)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단상>은 연애와 관련한 여러 모습이 담겨 있다. 떠난 이에 대한 아쉬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정과 상황. 만남에서 헤어짐에 이르기까지 연애의 과정에서 중심은 내 자신이며, 사랑은 '욕망'으로 표현된다. '욕망'을 통해 연애의 사랑을 쫓아가는 <사랑의 단상>의 접근법은 연애 경험이 있는 또는 연애중인 이들에게 추억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단상>은 매우 훌륭한 책이다. 그렇지만, 만약<사랑의 단상>의 사랑에 대한 접근법에 동감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충족시키고(충족되고), 축적한다. 그러나 결핍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의 여분(trop)을 만들어 내며, 바로 이 여분 속에서 충족이 내도한다.(p87)... 모든 '만족감(satisfaction)'을 뒤로 한 채, 과음(soul)이나 포식도 하지 않은 채 나는 포만의 한계를 넘어서서, 역겨움, 구역질, 취기 대신에 일치(Coincidence)를 발견하게 된다. '지나침'이 나를 알맍은 것으로 인도한다.(p88)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는 나에게는 새로운 것, 방해하는 것은 모두 사실의 범주가 아닌, 해석해야만 하는 기호로 받아들여진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사실은 이내 기호로 변형되며, 그리하여 결과론적인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과론적인 것은 사실이 아니라 기호이다.(p97)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을 기호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다음과 같이 첫 고백 이후 모든 언어 행동은 무의미하다. 이미 '사랑'의 뜻은 전해졌으니까. 그렇지만, 반드시 그럴까.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받고 싶기에, 항상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또한, 말을 하는 이 역시 '사랑해'라는 말을 통해 일종의 '자기 강화'를 한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언어를 단순한 수단으로 바라보는 저자의 관점은 동의하기 어렵다. 


 첫번 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 널 사랑해 Je-t-aime'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그 말을 그것의 관여성(pertinence) 여부에는 개의치 않고 그저 되풀이할 따름이다. 그것은 언어에서 나와 어디로 배회할 것인지?(p214) <사랑의 단상> 中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러나 그의 불투명함은 어떤 비밀의 장막이 아닌 외관과 실체의 유희가 파기되는 명백함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 열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신비주의자적인 움직임 :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p197) <사랑의 단상> 中


 또한, 우리가 사랑할수록 더 모호함에 빠진다는 저자의 주장도 생각해보자. 연애를 하면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알아가지만, 또한 우리의 편견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통해 연인의 이데아(idea)를 깨나가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처음의 모습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보다 성숙해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짝과 더 가까워지는 경험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사랑할수록 자기 자신을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분명함에 빠진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내면에 있는 비밀이 사랑을 통해 외부로 드러나는 체험을 한다. 비록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체험이겠지만.


 정보 제공자는 나에게 별 대수롭지 않은 정보를 넘겨주면서 하나의 비밀을 드러나게 한다. 이 비밀은 심오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며, 나에게 감추어졌던 것도 바로 이 사람의 이 외부이다. 막은 거꾸로 열린다. 내밀한 장면이 아닌 관중석에서,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p203)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의 인내심은 그 출발부터 자체 부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어떤 기다림이나 자제력, 속임수,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격심해도 닮지 않는 그런 불행이다.(p204) <사랑의 단상> 中


 사랑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사랑이 좋은 결실로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닐것이다. 변하지 않고 바래지 않는 '영원한 다이아몬드' 같은 사랑을 욕망하고 그것을 얻지 못해 좌절하거나, 그것을 가질 수 있어서(욕망의 충족) 행복하다는 것은 말그대로 사랑의 단면(斷面)이라 여겨진다.


 질투하는 사람으로서의 나는 네 번 괴로워하는 셈이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로워하며,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 봐 괴로워하며,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된 자신에 대해 괴로워한다. 나는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 데 대해 괴로워하는 것이다.(p213) <사랑의 단상> 中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이루어지지 않아 한 편의 추억으로 남길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사랑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아니면, 지금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통해 더 좋은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면, 헤어짐 역시 완성된 사랑을 위한 과정이 아닐까.


 나는 더 이상 해석을 믿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사람으로부터 오는 말은 모두 진실의 기호로 받아들여, 내가 말할 때 그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일지 어떤지는 의문시하지 않으련다. 바로 여기서 선언의 중요성이 비롯된다... 무엇가가 알려지려면 말해야만 하고, 또 그것은 일단 말해진 이상 일시적이나마 진실이 되는 것이다.(p307) <사랑의 단상> 中


 마지막으로, 내가 지금 말하는 '사랑해'라는 말은 검증되지 않는 약속이다. 이 말에 담겨진 상대에 대한 존중과 책임감의 무게는 현재가 아닌 미래(未來)에 가능하다는 점에서 바라본다면, 연인들이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진정한 사랑을 알고 말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유한한 인간 삶을 통해 궂은 일, 좋은 일을 함께 겪고 '영원(永遠)의 상' 아래에서 비로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단상>이 대상으로 하는 시간은 극히 짧은 시간이다.


[그림] Prince and princess(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65564531992133/)


'왕자님과 공주님은 결혼해서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끝'


 대부분의 동화가 위와 같은 말로 끝나지만, 현실은 '결혼식 이후'부터 시작된다. 아쉽게도 <사랑의 단상>은 사랑의 기나긴 여정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꿈과 환상이 가득한 세계에서의 사랑과 욕망.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범위의 한계라 여겨진다.


 사람과 관련한 많은 예술 작품이 있지만, 그 안의 어느 작품도 온전하게 사랑을 담지 못하고, 담아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랑의 단상>에서 묘사하는 사랑 역시 그런 점에서 사랑의 일부일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에 대한 저자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 않지만, '사랑'에 대해 일관점 관점에서 논리를 전개시키고 오랜 추억으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사랑의 단상>은 좋은 책임을 확인하며 이번 리뷰를 마친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5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4-14 19: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4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5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6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7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5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15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