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세계관의 역사 - 칸트.괴테.니체 게오르그 짐멜 선집 2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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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테는 주체와 객체의 방정식을 객체의 측면에서 푸는 반면, 칸트는 주체의 측면에서 푼다. 비록 후자의 주체는 우연적이고 개인에 따라 분화된 주체가 아니라, 객관적 인식의 초개인적 담지자인 주체다. 과학적-방법론적으로 보면, 칸트는 당연히 객관적이고 공평무사한 사상가이다. 반면 괴테는 주관적이고 존재의 상(像)을 자신의 정열적인 개별성에 따라 형성하는 사상가이다. 그러나 세계관적으로 내용적 결과에 입각해 보면 칸트는 주관주의자이다. 그는 세계를 인간의 의식안으로 끌어들여 의식의 형식에 의해 형성되도록 한다. 이에 반해 괴테는 오직 자족적이고 객관적인 존재만을 인정하는 바, 이 존재의 내부에서는 주체와 그의 삶 또한 자연의 총체적 삶이 고동치는 맥박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32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근대 세계관의 역사>에서 세 명의 사상을 통해 18~19세기 근대세계를 설명한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분화'(分化)와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통일'(統一) 그리고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영원회귀'(ewig wiederkehren)와 '초인'(Ubermensch)이 근대 세계관을 지탱하는 세 개의 발이다.


 칸트에게서는 가치가 인간에서 나와 자연으로 가지만, 괴테에게서는 자연에서 나와 인간에게로 간다. 인간의 특별한 지위는 자연이 그것의 최상의 창조물인 인간으로 발전했고 상승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인간이 세계발전의 최종목표로 간주된다는 사실은 칸트에게서 인간을 그 외의 존재와 대립시키며 이보다 절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시킨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72


 짐멜에게 칸트와 괴테는 여러 면에서 대척점에 서 있는 이들이다. 칸트는 인간-자연의 구도에서 물자체인 자신과 현상적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말한다면, 괴테는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을 통해 인간의 이념이 드러남을 강조한다. 자신을 넘어서지 못하는 개인과 개인을 넘어선 외부에서의 결합. 이것이 본문에서 강조되는 칸트와 괴테의 사상이자 차이점이다. 


  개인적으로 이들 분화와 통일이라는 관점의 차이를 칸트와 괴테의 분야와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분석적이며 과학적인 칸트 철학과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괴테의 문학. 자연을 정복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과학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예술. 아폴로와 디오니소스의 현신처럼 칸트와 괴테로 대표되는 다른 관점은 다른 한 편으로 시대가 자연을 바라보는 역사관, 시대관의 변천이기도 하다.


 18세기의 이상은 고립되고 본질적으로 동질인 개인을 요구했다. 개인은 합리적-보편적 법칙으로, 그리고 이해관계의 자연적인 조화로 결합되어 있었다. 반면 19세기를 특징짓는 이상은 노동분업에 의해 분화된 개인들을 고려했는데, 이들은 분업과 분화의 맞물림 위에 토대를 둔 사회조직들과 결합되었다. 분업과 분화의 두 원리는 근대경제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22


 이성(reason)의 강조가 계몽주의를, 분업이 산업혁명을 가져와 18세기 근대를 열었다면 19세기 근대의 통일적 세계관은 분업과 분화 그리고 이성의 결과물이다. '만인에 대한 민인의 투쟁'을 강요하는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인 자연 앞에서 개인들은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 다르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었다면, 외부로부터의 위협이 제거된 이후 사회는 '서로 같지 않은 개인'이 강조되고, 이들의 유대와 연대가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다만, 여기에서 머무른다면 자연에 대한 이성적인 인간의 승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개인을 넘어선 필요가 생긴 바로 이 지점에서 짐멜은 니체의 세계관을 가져온다. 니체의 사상이 접목되어 '인류'와 '초인에 의한 발전'이라는 개념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개인-사회'는 분화와 통일이라는 단순순환에서 벗어나 우상향의 진보적 세계관으로 정립될 수 있다.


  니체는 인류의 낮은 위치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이상을 인류적 이상으로 대체시키려 한다... 니체는 우리 종족을 완성된, 따라서 불변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발전할 수 있고 발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초인이란 인간종족의 훨씬 더 높은 단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모든 시기는 발전능력이 있는 한 그 단계를 넘어서는 초인이 존재한다. _ 게오르그 짐멜, <근대 세계관의 역사>, p150


 이처럼 짐멜의 <근대 세계관의 역사>는 칸트와 괴테라는 다소 낯선 조합을 통해 개인-사회의 관계를 설명한다.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접근법이지만 철학과 문학의 대가들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뒷받침하려는 짐멜의 저작을 통해 근대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를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괴테에게) 미학적 심상의 파괴는 곧 진리의 파괴이다. 수학적 자연과학이 사물을 가능한 한 무특성의 요소들로 분해해 얻어지는 계산적 표상은, 괴테에게 미학적-직관적 가치가 결여되기 때문에 심각한 방자함이자 사로(邪路)일 수밖에 없다. 거꾸로 칸트에게 미학적 규준은 자연인식의 대상에 대한 방자함이자 사로가 될 것이다. - P54

의지와 당위가 대립하게 되고, 자연적 주관성과 객관적 도덕법칙이 대립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통일성에 대한 요구가 일어난다... 칸트에게서는 객관적 도덕명령을 통해 주어지는데, 이 명령은 모든 특수한 이해관계를 초월하지만 주체의 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반면 괴테에게서는 도덕적-실천적 삶의 요소들의 직접적인 내적 통일성, 즉 모든 대립을 포괄하는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통해 주어진다. - P55

칸트에게 인간의 행위는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즉 ‘물자체‘에 속하는 내적인 측면이 하나요, 단지 현상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인 측면이 다른 하나이다. 결국 인간은 화해되지 않은 두 세계에 머물게 된다. 이와 반대로, 괴테가 보기에, 가시적인 것에서 진행되면서 경험적인 것에 영향을 미치는 순수한 행위는 인간의 이념을 드러낸다. 바로 이 이념과 더불어 우리의 존재는 세계의 요소나 역량이 된다. - P92

칸트는 전적으로 기존의 도덕을 공식화하려 한 반면, 니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으로 멈추어 서 있는 기존의 도덕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하려 한다. 칸트는 주어진 것을 인식하기를 원하는 이론가이며, 니체는 주어진 것을 실천적으로 개혁하기를 원하는 도덕의 사제이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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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게오르그 짐멜 선집 1
게오르그 짐멜 지음, 김덕영. 배정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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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가 된 정신은 부동성, 응고성 및 지속적인 존재 형식과 더불어 주관적 영혼의 넘쳐흐르는 생동감, 내적인 자기 책임성 및 변화하는 긴장에 대항한다. 정신은 정신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형식의 심층적인 대립에 의해 무수한 비극이 야기된다. 이 대립은 부단하지만 시간적으로 유한한 주관적 삶과, 일단 창출되면 부동(不動)이지만 무시간적으로 타당한 삶의 내용 사이의 대립을 가리킨다. 바로 이러한 이원론의 한가운데 문화 이념이 자리한다... 문화란 영혼이 그 자체의 내부에 미리 형성되어 있는 것이 더 고양되고 완성되는 어떤 것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p20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 1858~1918)은 <게오르 짐멜의 문화이론>에서 주관과 객관, 개인적인 영혼과 사회적인 정신의 종합으로 문화를 설명하는데,  그 바탕에는 인간의 영혼이라는 기본 전제가 자리한다. 짐멜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간 영혼은 그 자체로 완성에 이를 수 없다. 개인의 완성을 향한 길은 사회와의 과학, 종교, 예술, 윤리, 경제 등의 분야에서 다양한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며, 주관이라는 내용은 객관이라는 형식을 만났을 때 비로소 통일이라는 완성을 다다르게 된다.


 문화는 이렇듯 삶이 내용을 주체와 객체가 독특한 방식으로 교차하는 지점에 설정하기 때문에 그 개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교화되고 고양되며 완성된 사물을 가리켜  객관문화라고 규정할 수 있다. 객관문화는 인간 영혼을 자체의 고유한 완성의 길로 인도하거나, 개별인간이나 전체 사회가 더 높은 존재로 나아가면서 통과하는 도정(道程)의 일부분을 구성한다. 이에 반해 나는 주관문화를 그렇게 달성된 개인적인 발전의 정도라고 이해한다. _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p72


  문화를 이해하는 짐멜의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분업(分業)과 돈(錢)은 사회 속에서의 상호작용을 통한 개인의 완성에 커다란 위협이 된다. 대량 생산을 위한 분업이 가져온 생산자와 소비자의 단절이라는 결과와 교환을 위해 등장한 돈의 출현이 가져온  생산물 가치의 단절이라는 결과. 근대화를 뒷받침한 생산과 교환 양식에서의 극적인 변화는 결국 개인의 완성을 단절시켰을 뿐이다. 


 이처럼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은 문화를 중심으로 한 짐멜 사상의 전반적인 구조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같은 구조 위에서 짐멜의 대표작 <돈의 철학>을 읽는다면 보다 그 의미가 깊게 다가오리라 생각하며 글을 갈무리한다... 


 노동분업이 창조하는 인격과 창조된 생산물을 분리하고, 생산물로 하여금 객관적인 독립성을 갖게 한다면, 이와 비슷한 일은 노동분업적 생산과 소비자와의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노동분업이 주문생산을 파괴하면서 소비자를 향한 생산물의 주관적 색깔은 자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생산은 이제 소비자와 무관하게 진행되며, 상품은 소비자가 외부에서 다가가는 객관적 소여물로서 그 존재는 소비자와 대치된 자율적인 것이다. _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p89


 현재의 체험은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띄면서 문화의 또 다른 발전, 즉 도구에 불과한 것이 자기목적으로 기형성장하는 것과 맞물려 들어가는 듯하다. 목적론적 계열의 수정은 특히 도구가 목적을 은폐하는데 있어 세계사적으로 가장 광범위한 예를 보여주는 영역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경제 영역이다. 이 예는 돈이다. 돈은 교환과 가치보상의 수단으로서, 이 같은 중간 매개자의 기능 외에는 아무 가치도 없는, 극단적인 무(無)이다. 그런데 돈이 대다수 문화인간의 최고 목표가 되어버렸다. _ 게오르그 짐멜,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p190



문화의 특수한 의미는 인간이 영혼의 발전에 인간에게 외적인 어떤 것을 포함시키는 경우, 영혼의 길이 주관적으로 개인의 정신적 세계에 머물지 않는 가치와 계열을 경유하는 경우에 성취된다... 문화는 두 요소가 만남으로써 생성되는 바, 이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자체적으로 문화를 포함할 수 업다. 주관적인 영혼과 객관적인 정신의 생산물이 바로 그것이다. - P25

문화는 원래 처음 존재하는 순간 이미 내부에 그 내용의 형식을 포함하는데, 이 형식은 문화의 내적 본질 - 영혼이 미완성된 자신에게서 완성된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마치 내재적인 법칙에 따라 불가피한 것처럼 미혹시키고 무거운 짐을 지우고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며 분열시키도록 결정되어 있다. - P61

문화내용이 성장해 자아의 영역으로 편입되지 않는 것은 대부분 문화내용의 다양성과 전문화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내용이 단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것은 자체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 절대로 굽히지 않는 어떤 거승로서 인격과 대립한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관계의 우회로를 거치면서 외적인 것의 분화는 외적인 것을 가장 엄밀한 의미에서의 객체로서 느끼게 하는 유인(誘因)이 된다. - P95

인식은 삶과 뒤얽힌 요소로서 삶의 원천에서 자양분을 얻고, 삶의 방향과 목적의 총체성과 통일성으로 조종되며, 삶의 근본적인 가치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삶은 이제까지 거기에서 분리되어 자율적인 것으로 보이던 영역에 대한 지배권을 재천명했다. 인식의 형식은 내적 일관성과 자족적 의미를 통해 인간의 전체적인 표상의 세계에 대한 확고부동한 틀, 또는 파괴할 수 없는 배경막(幕)을 구성하면서, 삶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삶의 흐름에 의해 해체된다. 더불어 인식의 형식은 생성되고 변화하는 삶의 에너지와 방향에 대해 자신의 고유한 권한과 무시간적인 타당성을 근거로 저항하지 않고 이러한 삶의 에너지와 방향에 의해 주조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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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컨티뉴엄 리더스 가이드
A. 베일리 외 지음, 이준호 외 옮김 / 서광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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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축약이다. 흄은 독단적이지 않다. 즉 원인이 되는 능력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이 있다고 믿은 이유는 없다. 즉 있을 수 있는 이유라고는 선험적이거나 경험적인 것이 전부인데, 흄은 이런 이유가 모두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앞으로 알 수 있는 유일한 인과관계는 항상적 결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 때문에 우리는 세계의 인과적 구조에 관해 정당화되지 않는 신념을 갖게 된다. _ A. 베일리, D. 오브리언,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p132

A. 베일리 (Alan Bailey)와 D. 오브리언(Dan O'Brien)의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Hume's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서 저자들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대한 소개와 함께 <탐구>에 대한 큰 흐름을 짚는다. 본문에는 도덕과 종교 등 <탐구>에 대한 주요 내용에 대한 해석도 함께 다루어지지만, 입문서의 특성 상 흄 사상에 있어 큰 줄기만 잡고 상세 내용은 원문을 통해 정리해도 좋을 듯 싶다.

관념이 거의 변함없이 대응 인상에서 유래된다면, (예외적인) 특정 관념은 대응 인상이 없더라도 존재할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대응 인상이 없다면 그 인상의 관념도 있을 가망성은 거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것은 흄 자신이 줄곧 인정한 태도라는 것이 중요하다. _ A. 베일리, D. 오브리언,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p72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에서 보여지는 흄 사상의 가장 큰 특성은 '양립가능론'이다. 경험주의자인 흄에게 모든 관념은 감각의 결과물에 불과하다. 동물을 포함한 개체가 경험하는 결과는 축적되어 예측을 가능하게 하며, 경험의 빈도와 강도 등은 생겨나는 관념에도 영향을 미쳐, 어떤 관념은 신념으로 변화될 수 있다. 경험이 만들어 내는 관념. 이는 도덕과 종교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흄이 신념과 인상을 모두 생생하고 힘찬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직접 관찰되지 않는 사실에 관해 우리가 형성하는 신념과 인상이 강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밝히려고 진력하는 것이다. 인과추론의 결과로 발생하는 신념의 경우에 분명히 이것은 흄이 열정적으로 채택한 접근법이다... 인상의 힘과 생동성은 연합된 관념으로 곧장 전달된다. 이것은 그 관념을 생생하게 만들며, 그 관념을 한낱 관념에서 신념으로 변형시킨다. _ A. 베일리, D. 오브리언,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p101

개인적으로 '경험에 의해 관념이 형성된다'는 흄의 명제가 인상깊게 다가온다. 마음에 떠오르는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이라는 본유관념(innate idea)과는 달리 경험의 소산이라는 프로세스는 top-down과 bottom-up의 방식처럼 차이가 있지만, 단순한 차이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본유관념으로부터 도출되는 여러 관념들은 마치 포지티브 리스트(positive list) 방식과 같이 본유관념의 속성과 연관되어 확장되기에, 본유관념과 관계가 없거나 본유관념을 거스르는 관념에 대해서는 변신론(辯神論)과 같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다. 그렇지만, 경험으로부터 도출된 관념에서는 네거티브 리스트(negative list) 방식처럼 보다 폭넓은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보다 간결한 논의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차이가 대륙의 합리론에서 신(Theos)을 제1원인으로 위치시킨 반면, 흄의 사상에서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이를 잘라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처럼 절대관념을 가정하지 않고 논의가 진행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흄의 사상이 종교보다는 과학에 가깝고,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큰 틀을 잡고 그의 저작으로 들어가면 좋을 듯 싶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관념 - 정신에 떠오른 심상(image) - 을 인지하며, 그와 같은 모든 관념은 감각 인상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추정은 '관련된 관념'(relative ideas)을 포함한다. 관련된 관념을 거쳐 우리는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즉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 인상에서 직접 비롯된 필수적 해당관념(the requisite non-relative ideas)이 없더라도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다. _ A. 베일리, D. 오브리언,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탐구 입문>, 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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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3-11-05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칸트보다 흄이 더 유명해지길 기원해 봅니다. ㅎㅎ

겨울호랑이 2023-11-05 20:50   좋아요 1 | URL
저 역시 확실히 흄은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과소평가된 사상가라 생각합니다. 조금 더 준비를 하고 여태껏 미뤄두었던 흄의 3부작 <논고>도 준비가 되는대로 읽어보려 합니다. ^^:)
 

아벨라르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편적인 것은 오로지 여러 개체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개념과 개체 들을 가리키는 이름들뿐이라고 보았다.

엘로이즈의 시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관념의 실제적인 위상은 일반적으로 중세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종교적 윤리관, 즉 전적으로 교회의 권위와 강압적인 규례에 의존하는 윤리관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2세기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문화혁명을 사실상 주도했던 나라는 프랑스다. 랑과 오를레앙, 랭스, 오세르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리를 중심으로 새로운 학교들이 세워졌고 파리는 ‘새로운 아테네’라는 신화를 탄생시키면서 수도원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한 세속적 지혜mundana sapientia의 수도로 등극했다.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앎의 형태로 그를 이해하는 단계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신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는 과정은 성찰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낳지 않을 수 없었다. 신에 대한 사랑은 생 빅토르 신학의 특징 중 하나인 이성과 의지와 욕망의 조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찰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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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본질과 속성 개념을 인용하면서 베랑제는 본질이 사라지면 본질에 내재하는 속성도 함께 사라진다는 측면을 강조했다. 그는 성찬에서 빵과 포도주의 실체가 사라진다면 맛이나 색깔 같은 속성 역시 함께 사라지며 이는 감각에 의해 즉각적으로 포착될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빵과 포도주의 실체는 성찬이 거행되는 도중에도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변하지 않고 계속 존속해야 한다고 보았다.

믿음에서 유래하는 진실이 우선한다는 원칙을 토대로 란프랑코는 인간이 모든 것을 깨달을 수 없으며 신의 전지전능함이라는 불가사의한 원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만큼 성찬의 경우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과 정반대의 현상, 즉 속성은 불변하는 반면 빵과 포도주의 본질이 변화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안셀무스는 『모놀로기온』의 첫 부분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세 가지 논제를 제시한다. 이 논제들은 모두 창조된 현실세계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혹은 후세대가 명명했던 것처럼 경험적 관찰을 토대로 구축되며 형이상학적이고 또렷하게 신플라톤주의적인 성격의 두 가지 전제를 가지고 있다. 즉 사물들은 완벽하게 똑같을 수 없으며 아울러 동일한 완벽성을 지닌 모든 사물들은 무언가 동일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성격의 완벽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안셀무스의 담론은 전체적으로 삼위일체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모놀로기온』은 인간이 감지하거나 인식하지 못할 뿐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정보들을 제공한다. 반면에 『프로슬로기온』은 믿음에 근거한 신의 정의와 논리학의 도움으로 이루어지는 지적 탐구의 순간이었다.

안셀무스에 따르면 필연성이라는 개념은 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든 감히 신의 권능을 제한하지 못한다. 신에게 적용되었을 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결과적인 필연성’, 즉 무언가가 존재할 때 그것이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유래하는 필연성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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