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의 행복론
달라이 라마 외 지음, 류시화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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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일까. 달라이 라마는 하워드 커틀러라는 정신과 의사와 함께 행복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를 탐색하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는, 복권에 걸린 사람들과,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에게 얼마나 행복하냐고 물어봤더니, 처음에는 말도 못할 정도의 행복을 느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고 평온을 되찾자 당첨되기 전보다 특별히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불행하냐고 질문을 던졌더니, 처음에는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1년이 지난 오늘까지 살아 있어, 다시 얼마나 불행한가를 물었더니, 아직도 살고 있는 오늘의 하루 하루가 더없이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자비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자비심이란 우리 맘 속 깊은 본성에 들어 있는 것이므로 그것을 탐색해서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본질을 찾는 길이다.

이 글을 읽는 동안 나는 행복한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지속시켜 보았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오늘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나는 알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과, 나의 삶이 행복한 부분도 있었고, 아닌 부분도 있었다. 그러나, 좌절하기 전에 내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은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좌절하고 나서 죽음을 앞두고서야 하루 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걸, 내게 허여된 하루하루가 삶의 진리에 가까운 보물이라는 걸 깨어있는 정신으로 알아차리고 살아야겠다. 깨어있으라. 그리고 몽매에 앞서 알아차리라. 알아차리고, 내가 왜 무지한지, 깨달으라. 그래야 행복함에 싸인 하루 하루를 만들고, 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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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나비 - 2003년 제2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인숙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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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가 바다를 건너다니... 세상에는 저런 거짓말도 있구나. 그러자,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리고 내 아이의 아빠라는 남자가, 내게 기생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별것 아닌 것처럼도 여겨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거짓말들 중에, 내가 꿈꾸었던 행복이라는 이름의 거짓쯤은 별것도 아닌 것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누군가를 그리고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었다.

김인숙이 살아온 시대와 내가 살아온 시대는 대부분 겹쳐지는 삶의 영역이었을 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상징성들이 내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익숙한 구체성으로 다가오는 걸 보면... 그의 나비는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러나 그 나비는 공주처럼 저려서 새파란 초생달이 시린 김기림의 나비보다도 훨씬 처절하다. 이 시대가 낭만적 '서거푼'(서글픈) 나비를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다. 내 생각이 맞을거다. 이 시대는 소줏집 포장마차에서 술을 기울이며 '인숙아'하고 부를 뿐인 선배 문인들처럼, 더 이상 말을 잇는다면--- 그건 몸통만 남은 나비 내지는 몸통은 녹아내리고 날개만 녹아 뚝뚝 흘러 내리는 나비에 불과할 것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모더니즘 작가 김기림과 같은 제목의 '바다와 나비'를 읽는 것은 삶의 진실은 이런 것인가, 서글프고 그 한에 묻혀 살아갈 따름인가... 하고 생각한다. 포스트 모던한 김인숙이나 모던한 김기림이나, 시대의 아픔을 상징으로 드러내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나비를 설정한 건 우연일까, 아니면 수십년의 연도를 건너뛴 원형적 상징일까. 전상국의 작품을 읽게 된 건 기쁨이었지만, 소감은 역시 포스트 모던의 시대구나. 싶어 씁쓸하다.

이번 이상 문학상의 절창은 김인숙과 복거일의 동거에 있다. 복거일은 쇼우와 64년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로봇의 시대로 상상력을 넘치는 거 같지만, 김인숙의 소설 속엔 진실이 넘실대는 반면, 복거일의 소설엔 진실성은 부족하다. 복거일씨, 당신은 그 영어공용어의 공룡같은 이상을 왜 진실성 풍부한 소설에 담아내지 못하는가. 어설픈 조선일보식 파시즘의 전파에 가장 적절한 양식이 소설임을 당신은 모르는가?

김인숙의 바다와 나비에 드러난, 어슴프레하게 나타난, 영어의 시대가 가고 중국어의 시대가 도래할 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 자식을 중국에 유학 보내는 이 포스트 모던한 시대에, 복거일의 영어공용어론이 '얼어죽을 공룡어론'으로 오버램 되는 건, 내 상식의 무지함의 소치다. 플라나리아 보담은 김인숙의, 아니 그 신랑의 외침이, 술에 취해 술주정 속에서나 담아낼 수 있는 포스트 모던의 절규가, 모더니즘의 낭만보다 비극적임은, 내 삶의 적당한 낭만적 절규보담은 삶의 진실성에 앞선다고 읽는다. \김인숙씨의 착실한 진보에 박수를 보내며, 복거일의 몰락에 탄성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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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복거일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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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영어를 우리말과 공용(共用)하다가 결국은 공용어(公用語)로 공식화해야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것은 민족주의적 열정을 넘어선 것이다. 우리가 내일 아침부터 당장 영어로 대화할 수 있고, 영어로 문학 작품을 써 낸다고 해도, 우리의 언어에 함축된 정서를 드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말에는 조상들의 숨결과 함께 우리의 오롯한 삶의 흔적이 담겨 있고, 우리 문화에서 비롯된 의미들을 가장 잘 내포할 수 있도록 진화되어 왔다.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언어로 우리의 정서를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공용어로 영어를 채택한다고 해도, 결국은 영어교육의 강화 이상의 해결책은 없다. 저자의 의견처럼 얼토당토 않은 의견조차도 '마이너리티 리포트'로 제시될 수 있는 사회는 원숙하고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그간 얼마나 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냉혹해 왔던가. 80년 광주의 학살 장면을 본 외국인들이, '그들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하고 물었을 정도였는데…. 그의 의견은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로 무장한 '가진자들의 조율된 거대 담론'이었던 것이지, 결코 개인 차원의 사견(私見)은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어를 원어민처럼 유창하게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선천적으로 태아일 때부터 영어로 된 어머니의 생각을 전달받고 주변 문화를 영어로 접하는 아이들과, 식민지처럼 어색하게 강요된 영어 문화로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일단은 문화적 상하계층으로 대별될 것이며, 우리 민족처럼 소수어에 물든 하등 계층은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피해자로 남게 될 것이다. 저자가 예로 든 필리핀, 인도, 말레이시아 등의 예는 이런 예로 합당할 것이다.

결국 이 불평등은 재생산되고 영어를 상대적으로 쉽게 배울 수 있는 기득권 계층은 새로운 상승계층으로 신분이 오를 것이고, 미숙한 발음과 유창하지 못한 더듬거리는 읽기 능력밖에 익히지 못한 소외계층은 현대판 노예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문맹률을 낮춘 데에는 중세 봉건시대의 반-상(班-常)계급에 따른 피해 의식이, 식민지 시대에 와서 내지인-반도인의 구도에서는 그 질곡이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 해방 후에도 '내 자식은 배워야 산다.'는 빗나간 향학열의 역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영어를 공용화로 하고, bilingual의 시기가 지나면 영어를 국어로 사용하면 되고, 우리 모국어는 박물관 국어가 될 것이라는 주장은, 그 자신이 새 시대의 지배계층으로 상승할 수 있는 종류의 집단에서나 상상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은 '비명(碑銘)을 찾아서' 소설같은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호접지몽 : '나는 주(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주가 된 꿈을 꾸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만일 그런 일(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것. 정확히 말하면 참새가 어디에 떨어지느냐의 차이)이 일어난다면, 사건의 연쇄 반응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갈 것이다. 이 세상의 피륙은 그 힘을 견디지 못하고 문득 날카로운 비명을 내며 찢어져서, 어느 먼 곳에 전혀 다른 세상이 생길 것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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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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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원제는 'An old man, a young man, and life's greatest lesson'이었다. 화요일마다 제자 미치와 삶과 죽음에 대한 수업을 나누는 노교수 모리. 그는 사랑과 영혼, 삶과 죽음에 대해 제자 미치에게 강의를 하지만 그의ㅡ 삶은 촛농의 더께처럼 루게릭 병에 굳어가고 있다. 주된 내용은 '모리의 마지막 수업'과 대동소이하다. 아니 거의 같다. 그러나 이 두권을 아직 읽지 않은 이라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제자의 입장에서 스승에게 느끼는 존경과 연민과 그의 온 생애를 껴안는 찬사가 감동의 물결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죽을 것인가.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은 어때해야 하는가. 주말의 話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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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의 마지막 수업
모리 슈워츠 지음, 김승욱 옮김 / 생각의나무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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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나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죽을 것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기분 나빠 하기도 하고, 즐거워 하기도 한다. 흐뭇해 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그리고나서 자기의 대응책을 세우기 마련이다. 모리선생님은 루게릭 병이라는 죽음의 신 앞에서 남은 시간을 현명하게 쓰기로 결심하신 분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반응은 역시 두려워하는 것이었고, 모든 삶의 희망을 잃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온 세계를 죽음에 대한 질문으로 몰고 갈만큼 귀중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잡스런 이야기를, 읽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를, 별로 잠언이랄 것도 없는 이야기를 책으로 내느냐고 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앞에 서 보라. 죽음의 앞에 선 사람 옆에라도 서 보라. 얼마나 사는 것이 힘겹고, 부끄러운 일인지를.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인데, 나는 오늘을 얼마나 보람차게 살고 있는 것인가. 차라리 그렇게 살고싶어하던 그 이에게 주고 싶은 하루는 아닐까. 겸허하게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나부터 남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줄 아는 대응자세를 배우고 싶다. 사실 이 책에 새로운 것은 없다. 다만, 누구나 죽겠지만, 죽음을 맞는 태도도, 죽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말 좋아했던 사람이 죽음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나는 용기가 없어서 몇 번 찾아 가지도 못했다. 만약 그이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매일 찾아가서 얼마나 악화되었는지도 웃으면서 물어보고, 즐거운 책도 읽어 주고, 모리의 마지막 수업 책이라도 읽어줄 수 있을텐데... 남은 식구들은 걱정말라고, 정말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 땐 왜 몰랐던가. 나의 어리석은 어렸던 마음이 아팠지만, 한 번 한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말자고 다짐한다. 파도는 해안에 부딪쳐 사라지지만, 바다는 사라지지 않으니까. 인류의 삶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의 일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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