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처럼 읽는 세계사 즐거운 지식 (비룡소 청소년) 30
잔니 로다리 지음, 파올로 카르도니 그림, 이승수 옮김 / 비룡소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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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이렇게 읽어야 한다

 

세계사를 배운 기억 속에는 온갖 국가, 인물, 제도 등의 재료들이 마구 넣어져 있지만 맛깔나게 그 재료들이 아우러진 기억이 없다. 그래서 세계사는 내게 맛없는 음식의 추억으로 남는다. 그런데, 그 몸에 좋다는 세계사를, 정신을 기르는데 도움이 된다는 세계사를 아이들에게 맛있게 먹여줄 수 없을까? 이런 문제 제가기 이런 멋진 책을 만들었다.

 

이 책에서 잔니 로다리는 간결하게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다음과 같은 개념을 반복 강조한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만나게 되는 유명 인물들의 거창한 행동에 현혹되거나 감탄하지 말고,

보다 단순한 작은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

예를 들어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대단한 정복자였다.

하지만,

그는 과연 자신이 정복한 민족들에 대해 무엇을 알았을까?

그가 일으큰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을까?

얼마나 많은 여인이 폭행당했을까?

그의 승리로 그의 백성들은 어떤 이익을 얻었을까?(183)

 

역사 속에는 위대한 인물들만 살았던 건 아니다.

아니, 역사 공부가 필요한 건, 위대한 인물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작 역사의 그늘에서 살아가며 온몸으로 고난을 헤쳐나온 민중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

 

모든 인류의 문제에 대한 호소를 외면하는 이유는

나와는 상관없다는 무관심이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무지 때문이다.

오늘날 대중매체, 그중에서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거짓 정보를 전하는 수단이거나 대중오락의 무기들.(185)

 

지난날의 역사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비슷한 비극을 재생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많은 매체들은 가진자, 권력자의 이익을 위하여 진실을 가리거나 제대로 알리지 않는 방법을 쓴다.

 

내년 1~3월에 전쟁 위험이 있다.

 

이건 60년대 신문을 장식하던 대표 클리셰였다. 그런데, 이게 자그마치 오늘 뉴스다.

비극이다.

 

제국주의자들은 이익을 나누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충돌이 벌어지자

애국심을 내세워 전쟁의 이유를 감추었다.

금고가 그려져 있는 개인의 깃발을 국기 뒤에 숨기려고 애쓴 것이다.(164)

 

제국주의자들의 속셈까지 읽어주는 세계사.

그래. 역사는 일어난 사실의 서술이 아니다.

객관적인 역사는 세상에 없다. 객관적인 체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자의 횡포다.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역사는 폭력을 당하고 피해를 당해온 기록이었다.

서술자의 관점에 따라 역사에 기록될 바는 상반되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한번 치고 지나가는 파도가 아니라

화려한 거품을 품은 파도였다.

비록 암초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돌아갔지만,

혁명은 프랑스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이 되었다.

그리고 혁명은 계속되었다.(146)

 

멋진 비유다. 혁명이, 나폴레옹이 가진 의미는 금세 퇴색되는 듯 했으나, 그 의미는 영원하다는 것.

  

혁명은 끊임없이 포도주를 내주는 술통과 같아서

포도주를 맛본 사람들이 포도주 맛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듯이

혁명에 관한 여러 의견이 나왔다.(133)

 

혁명은 정지된 의미가 아니다. 역사의 의미 역시 그러하다.

한 사람의 역사가가 의미를 확정할 수 없다. 다양한 의견, 그것이 세계사의 진미다.

 

인간은 오랫동안 지옥을 눈 앞에 두고 살았다.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면서 인간이 지옥에 대해 갖고 있던 두려움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황제로부터 등을 돌리게 했다.

교회의 생각과 다른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실로 위험천만한 일이었다.(108)

 

중세의 어둠을 지옥으로 표현했다.

지옥에서 살아오던 사람들의 두려움. 그리고 다른의견 표현의 두려움.

과거의 다른 나라의 역사만 그렇지 아니하다. 오늘 우리의 삶이 그렇지 않은가.

역사는 끝없이 반복된다. 어리석게도...

 

몇몇 고관들, 재정가들, 지주들의 손에 부가 집중되면서

수많은 민중들은 갈수록 극심한 빈곤에 빠져들었다.

가난한 민중들은 야만인들에 대항해 제국을 지키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 주인이나 저 주인이나 매한가지였다.(93)

 

로마의 몰락을 이렇게 묘사한 책은 드물다.

로마 몰락의 주역은, 권력자의 낭비가 아니다. 민중들의 삶이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공자를 통해, 역사의 태평성대라 어떤 세상을 추구하는지를 읽어준다.

이런 것이 작가의 세계관이자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귀족들이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탐욕을 버려야 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반항하지 않고 복종해야 했다.

나라가 태평하려면 백성들 각자가 개인 생활을 잘 다스리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것.

역사는 공자의 말이 잘못된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중국이 태평성대를 누린 것은 착한 사람들이 되었을 때가 아니라,

사회적 부정이 사라졌을 때였다.(44)

 

 

작가의 세계관을 민중적 세계관이라고 치부하면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권력자의 부정부패는 정치적 혼란을 만들 뿐이다.

사회적으로 부정이 사라질 때만이 국가는 안정되고 융성할 수 있음을,

그 쉽고도 지난한 역설적 이치를 가진자들은 극구 부정하는 것 또한 역사의 이치다.

 

 결국, 역사는 아()와 비아(非我)의 투쟁인 셈이다.

그 투쟁의 현장을 이처럼 생생하게 읽어주는 책으로 세계사를 접한다면 재미도 느끼면서 편향되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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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3-12-27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의 교회를 보면 중세의 카톨릭이 보이고, 점점 더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세계적 현상을 보면 인용하신 로마제정 말기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래서 더욱 역사교육은 국/영/수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도쿄 산책자 - 강상중의 도시 인문 에세이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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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적막한 기분...

 

이런 기분을 아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도시화가 일어나기 전, 농촌 사회는 사람들은 적지만, 아는 사람뿐이어서 늘 목말하했을 사람들이,

이제 도시에서 살면서 고독해진다.

 

도쿄는 3.11 이전과 이후가 다르다.

 

진흙탕 길을 포장하고,

하수도나 하천을 정비하고,

욕망의 리비도가 오로지 수직 상승하는 스카이 라인으로 '발기'로 비유되는 대도시.

그것이 한 순간에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반성을 하게 한다.

 

잡지 '바일라'에 연재한 글들이라 간단하고 짤막하지만,

'서울'이나 '부산' 같은 대도시의 한 구석을 이렇게 돌아보는 일도 재미있을 듯 싶다.

<다시 서울을 걷다> 같은 책을 읽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여러분 중에도 '자기 찾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기' 같은 건 없습니다.

있는 것은 지금 거기에 있는 자신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깨닫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기 안의 모순을 그대로 껴안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찾기'의 여행에 필요한 것은 바로 그 각오와 담력입니다.(21)

 

자이니치(재일조선인)로 살아온 강상중이,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으며

필요한 것으로 꼽은 것이 '각오'와 '담력'이다.

이 '각오'와 '담력'은 이 책에서 제법 등장하는데, 그것이 '살아가는 힘, 고민하는 힘'일 수 있다.

 

인생의 드라마트루기(연출법)에도 저는 이 '거리'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것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라고 할 때,

가족이나 배경 등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것과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가요?

일단 거리를 둔 상태로 인생을 드라마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딘가에 또 하나의 눈을 갖지 않으면 자신과 그 역할의 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연출가처럼 조감할 수 있는 시점을 갖지 않으면 이야기를 잘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점을 갖기 위해서는 인생에서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뒤로 물리고 볼 수 있는 정신적인 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합니다.(54)

 

그는 남들이 흔히 가는 순례길이나, 전국일주를 택하지 않는다.

매일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는 도심의 어떤 골목들의 의미를 곰곰 궁리한다.

거기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오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면, 어디에나 '이것이 인생'은 있는 법.

그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자만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해주고, 자신을 옳게 보기 시작하는 여유를 갖게해준단다.

 

우리는 고민을 순수하게 사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그사람의 내면적 문제이므로 자신과는 관계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어떤 고통된 원인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사는 한 고민하는 것은 당연하고,

오히려저는 좀더 고민해도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철저하게 고민하고 다시한번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이 살아가는 힘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형화된 행복감이 아니라 자신이 긍정할 수 있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역시 고민하는 힘이 필요함니다.(75)

현대인은 고독하다.

그러나 현대인의 고민은 카프카의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처럼 이해받기 힘든다.

그 고민을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철학'일 것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면 '연대'일 것이다.

 

소세키의 '마음'에는 '선생님'이 '나'에게 "당신은 진지합니까?"하고 몇 번이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진지함이고, 진자하게 타자와 대면하는 일입니다.(76)

 

진지하게 타자를 대면하기 시작해야하는 일이 근대의 과업이었다.

그렇게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은 사람을 울리는 글이란다.

근대 이전의 <본질>에 주어진대로 살아온 삶들은 고민할 필요가 적었을 테지만,

근대 이후의 <실존>은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여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녔다.

 

이방인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자신이 총을 쏘고도 그 상황을 확정짓지 못한다.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은 미친놈이 아니라,

미친 시대를 살아가는 자와 진지하게 마주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탄생된 또다른 나 '뫼르소'인 셈이다.

 

애초에 인문학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왜, 무엇때문에라고 묻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글로벌화에 따라 사회가 다양해지고 개인들의 자유가 강조되면서

무엇이든 개인의 판단에 맡겨지고,

인문학적 테마도 모두 내마음이지 하는 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인문학적 물음에는 정답이 없기때문에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해 고뇌해보았자 전적으로 시간 낭비일 뿐이란 것입니다.(122)

 

엊그제 수능을 마친 아이들의 머릿속에 한결같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렇게 달려온 걸까?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진로 지도는,

소위 돈벌이가 된다는 '사'자 달린 직업군에 대한 쏠림이외의 기준을 달기 어렵게 된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시대...

 

'고민하는 힘'을 길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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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3-11-1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자기같은 건 없다는 말이 딱 와닿네요. ^^ 지금 거기에 있는 자신에서 출발한다는 것.
요즘 온갖 멘토와 미래설계타령에 질릴 것 같은데 말이죠.
이걸 알아내기 위해서 고민하는 힘이 필요하다가 맞을 것 같네요. 저말 한마디때문에 이 책이 끕 땡깁니다. ^^

글샘 2013-11-11 13:36   좋아요 0 | URL
이 책은 토막글들인데, 생각이 참 깊더라구요.
 
당신들의 기독교 - 환상의 미래와 예수의 희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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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한 삼십 여년 전에 여기 한번 다녀 가셨을 겝니다.

너무도 가슴이 터지도록 아파서 다들 비명을 지르고 그러다가 넋이 나갔던 그 시절,

예수님이 오지 않았을 리 없지요.

 

밤이 되면 도로는 브레이크등으로 붉게 강물을 이루고,

주택가 곳곳에서 예수님이 참으로 넓은 팔을 벌리고 오셨지요.

삼십 년 전 광주에서도...

교회들이 문을 꼭꼭 걸어잠그고...

평화의 사도들이 아마도 길거리에 김밥 나눠주러 나와서 교회를 꼭꼭 걸어 잠갔을 터입니다만,

그 거리에서 예수님도 같이 피흘리셨을 겝니다.

 

이 나라의 교회들은 이제 문을 활짝 열고 '시주함'을 활짝 펼쳤습니다.

아, 교회는 '시주'가 아닌가요?

뭐, 중놈들 배불리던 시주나, 문닫아 걸고 숨었던 그자식들 처먹는 '헌금'이나, 그게 그거 아닙니까?

 

상인 자본주의와 개신교 정신 사이의 친화성은 구원적이었고(16)

 

그래요.

그렇게 시작된 개신교였는데,

어쩌다 이땅에 오셔서 그렇게 친자본적, 친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착실히도 젖어 들었는지요.

 

B는 동시대 수많은 장삼이사처럼 워낙 불교 신도인듯하게 살아왔다.

여성에게 우호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는 곳으로 그 당시 빈발하고 있던 교회라는 기이한 장소가 한결 평했다.

교회당은 일부 소외된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장소적 가능성을 현시했던 것이다.

물론 거기서도 설교라는 언어적 치유의 매개가 외로운 심금을 치고 있었던 사실...

여자들의 (살이 아닌) 말에 도통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회에서...(27)

 

그렇죠.

이 땅에선 빨갱이가 아니려면,

군인가족, 경찰가족, 그도 아니라면, 교회라도 다녀야 했던 겁니다.

 

폭력적이거나 무능한 부모와 변덕스러운 남편 대신 '전지전능한 사랑의 신'...으로서의 교회(31)

 

아, 이 땅의 교회는 참으로 다양한 역할을 하여왔던 모양입니다.

 

불행과 고독을 위로하는 낭만적 슬픔의 장소... 이자,

어린 우리에게 그곳은 잠시나마 가난이라는 현실을 잊고 남의 땅에서 벌어진 만화경적 고사에 취하는 환상의 자리...(95)

로서의 교회는 이제 바뀌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돈이 있어야 대접받아.(96)

그렇군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자기에게 타락한 현대사회의 치료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들은 자기가 치료하는 척하는 그 질병의 증상이다.(110)

 

군대간 아들이 주말마다 천주교회를 꼬박꼬박 갔답디다.

주님의 은총으로 초코 과자와 콜라를 영접받았다더군요.

이제 자대배치받고 아직도 가냐고 그랬더니, 축구한다더군요.

훈련소에서나 그 핍박을 피하는 곳으로,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는 곳으로 기능하는 예수님의 처소가,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예수님,

이 땅에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과연 무엇을 합데까?

명박스럽게 자신의 재산이 늘어나고, 차근차근 축적되길 간절히 기도드리옵디까?

가난한 사람들은 취업을, 진학을, 사업을 그렇게 기도합디까?

 

물도 썪도록 강을 파헤쳐 돈을 벌었고,

원자력 발전소에 부정한 부품을 주고받아 돈을 벌었고,

온갖 공기업의 임원이 되어 엄청난 돈을 벌었던 고위층들이,

교회에 가서 도대체 무엇을 빌었는지 예수님 잘 아십니까?

 

나는 종교의 완성 - 종교는 결국 믿는 자의 일생에 근거한

한시성과 실존성에 제한적으로 유효하므로 완성이라는 말 그자체에 어폐가 있긴 하지만, -

이 어떤 정서와 분위기에 젖어있는 생활 양식,

그리고 그 생활 양식에 의해 검질기게 몸을 끄-을-고 다가서려는 어떤 희망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리라고 전망한다.(132)

 

이 책의 지은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종교란 것은 교회에 있지 않고,

그 종교를 믿는 자의 삶에, 그 몸으로 증거하여야 하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제 이 교회많은 나라에 오셔서,

저 교회들은

그 교회의 기독교는 나 '기독(크리스트)'의 이름을 빙자한 삿된 무리들의 거처라고 알려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있었으니 '기독교'가 필요치 않으나,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고자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에 불과한 신자가 아니라,

제자의 길, 그러니까 어렵사리 몸을 끄-을-고 남을 따르려는 삶의 양식을 갖추어야 합니다.

제자란 '차자성의 소실점을 향해 몸을 끄을고 다가서는 검질기고도 슬금한 노력입니다.

쉽게, 자기 십자가를 지기로 고쳐 말할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제자는 촛농의 힘에 의지한 이카루스처럼 어렵고,

신자는 쓰레기통의 파리처럼 번성합니다.

이제 신자의 파리떼와 그 파리대왕들의 틈 속에서 유일한 가능성은 '제자'이지만,

예수처럼, 다만 불가능한 꿈을 지피면서

걷고 걷다가, 죽어버리십시오.(머리말에서, 5)

 

예수님,

예수님의 신자들만 이렇게 부패하고 나태하겠습니까.

세상이 그렇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고난의 길이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어서,

예수님께서

부디 같이 걸어 주시라고...

몇 마디 당부를 적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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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3-10-21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나한테 교회다녀야 한다고 열정을 바쳐 강요하던 선생님께 내가 했던 말이 여기 써 있네요.ㅋㅋ
우리 아들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두루 섭렵했는데, 요즘은 어쩌는지 휴가오면 물어봐야겠어요.^^
 
안나와디의 아이들 - 성장과 발전의 인간적 대가에 대하여
캐서린 부 지음, 강수정 옮김 / 반비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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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참 짜증난다

선거도 믿지 못하고, (4.19로 이승만을 밀어냈지만 배운 게 없다. 그자식을 국립묘지에 심어놔서다.)

정치는 그야말로 식민지+미국의 내정간섭+독재시대의 관료주의+정경유착으로 퇴폐적이고,

사회는 많이 깨끗해졌다고는 하지만,

각개전투로 살아야하는 총체적 부패의 나라다.

 

그런데, 터키 소설 같은 거 읽어보면, 이야~ 한국은 정말 질서정연한 나라다.

유럽에 여행가서 소매치기 조심 이야기 들으면... 한국의 치안은 사랑스럽다.

무엇이든... 이렇게 상대적인 모양이다.

 

그치만, 너희를 잘 살게 해주겠노라던 공주마마가,

왕자리를 꿰차고선, 쏘리~ 돈이 없어서 너희를 잘 살게 해줄 수 없넹~ 이런 건 씨발, 빠큐~다.

 

이 책은 인도의 뭄바이란 도시의 주변부 안나와디 지역의 삶에 대한 관찰기이다.

읽노라면,

인도의 자랑스런 '빈민 구제 활동'은 줄줄 새는 바가지라는 걸 깨닫게 되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고,

아직도 인도에 넘쳐나는 신분 의식, 여성 비하의 치떨리는 삶과,

어린 아이들에 대한 인권 같은 의식의 부재로 인한 삶의 고난이 가득하다.

세상이 무섭다.

그리고, 말이란 게 무섭다.

 

류시화 책을 읽고, 인도 참 멋지겠다~

강석경 책을 읽고, 인도 참 좋겠다~

법정 스님 책을 읽고, 인도 가보고 싶다~

근데 이 책을 읽고, 어휴~ 인도 안 가길 잘 했다.  이렇게 된다.

 

제목은 영 아니다. 이 책엔 안나와디는 나와도, 아이들은 '안 나와' ㅋ

원제는 Behind the beautiful forevers ; Life, death, and hope in a Mumbai Undercity

뭄바이 하류의 삶, 죽음, 그리고 희망... 아름다운 영원함의 이면... 보고서다.

 

인도를 '아름다운 정신적 구루들의 나라'라고 부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바라본 일부분이다.

류시화를 믿고 인도를 훌쩍 방문해 보고 싶다고 하거나,

한비야를 믿고 불쑥 아랍 국가들을 돌아 보고 싶다고 하는 일은 무모한 일이다.

 

암튼, 이 책은 뭄바이란 인도의 대도시의 하류층들이 겪는 비참한 생활상을 객관적으로 그리기 위해

땀흘린 한 사람의 노력이 오롯이 담겨있다.

 

사회의 문제가 '개인화' 되어버린 현실을 잘 그리고 있다.

 

부패로 아주 많은 기회가 약탈되는 나라에서

부패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진 몇 안 되는 순수한 기회였다.(67)

 

하람 카 파이샤.

 

더러운 돈이라는 뜻이다.

이런 저런 부정부패의 고리마다, 그 더러운 돈을 찾는다.

휴~ 자본주의는 가장 하류 인생들을 갉아먹는 무서운 벌레다.

몸뿐만 아니라, 체계적으로 뇌를 파먹는다.

 

병원에 환자식도 약도 없다.

 

뒤로 빼돌려 팔아먹느라 창고가 텅텅비었다는 건 비공식적 진실이었다.(169)

 

하류 인생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분신을 하든, 폭행을 저지르든...

중요한 것, "비극을 통해 챙길 수 있는 돈"만이 그들의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

 

화상환자 파티마가 감염으로 죽자,

병원에서는 차트를 고친다.

 

입원할 때 전신 35%였던 화상이

죽고나자 95%, 어떻게 손써볼 여지가 없었던 치명적인 상태로 변한다.

 

경찰서에 잡혀간 아이들을 <법의학적 소견>을 위해 진찰한다.

18세 이상이면 교도소로 가야하니깐.

 

2000루피를 내면 압둘은 17이고, 내지 않으면 20살. (206)

 

이게 인도란다. 헐~

 

빈민촌과 화려한 호텔이 나란히 붙은 지역에서

메탈슬러그 같은 폭동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이것이 저자인 캐서린 부의 의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세계화 시대

비정규 임시직이 양산되는 이 무한 경쟁의 시대에도

희망은 헛된 꿈이 아니다.

극빈층의 수는 서서히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무능한 정부는 개인의 전망 혼란을 강화하고,

부정부패의 배를 불릴 때가 더 많다.(368)

 

그렇구나.

무능한 정부여서 그렇구나...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지니까... 무능한 국민이어서 그렇구나...

 

읽기 전이나

답답한 마음은 변함 없지만,

이런 문제를 골똘히 탐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일말의 희망이다.

 

----------------- 고칠 부분이 눈에 띈 곳...

 

36. 트럭으로 공수해온... 공수는 항공기로 수송하는 거다.

216. 높은 자살율... '률'은 모음과 ㄴ 뒤에서 '율'로 소리난다. '내재율, 배율, 비율'이거나, '운율, 환율'처럼...

                           ㄹ 뒤에서는 '률'로 나야한다. 자살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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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9-27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원제가 훨신 낫게 보입니다.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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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떠드는 인간들의 목적은,

한국도 역사를 쫌, 지들 입맛에 맞게 고쳐서

국민을 지들 입맛에 맞게 우민화해야한다는 것일 때가 많다.

 

그 인간들은 '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좌편향이거나 민중주의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다고 침을 튀기고,

새로운 역사 교과서는 '민족주의'적이어야하며, '국가관'을 투철하게 해야한다고 핏대를 세운다.

 

그렇지만, 한국사 교과서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서술되었는지,

쥐박 각하께옵서 왜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를 아예 교육과정에서 삭제하시었는지,

이 책을 보면 답이 나온다.

 

한 마디로,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부터 역사학의 적자(종손)는 '노론'계열과 '친일' 계열이었다.

미국 군정이 남조선을 접수하고 젤첨에 한 일이 '국립종합대학교설립안'이었으며, 그것이 무지 심한 반대에 처했더랬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미국은 그렇게 서울대학교를 설립하여 그 노른자를 친미주의자로 심었다.

그리고 '친일파 척결'이 이뤄지지 않은 '대한민국' 에서 '노론-친일-친미'의 계열은 하나의 동아리를 형성하였다.

 

식민지와 전쟁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를 뼈저리게 겪은 민중은,

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치면서 '베트남 전쟁, 정경유착과 재벌 위주 경제 파탄, 부의 편중, 국민의식 억압' 등에는 관대하고,

먹고 살게 되었다는 하나만을 통해 '국익'을 실감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노론-친일-친미' 계열의 '한국사'를 가르치는 일은 '국익'과 직결된다는 이상한 사고를 갖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된 나라들에서는 파시즘적 독재가 쉽게 힘을 얻는다.

 

군주는 야수처럼 행동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특히 여우와 사자의 성질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자는 책략의 함정에 빠지기 쉽고,

여우는 늑대를 힘으로 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주는 함정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여우가 되어야 하고,

늑대를 혼내 주려면 사자가 되어야 한다.(마키아벨리, 군주론)

 

이런 것이 16세기 마키아벨리의 약한 나라의 군주에게 바쳤던 충정이었다면,

1960년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설파한 '헌장'을지은 것 역시 그런 충정이었으리라.

 

그렇다면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국가인 것이다.

21세기에도 발달한 인터넷에 족쇄를 채우려 하고,

가려지지 않는 하늘을 가리려 '공권력'을 내세우는 정권이라면,

'민주주의' 이념보다는 차라리 마키아벨리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왕조'의 이념을 따라는 자들이리라.

 

그래서 한국의 '시위대' 맞은 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버이 연합'이 있다.

한국의 시위대가 주장하는 바는 대부분 '보수적 주장'이다.

 

소고기 좀 정체를 알고 수입하자.

광우병 소고기를 한국만 제한없이 수입하는 일은 주권을 버리는 일이다.

 

라는 먹고 사는 문제에서부터,

 

선거법을 위반한 투표하면 무효가 아니냐.

국가 기관인 국정원과 선관위가 <국민투표>에서 불법을 자행했다면 그걸 조사하라.

 

이런 문제까지, 이건 지극히 체제 내적 문제고,

합헌적인 문제제기이며,

보수적이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우익>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들을 '빨갱이'라고 내몰면 ㅋ~

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욕먹을 건 지들도 아니까,

<종북>이라고 ㅋㅋ, (얘들아, 종북보다는 빨갱이~가 만국 공용어란다.)

그래가지고, 진짜 '적국'인 북한을 따르는 거라면,

'어버이 연합'이나 '경찰'이 아니라, '국군'이 진압해야 할 세력이라면, 탱크를 몰고 올 일이지,

왜 정체 불명의 '어버이 연합?'

 

그건, 그들의 사고가 지극히 '봉건적, 노론'의 그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장유유서, 부자유친의 수직 질서를 내세워, 할아버지를 칠래?

한대만 쳐봐, 조중동에 대서특필~ 일파만파~ 작전으로 나갈거니깐.

이러는 것이다.

 

이덕일의 이 책에서는 한국사에서 '노론과 친일'의 입장에서 우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적고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의 저류에 쏠린 저자의 관점은

왜 한국 현대사가 이렇게 왜곡되었는가, 그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다.

과연 <역사적 진실은 어떻게 가려지고 호도되는가>를 탐구한 것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노론'과 '친일'이라는 같은 집단이 이적지 이 나라의 '역사학계'의 주류였음을 역설하는 책이다.

 

정조는 정말 심환지와 친했고, 독살 안 당했다는 '노론의 주장'을 그대로 믿을 건지,

송시열은 북벌론자고, 이율곡은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노론의 주장은 진짜인지,

이 책은 자료를 살펴가며 이야기를 풀고 있다.

 

정조가 노론 벽파를,

다른 장점은 없고 남의 옳지 않은 점을 보면 힘껏 말하고

통렬하게 배척하는 것 뿐,

모두 아침에는 동쪽으로 갔다가 저녁에는 서쪽으로 가고

냄새를 쫓아다니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무리들...(298)

이라고 비난한 것은, 요즘의 정치인들이랑 별다를 것도 없어 보여 씁쓸하다.

 

국왕이 노론과 반대되는 행보를 걸을 때는 독살도 서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해

노론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부족한 반면

개인과 집안, 당파의 이익에는 민감했다.(323)

 

그리하여 그들은 사직이 기울어질 때,

임금에 대한 충성보다는 집안이나 당파의 이익을 위해 친일파가 되기에 이른다.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다.

 

친일세력이 청산되기는 커녕

해방 후에도 사회 주도세력이 되었던 정치상황이

학계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역사학계는 조선 후기 노론과

일제 식민사학을 계승한 학자가

이른바 태두로까지 등극했다.(337)

 

이렇게 비틀어진 역사를 안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한국사 바로세우기를 위하여 힘썼던 한홍구 씨 같은 이는 이제 다시 빨갱이 학자가 될 판이다.

 

난 그냥 내가 먹고 사는 일에나 애쓰고,

보수적 가치나 애들에게 이어주는 교사로 만족하고 싶다.

그리고 월드컵을 즐기며 대~한 민국이나 외치는 우익으로, 멍청하게 살고 싶다.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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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09-09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일에 반대하고, 민족, 국가의 자주권을 주장하고 (실례로 전작권을 돌려 받는 것, 옳바른 FTA) 등 ; 이런 것을 보수의 가치라고 이야기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현실감 없는 말이라고 (양쪽에서) 지적 받기에. ... 관심가는 책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글샘 2013-09-11 08:24   좋아요 0 | URL
중립은 무관심이라고 강변하는 이들이 젤 두려워하는 게...
진짜 보수죠.
보수적 관점은 오래 가고, 변하지 않는 것이니까요.
건전한 보수로 살고 싶단 생각이 많이 듭니다.

transient-guest 2013-09-11 0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합리적인 주장은 모두 '종북'이나 '좌파'가 되는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보수'를 표방하지만,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지요. 어버이 연합이나 자유청년 연합의 등장은 결국 특정정권과 집단의 비호를 받는 정치깡패가 합법단체로 가장한 것일테죠. 사관이 바로서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취지의 신채호 선생 말씀이 생각납니다.

글샘 2013-09-11 08:25   좋아요 0 | URL
건강한 보수는 한 사회의 버팀목일 건데,
나쁜 놈들이 자기들이 보수 자리를 차지하고, 반대쪽을 욕하는 형국이죠.

그래도 올바른 역사학자들의 목소리가 책으로 강연으로 나올 수나 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할까요?
유신시대였음, ㅋ~ 다들 남산 가서 두들겼을 테지요.

Mephistopheles 2013-09-11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얼마전 어떤 기사(공주마마 해외순방관련)에 실린 댓글 중.

"그때는 정말 살기 좋았습니다. 대통령 각하 그때처럼 살기 좋게 해주시길 믿고 응원합니다."

란 댓글을 보고 표정관리 힘들더군요..ㅋㅋ

글샘 2013-09-11 10:40   좋아요 0 | URL
채만식 소설에 '태평천하'가 있죠.
조선 시대 착취당하던 부자가, 일제 강점기엔 공명정대한 세상이었다면서 '태평천하'라고 외치는...

박정희 시대(20년이나...)에 경제발전이 이뤄진 데 대한 맹목적 신뢰가 크죠.
시대에 대한 역사적 개관이나 정경유착에 대한 부정적 결과에 대해선 눈감고 말이죠.
이렇게 빈부격차를 벌인 주범이 그 시대인데 말입니다.

죽은 정주영이 살아나와 적은 댓글 아닐까요?

Mephistopheles 2013-09-11 11:14   좋아요 0 | URL
말씀대로라면...죽었던 사람이 댓글을 달아도 분신술까지 펼치면서 댓글을 달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생각보다 그 시대가 그립다는 사람들이 꽤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