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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나리오 선집 제17권
영화진흥위원회 엮음 / 집문당 / 2000년 12월
평점 :
품절
피곤할 때 영화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조금만 지루해도 눈꺼풀의 무게가 실감나니 말이다.
내가 제일 졸면서 본 영화는 JFK(전날 밤샜다.)와 r-point(전날 술마셨다.) 같은 영화들인데, 거의 슬라이드 보듯 줄거리 없이 몇 화면만 기억이 나곤 했다.
그런 경우 외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 보면 <리와인드> 기능을 활용하고 싶어 근질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영화를 몇 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앞에서 못봤던 팁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는 일은 영화를 보는 일에 비해 훨씬 쉽다. 좀 이해가 안 되거나 딴 생각하면서 읽은 부분은 다시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지나가다가 시나리오 선집이 좌르륵- 시리즈로 꽂혀 있어서 옳다꾸나 하고 한 권 빌려온 것이다. 읽다 보니 영화보다 재미있단 생각도 든다.
1999년의 시나리오라는데 간첩 리철진, 거짓말, 내 마음의 풍금, 박하사탕, 쉬리, 이재수의 난, 정, 텔미썸딩, 안단테 칸타빌레, 클럽버터플라이 등이 실려 있다.
간첩 리철진, 내 마음의 풍금, 박하사탕, 쉬리, 텔미썸딩은 이미 본 작품들이었지만, 내가 보거나 읽은 것들을 얼마나 많이 잊고 사는지를 실감하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큰 줄거리만 남았을 뿐, 섬세한 장면들은 놓치고 말았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비디오로 본 내 마음의 풍금이나 텔미 썸딩 들은 완전히 새로 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
박하사탕도 영화로 봤지만, 글로 읽으면서 더 아련한 아픔이 강하게 전해진다.
이재수의 난은 현기영의 소설로 읽은 적 있는 이야기인데도, 이정재를 떠올리며 제주도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읽었다.
국어 샘들은 문학을 <시, 소설, 수필, 희곡> 등으로 나눈다고 하는데... 한국에 제대로 된 수필이나 희곡이 없다. 수필은 잡문이 너무도 많고, 희곡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오죽하면 교과서에 실을 희곡이 없어 봉산 탈춤을 실어 놨을까.
그리고 또 실을 것이 없자, 학교라는 유명한 드라마 대본을 싣고 말았고.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들판에서>는 사이코드라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시나리오에 이런 풍부한 밭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내 마음의 풍금 같은 것은 교과서에 실어도 충분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한국 영화의 발전이 기형적 구조라고 비판들을 하지만, 좋은 영화는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오는 것이 기본 아니겠는가. 한국 영화의 유행이 한 때의 흐름인 <한류>에 머물지 않으려면, 아이들에게 시나리오를 가르쳐야 한다.
마이크가 없던 시절 웅변을 가르쳤지만, 마이크의 등장으로 소리지르기 보다는 유머와 위트가 중요시 되듯이, 종합 공연 시설이 없던 시절엔 소리 지르는 발성의 연극이 필요했고 희곡이 중시되었지만, 빛과 소리의 예술인 영화의 시대엔 시나리오를 강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시나리오를 읽는 일은 전문 용어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상상력을 북돋우는 데는 희곡보단 시나리오가 우위가 아닐까 한다.
앞으로 이 선집 시리즈를 독파하게 될 듯한 예감을 주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