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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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얼마나 고독한 "행사"인지를... 삶에서 느끼는 일은 고독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만 고독한 것이 아니다. 누구나 고독하다. 이런 고독을 읽는 일조차 쉽지 않은 "행사"다.

인생이란 헐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틈틈이 지나가는 햇살을 바라보는 것.
따뜻한 강물처럼 나를 안아줘.
더이상 맨발로 추운 벌판을 걷고 싶지 않아.
당신의 입속에서 스며나오는 치약 냄새를 나는 사랑했던 거야.
우리 무지갯빛 피라미들처럼 함께 춤을 춰.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거라고 내게 얘기해 줘.
가끔은 자유와 이상과 고독에 대해서도 우리 얘기해.
화병처럼 나는 주인만을 사랑해.
나도 너의 주인이 되고 싶아.
당신이 먼저 잠든 밤마다 나는 이렇게 한줄씩 쓰고 있어요.

아이브로우 펜슬로 밤마다 이런 글줄들을 머리맡에 써야만 하는 존재들. 이런 것들이 남들의 이야기일까?
인간은 서로서로 남이 아니다. 모두들 누군가를 낳고, 늙어가고, 병들고, 죽음에 의해 비창에 빠지게 되는 존재인 것이 인간이다. 그런 유한자인 인간들의 삶은 사실 얼마나 추하고 초라한지... 그 구역질나는 삶을 조금은 신비로운 필치로 그려내는 이가 윤대녕이란 사람이다.

소설가가 먹고 살기 힘든 시대가 제법 되었다. 80년대 이후, 서사의 시대가 훌쩍 지나버리고, 이미지의 시대로 돌아서버린 느낌.
그렇지만 이렇게 서사를 잊지 않고 마주선 이의 글은 초라하지만은 않은 든든함이 느껴진다.

아파도 아프다고 소리내지 못했던 시대의 목소리를 이제 조금씩 낼 수도 있는 것이 문학의 의미라면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집.

윤대녕 세포의 원형질들이 기억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들과 그의 삶의 단편들이 직조해낸 소설들은 읽는 이를 금세 소설 속의 인물들에 동화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들은 아프다고 한다. 읽는 우리도 아프다.

삶이라는 건 내 형편에 맞게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만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는 삶에 대한 문제 의식은 인간이면 누구나 얽매여 있는 문제들의 수준이 각기 다름을 제대로 꿰뚫은 말이다.

삶의 "고 苦"라는 가시들이 쿡쿡 우리를 찔러댈 때 움찔 놀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러면서 왜 나만 아픈지를 불쾌해하는 존재들에 불과한 것이 <우리>란 존재임을 격려해주는 날씬한 소설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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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05-21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슬프고 쓸쓸했지만 전 충만함도 느껴져서 좋았어요. ^^
 
그대 이름 내 가슴에 숨 쉴 때까지 - 이외수의 사랑예감 詩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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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표지가 우단으로 받쳐져 있다. 그 보들보들한 촉감... 그리고 특이하게 자석이 붙어 있어 표지에 착 달라붙는 것이 재미있다.

나는 시집을 펴면, 우선 제목을 찬찬히 읽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수십 장을 파지를 내는 만큼, 그 제목을 붙일 때는 마치 아이 이름 붙이듯 고뇌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외수 시집이라... 소설과 우화를 주로 읽었는데...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의 제목을 차근차근 읽다 보니, 달의 이름이 그저 시가 된 것들이 있다.

처음에 4월
다음에 2월, 3월, 11월
그 담엔 12월
그리고 9월
그 뒤에 7월
옆쪽에 1월과 5월, 8월
다음 장에 10월
마지막 장에 6월

이렇게 한 달도 빠진 것 없는데... 월의 이름으로도 시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순서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마음. 이런 것이 시인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말미에 '언어의 동작들이 가지는 아름다움' 때문에 소설을 읽고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동작이라... 글로 옮기고 나면 언어는 움직인다. 옳다. 그것이 쓰는 일이구나. 언어를 작동하게 하는 일. 언어라는 추상명사를 시각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일. 그리고 그 언어의 움직임을 그만의 고유명사로 삼는 일. 개성적인 문체...

그는 그 글의 또 마지막에 '책값 오라지게 비싸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우라지게 비싸다.
한 페이지에 실어도 반도 안 될 책을 두 페이지에 나누어 싣는 심보는 뭔지...
그리고 시집이 15000원이라니... 가당키나 한가?

빨랫줄 - 왜 당신의 마음은 세탁해서 널어놓지 않나요?

8월 - 인생은 비어있음으로 더욱 아름다워지는 줄도 모르면서...

봄날은 간다 - 부끄러워라 내가 쓰는 글들은 아직 썩어가는 세상의 방부제가 되지 못하고 내가 흘린 눈물은 아직 고통 받는 이들의 진통제가 되지 못하네 돌아보면 오십 평생 파지만 가득하고 아뿔싸 또 한해 어느새 유채꽃 한 바지게 짊어지고 저기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봄날이여...

그는 이제 8월쯤에 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의 시들은 이렇게 인생을 생각하는 것들이 좀 좋다. 사랑을 노래하는 것들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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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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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책의 표지는 잿빛이고 이인문의 강산무진도로 가득하다.
이 책이 김훈의 대표 소설집인지도 모르겠지만 김훈의 뇌리에 든 것들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것들 같다.

김훈의 뇌수는 요즘 수분이 증발한 모양이다. 나이는 속일 수 없다.

김훈의 문장은 자전거 여행에서 절정에 달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자전거 여행 1편에 반했던 그의 문채를 다른 작품에서 찾을 순 없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삶들은 인생의 까풀막을 넘어서서 시속 50킬로로 달려가는 내리막길의 가속도를 버거워하는 그것들이다.

나는 이제 까풀막을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다 쓰고 있는 시점에 놓인 듯 한데,
갈수록 가속도가 눈에 보이는 나이를 먹은 뇌수는 잿빛이고, 그 눈엔 무진강산이 보일 듯도 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여행을 가면 차내가 시끌벅적하기 그지없다.
창밖의 자연에 눈을 돌리기엔 가슴이 너무 뜨거운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들과 여행을 가면 차는 조용하다. 다들 창밖의 어느 지점을 응시한다.
그 지점에 자기 삶이 놓여있는지도 모르겠다.

삶을 그렇게 무덤덤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조용한 곳에서 곡기를 끊고 삶을 가벼이 마무리한 스코트 니어링의 지혜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인간의 유한함이 지향하는 무한의 세상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자꾸 생각하게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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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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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적 재능이 탁월한 편은 전혀 아니고, 문학적 감수성이 강렬한 쪽은 더더욱 아니고, 소설을 줄창 살펴가면서 읽는 것도 전혀 아니다. 그렇지만,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유명짜한 소설을 읽지 않고서는 아이들의 독후감을 읽어낼 수 없어서 읽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생겼고, 알라딘에서 비비댄 후로는 이런저런 리뷰들을 읽다가 너무도 맛깔스런 리뷰에 매혹되어 소설을 읽는 일도 흔하게 되었다.

이 소설도 드팀전님의 리뷰를 읽었던 것 같은데(요즘엔 내 기억력을 도통 믿을 수가 없음 ㅋㅋ) 정말 오랜만에 맛깔스런 소설 한 편에 매혹되어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읽고 만 것 같다.

마지막 장까지 넘기다가 아직 한 열 장 남았는데, 거기서 해설이 툭 튀어 나왔을 때의 심사란... 왜 그리 해설이 밉살스러워 보이던지... 아직도 부용각 언저리에 휘감기는 광목 자락의 바람 가득 받은 흰빛을 해설피 쳐다보고 싶었건만...

이현수란 작가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정말 짠한 이야기들을 푸짐한 말의 밭에서 모락모락 피워올린 수작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맛보았던 쫄깃쫄깃한 겨울 꼬막맛과도 같은 말뽄새가 이 작품이 한 권의 장편인데도 대하소설이 아님을 아쉬워하게 하는 맛이 있다. 정말 이 책이 열 권짜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혼불처럼 열 권은 지겨운 소설도 있건만...

조선의 기생은 무엇이었을까? 기생은 여느 술집 작부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기생의 세계는 술집 작부의 음淫을 뛰어넘는 락樂이 있었던 것 같다. 낙이불음이라고... 즐기지만 음란하진 않은...

그리고 기생들의 세계에선 춤기생, 소리기생 같은 예인의 전통을 갖추고 있다. 그저 얼굴만 예쁜 꽃기생도 있는 모양이지만, 기생의 원류는 아닐 것이다.

조선 시대는 꽉막힌 유교의 시대였다. 안채와 사랑채는 분리되었고, 아내란 존재는 정지용이 향수에서 노래한 것처럼 쳐다봐도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일꾼 내지는 자식 생산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사대부들은 울타리 밖에서 '여성'을 찾았고, 거기엔 대화가 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춘 여성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저 섹스 파트너로 기생이 존재했다면 그들이 굳이 예인의 소양을 갖출 필요가 있었겠는가?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여럿이지만, 우선 그 푸짐한 말맛에 있다.

기생은 흥을 먹고 태에 사는 법... 처럼 멋진 말들을 구석구석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왼갖 비유가 달착지근허니 귀에 앵겨붙는다. 이 작가, 시 써도 꽤 괜찮겠다.

채란의 죽음을 보고 '한 사랑에 목맨 기생이 치러야 할 대가라고 고쳐 생각해 봐도 풀잎에 벤 것처럼 마음이 쓰라린' 사람.이라는 둥

오마담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타박네의 말, 삼베와 명주를 모아쥐고 한 시간만 비벼 보아라. 거친 삼베야 아무 상처가 없지만 보드라운 명주는 글세 올이 나가거나 실밥이 터지고 만단다...

사랑은 가루비누랑 똑같은 거다. 거품만 요란했지 오래 쓰도 못 허고, 생각없이 그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마 살 속의 기름기만 쭉 빼묵고 도망가는 것도 글코, 그 물이 담긴 대야를 홱 비아뿌만 뽀그르르 몇 방울의 거품이 올라오다가 금세 꺼져뿌는 기 똑 닮었다... 캬, 가루비누...

요시로는 아고 어른이고 철딱서니가 없어놔서 큰일이라카이. 말세가 따로 있나, 어른없는 시상이 말세지...

행패부린 손님을 보고는, '괜찮다. 왜냐면 나는 기생이니께... 내가 손님에게 멱살이 잡혀 마당에 내동댕이쳐진 것도 잊고, 니가 받고 싶지 않은 손님을 대신 받은 일도 잊어버려라. 넌 그걸 수모로 생각하고 내게 대드는 모양이다만, 그건 수모가 아니야. 기생인 인생이 심심할까봐 덤으로 열리는 이벤트라고 생각하렴.' ㅋㅋ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행패 부리는 학부형에게, 교사 인생 심심할까봐 덤으로 열리는 이벤트라고... 그러고 보니 나도 이벤트 참 많이 겪었네..

그리고 묘사도 돋보인다.

처음에는 목을 씻느라 깔깔하던 소리가 곧 자기 자리를 찾는다. 다른 기생의 청아한 소리가 먼저 소리에 얹힌다. 한번 꺾어올리고 두번 문지르다 떨어지는 두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고, 소리를 밟고 선 미스 주의 몸이 움찔 곡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싸목싸목 소리를 따라 흐르던 몸이 대청 그늘 속으로 스며들고 흰 한삼 자락의 한 끝이 허공을 베어물면 세로로 면이 갈라지고 손끝으로 쳐서 띄운 다른 자락은 중동에 쏠린 힘으로 바람을 머금어 팽팽하게 펴진다. 면이 모였다가 흩어지면 선이 되고 힘을 주어 후리면 날개를 펼친 새 한마리 후드득 날아 오르는 형상이 된다. 엇나가게 내지른 두 자락의 한삼, 팽팽한 기운으로 잡아당기면 끝면만 탈싹 무너지다 어니새 하나의 꽃이 되어 난분분 떨어진다. 후리고 꽂고 치고 빠지는 손길을 바라보던 미스민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들썩인다.

바람에 한껏 배를 부풀린 무명이 하늘로 치솟아올르 때 사향내가 코를 덮치고 이어 여자의 굿불이 보였지. 손긑이 저릿한 게 숨이 쉬어지질 않았어. 또다른 무명이 바람에 펄럭 하늘로 솟구칠 땐 쪽을 찐 옆얼굴이 보이더군... 무명 뒤로 여자의 실루엣이 어른어른 비치는데도 볼 수가 없으니 입이 타더군...누가 저 무명들을 확 걷어줬으면 좋겠어... 늘어진 무명천 밑으로 꽃 자수가 놓인 비단 고무신이 왔다갔다하는 게 보였거든...

조정래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찰지고 달콤한 말들을 이현수에게서 얻게 되어 흐뭇하다. 그의 소설을 읽는 기분은 마치 기방으로 가는 한 편의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접해도 금세 익숙해지고 마는 환상의 세계를 보여준 작가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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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3-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찰지고 들쩍지근하게 엉켜드는 말들, 소리내어 읽으면 감칠맛도 나더군요. ^^

글샘 2007-03-27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참 재밌죠? 말도 정말 찰지구요. 리뷰 같은 거 오랜만에 쓰는 거 같네요. 이제 책도 슬슬 읽어얄텐데... 학기초에 감각을 잃어버리니... 그래도 피아노는 열심히 다니고 있답니다.^^ 일주일이 한 두어번 빼먹기도 하지만 ㅎㅎㅎ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 연암 박지원이 가족과 벗에게 보낸 편지 참 우리 고전 6
박지원 지음, 박희병 옮김 / 돌베개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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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루쉰의 편지에서 오늘을 박지원의 편지까지...
루쉰과 박지원은 좀 비슷한 면도 있는데, 이거 남의 사생활 엿보기에 맛을 들였다.

박지원의 글들을 읽노라면 그 스케일이 장엄함에 깜짝, 놀라게 된다.
국가의 경륜을 한줌 모래알 같이 여겨 비웃던 허생의 그릇의 크기나,
통곡할 만한 자리를 알아볼 줄 아는 시원스런 사람의 면모를 보기 쉽다.

그렇지만 사적인 편지에서, 박지원은 자상하고 따사로운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역시 제목이다.
박지원의 숱한 편지글을 읽고서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를 뽑아낼 줄 아는 탁견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눈엔 '무람없다, 무상무도하다, 장차 어쩌려고 그러느냐?'하는 잔소리가 가장 인상적이다.
큰 스승은 놓치는 것이 없이 자잘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버지인 하느님께서는 무엇 하나 잊고 깜빡 하시는 일이 없으시다.
박지원의 사람됨이 크고 넉넉하다고 하나, 이런 잔소리에서 그이의 인간성이 오롯이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이 편지들은 안의 현감, 면천 군수를 지낼 때의 글들이다.
자잘한 나랏일로 바쁜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참으로 섬세한 사람임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박희병 선생의 글인데 왜 한문 풀이가 없을꼬 했더니, 뒷부분에 역시 원문을 붙여 두었다.

이 책의 백미는 역시 해제의 1문단이다.

연암 박지원은 한국 문학사상 굴지의 대문호다. 그는 특히 산문을 잘 썼는데, 글 솜씨가 워낙 빼어나 그의 산문은 마치 잘 빚은 항아리처럼 물샐틈없이 삼엄한 완정미를 보여준다. 연암의 글은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반어적이고, 때로는 통렬하고 풍자적이며, 때로는 몹시 처연하고, 때로는 능청스러우며 심원하고, 때로는 근엄하고, 때로는 예리한 통찰력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하고, 때로는 논리적이고 심오하며, 때로는 몹시 논쟁적이고, 때로는 세상 이치를 다 깨달은 사람의 글인 양 담담하고 명상적이며, 때로는 깊은 연민이 담겨 있고, 때로는 몹시 슬프고 아름답다. 그리고 이 다양한 면모의 기저부에는 세상 안팎에 대한 놀라운 반성력과 자기 응시가 자리하고 있다. 그것만이 아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창조적인 형식과 의장 속에 깊은 사상을 담지해 내고 있으며, 사회와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 더 나아가 나라와 인민에 대한 선비로서의 경세적 책임감을 견결하게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 박희병 선생님을 읽는 일은 그래서 즐겁다. 이런 글을 만날 수 있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빅지원은 박희병 선생님 손에 와서 비로소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 요즘 우리 사회의 세태는 경박에 경박을 더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런 세태에 영합하여 일각에서는 연암을 마치 개그맨처럼 만들어 놓고 있기도 하다...(고미숙, 뜨끔하겠다.ㅋ) 연암의 글쓰기에서 그 고심처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고 사려 깊게 음미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보다는 연암의 조박이나 해타에 대해 환호작약하는 경향도 없지 않은 듯 하다. ... 적어도 연암의 산문을 제대로 이해하고 감득하기 위해서는 연암 정도의, 혹은 연암과 방불한 사유와 고심, 인문적 교양과 식견을 갖출 필요가 있을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 연암을 말한다는 건,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초등학생(이 말이 좀 심하다면 중고등학생으로 고쳐도 상관없다. - 이런 글은 나나 쓰는 심한 욕설 비슷한건데, 야, 박희병 선생님 화 많이 나셨구나. ㅠㅠ) 이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을 평하고 운위하는 꼴이 되기 쉽다. 아무리, 말을 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고, 그래서 제 보고 싶은 대로 보면 그만이라고 강변할지라도, 적어도 학문하는 사람의 눈으로 본다면 이건 연암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계실 때, 이 서간집을 만나 번역에 힘을 쓰신 것이다.
박희병 선생을 만나 박지원이 물만난 고기가 되어 거듭 출간되는 일에 혼자서 환호작약하는 경향이 있다. -,.-;;  나야, 뭐 초등학생 수준에서 박사과정 대학원생 평하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니... ^^ 그래서 난 더이상 학위에 마음을 두지 않는 거다. 내가 좋아하는 박희병 선생님께 혼나기 싫어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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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1-30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박희병 선생의 연암글에 대한 평가가 매력적이네요...한 번 읽어보고 싶어지는군요.

글샘 2007-01-30 1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편지글은 그저 그렇지요. 편지니까요. 소소하고 사소하고... 오죽하면 고추장 단지...까지. 근데 박희병 선생님이 들입다 까는 사람들, 초등..운운 하면서... 정말 싫습니다. 학문하는 자리에 온갖 퓨전 잡탕을 끌고 들어와서는 재미없는 책을 비싼 값에 제작해 내는 사람들이잖아요.

프레이야 2007-01-30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목부터 우선 마음을 끕니다.
스승은 놓치는 것이 없는, 자잘한 사람... 작은 것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서
큰것을 바라기 어렵다고 들리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작은 것에 얼마나 충실한가
자문합니다. 연암의 글은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를 읽었습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고, 이 책도 함께 읽어보고 싶습니다. ^^

글샘 2007-01-30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업 시간에 문제집에 나온 글을 가르치다가 간혹 박지원의 글을 수십 번 읽는 일이 있는데요, 읽을수록 오묘한 맛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박지원을 전면적으로 읽으려 해도 역시 어려워요. 정민 선생님이나 박희병 선생님같은 전문가들의 책을 읽으면 가깝게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책은 참 다정다감한 박지원을 느낄 수 있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