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기쁨
아베 피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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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세 가지 규칙을 준수한다. 먼저,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을 해서 번다(노약자와 장애인들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부나 시청, 도청으로부터 어떠한 지원금도 받지 않는다.)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걸 나눠가진다. 공동체에 크게 기여하는 가장 튼실한 사람도 생산성 없는 노인보다 더 많은 걸 갖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멸시받고 소외된 주변인들인 우리는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생활하는 데 충분한 정도 이상의 노동을 한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궁핍을 뛰어넘고 베푸는 자들이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는 우리도 마음을 담아 나누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부족한 것이라곤 없는 여러분이 그런 일을 못할 게 뭐 있습니까!"이것이 엠마우스 운동이다.-30-31쪽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그는 자신보다 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 절망한 자에서 구원자가 된 것이다. 엠마우스는 그렇게 생겨났다. -35쪽

우리는 그 누구에게도 "신자세요, 교회에 다니십니까? 우파세요 좌파세요? 투쟁가이십니까 협력자이십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그런 질문은 절대로 하는 법이 없다. 처음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저 이렇게 물을 뿐이다. "배고프세요? 졸리십니까? 샤워를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미사에 가건 아니면 다른 모임에 가건 그것은 전적으로 각자의 자유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 가운데 아주 적은 수만이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끄집어낸 '이야기들'을 들려주면 좋아한다. 그 이야기들을 통해 그들은 예수께서 건강한 자들과 관례를 잘 따르는 자들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길 잃은 자들, 죄인들, 의심하는 자들을 위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44쪽

희망을 소망과 혼동하지 말자. 우리는 온갖 종류의 수천 가지 소망을 가질 수 있지만 희망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제 시간에 오기를 바라고, 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며, 르완다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이것들은 개개인의 소망들이다. 희망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삶의 의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만약 삶이 아무런 목적지도 없고, 그저 곧 썩어 없어질 보잘것없는 육신을 땅 속으로 인도할 뿐이라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희망이란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53쪽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를 하려 들지 않도록 주의하자. 그들에게 멋진 설교를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다만 애정어리고 걱정어린 몸짓으로 그 고통에 함께함으로써 우리가 곁에 있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그런 조심성, 그런 신중함을 갖도록 하자.-71쪽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나는 걸까요?" 그러면 나는 그저 이렇게 대답한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이지요."-74쪽

인간은 밤바다를 항해하는 한 척의 배와 같다. 복음과 교회는 바닷가에 있는 등대와 같다. 그것의 위치는 완벽할 정도로 정확하게 지정되어 있다. 그것은 계시와 교리의 엄정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멋들어진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등대가 꺼져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배는 암초에 좌초하고 말 것이다. -158쪽

반드시 이민자들이 한 행위가 아닌, 불행에서 비롯된 범죄로 인해 살기 힘들어진 구역에 사는 일부 플아스인들의 분노를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못 가진 자들을 위해 프랑스 내에서는 물론이요 프랑스 국경 밖에서도 벌여야 할 국가적이고 세계적인 연대의 노력만이 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 불법을 저지른 처지에 놓여 있는 이민자들 전부를 국경으로 인도함으로써 그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건 환상이다. 세계화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보다 광범위한 차원의 부의 재분배를 생각하는 문화권을 새롭게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190쪽

고통받는 누군가에게 '당신은 참으로 운이 좋군요. 당신이 겪는 고통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조심한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두 가지 태도만이 바르다고 마음속 깊이 확신한다. 침묵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이 그것이다.-2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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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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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재미없어도 걱정 마라. 네가 아둔해서 그런 것이 아니니. 어려운 글도 반복해 읽고, 살면서 그 뜻을 헤아려 보면 ‘아, 그게 이 뜻이었구나!’하며 무릎을 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는 어려운 책의 깊고 담백한 맛을 알게 되지."-53쪽

"네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답을 물을 책도 있고, 심심하고 답답할 때 재미를 줄 책도 있지 않느냐. 네 아버지가 살던 때와 네가 커서 살 세상은 다를 게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87쪽

"어려운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느냐?"

"양반들이 어려운 중국 글자만 고집해서 이제껏 사람들이 그런 재미난 것을 놓친 듯싶다."
-154쪽

"그래도 과거를 보고 공자님 맹자님 말씀을 읽으려면 한자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조선 사람 모두가 과거를 보는 것도 아니고, 정 그러면 과거도 언문으로 보면 되지 않느냐?"-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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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9-11-27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면서 참 좋구나 했어요

마노아 2009-11-27 12:00   좋아요 0 | URL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책일 것 같아요.^^
 
미식견문록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음식기행 지식여행자 6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7월
품절


철갑상어는 연어나 송어, 청어처럼 제가 태어난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란한다. 그러나 미국을 따라잡자고 건설한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폐수로 하천과 바다가 오염됐고, 더욱이 카스피해로 흘러드는 볼가강 등의 하천 유역을 따라 많은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철갑상어는 산란할 곳을 잃었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카스피해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졌다. 철갑상어는 원래 실러캔스(고생대 물고기의 한 종류)와 같은 세대로 3억 년 전에 나타난 고대어이니, 지금까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다.

-55쪽

철갑상어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산란하지만 연어나 청어와 달리 산란 뒤에도 죽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산란을 되풀이하며 100년도 넘게 사는 장수어다. 그 때문에 산란할 수 있는 성어로 성장하기까지는 10년 혹은 그 이상 걸리기도 한다.

-56쪽

구대륙 사람들이 토마토, 감자, 옥수수 등의 식품을 알게 된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온 1493년 이후의 일이다. 우리에게 친근한 이 식품들이 실제로 보급된 속도는 실로 거북이 걸음보다 더뎠다.

-63쪽

토란, 참마, 마, 고구마 등 구근류가 풍부한 일본과 달리 러시아인, 아니 많은 유럽인들에게 구근류는 감자 한 종류밖에 없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감자 생산국이다. 연간 8,500만 톤으로 아시아 전체의 연간 생산량 8,200만 톤조차 훌쩍 뛰어넘는 숫자다.
-66쪽

유럽 각지를 엄습한 빈번한 흉년이며 기근에도, 아무리 나쁜 기후조건에도, 아무리 척박한 토지에도 감자는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었고 영양가도 높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절대 군주들은 이 새로운 식품이야말로 오랫동안 골칫거리였던 식량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믿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것이 헛수고로 끝나자, 나중에는 보급을 위해 폭력으로 위협하는 강제 수단까지 동원했다.

-68쪽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난 원인이 된 금단의 열매는 사과가 아니라 실은 감자였다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지 않은 음식일뿐더러, 씨로 발아하지 않고 클론 증식하는 것이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구교도들이 퍼뜨린 미신에는 이런 황당무계한 것도 있었다. 세계 최초의 감자는 마르메스 왕의 딸이 악마에 홀려 타락할 대로 타락해 죽은 무덤 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 이 ‘악마의 열매’를 먹은 자는 반드시 지옥에 떨어진다고 여겼다.

-73쪽

물론 시베리아의 농민은 아직 감자를 몰랐다. 험한 일을 모르는 유배자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에 괭이를 쥐고 밭을 갈며, 먼 고향에서 감자를 들여와 재배했다. 이것을 널리 보급하려고 주위의 농민들을 불러 모아 요리하여 먹어 보였다. 그러나 농민들은 기분 나쁘다며 좀처럼 먹으려 들지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의 이상에 불타는 이들 데카브리스트들이 표트르 대제처럼 목을 베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리는 없다. 대신 금화를 꺼내 보이며 감자를 재배해서 먹는 자에게 주겠다고 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효과를 냈다. 그 후 감자가 이들 농민에게 금화 한 닢 이상의 실익을 가져다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리하여 감자는 급속히 시베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75쪽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으로 건너간 초콜릿은 아직 귀중품이었고, 숲 속에서 혼자 사는 노파에게는 얻기 힘든 물품이었을 것이다. 설탕 또한 17세기까지는 상류층 사람들밖에 먹을 수 없는 귀중품으로, 약으로 대접받을 정도였다. 서민들에게는 구경도 못할 사치품에 틀림없으니, 아마도 단맛은 꿀맛이었을 테지...... 음, 슬슬 입에 군침이 돌기 시작하네. 도대체 어떤 맛이었을까, 과자로 만든 집은?

-144쪽

놀랍게도 무는 인류가 먹어온 농작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류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노예들의 음식이었다고 한다. 또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폴론 신전에 제물을 올릴 때 사탕무는 은쟁반에, 무는 구리쟁반에 올렸다고 한다.
로마인이 무를 품종개량 하는 데 성공하여 그 뒤 유럽 각국 사람들의 상비 식품이 되었다. 중세기의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농민들은 수확한 무의 10분의 1을 교회 세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무는 어떤 기후 조건 아래서라도, 아무리 척박한 토양에서라도 자라고, 수확 뒤에도 장기간 저장할 수 있었으니 러시아에서는 실로 오랫동안 식탁의 주역이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감자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러시아 방방곡곡에 보급되기까지 무는 주식 자리를 차지했다. <커다란 순무>는 그런 환경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151쪽

똑같이 생겼으나 너구리는 개 과, 오소리는 족제비 과다. 너구리는 육식성 잡식이고, 오소리도 잡식이나 기본적으로는 초식이다. 겨울잠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피나 방을 두껍게 축적하여 체중이 30kg까지 나가며, 고기는 맛있고 양도 푸짐하니 사냥꾼들이 노리는 표적이 된다.
-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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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11-12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식에 관한 책들이 무척이나 많네요.
전 음식에 관한 책은 한번도 못 읽어 본 것 같아요.^^;;
식객은 읽고 싶은데 시리즈가 너무 많구요.ㅜㅜ

마노아 2009-11-12 12:39   좋아요 0 | URL
음식 관련 만화, 영화, 책 등등... 오래도록 사랑 받는 것 같아요.
식객 시리즈는 참 좋은 책인데, 후애님이 한국에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완결이 되지 않을까요?
그때 보셔요. 스테디 셀러니까 여전히 사랑받고 있을 거예요.
원래 제일 맛있는 건 나중에 먹는 겁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 2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시가 내게로 왔다 2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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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14쪽

프로스트, 가지 못한 길에 부쳐....

그대가 지금 가는 길이 그대의 길이다.
그러나 때로 나는 내가 가지 않은 다른 길을 생각한다.
그 길로 갔어도 나는 행복했을 것이다.-58쪽

호수 1(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밖에-70쪽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 · 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116쪽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리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히 늪으로 발을 옮겼다-117쪽

직녀에게(문병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선 채로 기다리기엔 은하수가 너무 길다.
단 하나 오작교마저 끊어져 버린
지금은 가슴과 가슴으로 노둣돌을 놓아
면도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선 채로 기다리기엔 세월이 너무 길다.
그대 몇 번이고 감고 푼 실올
밤마다 그리움 수놓아 짠 베 다시 풀어야 했는가.
내가 먹인 암소는 몇 번이고 새끼를 쳤는데,
그대 짠 베는 몇 필이나 쌓였는가?
이별이 너무 길다
슬픔이 너무 길다
사방이 막혀 버린 죽음의 땅에 서서
그대 손짓하는 연인아,
유방도 빼앗기고 쳐녀막도 빼앗기고
마지막 머리털까지 빼앗길지라도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
우리들은 은하수를 건너야 한다.
오작교가 없어도 노둣돌이 없어도
가슴을 딛고 건너가 다시 만나야 할 우리,
칼날 위라도 딛고 건너가 만나야 할 우리,
이별은 이별은 끝나야 한다.
말라붙은 은하수 눈물로 녹이고
가슴과 가슴을 노둣돌 놓아
슬픔은 슬픔은 끝나야 한다, 연인아.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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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09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는 항상 봐도 잘 이해가 안되요.마음으로 느끼라고 하는데 마음이 메말라서 일까요?

마노아 2009-11-09 21:09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정신적으로 충격을 좀 받은 날이어서 마음을 순화시키려고 시를 읽었어요.
저도 어렵긴 해요.^^

꿈꾸는섬 2009-11-09 2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시도 보이는군요.

마노아 2009-11-10 09:07   좋아요 0 | URL
저한테도 좋은 시를 옮겨 봤어요. 좋은 시는 통하게 마련인가 봐요.^^

순오기 2009-11-10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녀에게는 김원중의 노래로 들어야 제대로인데...
시들이 비장해요. 프로스트와 정지용의 호수만 빼곤...

마노아 2009-11-10 09:08   좋아요 0 | URL
직녀에게 노래로만 알아서 시는 처음 보았어요.
시들은 너무 함축적이어서 의미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아요.
의미를 알겠는 시만 가져와 보니 자못 비장해졌네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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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피하려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고통을 피하려고 스스로 죽기도 한다. 해피에게는 아이 없이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마음먹게 된 건, 희망을 찾은 게 아니라 희망을 버렸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만은 남편과도 공유할 수 없었다. 희망이라기보다는 살아가야만 하는 최소한의 근거를 찾은 건 그로부터 사 개월 뒤의 일이었다. -27쪽

입안으로 들어온 바닷물은 짜고도 압도적이었다. 순식간에 고통이 그녀의 몸으로 밀려들었다. 언제라도 그녀를 매혹시켰던 고통이었건만 맛보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59쪽

맞다. 나는 연필이었고, 그래서 흑심을 품고 있었다. 혹시 그 시를 매개로 누군가를, 아마도 내 땅의 말로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무명씨라도 만나지 않을까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 무명씨는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커다란 눈 옆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처음 보는 순간 미스 마플이라고 부르면 딱이라는 느낌이 드는 할머니로 밝혀졌다. -75쪽

요즘 들어서, 살아오는 동안 안 하고 넘어간 일들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청년은 아직 이게 무슨 기분일지 모를 거야. 한 일들은, 그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마음에 남는 게 하나도 없는데, 안 한 일들은 해봤자였다고 생각하는데도 잊히질 않아요. 왜, 하지도 않은 일이 잊히지 않는다니까 우스워요? 그러게.-79쪽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 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81쪽

어느 날, 잠에서 깨어봤더니 아빠가 내 시안을 다 보고 나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광고주처럼 느껴진다면 회사를 그만둬야만 할까, 아빠와 절연해야만 할까? 아무튼 그 아침에 나는 무척 슬펐다. 서른번째 생일을 그런 식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보다도 아침부터 생일이라는 걸 스스로 발설했으니 이제 내 인생에 멋진 남자와 근사한 저녁을 먹다가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내 서른번째 생일이었는데'라고 중얼거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서러워서.-95쪽

그 시절에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우린 세상 모든 사람인 양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 종현이 말한 것처럼 우린 하루 스물네 시간을 1440개의 아름다운 일 분들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 입학선물로 받은 캐논 디지털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던 종현에게 그 일 분이란 숨겨진 빛을 찾아내는 60초에서 세계를 가장 또렷하게 바라볼 수 있는 1000분의 1초 사이를 오가는, 우주만큼이나 광활한 시간이었다. -98쪽

"그건 그 남자의 말이 맞아, 누나. 이 세상을 지배하는 건 우연이야. 시골이라면 자연이겠지만, 도시에서는 우연이야."-104쪽

그 다음에는 종현이 얘기했다.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겼는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또 옆좌석이나 뒷좌석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114쪽

오타루에서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우리는 원없이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봤다. 2월의 눈은 무척이나 가벼워, 내리다가는 다시 하늘로 솟구쳤고 나뭇가지에 쌓였다가도 바람에 날렸다. 그런 눈이 내리는 동안, 낮은 더욱 낮답게 환했고 밤은 더욱 밤답게 어두웠다. 거기 오타루에서 내리던 눈은 이미 내린 눈 위에 착하게 쌓여만 갔으므로 이제쯤 돌이켜보면 오타루의 겨울은 단 한 톨의 눈송이도 버리지 않을 정도로 검소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123쪽

이상한 일이기도 하지, 그때 나는 용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먼 훗날의 누군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의 내가 용서하는 일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의 경우는 어떨까? 먼 훗날의 나라면 지금의 나를 용서할 것인가?-124쪽

엄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와 고통을 함께한 것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진통제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177쪽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그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249쪽

안구를 적출한 뒤에는 전에 한번 가본 곳일수록 다시 가지 않으려는 성향이 생기는데, 그건 혹시라도 제 기억과 다른 부분을 발견할까 두려워서죠. 그건 아마도 성장을 두려워하는 일과 비슷할 테죠. 완강하게 과거의 시각적 잔영만 붙들고 있는 셈입니다.-277쪽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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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11-05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 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저는 이 문장이 너무 좋아요. 김연수 낭독회에서 읽어줬는데. 아. 너무 귀여웠어요. ㅎㅎㅎ

마노아 2009-11-05 18:36   좋아요 0 | URL
멋있었다가 아니라 귀여웠단 말이지요? 김연수씨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려 보면 그게 더 어울리긴 해요.^^

Kitty 2009-11-05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진짜 전 취향이 아닌 듯 ㅡㅡ;;
김연수씨 문장을 보면 진지하게 제 국어실력과 이해능력을 의심하게 되어요.
세 번쯤 읽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ㅡㅡ;;;

다락방 2009-11-05 21:49   좋아요 0 | URL
Kitty님 저도 그 말이 하고 싶어요.
분명 아름다운 글인것 같은데 뭐랄까 묘하게 신경에 거슬려요. 아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그러니까 그냥 충분히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데 더 아름답게 쓰기 위해서 한번쯤 비틀거나 더하거나 꼬았다거나 하는 그런 느낌이 말이죠. 저도 며칠전에 알라딘에서 책을 샀더니 이 책의 미니 단편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걸 주더라구요. 그래서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단편 한편만 읽어보게 됐는데, 어려운 단어를 쓴것도 아닌데 다시 읽고 다시 읽고 했어요. 뭔지 알겠는데 또 뭔지 모르겠는 느낌, 뭔가 확 다가오지 않고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에요. 어려운 단어들은 아닌데 왜 어려운 문장이 되버리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 단편 읽고 단편집 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마노아 2009-11-05 23:52   좋아요 0 | URL
두 분 얘기 공감해요. 첫번째와 두번째 단편을 읽고 나서 역시 나랑은 안 맞아...이랬거든요. 그런데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좋았어요. 그렇지만 확실히 이렇게 말을 꼬고 꼬는 것보다는 스토리 중심이 더 좋아요. 읽어도 머리에 잘 안 들어와서 다시 읽게 만드는 건 피곤해요. 좀 멋부리는 것 같기도 하구요.^^;;;;

꿈꾸는섬 2009-11-05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연수, 너무 사랑스러워요.^^

마노아 2009-11-05 23:52   좋아요 0 | URL
하핫, 호불호가 확 갈리고 있어요.^^

같은하늘 2009-11-06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독해능력(?)이 안좋아 이책 구입하고도 못읽고 있잖아요.^^
처음에 좋다는 얘기와 예쁜표지(?)에 덥썩 구입했는데 여러분들이 난해하다는 평을 하셔서...ㅜㅜ

마노아 2009-11-06 10:14   좋아요 0 | URL
책이 확실히 예쁘지요? 전 천천히 읽고 있어요. 도무지 모르겠는 것들은 그냥 스윽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