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들 로드 - 3천 년을 살아남은 기묘한 음식, 국수의 길을 따라가다
이욱정 지음 / 예담 / 2009년 8월
절판


밀가루 음식을 탕으로 맛있게 먹으려면 간이 잘 밸 수 있도록 얇게 늘려야 한다. 밀가루 반죽을 덩어리째 넣으면 간이 잘 배지 않는다. 게다가 가늘고 긴 면의 형태로 만들어야 양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수는 가루를 내어 구워 먹을 수밖에 없었던 빵 문화를 낳았던 밀이 중원의 탕 문화를 만나 끓는 물에 조리하기 적합한 디자인으로 변모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건식의 재료와 습식의 조리법이 만난 동서 최고의 합작품, 이것이 바로 ‘국수’였다.-124쪽

송나라 이전까지의 도시들은 정치·군사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한, 전형적인 고대형의 도시였습니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의 경우도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성벽 내부는 다시 정방형으로 구획되어 바둑판처럼 108개의 방(坊)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방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담도 있고 문도 있어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는 잠갔습니다. 이곳에서는 장사를 할 수 없었죠. 상업이 가능했던 곳은 오로지 ‘시(市)’라고 불리는 구역이었습니다. 장안에는 동서로 두 개의 시가 있었는데, 하나는 동시이고, 하나는 서시였습니다. 그리고 동시에서는 내국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서시는 서역인들이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물건을 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야간에는 통행금지제도가 시행되어 밤에는 아예 물건을 사는 게 불가능했죠. -145쪽

하지만 송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폐쇄적인 도시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아주 개방적인 도시의 형태를 띱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어디서나 장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통에 영향을 주고 안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장사를 금한 홍교(虹橋-무지개다리)에서도 장사를 했습니다. 「청명상하도」의 홍교를 보면 장사하는 노점이 여덟 곳이나 있습니다. 번화한 지역에서는 밤새 장사를 해서 송대 카이펑은 지금의 도시처럼 밤 문화생활이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2,000여 명의 유태인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정착할 만큼 상업이 융성하고 비즈니스 기회가 넘치는 개방적인 도시였죠. 기록에 의하면 카이펑에는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업체만 160여 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얼마나 교역량이 많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카이펑으로 몰려들었겠는가. -146쪽

송대 연구소장은 카이펑의 도시 규모가 인구 150만 명-당시 유럽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의 인구는 40만, 런던의 인구는 10만 명이었다-에 이를 정도로 점점 커지면서 사람들이 성을 나가기 힘드니까 성벽을 없애고 가게를 열어 24시간 장사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우리는 「청명상하도」와 함께 북송시대 카이펑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동경몽화록』을 통해 당시 이곳 거리에 새벽 4시에 문을 열어 한밤중까지 영업을 하는 음식점과 상점들이 즐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경몽화록』은 남송 시대 맹원로가 쓴 역사서로, 북송이 금나라에 패해 어쩔 수 없이 남쪽에서 살게 된 맹원로가 옛 수도의 번영을 그리워하며 저술한 책이다. 때문에 이 책에는 북송의 풍속과 건축, 문화 등 다양한 모습이 아주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음식문화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 우리 제작진의 흥미를 끈 것은 송대에 이르러 국수가 대중음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들이었다. -146쪽

이를 테면 당시 북송 카이펑 사람들이 먹었던 다양한 국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양고기 국물을 낸 암생연양면, 마늘과 귤껍질로 만든 소스로 무친 이탈리아 파스타와 닮은 세물료기자, 돼지고기와 닭고기로 국물을 내서 담백한 동피면, 물로 식혀서 먹는 냉동기자, 밀반죽을 손으로 비틀어 불규칙하게 썰어 고기, 야채와 함께 먹는 흘달, 동피숙회면, 혼돈, 채면, 호접면 등 그 종류가 수없이 많았다. 이를 통해 국수가 송나라 때 매우 보편화되고 인기 있는 음식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147쪽

송대에 국수가 대중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옛날에는 그저 숟가락을 쓰고 지금은 모두 저(箸)를 사용한다"는 보편화된 젓가락 사용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는 면 요리가 대중화되어 젓가락으로 먹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을 추측하게 했다. 실제로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 당나라 때 밀의 생산량이 증가하고 제분 기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하면서 밀가루 가격이 하락해 귀족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분식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면(麵)’과 ‘병(餠)’이라는 글자가 온전히 구분되지 못했다. 당시 밀가루 음식을 가리키는 병처럼 면도 밀가루라는 뜻 이외에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총칭하는 말로 쓰였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국수처럼 밀반죽을 끓는 물에 데치거나 삶은 형태로 먹는 음식을 ‘탕병(湯餠)’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국수는 탕병의 부분집합에 불과했다. -147쪽

수많은 학자들은 송대 사람들이 많은 음식들 중에서 특히 국수를 즐겼던 이유를 도시발달로 인해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화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로 상공업에 종사했던 송대 사람들은 그 전의 중국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처럼 대단히 바빴다. 때문에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을 시간이 없어 주로 외식을 했다.
-150쪽

당시 카이펑은 음식 배달이 대단히 일상적일 정도로 외식문화가 꽃 피웠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져 외식을 즐겼던 송대 사람들. 이들은 외식을 할 때도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국수는 길고 가늘어 삶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조리법도 간단해 빨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송대 사람들에게 최적의 메뉴였다.
파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식사 시간 때마다 밀어닥치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상품은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심지어 미리 삶아 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으면 음식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단시간에 손님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151쪽

송나라 당시 식당 점원들은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메뉴판을 들고 가서 주문을 받아 정확하게 기록을 해두었다가 주방으로 가서 주문 내용을 큰 소리로 전달했다. 그러면 주방에서는 빠른 속도로 음식을 완성했고, 때문에 서빙을 하는 점원들은 쉴 틈 없이 양손은 물론 어깨까지 사용해 많은 음식을 날라야 했다. 그들은 아무리 음식의 가짓수가 많아도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정확하게 그 손님 앞에 놓았다. 하지만 주문을 잘못 받아 다른 음식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점원들은 주인에게 야단을 맞거나 월급이 깎이기도 했고, 심지어 해고를 당하기도 했다.-153쪽

그녀들에게 이 국수틀이 어디에서 온 것 같으냐고 묻자 옆 마을의 국수틀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중국의 것이라고 말하자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면서 방금 전까지 국수가 잘 뽑힌다며 국수틀에 대해 칭찬 일색이던 여인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국수틀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체츄 축제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국수틀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모르기 전에는 국수틀에 대해 아무 불평도 없던 사람들이 중국의 것이라는 것을 알자 흠을 잡기 시작했다.
산시성의 국수틀을 보고 중국의 것이라고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부탄인들의 반응이 무척 재미나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을 눈치 챌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산시성의 국수틀과 부탄의 국수틀이 놀랄 만큼 흡사한 것은 혹시 중국의 압출면 문화가 전파되었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닐까.-239쪽

"인도인들은 산을 싫어해서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힌두문명의 재미있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힌두문명은 대평원에서 잉태된 문명이기 때문에 애써 히말라야처럼 높은 산을 오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산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실제 전혀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광대한 내륙문화이 중국문명이 바다로 나가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인도에 면뿐만 아니라 중국문화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히말라야는 중국문화가 인도로 전파되는 것을 막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의 면도 인도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티베트 문화권에서 멈춰선 것입니다."-247쪽

우리가 만난 이어령 박사는 이런 이유로 면이 특별한 날에 먹는 음식이 될 수 있었다고 의견을 내놓았다.
"외래문화는 축제문화가 되기 참 좋습니다. 평소에 늘 봐서 익숙한 토착문화와 달리 외래문화는 색다르니까 여느 것과 차별화되기 쉬운 거죠. 외래 작물인 밀로 만든 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통 때 늘 먹던 음식이라 친숙한 밥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기 어려웠지만 면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면은 이색적인 외래의 것이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를 갖기 좋았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뜻밖에 횡재를 만났을 때 "이게 웬 떡이야?"라고 하지 "이게 웬 밥이야?"하지 않습니다. 밥은 늘 먹는 음식이고, 떡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죠. 특수한 것이 의미가 부여되기 쉽죠. 특히 면은 실처럼 모양이 길기 때문에 장수와 사람과의 긴 인연을 상징했습니다. 쌀알은 모두 따로따로 분리되어 떨어지지만 면은 길게 얽히기 때문에 시간의 상징이었죠. 그래서 생일이나 회갑연에는 면처럼 길게 살라는 의미에서 국수를 먹었습니다."-258쪽

"사찰 국수의 육수에 들깨를 넣는 이유는 승려들이 고기를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승려들의 식단은 채식입니다. 때문에 단백질과 지방이 부족해지기 쉬운데, 들깨에는 이런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승려들은 들깨를 많이 먹었고, 또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들깨는 승려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지방의 공급원이었습니다. 들깨 칼국수는 전통적인 사찰국수입니다."-274쪽

"승소는 스님들이 국수를 이르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 ‘스님의 미소’라는 뜻으로, 스님들이 국수만 보면 좋아서 웃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스님들이 왜 국수를 좋아하냐면요, 국수에는 육식을 하지 않는 스님들에게 결핍되기 쉬운 글루텐이라는 단백질이 많아서 국수만 보면 몸이 당기거든요. 그래서 국수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서 미소를 짓게 돼 승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어요."-276쪽

에도시대는 270년간 지속되었고, 개방 전까지 한국, 중국, 네덜란드밖에 교역하지 않았던 매우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에도문화는 일본 안에서 그들끼리 건설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끼리 독자적으로 세운 도시, 에도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18세기 전성기 때의 에도의 인구는 무려 100만 명에 달했다. 비슷한 시기 중국 베이징의 인구는 60만, 프랑스 파리의 인구는 55만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 무렵 에도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것이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꺼려했던 에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니, 나는 아이러니한 느낌을 좀처럼 지울 수 없었다. -328쪽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에도가 100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에도시대 일본의 실질적인 통치세력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의 정치체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도쿠가와 막부는 쇼군이 다이묘를 영주로 임명해 그들에게 관할하는 영지를 통치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쇼군은 그 다이묘들을 다스리는 형태의 중앙집권적 봉건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쇼군은 다이묘들의 충성도를 확인하고 통제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했기에 다이묘들의 처자식들을 에도에 인질로 잡아두고 ‘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실시했다. 참근교대는 다이묘들을 1년 동안은 자신의 영지에서, 1년간은 에도에서 거주하게 하는 제도로, 쇼군은 이를 통해 반란을 막았다.
그런데 전국 각지의 260여 명에 달하는 다이묘들이 참근교대를 하기 위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수행원이 적게는 100~150명, 많게는 4,000명이 따라붙었다. 그러니까 매년 에도에 30-40만 정도의 무사들이 오갔고, 여기에 이들을 위한 사원과 창고, 숙소 등을 건축하기 위해 전국에서 수공업자와 상인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정권강화를 위해 도입한 참근교대제가 에도를 대도시로 급성장하게 하는 기능을 한 것이다.-328쪽

일본 사람들은 신도시 건설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장인, 노동자, 상인들을 가리켜 ‘조닌’이라 불렀다. 조닌은 도시에 사는 상공업 종사자라는 뜻으로, 다이묘들이 거느린 무사들과 이들이 가세해 에도는 한때 남성 인구가 전체 인구의 70%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에도는 남자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에도의 남자들, 특히 조닌 중에는 가족을 두고 혼자 지방에서 올라와 사는 독신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공사 현장 인근의 목조 연립 주택인 ‘나가야’에서 살았다. 나가야는 한 채의 집을 수평 방향으로 여러 개로 칸막이해서 다가구가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만든 집으로, 마당에 상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급증한 인구로 주거공간이 가구당 5평 남짓으로 매우 비좁았다. 그로 인해 부엌이 있기는 했지만 화재의 위험성 때문에 매 끼니를 해 먹기가 불편하고 위험했다. -329쪽

놀랍게도 같은 시기, 머나먼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유일무이하게 고유한 국수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로, 중세 유럽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 특히 남부 이탈리아인들을 가리켜 국수를 어마어마하게 많이 먹는 대식가라는 뜻의 ‘만자 마케로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이 지점에서 이런 의문들이 생겼다. ‘수많은 유럽인들 중에서 왜 이탈리아인들만이 국수를 먹었을까?’, ‘이탈리아 사람들은 언제부터 국수를 먹기 시작했을까?’, ‘혹시 이탈리아의 국수도 중국 국수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등등.-337쪽

에도시대와 나폴리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한 현상에 주목했는데, 바로 국수라는 음식이 중소 상인들, 도시의 육체 노동자들, 서민층에게 각광받는 음식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동서양을 떠나 국수가 인류 최초의 패스트푸드였음을 나타내는 증거가 아닐까.-387쪽

안도 모모후쿠가 개발한 인스턴트라면은 인류의 식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사발이나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는, 면의 문화가 없던 곳에서도 면을 먹게 된 것이다. 즉, 인스턴트 라면으로 인해 면은 인류 공통의 먹거리가 되었다. 실제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인들이 지금까지 먹은 인스턴트 라면의 개수는 무려 1,000억 개에 이르고, 현재 지구상의 60억 세계인들이 연간 100억 개에 육박하는 인스턴트 라면을 먹고 있다고 한다. 1년간 세계에서 소비되는 인스턴트 라면을 모아 에펠탑을 지으면 무려 327개를 세울 수 있다. 라면은 인류가 만든 가공식품 중 가장 많이 소비되는 식품으로,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말은 과언이 아니다. -390쪽

인스턴트 라면을 만드는 과정 속에는 2,500년 동안 인류가 고안해내고 발견한 면 제조 방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인스턴트라면은 밀가루를 물, 소금 등과 적절한 비율로 섞고(배합)→밀반죽을 얇고 평평하게 밀고(압연)→얇게 민 반죽을 자르고(제면)→면을 익히고(증숙)→찬물에 면을 식히고(냉각)→식힌 면을 말리는(건조) 공정을 거쳐 완성된다. 이는 우리 제작진이 국수의 발자취를 따라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곳곳에서 만났던 고대 사람들이 창안해 낸 제면법들이었다. 즉, 간편함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대표음식인 인스턴트라면 속에 수천 년의 국수 역사가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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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19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책으로도 나왔었군요. 다큐멘터리 재밌게 봤었어요.
날이 더워도 추워도 국수가 생각나지 않아요? 저는 점심에 냉모밀국수 해먹었어요. ㅎㅎ

마노아 2010-06-19 19:50   좋아요 0 | URL
저는 오늘 점심에 칼국수 먹었어요. 급식 메뉴가 칼국수였거든요.
에어콘 바람으로 추웠는데 딱 좋았어요.
그치만 요새 가장 먹고 싶은 건 콩국수예요.^^

L.SHIN 2010-06-20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전에 읽을까 말까..했었는데.
재밌는 것은 동.서양 어느 나라나 국수 문화가 있다는 거에요 ^^

마노아 2010-06-20 16:30   좋아요 0 | URL
국수가 서민 음식으로 보편화되었는데, 지금도 경우에 따라 고가 음식도 되어요.^^
아, 드라마 파스타 참 재밌게 봤는데..^^

BRINY 2010-06-20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다큐멘터리 보면 정말로 면이 땡겼어요.

마노아 2010-06-20 16:30   좋아요 0 | URL
이 책 보는 것 보더니 어떤 샘이 다큐가 1편 빼고 너무 실망스러웠다고 막 흥분하셨어요.
저는 안 봐서 대꾸할 수가 없었어요. 그치만 궁금했어요.^^

같은하늘 2010-06-22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수를 좋아하는 저 TV로 열심히 봤던 기억이...^^
책에도 사진이 잔뜩 실려 있나요? 먹고싶다...

마노아 2010-06-22 08:48   좋아요 0 | URL
책에는 사진이 그닥 많지 않고요, 대략적인 현지 분위기만 담아서 오히려 우중충했답니다. ^^;;;
 
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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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분명히 인간이 일으키는 것이나, 이상하게도 마치 어떤 자연의 필연성을 갖고 있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재해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그렇게 닥친 전쟁은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다. 인간은 인간을 죽일 수 있을 뿐, 되살릴 능력은 불행히도 그의 것이 아니다. 전쟁에서 죽어간 인간의 영혼을 받는 것 역시 그의 일이 아니다. 그 압도적인 무력감 앞에서 인간은 당연히 종교적이 될 수밖에…….

-5쪽

아직도 우리는 ‘정의로운 전쟁’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모든 전쟁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는 것일까? 역시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아직 평화주의자가 아닌지도 모른다. 선뜻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만큼, 야만은 아직 우리의 것이다.

-7쪽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오늘날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현실을 왜곡하는 형태가 아니라, 아예 현실 자체를 사라지게 하고, 그것이 다시 등장하는 것을 막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전쟁은 사라졌다. 조종석이 스크린 위에서. 핵폭발은 사라졌다. 사이버 공간 속으로.

그렇다고 정말로 전쟁과 핵폭탄이 사라진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스크린으로 전쟁을 대신할 수 없고, 시뮬레이션으로 핵폭탄을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의 의식 ‘안’에서 전쟁과 핵폭발의 가공함을 지울 수는 있어도, 그것이 우리 의식 ‘밖’의 참혹한 현실까지 지울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참혹함이 우리에게 의식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그 현실이 우리의 의식에 현실로 등장하는 것을 제지당한다면? 어차피 없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63쪽

장인과 처남에게 "누가 저 자살 공격을 계획했느냐"고 묻자, 매우 당혹스러워한다. 이제까지 그런 질문은 한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물음이 없어야 비로소 저들은 조국을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호국의 영령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데올로기는 반드시 던져야 할 질문을 덮어두는 데에서 성립한다. 도대체 저 아이들을 무의미한 자살공격에 몰아넣은 사람은 누구일까? 아직까지도 나는 이 미친 작전을 기안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아마 일본인들도 모를 것이다. 알 필요도 없고, 별로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알아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74쪽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호국영령’이라는 말도 실은 일본 군국주의 문화의 잔재다. 일본인은 예로부터 다신교를 신봉했고, 때문에 일본에는 약 900만 종의 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은 곧 ‘신’으로 추앙되는 전통 때문이다. 이런 문화에서는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신이란 ‘인간 존재의 자기 완성’이라는 존재미학의 목표를 의미한다. 물론 이 존재미학은 정치에 오용되어 곧바로 군사문화로 옮겨질 수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에 나선 일본 병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신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고 믿었다 한다.

-77쪽

이것이 호국영령의 개념이다. 이 개념 속에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정치적 요구는 종교적 숭고함의 외피를 입는다. 사실 어떤 것을 위해 스스로 제 목숨을 던지는 자살공격은 더 이상 정치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 현상,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 차원으로까지 올라간 극단적인 정치의식의 발로다. 정치는 현세만을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목숨을 버리라고 명령하는 정치적 요구는, 그 명령을 따르는 이들의 희생을 내세라는 종교적 약속으로 보상해야 한다. 그래서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죽어서 ‘신’이 되었다. 머나먼 태평양에서 호국영령이 되어 돌아와 일본인의 가슴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78쪽

자살공격은 전세가 불리한 쪽에서 사용하는 전술로, 그 자체가 그들의 좌절과 절망을 반영한다. 그것은 압도하게 우세한 적 앞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수단이자 절망에 빠진 자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여기서 정치의식은 극단화하여 종교와 하나가 된다. 그것은 정상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빌린다. 그 가망 없는 몸짓으로 기적의 창조를 바라는 것도 실은 종교적 심성에 가깝다. 전사자들은 순교자가 된다. 이 점에 관한 한 가미카제와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서로 다르지 않다. 나아가 자유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회가 아니라, 강한 집단주의와 공동체 의식을 가진 사회를 배경으로 한 전술이라는 점에서도 둘은 일치한다.

-82쪽

실러의 말대로 "신들이 더 인간다웠을 때, 그때 인간은 더 신적이었다." 신들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에서는 인간이 제 존재를 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 이런 사회의 문화는 자연스레 유미적 성격을 띠게 된다. 신화 속의 신들은 선악의 도덕에 구애받지 않기에, 신이 되고 싶은 인간들은 선(善)이 아니라 ‘우수함’을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한다. 인간의 한계를 초극하여 신이 되려는 자들의 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이 아니라 초인의 ‘미학’이다. 가미카제가 주는 감동은 윤리적 감동이 아니라 예술의 감동. 그것은 ‘신에 대한 헌신과 희생’이라는 종교적 코드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 초극’이라는 존재미학에서 흘러나온다.

-83쪽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다르다. 가미카제가 ‘영웅’이라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순교자’다. 가미카제가 희생으로 제 존재를 ‘완성’하려 했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신에게 바치는 희생의 존재로 제 존재를 ‘포기’하려 한다. 가미카제가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초인’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린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한갓 신의 뜻을 실현하는 ‘소도구’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가미카제가 극단의 ‘우월함’이라는 미학을 실천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마찬가지의 극단성을 가지고 ‘겸손함’의 도덕을 실현한다. 가미카제가 인간 세계에서 ‘불멸의 명성’을 얻어 영원성에 도달한다면, 이슬람 자살특공대는 자살의 대가로 신으로부터 천상에서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약속받는다.

-83쪽

과거에 인간의 기술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이 차지했던 자리를 이제는 인간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술이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숭고한 것은 기술이다. ‘충격과 공포’ 작전에서 우리는 숭고함의 경지에 도달한 기술의 파괴력을 본다. 이 압도한 파괴력에 대항할 기술이 없는 사회의 성원들은 이 거대한 제2의 자연에 도대체 무엇으로 맞서야 할까?

-85쪽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원래 미군은 ‘충격과 공포’ 효과를 위해 원자폭탄을 무인도에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한 과학자가 "효과를 보려면 폭탄을 사람이 사는 곳에 덜어뜨려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주장대로 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져 기대하던 효과를 거두었다. 그토록 격렬히 저항하던 일본 군부도 단 두 개의 폭탄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원폭을 민간인 거주지역에 떨어뜨려야 한다고 했던 오펜하이머는 순수 기술 면에서는 현명했다. 충격과 공포 작전이 이라크에서 애초에 노렸던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는, 그 폭격이 민간인을 겨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격과 공포 효과는 일정하게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87쪽

반면 미․영 동맹군은 또 다른 종류의 충격과 공포 효과를 체험해야 했다. 이라크 군의 ‘자살공격’이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이다. 자살공격은 개인주의 문화를 배경으로 자라난 미국과 영국군 병사들에게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는 한계 밖에 있는 현상이었으리라. 대의를 위해서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이슬람의 윤리, 그 역시 인간의 상상 규모를 초월한 것이고, 그 앞에서 앵글로색슨 병사들은 아마도 또 다른 형태의 숭고한 ‘충격과 공포’의 감정을 체험했을 것이다.

-87쪽

가공할 파괴력을 무기로 한 가학의 숭고함과 초인간적 희생을 무기로 한 피학의 숭고함. 한쪽은 첨단 과학기술을 이용해 숭고한 효과를 연출하고, 다른 쪽은 봉건적이고 종교적인 심성을 동원해 또 다른 숭고한 효과를 연출한다. 한쪽에는 감정이 메마른 차가운 과학적 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고, 다른 한쪽에는 뜨거운 파토스로 가득 찬 종교적 비합리성이라는 괴물이 서 있다. 이 두 괴물이 서로 맞붙어 인간의 척도를 넘어서는 숭고한 규모를 자랑한다. 이라크 전선에서는 이렇게 두 개의 숭고함이 부딪치고 있었다.

-88쪽

숭고함의 미학과 윤리는 정치적으로 겁탈당하여 전쟁의 원리가 되었다. 침략자와 독재자는 인간의 척도를 넘어선 이 두 개의 숭고함으로 서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려 했다. 하지만 이 숭고한 놀이의 대가를 몸으로 치러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은 결코 숭고하지 않은 민간인들이었다. 침략자의 파괴력을 방어할 고도의 기술도, 순교하라는 독재자의 요구에 부응할 광적인 신앙심도 없는 사람들. 그저 평균 수준의 합리성과 평균 정도의 종교성을 가진 사람들.

-89쪽

오늘날 독재자 후세인을 만든 것은 미국이며, 그 미국이 후세인의 생화학무기가 이란을 향할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고, 그 독가스가 정작 쿠르드족을 학살할 때는 과감하게 묵인해 주었다는 것을, 그(복거일)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저렇게 징그럽게 넉살을 부리는 걸까? 이 더러운 전쟁의 진짜 목표가 이라크의 유전을 접수하고, 친미 괴뢰정권을 세워 이란과 시리아를 견제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그는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괜히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만약 전자라면 머리가 나쁜 것이고, 후자라면 양심이 불량한 것이리라.

-94쪽

언제부터 미국이 이라크 인민의 자유에 관심을 가졌던가? 전세계 모든 독재정권을 옹호한 게 미국 아니던가? 도대체 전세계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은 독재정권이 있었던가? 후세인이라는 독재자를 서아시아의 실력자로 키운 것이 누구였던가? 미국이다. 어느 잡지의 사진 속에서 "이라크의 자유"를 외치는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다정하게 악수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라크인들이 자유로웠던가? 게다가 미제 폭탄이 언제 ‘정권과 인민을 명확하게 구분’하던가? 정밀하다는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이 어디 정권 수뇌부던가? 무참히 학살된 1,300명의 희생자. 5천 명의 부상자는 모두 그들이 해방시킨다던 ‘인민’들이었다.

-98쪽

캐나다와 멕시코는 아예 미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대미 의존도가 우리보다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파병은커녕, 미국의 전쟁에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주권 국가로서 타국의 부당한 요구에 제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거기서 비롯하는 외교 갈등은 그 후 다시 해결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거기에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정신병 증세가 있다.

-111쪽

한미동맹교. 그것은 우리 사회의 낡은 우상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우상은 흠모의 대상이고, 다른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청와대에서 국회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의 지도층을 온동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우습게도 워싱턴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벨 소리였다. 숭배는 공포의 소산이다. 누가 미국을 신으로 만들었는가? 우리의 두려움이다. 우리 중의 어떤 이들은 북한 공산주의를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은 자유주의 미국의 힘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들에게 미국은 우리를 구할 자비의 신이며, 다른 이들에게 미국은 배교자를 징벌하는 복수의 신이다. 다분히 과장된 이 두 가지 공포가 합쳐져 미국이라는 나라를 신성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112쪽

그리스도는 목숨 하나로 인류 전체의 죄를 대신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이라크인들은 예수보다 운이 나쁜 편이다. 2천 개의 목숨을 합하여 기껏 한 사람의 죄를 씻어주고, 그렇게 죽은 다음에는 사흘이 넘도록 아직 부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사장 부시는 시퍼런 칼로 제단 위에서 양들의 멱을 딴다. 몇 마리의 목을 땄을까? 이 귀찮은 질문에 사제들은 대답한다. "희생양의 수를 집계할 계획이 없다." 양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이 광경에 경악하는 우리에게 파월 사제가 태연히 말한다. 후세인의 죄를 씻기에 저 정도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양들의 침묵은 기가 막혀서일까?

-131쪽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이 하루 식량으로 배급받은 것이 건빵 크기의 조그만 빵조각 하나였다. 그것으로 보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을 테지만, 그 예문에는 조국을 지킨 인민들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강조하느라 바빠 희생자의 수는 미처 언급할 틈이 없었다. 이렇게 양측이 조그만 도시를 놓고 피차 엄청난 사상자를 내며 집요하게 전투를 벌인 것. 그곳이 남부의 유전과 소련의 공업지대를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 도시에 우연히 ‘스탈린’ 동지의 이름이 붙어 있었던 것, 그것이 그 전투를 더욱 더 집요하고 치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지도자의 이름이 붙은 도시의 함락은 전략의 의미만이 아니라 상징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결국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6개월에 걸친 포위작전으로 도시는 초토화되고, 수십만의 시민이 굶어죽었다고 한다.

-138쪽

후세인의 서재에 들어가본 어느 기자는 그의 책장에는 오로지 스탈린에 관한 책만 꽂혀 있었다고 전한다. 스탈린이 아마도 그의 인생의 모범이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의 통치는 실제로 스탈린의 것과 비슷했고, 그러다가 스탈린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러시아 인민의 어깨에서 공산주의의 멍에를 벗겨주러 왔다는 히틀러의 군대에 포위됐고, 바그다드는 사담에게 억눌린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를 주러 왔다는 부시의 군대에게 포위되었다. 침공하는 부시와 침공당하는 후세인, 어느 편이 옳은가? 침략하는 히틀러와 침략당하는 스탈린, 정의는 어느 편에 있을까? 침략당한 독재자와 침략하는 제국주의자, 우리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이라크 민중의 해방자는 누구일까?

-140쪽

후세인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해방투쟁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를 위해 바그다드 전체가 옥쇄할 필요는 없다. 그가 가진 것은 오로지 무력뿐이나, 무력은 더 큰 무력 앞에서 무력한 법. 하지만 오로지 무력만 갖고 있기는 미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 무력으로써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 그것을 통해 이권을 챙기려 할 것이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과 그들이 추구하는 이권 사이의 괴리, 이 틈을 영원히 무력으로 메울 수는 없는 것이다.

-146쪽

미군은 바그다드에 입성했다. 그리고 그 안에 포위됐다. 군사적 싸움의 시기는 지나고, 이제 그들 앞에는 지루한 정치적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군사력으로는 압도한 우위를 자랑해도, 사담이 사라진 이상 그들의 정치적 우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들이 해야 할 싸움은 불행히도 군사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격의 것이다. 그들을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승리하는 유일한 길은 깨끗이 패배하는 것, 즉 이라크의 미래를 이라크인들의 손에 맡기고 조용히 그 땅을 떠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게다. 때문에 그 정치적 열세를 군사적 우위로 상쇄하면서 그들은 계속 그곳에 머무르려 할 것이다.

-149쪽

근대사회에서 개인의 폭력 행사는 금지된다. 사형(私刑)이나 복수할 권리는 인정되지 않는다. 폭력의 권리는 국가에 위임되고, 국가의 폭력 행사는 법의 통제 아래 놓인다. 이제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은 사법체계를 통해 평화로운 방법으로 해결된다. 개인의 폭력적 잠재력은 교육과 제도를 통해 최소한으로 억제된다. 단순 무식한 중세의 전사(戰士)는 교양과 매너를 갖춘 신사(紳士)가 된다. 전사를 움직이는 것이 명예라면, 신사를 움직이는 것은 이익이다. 이런 이기적인 신사들이 만든 사회에 사는 낭만적인 전사들은 당연히 권태를 느낄 수밖에 없다. 전사들은 자신의 폭력성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으나, 그 욕망은 사회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다. 이 검열을 피해서 억눌린 폭력의 욕망을 승화하는 방법은 없을까?

-160쪽

그 방법이 있다. 즉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을 통해 개인의 공격 본능을 맘껏 발산하는 것이다. 국가가 승인하는 폭력.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 속에서라면 야수 같은 공격성도 범죄의 기질로 비난받지 않는다. 외려 사적으로는 남성다운 아름다움으로, 공적으로는 애국주의와 영웅주의의 미덕으로 칭송받는다. 미시마가 "우익의 남성미" 운운하며 느닷없이 웃통을 드러내고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들고 근육 자랑하던 것을 생각해보라. 미시마와 고바야시가 산업사회의 권태를 말하며, 전쟁을 논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게 어디 일본만의 일인가? 우리 정부가 파병을 결정하자, 모 전우회에서 자기들도 덩달아 참전하겠다며 누렇고 뻘건 해프닝을 벌였다. 원시 본능을 승화하고, 억눌린 성 에너지를 방출할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이다.

-161쪽

미국은 이 전쟁에 ‘이라크의 자유’라는 시적인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그들이 이라크에 자유를 주려고 전쟁을 일으켰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알다시피 이번 전쟁의 원인은 이 지역에 걸린 미국의 이해관계다. 오늘날 전쟁은 이렇게 산문적인 원인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파병하는 것도 다르지 않다. 명분 없는 파병의 유일한 명분은 ‘국익’이다.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인)에게 이보다 더 강한 설득력을 갖는 논증은 없다. ‘이익’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의 인성은 전쟁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이것이 봉건의 야만성을 대신해 들어선 근대의 야만성이다.

-165쪽

적어도 오늘날 전쟁 자체가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전쟁은 사악하지만 불가피한 것이라 말한다. 그나마 전쟁 자체가 나쁘다고 말하게 된 것이 근대라는 시대의 성취다. 에라스무스 이전에는 전쟁 자체를 나쁘다고 말하는 어법 자체가 없었다. 전쟁은 늘 신성한 것이었다. 물론 근대에 들어와서도 우세한 것은 여전히 ‘정당 전쟁론’이었다. 한마디로 전쟁도 어떤 선한 목적을 위한 정당한 수단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조차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을 구별하며, 후자를 긍정한다. 사회주의 조국전쟁,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민족해방전쟁, 억압받는 민중의 혁명유격전 등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이다.

-166쪽

미국은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선사한다고 하나, 칸트는 어떤 국가도 타국의 체제와 통치에 폭력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다른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나라는 결국 그 나라 인민의 ‘인권’도 침해할 수밖에 없는 것. 이라크에 자유를 주러 간 미군은 지금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고 있다.

-168쪽

"주적은 제 나라 안에 있다." 베를린의 반전시위에서 본 어느 플래카드에 적힌 구절이다. 옳은 말이다. 평화의 적은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제 나라 안에 있다. 각자 제 나라 정부의 전쟁을 막는 것이 세계시민의 의무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전쟁을 결정하는 것은 시민의 태도에 달려 있다. 가령 시민의 대다수가 반대하자 스페인 정부도 결국 파병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전쟁은 막을 수 있다. 문제는 평화주의 역량을 강화하여, 그것으로 국가가 저지르려는 전쟁에 대한 시민 사회의 내성을 기르는 것뿐이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고? 그렇게 전쟁이 하고 싶은가? 그럼 제발 ‘정치’를 하라. 내가 다니던 베를린 자유대학의 화장실 벽에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정치는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의 연장이다."

-171쪽

빌라도는 고대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유대인들이 그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을 나열한 후, 이어 피고인 예수에게 변론의 기회를 준다. 이 경우 피고인들은 대개 용서를 빌거나 자신을 변명하느라 혀가 바빠지기 마련. 하지만 예수라는 사내는 달랐다. 그는 빌라도가 제시한 게임의 규칙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변론을 포기하고 아예 생사에 초연한 태도를 보인다. 그 모든 것을 신이 자신에게 건네준 쓴잔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한마디로 빌라도의 웅변적 수사학이 지극히 인간적이었다면, 예수의 침묵의 수사학은 완벽하게 신적이었던 것이다. 빌라도는 크게 당황한다. 그리하여 그를 가리켜 감탄하여 외치기를, "Ecce homo!(이 사람을 보라!)"

-172쪽

사실 우리의 것은 빌라도보다 죄질이 더 나쁘다. 이라크인을 넘겨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살해행위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그 짓을 하고도 빌라도처럼 대야에 손 씻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려 전쟁이 끝나자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직 이라크 복구사업에서 얼마나 많은 이권을 따낼 것인가 하는 얘기뿐.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이익이 떨어지기는 하는 걸까? 남이 흘린 피로 얻어낸 그 이익으로 앞으로 우리 배에 정말 자르르 기름기가 돌까? 예수를 못 박은 후, 그가 달린 십자가 밑에서 로마의 병정들은 그가 입었던 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 성경의 이야기는 인류 사회에서 늘 벌어지는 어떤 사건들의 상징이자 원형인 모양이다.

-1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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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바나나 다이어트
하마치.와타나베 스미코 지음, 최인정 옮김 / 넥서스BOOKS / 2008년 8월
구판절판


군살이 붙는 이유는 몸 안에 지나치게 늘어난 노폐물과 독소를 봉쇄하기 위해서다. 노폐물은 주로 배변활동에 의해 몸 밖으로 배출된다. 그런데 변이 순조롭게 몸 밖으로 나오지 않아 변비가 생기면 배출되지 못한 변이 장 안에서 부패해 독소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독소가 갈 곳을 잃고 몸속을 순환하면서 혈액과 림프액(우리 몸속에서 가장 많은 수분을 차지한다)의 기능을 저하시킨다. 독소는 피부를 통해서도 나가려고 하는데 이 때문에 피부가 거칠어지거나 여드름이 생기기도 한다. 만약 독소를 더 이상 내보낼 방법이 없게 되면 몸은 해로운 물질이 몸속에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순환하지 않는 ‘지방’ 속에 가둔다. 그 결과 늘어난 잉여 지방이 바로 군살이다.
-23쪽

식습관
TV나 신문 보며 먹기, 폭식, 씹는 횟수가 적은 식습관 등은 음식을 소화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위를 지치게 만든다.
조미료를 많이 사용한 음식이나 유제품, 카페인, 감자튀김이나 도넛과 같이 트랜스지방산이 많은 음식을 자주 섭취하는 것도 삼가자. 이 음식들은 간에서 분해해야 하기 때문에 과다 섭취하면 간이 쉽게 지친다.
신선하지 않은 음식이나 백설탕을 과다 섭취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생활습관
지나치게 운동을 많이 하거나 밤낮이 바뀐 올빼미형 생활, 불규칙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또 수면 부족, 휴식 부족, 심호흡 부족, 나쁜 자세,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빛을 보는 시간이 긴 경우도 쉽게 피로로 이어진다.
몸이 제대로 쉬지 못하거나 장시간 긴장상태가 계속되면 신체적 피로가 쌓인다. 그렇게 되면 체질이 악화되어 살찌기 쉬운 체질이 되며 이는 곧 비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25쪽

오전 중에는 위장의 소화능력이 낮기 때문에 소화하기 쉬운 것, 또는 소화할 필요가 없는 것을 먹는 것이 좋다. 특히 생과일은 수분보충 역할도 하므로, 아침에 과일을 먹으면 건강에도 좋고 다이어트 효과 역시 기대할 수가 있다.

바나나의 당류가 오전 중에 높은 집중력을 발휘하게 해줘 업무능률을 향상시킨다. 또 아침부터 달콤한 바나나를 먹으면 설탕의 섭취빈도와 양을 줄이는 효과도 있다.
-29쪽

바나나의 영양
바나나는 과일 중에서 칼륨이 가장 풍성하다. 칼륨에는 혈압을 상승시키는 나트륨을 소변을 통해 배출시키는 효과가 있어 부종을 없애준다.
식이섬유는 가장 부족하기 쉬운 영양소로, 여성의 90%가 부족하다고 한다. 바나나에는 이 식이섬유가 풍부해 변비해소에 큰 도움을 준다.
바나나에는 다른 과일에 거의 없는 세로토닌이 풍부하다. 세로토닌은 신경을 안정시켜 숙면을 도와주며 짜증을 줄여주고 과식을 막는 효과도 있다.

파란 바나나는 해독력이 높다!
잘 익은 바나나는 면역력을 높인다!
-32쪽

바나나는 먹고 싶은 만큼 먹어도 된다. 그리고 기본은 바나나지만 바나나를 먹고 싶지 않은 날은 다른 과일을 먹어도 괜찮다. 단, 한 번에 한 종류만 먹도록 한다.

배가 고파서 아무래도 뭔가 더 먹어야겠다고 느끼면 바나나를 먹고 나서 15~30분 후에는 먹어도 된다. 만약 빨리 다이어트 효과를 보고 싶다면 주먹밥 등과 같은 밥류가 좋다. 업무 시간과 같이 밥을 먹기 어려운 경우에는 가볍게 사탕을 먹는 것도 괜찮다.
-42쪽

아침에 바나나를 먹을 때는 상온의 물을 마시는 게 좋다. 하지만 바나나를 먹은 후 15~30분이 지난 후에는 무엇을 마시든 상관 없다.

맛이 있는 음료수를 자주 마시면 미각이 둔해져 많은 양을 마셔야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물을 자주 마시면 미각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
-43쪽

점심 식사는 좋아하는 것을 먹어도 상관없다. 식후에 과식으로 괴롭지 않을 정도라면 점심은 먹고 싶은 만큼 잘 먹어두는 게 좋다.
만약 빨리 다이어트 효과를 보고 싶다면 가능한 한식을 먹자. 특히 밥을 많이 먹고 반찬을 적게 먹는 것이 핵심이다. 밥은 한 그릇 더 먹어도 괜찮다.

먹고 싶다면 매일 간식을 먹어도 상관없다. 다만 과식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에 한 종류로 한다. 양은 한 봉지라도 괜찮다. 초콜릿 등이 좋고 아이스크림이나 도넛, 감자칲 등은 자주 먹지 않도록 하자. 특히 찬 음식을 먹는 습관은 위장을 약하게 만들어 살이 잘 빠지지 않는 체질이 되기 싶다. 기름을 많이 사용한 과자도 다이어트에는 적이다. 만약 배가 많이 고프면 주먹밥과 같은 밥을 먹자. 또 단 음식이 너무 먹고 싶은데 빨리 다이어트에 성공하고 싶다면 과일(한 종류)을 먹는 것이 좋다.
-44쪽

비만의 가장 큰 원인은 저녁 식사 시간에 있다.
밤늦게 먹으면 위장이 활동 중인 채로 잠들게 되어 위에 부담을 주고 숙면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숙면을 하지 못하면 피곤하게 되고 체질이 악화되어 붓거나 살찌기 쉬운 체질이 왼다.
만약 저녁을 일찍 먹는다면 많이 먹어도 되고 무엇을 먹어도 상관없다. 가능한 저녁 6시 정도에 먹고 늦어도 8시까지는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자.
저녁 식사 후 디저트를 먹는 습관도 버려라. 대신 단 음식을 먹는 시간을 오후 3시의 간식시간으로 옮겨보자. 먹고 싶은 음식을 아예 먹지 않기보다는 시간대를 바꿔서 즐기는 것이다.
-45쪽

늦어도 밤 12시 이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습관을 갖자.
체질개선은 주로 숙면 중에 이루어진다. 공복 상태에서 잠이 들면 바나나의 피로회복 효과가 더해져 훨씬 숙면을 취할 수 있다.

운동을 적당하게 하면 건강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지만 괴로운데도 계속하는 것은 오히려 마이너스다. 숨이 차지 않을 정도로만 운동을 하자.
실제 팔을 위 아래로 흔드는 것과 같이 크게 칼로리가 소모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간단한 동작이 다이어트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46쪽

알람시계를 사용하지 않고 저절로 잠에서 깨는 것이 가장 좋다. 알람소리가 뇌를 심한 긴장상태로 만들기 때문이다. 숙면을 취하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긴장하게 되면 몸에 부담을 준다.
또 뇌가 긴장하면 뇌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대장도 긴장하게 되고, 대장이 긴장해서 딱딱해지면 배변도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잠에서 깨어나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자.

점심식사 후 앉아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한다. 소화 중에는 혈액이 위에 집중되는데, 소화에 집중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거나 운동을 하는 것은 잠시 삼가도록 하자.

저녁 식사 후에 배가 다시 고파지면 과일 한 개 정도를 먹는 것이 적당하다.
-48쪽

밤늦게 먹었다고 해서 그만큼 오래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소화시키느라 밤을 새면 피로가 더 쌓인다. 그러므로 취침은 밤 12시 이전에 꼭 하도록 하자.
사람의 몸은 자정부터 새벽 2시에 걸쳐 가장 활발히 회복된다고 한다. 특히 체질개선은 자고 있는 동안에 활발히 이루어지며 변도 보통 수면 중에 만들어진다.
-54쪽

아침에 곡물을 먹으면 오전에 위가 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몸에 좋지 않다.
-56쪽

여름에 덥다고 얼음물을 마시면 위가 너무 차가워지므로 조심하자. 위장이 차가워지면 건강이 나빠지고 체질 악화로 이어진다. 몸을 식히고 싶을 때는 바깥쪽을 식히자. 몸 안(내장)을 차갑게 하면 병에 걸리기 쉽다.
-61쪽

수분이 감소하면 혈액이 끈적끈적해지고 피부가 거칠어진다.

혈액 점성이 높아져 끈적끈적해지면 체질이 더욱 악화된다.
따라서 운동이나 목욕, 자기 전에 물을 꼭 마시자. 혈액이 끈적끈적해진 후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수분 보충을 충분히 해야 하는 것이다.
-63쪽

간혹 근육을 줄여서라도 살을 빼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탄수화물을 극단적으로 줄이면 근육은 줄어든다. 그러나 면역력 저하, 초조함이나 우울증 유발, 거친 피부, 탈모, 생리불순, 불임 등의 부작용이 뒤따른다.

유산소 운동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숨이 찰 정도로 하면 산소결핍으로 오히려 유산소 운동이 되지 않는다. 지방은 산소와 당이 없으면 연소되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반드시 지방이 타는 것은 아니다.
지방을 연소시키기 위해 장시간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무리하면 오히려 지방이 연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운동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65쪽

효소는 ‘A⇒B'에서 ’⇒‘에 해당한다. 이렇게 효소가 일으키는 화학반응을 우리는 ’대사‘라고 부른다. 호흡, 혈액순환, 사고, 운동, 수면, 식사 등을 할 때마다 항상 수많은 대사가 이루어지며 그때마다 많은 효소가 소비된다.
효소가 부족하면 몸의 작용이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해 몸이 힘들다고 느끼게 된다.
효소는 야채와 과일에 많이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가열하면 파괴되므로 식사를 통해 섭취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효소는 열에 약하고 파괴되기 쉬운데 찌거나 끓이면 이를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생으로, 또는 스팀 가열하여 효소를 섭취해 건강과 다이어트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자.
-67쪽

보통은 무리하게 연소시키지 않아도 과다 섭취한 칼로리는 변과 함께 배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칼로리 소비가 적다고 생각해 운동량을 늘린다.
무리한 운동은 오히려 피로와 노폐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습관은 비만으로 이어진다. 또 면역력을 저하시켜 체질이 나빠지고 건강을 해치며 결국 병원신세를 지게 되는 등 건강을 위해 노력했는데도 오히려 안 좋은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식욕은 일종의 감정이다.
-70쪽

조미료(아침에 바나나와 물만 먹는 것은 하루의 조미료 섭취량을 줄이기 위해서다)는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미각을 둔하게 만든다. 미각이 둔해질수록 식사를 더 많이 해야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배가 불러 괴로울 정도인데 더 먹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미각이 둔해졌기 때문이다. 먹은 양과 포만감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라도 조미료는 가능한 적게 쓰도록 하자. 또 조미료를 분해하려면 간에 큰 부담을 준다.
-76쪽

앉을 때 의자에 허리를 살짝 걸친 상태로 양발을 앞으로 쭉 내밀고 상반신부터 발까지 막대기 같이 앉는 자세라고 해보자. 내장이 사선 방향으로 중력의 영향을 받아 본래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내장에 피로가 쌓여 기능이 저하된다. 내장 기능이 저하되면 노폐물이 쌓이기 쉽고 살찌기 쉬운 체질이 된다. (발은 편하지만 상반신이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77쪽

일반적으로 변비해소에는 식이섬유가 유명한데 이는 많이 섭취해도 변비의 원인이 될 수 있다.
-91쪽

바나나와 쌀 등 탄수화물을 잘 섭취하면 뇌에 유일하게 영양을 공급하는 당을 섭취할 수 있어 뇌의 호르몬 생성이 촉진되고 여성 호르몬 분비에 큰 역할을 한다. 행복한 기분, 긍정적인 마음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행복감을 느끼면 뇌에서 쾌락물질이 분비되어 체질개선과 호르몬 균형도 향상된다.
-96쪽

커피나 차는 이뇨작용이 매우 강해 몸의 수분을 빼앗습니다. 따라서 자주 마시지 마세요.
맛이 있는 음료수를 자주 마시면 미각이 둔해져 폭식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그래도 마시고 싶다면 바나나를 먹은 후 15~30분 후에 먹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다이어트 효과를 높이고 싶다면 역시 상온의 물이 가장 좋습니다.
-118쪽

쌀에는 비타민, 미네랄, 식이섬유가 함유되어 있는데 스팀 가열을 해도 효소가 파괴되지 않아 건강과 다이어트에 효과가 큽니다. 탄수화물은 가능하면 밥으로 먹고 다이어트 효과를 높이고 싶다면 탄수화물 따로, 고기와 생선을 따로 먹어보세요. 소화가 훨씬 잘 되고 체질 개선에도 도움이 됩니다.
-1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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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0-06-13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곡물을 먹으면 오전에 위가 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몸에 좋지 않다......
정말인가? 보통은 아침엔 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순오기 2010-06-14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은 바나나를 사와야겠네요.^^
12시 전에 잠들어야 하는데...나는 심야족, 다시 원형탈모가 와서 이젠 일찍 자려고요.ㅜㅜ

마노아 2010-06-14 10:28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한 시 넘어서 잤어요. 이거 고치기가 가장 힘들어요.ㅜ.ㅜ

pjy 2010-06-14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을 잘 자서 변을 잘 만들었던 1人
요새는 철분약땜에 소화도 잘 안되고, 변색도 맘에 안들고 ㅜ.ㅜ
나의 황금똥은 어디로 @@~~~

마노아 2010-06-14 10:29   좋아요 0 | URL
저도 요새 철분약 먹느라고 힘들어요. 그 약에 변비약도 포함되어 있어요.^^;;

카스피 2010-06-1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들은 바로 바나나는 다이어트보단 근육을 찌우는데 더 짱이라고 하던데요^^

마노아 2010-06-15 00:24   좋아요 0 | URL
지방이 근육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소년병, 평화의 길을 열다
사토 다다오 지음, 설배환 옮김, 한홍구 해제 / 검둥소 / 2007년 6월
품절


정작 일본 제국주의가 키워 낸 일본인 군국 소년들은 전쟁을 치르지 않게 되었지만, 조선인 군국 소년들은 남북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승패가 없는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은 이들 조선인 군국 소년들이 전쟁에 대해 돌아볼 기회를 주지 않았고, 이들은 이제 ‘군국 노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시청 앞에 군복을 입고 모여 끝나지 않은 전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군국 소년들이 만든 나라다. 그것도 일제가 남긴 군국주의의 잔재를 성찰하고 씻어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폭시킨 군국 소년들이 지키고, 이어받고, 다스린 나라다. 이들 군국 소년들의 사령관이 바로 박정희였다.
-8쪽

"일하며 싸우고, 싸우며 일하세."라는 다짐을 해야 했던 나라에 보통 노동자는 없었다. 산업 전사만 있을 뿐이었다. "때려잡자 김일성, 쳐부수자 북괴군, 무찌르자 공산당, 이룩하자 유신 과업!"을 높이 외치던 1970년대는 온 나라가 병영이었고 전선이었다. 평화란 적을 다 때려잡고 쳐부수고 무찌른 뒤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 전에 평화를 말하는 자는 간첩이거나 불순분자거나 이적 행위자일 뿐이었다.
대한민국은 늘 전쟁을 준비하는 나라였다. 출근도 전쟁이고, 입시도 전쟁이고, 생산도 전쟁이었다. 전쟁에 나서는 전사들은 찬양과 기념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큰 전쟁 기념관을 갖고 있다. 그러나 평화를 찾고 만지고 느끼고 호흡할 만한 기념 시설이나 평화 박물관은 변변한 것 하나 없다.
-10쪽

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이 땅에는 제주 4.3 사건을 필두로 엄청난 민간인 학살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민족에 의한 학살이 아닌 동족끼리의 학살……. 불행하게도 학살의 대부분은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학살이라 불리지 않았다. 토벌 작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한국군이 베트남에 갔고, 거기서도 ‘토벌’은 이루어졌다.

-11쪽

정말 한국이 가난한 나라였던 1960년대보다도 우리는 21세기에 실행한 이라크 파병에서 ‘국익’이란 말을 훨씬 더 많이 듣게 되었다. 많은 국민들이 이라크 전쟁이 정당한 전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국익을 위한 파병이란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소리에 이라크전쟁이 침략 전쟁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파병 반대의 소리를 내지 못했다면, 과연 우리가 20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을 비판할 수 있을까? 일본의 조선 점령과 대륙 진출은 분명 일본의 ‘국익’을 엄청나게 신장시키는 일이었다.

-12쪽

한국은 20세기의 전쟁에서 단순한 피해자만은 아니었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국이 치른 전쟁의 경험을 곱씹어 보면서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쟁을 원치 않는 다른 나라의 젊은이들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책이 한국의 소년병에 의해 쓰이지 않은 점은 몹시 아쉽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평화를 향해 가는 데 넘어야 할 산도 많고, 건너야 할 강도 많다. 늦었지만 이제 시작이다. (한홍구 해제)

-15쪽

어느 시대 어떠한 전쟁에서도 외국을 침략하는 나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욕심이 많아서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나라는 정당한 데 비해 상대편 나라는 올바른 자기 나라의 주장을 듣지도 않고 멋대로 지껄이며 반항하기 때문에 이를 벌하기 위해 공격하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30쪽

전쟁을 계속하면 할수록 소진되고 마는 상태에 일본군은 처한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도 딱 이와 같았다.
따라서 미국이 요구한 대로 중국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만 하면 일본도 그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때까지 "이겼다! 이겼다!"하고 일본군의 승전 소식을 일본 국민들에게 선전했는데, 실은 승리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백일하게 드러난다. 그러면 군인과 정치가들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것이다. 일본군 수뇌부와 정치가는 자신들의 실패를 국민 앞에 까발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실패를 책임질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36쪽

혁명이든 독립이든 결코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된다. 이웃 나라의 힘을 빌려서 이룬 혁명과 독립은 결국 그 나라로의 종속을 불러올 뿐 진정한 혁명과 독립을 일구어 내지 못한다. 또한 똑같은 것을 반대 입장에서 말하면 어떠한 나라의 혁명과 독립에 이웃 나라가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진심으로 어떤 나라의 혁명과 독립을 도우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가가 하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것은 대체로 그 나라를 자국의 종속 국가로 삼으려고 하는 움직임이 된다.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돕는 것은 언뜻 보아서는 아름다운 것 같다. 그러나 돕는다고 해도 진정으로 그 나라를 이롭게 하는 지원 방법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돕는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그 나라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가는 일이 많은 법이다.
-70쪽

외국에 많은 군대를 파견한 국가가 그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철수하게 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가 완전히 망가지게 되므로 군인들은 철수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정치가가 분명히 명령을 내려 철수시키려고만 하면 군인들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85쪽

군인은 정치가의 명령에 따른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에서는 정치가가 군인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 군인이 멋대로 일을 벌이려고 하면 정치가를 지지하는 국민이 잠자코 있지 않기 때문에 군인도 역시 정치가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을 침략하고 있던 무렵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았다. 국민이 정치가를 선출하고 정치가가 군인에게 명령하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고, 군인은 마음대로 행동하고 정치가는 그것을 제지하지 못하고 국민은 그러한 정치가나 군인을 그만두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군국주의가 되어 버렸다.
-88쪽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날 때 미국 국민에게 퇴임 연설을 했는데 "미국에는 지금 군산복합체가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해 있다. 이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주의해야만 한다."라고 했다.
군산복합체란 무엇인가? 현대처럼 군대라는 것이 아주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하게 되면 군산복합체는 어떻게 해서든 굴러가기 마련이다. 비행기, 군함, 미사일을 만드는 데에는 엄청난 돈, 기술, 공장, 노동자가 필요하다. 전쟁이 있을 때에만 군수 업체가 긴급하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평화로운 시기에도 정부로부터 무기 주문을 받고 그러한 무기를 제조한다.
-89쪽

무기를 만들어 돈을 버는 대기업 자본가들은 평화주의자들을 상행위의 적으로 여기고 싫어하기 때문에 평화주의자들을 억압해 줄 것 같은 정치가에게 벌어들인 돈을 지원하게 된다. 민주주의 사회는 정치가 국민의 의사로 움직이는 사회이지만, 국민의 의사라는 것은 하나의 선전으로만 이용되는 면도 크다. 그런데 그러한 정치 선전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텔레비전과 신문인데, 대기업을 움직이고 있는 자본가들은 그 경제력으로 텔레비전과 신문에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90쪽

무기 산업이 거대해지면 여러 가지 두려운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생산된 무기가 낡거나 재고가 생기면 후진국에 팔아넘기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후진국들은 나라 안에 곤란한 문제가 발생하면 국력에 맞지 않는 군사력으로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하거나 가까운 외국과 분쟁을 만들어 국민의 불만을 외국으로 돌리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무기를 자꾸자꾸 사들이면 소규모 교전으로 끝날 일이 대규모 전쟁으로 돌변하거나 군대에만 돈을 지출하게 되어 산업 발전에 지장을 주게 된다.

-91쪽

물론 작은 나라에서 발발한 전쟁을 서로 지원하더라도 미국과 소련이 직접 전쟁을 하지는 않았다. 직접 전쟁을 하면 양쪽 다 모조리 죽는 꼴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직접적으로 전쟁을 해야 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들에서 전쟁이 있을 때마다 미국과 소련은 서로 상대 국가를 비난해 왔다. 그리고 "이 이상 더 심한 짓을 하면 미사일로 원자폭탄을 투하하겠다!"하고 서로 으르렁거렸고, 그때마다 실제로는 ‘상대편에게서 미사일 공격을 받으면 큰일이야.’ ‘위협을 받더라도 그걸 이겨 내려면 저쪽보다 강한 무기를 보유해야만 해.’ 하면서 점점 더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122쪽

더 이상 앞으로는 식민지에서 이익을 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은 아주 최근 일이다. 2차 세계대전과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그것이 분명히 밝혀졌다. 지금부터 겨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아직 인류의 머릿속이 확 뒤바뀌었다고 할 수는 없다. 전쟁을 해서 득이 될 게 없다는 점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어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아직 남아 있다. 자기편이 먼저 공격할 의도는 없어도 상대편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나 상대국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보다도 강한 군대를 보유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강한 군대라는 것은 실제로 전투를 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강한 군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서로 상대가 어느 정도 강한가 하는 것은 실제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이만큼 강한 군대가 있으면 괜찮을 거야.’하고 거의 아슬아슬한 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군대에 돈을 쓰는 것이다.
-122쪽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의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경쟁시켜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사고방식이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도 모든 학생들을 경쟁시킨다. 결국 최근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전쟁도 그러한 경쟁의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전쟁을 하면 어느 쪽이 우수한 민족인가 알 수 있다. 승리한 쪽이 우수한 민족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한 민족이 패배한 민족을 지도하면 된다. 이리하여 과거부터 전쟁에 자신이 있는 민족은 "우리는 원래부터 뛰어난 민족이며 상대는 본래 열등한 민족이므로 열등한 상대를 지도하기 위해서 우선 상대 지도자를 쳐부수는 것이다."라고 했다.
-141쪽

어느 나라 종교에서든 신이라는 존재는 정의로운 자의 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신이라는 존재는 누구보다도 강하므로 신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면 당연히 승리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결국 정의로운 자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논리가 생긴다. 이 논리를 역으로 생각하면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정의롭다는 것이 된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전쟁은 승리하기만 하면 옳은 것이 된다.

-142쪽

사람은 가족끼리는 강자가 약자를 돕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데 비해, 학교에 가게 되면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학습에서 경쟁하게 되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어른이 된 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고 배운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145쪽

세상이 발달하고 식량도 충분히 얻을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조금씩 서로 돕는 일을 멈춘다. 모두가 일하고 모두가 먹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던 사회에서는 모두가 사이좋게 서로 도왔지만 농업과 목축이 발달하고 자신들이 먹을 만큼보다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면 인간은 노예를 부리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전쟁을 해서 이웃 나라에서 포로를 끌고 와 그 포로를 노예로 삼아 일을 시키면 노예는 자신들이 먹는 양보다 많은 식량을 생산해 낸다.
그래서 노예를 부리는 측은 식량을 생산하는 일을 그만두고 노예에게 일을 시키면서 자신들은 전쟁에 더욱 강해지기 위해 무기 제작과 전투 훈련을 하기 시작한다.
-150쪽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억압하며 거기에서 이익을 뽑아내면서 군대와 학교를 자꾸자꾸 정비해 가면 그 나라는 더욱더 강대해지고 현명한 사람도 늘어날 것이다. 이리하여 강하게 되고 현명해진 자는 자신이 누군가를 짓밟고서 그렇게 되었다는 점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인간에게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와 뒤떨어진 자의 차가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151쪽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되면 주변 국가들도 모두 공산주의를 채택하여 미국이 아시아에서 쫓겨날 것이라는 등 궁색한 변명을 댔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베트남은 전후 10여 년간 소련을 본보기로 삼아 전력을 다해 공산주의를 시행해 본 후, 소련식으로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제적으로 발달한 이웃 자유주의국가들에게 동반자로 삼아 달라는 제안을 하게 되었다. 미국이 그렇게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도 그러하다. 이 나라가 공산주의의 편에 서든 말든 소련에게 별달리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은 원래 가난한 산림 국가로,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할 수 있기는커녕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떻게 보면 성가신 존재였다. 더욱이 소련의 군대 파견은 아프가니스탄에 미국 세력이 들어오면 곤란하다고 우려했기 때문이지만,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해서 득 될 것이 없었다. 다만 소련과 국경이 맞닿아 있으므로 다소 소련을 위협할 수 있는 정도의 이득이 있었을 뿐이다.
-174쪽

대군을 보냈어도 아프가니스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지 못한 소련은 공산주의가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상으로 환영받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 군대에게 승리하고, 나치에 고통 받던 전 유럽 사람들을 구원했던 것이 소련과 소련군의 자랑이었는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소련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오히려 소련에 저항한 것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소련군은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 것인가?’하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결국 소련은 철수했다. 이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하지 못했던 것이다. 헛된 전쟁임을 깨닫고 스스로 철수한 점이야말로 훌륭하다.

-175쪽

다른 한편 미국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호된 꼴을 당했다. 미국은 무기를 원조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을 쫓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사라진 아프가니스탄에는 미국에게서 받은 무기로 철저히 무장한, 미국에게서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버림받은 탈리반 세력이 생겼다. 이들은 소련뿐만 아니라 미국의 말도 듣지 않았다.

-176쪽

인구가 지나치게 증가한다는 것은 전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인구가 자꾸 증가하는 데도 그 사람들이 모두 취직할 수 있을 만큼 인구 증가에 수반하여 공업이나 무역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사회주의 국가처럼 그것을 정치로 조절해 내지 못하면 실업자가 대량 발생하게 되고 그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일이 있다.

-190쪽

지금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인구가 이렇게 맹렬한 기세로 늘어가는 것에 대해 그것이 머지않아 심각한 기아 상태를 낳고 잘못하면 전쟁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 하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지금까지 전쟁을 일으켜 온 것은 주로 공업 선진국들이었지 가난한 나라들은 아니다. 따라서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상하게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해도 그 나라가 남아도는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다른 나라에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다만 가난한 나라들에서 실업자가 넘쳐 났을 때 그곳 사회가 불안해 혁명이 일어나 그 혁명을 이웃 나라들이 저지하려고 하거나 지원하려고 하여 국제적 분쟁이 일어나는 일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다. 그러한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웃 나라의 정치에는 어느 나라도 간섭하지 않는다는 국제적 규약을 분명히 마련해 두어야 한다.
-192쪽

전쟁터에서 잔혹한 짓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일상에서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위선일까?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보이는 온화한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물론 다소 싸움을 할 수도 있지만 인간의 본성이 본래 흉포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흉포해지는 것은 전쟁 때문에 자신과 동료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거나, 상대방은 나쁘기 때문에 혹독한 꼴을 당해도 싸다고 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에 휘말리거나, 폭력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칭찬을 받거나 신분이 올라가는 등 이득을 얻는 구조 속에 놓여 있는 경우이다.
-206쪽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인간은 두려워할 줄 모르게 되었다. 무서운 것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데서 길러지는, 살아가기 위해 중요한 또 하나의 본능을 없애 버리고 있는 것이다.

맨주먹으로 상대와 싸움을 벌이거나 상대를 죽이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런데 도구를 사용하면 자신은 고통을 겪지 않고도 상대를 참혹하게 만들 수 있다. 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마침내는 멀리서 단추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수천, 수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동물이 지니고 있는, 싸움을 멈추는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만큼을 인간은 이성으로 채워넣어야 한다. 인간이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동물보다 훌륭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성으로 다툼을 통제하고 나서야 비로소 동물과 같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2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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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통 한국사 2 - 고려의 성립부터 멸망까지 통통 한국사 시리즈 2
안길정 외 지음, 강화경 외 그림 / 휴이넘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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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귀족들은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았을까? 여러 묘지명에서 평균값을 구해 보면 자녀수는 보통 4명 정도였어. 부부간의 나이 차는 5년을 넘어서지 않아. 혼인한 나이가 알려진 왕들의 평균 혼인 나이는 18세 전후야. 그 가운데 왕건의 맏아들로 고려의 2대 왕이 된 혜종은 10세에 결혼했단다.
수백 개의 묘지명을 통해 고려 귀족의 평균 수명을 구해보면 39.7살 정도야. 즉 40살을 채 누리지 못하고 죽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었어. 국왕 34명의 평균 수명이 42.3세였으니, 최고의 의료 혜택을 누리고서도 일반 귀족보다 2년밖에 더 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160-1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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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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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6 2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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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3 15: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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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3 1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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