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
배용준 지음 / 시드페이퍼 / 2009년 9월
품절


천연잿물을 쓴 한지는 종이의 질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윤택도 질감도 매우 우수하다. 양잿물과 달리 천연잿물은 인체에 무해하다. 심지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어, 예전에는 사약을 내릴 때 천연잿물에 섞어 먹였다고 한다. 천연잿물을 내리기 위해서는 콩, 고추, 메밀, 볏짚, 목화태 등의 재료를 쓴다. 천연잿물로 만든 종이는 태웠을 때 하얀 재가 나오고, 약품으로 만든 종이는 까만 재가 남는다고 한다. -128쪽

이곳 암자의 해우소는 아직도 옛날식이다.
자칫 소홀하면 냄새나 관리가 엉망일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
정갈한 상태로 남아 있다. 아궁이에서 타고 남은 재를 뿌리면 냄새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희미하게 남아있던 불씨로 인해 종종 화재가 나곤 해서
그 대신에 그때그때 톱밥을 뿌려주는데, 효과는 같다.
이렇게 쌓인 것을 직접 퍼내 한쪽에서 말려 밭에다 뿌리면 최고의 퇴비가 된다.

특이한 것은 스님이 아닌 일반인용 해우소에서 나온 것은
별도로 구분해 그냥 버린다는 점이다.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인지 독소가 많고 영양이 없어
퇴비로 쓰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157쪽

오대산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상원사와 숱한 전설로 유명하다. 고려 때의 고승 나옹선사의 허름한 토굴은 아직도 스님들이 홀로 거하며 수행하는 곳으로 남아있고, 조선왕조 7대 임금 세조는 비극의 역사를 써내려간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오대산에서 수많은 불사로 만회하려고 했다. 세조는 경주 에밀레종과 더불어 국내에 두 개밖에 없는 신라 범종을 전국에 물색해 찾아낸 다음 이곳에 옮겨놓았다. -159쪽

사찰에는 휴식이 있다. 삶의 성찰이 있다. 자신을 채찍질해 나아가는 수행이 있다. 문화가 있고 전통이 있다. 차가 있고 음식이 있다. 건축이 있고 유물이 있으며, 무엇보다 이야기가 있다. 그것들이 그저 숨죽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살아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중동, 산사의 고요함 속의 움직임이다.-170쪽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지만, 예전에는 찻씨를 주머니에 넣어 시집가는 새색시 손에 쥐어주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부리가 유독 튼튼하고 처음 심겨진 곳에서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못하는 차나무처럼, 시집간 곳에 뿌리를 내리고 일부종사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꽤나 엄한 속내를 가진 전통이지만, 그보다 다감한 의미도 있었다. 찻씨는 한 구멍에 두 개를 넣어도 한 뿌리로 자라는 특성이 있는 것처럼, 부부는 어떤 순간에도 일심동체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186쪽

야생차밭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무성한 풀밭으로 오해하기 쉽다. 차나무는 잡초 등과 함께 자연스럽게 자라기 때문이다. 잡초와 경쟁하며 자란 찻잎의 자생력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벌레들은 6~7월경에 남아있는 뻣뻣한 묵은 찻잎을 먹지 않고 차나무 곁의 부드러운 잡초를 먹기 때문에 약을 칠 필요가 없다. -186쪽

벌레들은 야생찻잎보다는 잡초를 더 좋아한다. 하지만 화학비료를 주면 찻잎이 달아져 자연히 벌레들이 찻잎으로 몰리게 되니, 화학비료에 제초제, 농약까지 추가되는 셈이다. 그래서 야생차나 유기농 차의 가치가 높은 것이다. -186쪽

'작설'이란 명칭은 익제공이 송광사의 방장스님으로부터 찻잎을 받고 보낸 답시에서 처음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작설은 참새의 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작고 귀여운 참새의 부리 안에 자리 잡은 그 작고 작은 혀라니, 놀라운 상상력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녹차라는 말보다 작설차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작설'은 귀한 차를 뜻하는 말이었다.-186쪽

흔히 세계 3대 명차로 중국의 무이차, 인도의 다즐링, 스리랑카의 우바를 꼽는데, 이 차들의 공통점은 고산지대에서 자란 차라는 점이다. -194쪽

"자신의 키보다 뿌리를 깊게 내리는 나무는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한국 재래종 차나무는 뿌리가
제 키보다 세 배까지 자라
땅의 기운을 빨아들일 수 있는 심근성 식물입니다.
그래서 깊은 맛이 나는 것이지요."

(신광수 선생님)-195쪽

17세기 이전만 해도 세계 도자사에서 자기를 만들어 쓴 나라는 중국과 한국뿐이었다. 중국의 경우 이미 10세기 후반부터 청자를 만들었고, 한국은 11세기부터 독자적인 상감 기법으로 비색의 고려창자를 '강진 용운리 가마'와 '고창 용계지 가마'에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럽은 18세기부터, 일본은 '아리타 가마'에서 만드는 데 1616년 백자를 만들면서부터 자기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차이나'라는 발음이 중국인 동시에 도자기를 뜻하는 단어로 세계에 통용되고, 일본의 명품 도자기 브랜드 노리다케가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동안 한국의 도자 문화는 다수의 무관심 속에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203쪽

경주는 1500년 전에도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 경제 정치의 중심지였다. 일반가옥과 우물, 이를 둘러싼 담장과 골목길로 이뤄진 8천 평 규모의 구획을 방(坊)이라 불렀는데, 경주에는 360개의 방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전성기 때는 17만 8천 936호의 집이 있었다고 하니, 대략 계산해도 인구가 80만 명이 넘는다. 현재 한국에서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도시가 8개(서울, 수원, 인천, 대전, 광주, 울산, 대구, 부산) 밖에 되지 않는 걸 떠올려보면 실로 대단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관청이나 사찰, 시장 등의 시설을 국가 차원에서 설치하고 운영하기 마련이다. 시장은 주로 인파가 붐비는 사찰 부근에서 열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세금을 걷고, 혹시 저울 눈금을 속이지 않는지 감시하며, 다툼이 나면 이를 중재하기 위해 관원들이 상주했는데, 그 수가 30명이었다. 당시 중국 당나라의 장안성 시장 관원이 28명이었다니, 경주 시장의 규모가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다.-234쪽

오래된 도시를 방문할 때면 비어있는 아름다움이 가슴을 적신다. 칼날 같은 현대의 도시가 주는 긴장감에서 벗어나 느긋함과 편안함을 만끽한다. 지나치게 화려하고 거대한 건축물들, 욕망을 마음껏 표현한 건축물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오히려 그것에 짓눌리게 된다. 오히려 단순하고, 절제된 공간에서 비로소 사람은 주인공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건축미를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 거장 안도 다다오 선생의 작품에서 자주 느끼곤 한다. -234쪽

황룡사는 80미터가 넘는 동시대 동양에서 가장 큰 목탐이 있었던 만큼 8쳔800평에 달하는 그 거대한 규모 자체로 유명하다. 오늘날에도 재현이 쉽지 않을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 집약된 9층목탑은 전쟁에 의한 화재로 불탔을 당시 그 재가 하늘을 수십일 동안 덮었다고 한다.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 보다 4배나 큰 범종은 49만 7천 근(80톤)의 구리를 녹여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엄청난 양의 황금이 들어간 거대한 금동불상 등이 존재했다고 하니, 그 방대한 양의 재료를 어디서 구해 왔는지조차 궁금하다.-238쪽

한글은 우주 만물의 형상을 나타내는 철학적인 문자다. 한글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모음자 셋을 살펴보면 그 안에 천지인이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ㅣ'는 인간이며, 'ㅡ'는 땅이다. 그리고 '.'는 하늘이다. 한글에 대한 최초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는 '천지의 탄생은 본디 하나의 기운으로부터 생겨나며, 음양과 오행이 서로 돌고 돌아, 만물이 그 안에서 형체와 소리를 갖추었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한글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꼴을 본떠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자음자 또한 'ㄱ'에서 'ㅍ'까지 점, 선, 면의 변화를 묘사할 수 있는 모든 양상을 표현한다. 심지어 마지막 자음자인 'ㅎ'은 ㅏ, ㅡ,.의 집합체다. -262쪽

한 부호가 하나의 소리만을 대표하는 일자일음의 문자 체계는 한글이 유일하다. 그만큼 세밀하게 소리를 분석해 표기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제임스 맥콜리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글은 현존하는 문자체계 가운데 가장 독창적으로 창조된 것이며, 세계의 문자체계 속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문장을 단어로, 음절로, 그리고 음소로 분해하며 동시에 기본적으로는 음절문자의 형태를 유지하는 유일한 문자체계다. 한국인들이 1440년대에 이룬 업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그로부터 500여 년이나 지난 오늘날의 언어학적 수준에서 보아도, 그들이 당시에 수행한 일은 탁월한 것이다."
-262쪽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음(音)을 가진 글자인데, 한글의 총수는 무려 1만 2천 768자에 달한다고 한다. ‘바람 소리, 학 소리, 닭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 무엇이든 소리 나는 대로 글자로 쓸 수 있다’는 『훈민정음해례』의 호언장담이 꼭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한글은 창제당시인 15세기부터 일본어나 중국어, 만주어, 몽골어 등 외국어의 소리를 표기하는 발음기호로 사용되기도 했다. 쉽고 간결한 한글 덕분에 한국의 문맹률은 0%에 가깝다. 유네스코는 전 세계에서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 헌신하는 개인, 단체, 기관에 수여하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 문해상’이라고 명명해 부른다.
-262쪽

세종대왕은 경연을 3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대왕의 즉위 첫 마디가 당시 도승지 하연에게 말한 "우리 논의합시다"였다고 한다. 꼭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아도, 아니 오히려 반대하더라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이야말로 더 큰 것을 얻는 지름길일 것이다. 자신과의 대화, 세상과의 대화를 포기한 사람과 집단은 당연히 정체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서울의 기와나 대로가 지금처럼 전해지는 것도, 대화재를 극복하고 길을 넓히고 기와를 저렴하게 공급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재건한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즉위 초 밀어닥친 7년의 기근 및 서울의 대화재 사건 때 보여준 솔선수범은 그의 인품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대기근 당시 그는 몸소 왕의 침소를 등지고 초가 한 칸에 기거하며 채식 위주의 소박한 끼니를 이어갔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원래 육식을 좋아하고 잔병이 많았던 터라 신하들의 걱정이 컸다지만 대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명령하기보다 솔선함으로써 이끌고 나갔던 세종대왕의 리더십이다. 위기가 닥칠 때 스스로 몸을 낮춰 행동하는 지도자는 많지 않다.
-265쪽

세종대왕은 노비들의 출산휴가마저 3단계로 진행했다고 한다. 관청의 노비들에게 7일간 주던 ‘아이 돌보기’ 휴가를 100일로 늘이고,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해주고, 나중에는 남편 노비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
-267쪽

때론 잊고 지내던 세계에 눈을 돌려 제멋대로 상상을 풀어놓는 것은, 우리 삶을 보다 윤택하게 만든다. 신화도, 전설도, 다 그렇게 나고 자랐다.

산업혁명 이후 과학이 우리를 전지(全知)하게 하고, 기술이 우리를 전능(全能)하게 할 거라는 믿음이 팽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류의 삶이 오랫동안 별반 나아간 것은 없는 것 같다. 때때로 어떤 결과를 얻는 것보다도 과정 자체가 더 즐거울 때가 있다. 살림살이가 늘어갈 때, 우정이나 사랑이 커나갈 때, 아이가 커나갈 때, 일이 잘 진행될 때. 이렇듯 아는 것도 알아나갈 때가 재미있다. 안다는 것, 그것은 ‘미지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뜻도 된다. ‘알 수 없는 것’, '미지의 것’을 마음에 품고 살 때 그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유익한가를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순수하고 겸손하게 한다. 그리고 노력하게 하며 반짝이게 한다. 배움의 열의를 갖게 한다. 너무 많으면 바보가 되고, 너무 적으면 교만하게 만들지만 적당히 가지면 유익한 것이 바로 그 미지의 것이다.
-280쪽

윷놀이는 고조선 때부터 전해진 아주 오래된 놀이다. 그런데 윷놀이 할 때 윷말을 옮기는 윷판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한 사신의 별들을 나열한 것이라고 한다. 윷놀이는 윷말이 마지막으로 남쪽에 있는 곳을 통과하면 끝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곳은 남두육성이 자리한 곳이다. 북두칠성은 사후 천상세계를 담당하는 역할을, 남두육성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주관하는 역할을 한다. 사람들의 무병장수를 관장하는 남두에 이르러 비로소 그것을 얻는다는 상징적인 취지가 윷놀이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놀이를 통해 지식을 전승하던 한국적 전통으로 미루어 보아 가능한 일인 것도 같다.

윷판은 현재 네모난 형태지만 옛날에는 둥근 원형이었다. 별들이 하늘을 한바퀴 도는 천체의 운행 원리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윷판 안에 찍혀있는 점은 모두 29개인데, 그 중 가운뎃점이 북극성에 해당하고 나머지 28개의 점이 이를 중심으로 도는 하늘의 28수 별자리다. 옛사람들은 이를 놀이화해서 하늘의 법도를 인간의 삶에 투영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287쪽

"난 가야 문화에 왜 이렇게 마음이 가지? 가야 사람이었나 봐."
동료 중 한 명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진지하게 대꾸한다.
"아니에요. 형은 고구려 사람인데 가야국을 침략했다가
가야국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한 걸 거예요."
그런가….
-313쪽

한국 전통주는 불행히도 그 맥이 약 90년간 끊겼다. 1907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령이 발령된 이래 수백 종에 달하는 한국 전통주가 사라져갔다. 1916년엔 밀주 단속강화로 모든 주류가 약주(청주), 탁주(막걸리), 소주로 획일화되었고, 1917년부터는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각 고을마다 주류제조업자를 새롭게 배정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주세법>에 의한 밀주금지령은 약 48년간 시행되었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의 식량난과 1965년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쌀을 주로 사용하는 전통주의 단절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는 가양주 비법이 여인들의 구전과 경험에 의존하여 기록과 보존에 소홀했던 탓도 있었다.
-326쪽

한옥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을 집 안으로 품어 끌어안은 환경친화적인 건축물이다. 난방을 위한 구들과 냉방을 위한 마루가 상호보완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한옥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구들과 마루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한반도에서 더위와 추위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었던 독특한 주거양식이다.

온돌은 옥스퍼드 사전에도 고유어 ‘Ondol'로 등재될 만큼 그 독창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지리산 칠불암에 있는 아자방(亞字房)이라는 큰방은 한국에서도 최고의 구들방으로 손꼽힌다. 문헌에 따르면 불 지피는데 일주일이 걸리고, 무려 세 무더기의 장작을 때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불이 한번 붙으면 약 40일간 온기가 가시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고구려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온돌은 무공해와 에너지 절약이라는 측면에서도 몹시 획기적인 발명품이다.
-353쪽

꽤나 아이러니한 정의지만, 한옥은 자연친화적일 뿐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한칸(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의 기준치수를 얼마로 정하느냐에 따라 모든 구조의 치수가 완벽하게 계산되는데, 기준치수는 거주하는 이의 신체 사이즈에 맞춘다. 집에서 살 사람의 키가 작으면 천장이나 건물 전체의 크기도 다소 작아지고, 반대의 경우 집 크기도 조금씩 커진다. 그러니 이보다 인간중심적인 디자인은 동서고금의 건축사를 모두 살펴봐도 다시 없을 게 분명하다.
-358쪽

한옥이 쉬는 숨은 이런 것이다. 집 안에 습기가 차면 나무와 흙이 숨을 들이마시고, 건조하면 내뿜는다. 문풍지를 통해 들어온 가느다란 바람은 온 방 안을 돌아다닌다. 공기를 순환시키고 습도를 조절하며 바깥 소식을 들고와 놓고 나가는 바람이다.

한옥의 움직임이란 또 이런 것이다. 집에 이상이 생기면 나무의 뒤틀림으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난다. 집이 갑자기 폭삭 무너지는 법은 없다. 그전에 미리 알려준다. 뚜닥뚜닥 장도리질 몇 번에 건강을 회복했다가, 또 나이 들어 쑤시고 아프면 하소연을 한다. 같이 자라고 함께 늙어가는 생명체에 가까운 집이다. 노크 대신 인기척을 전달하는 발밑의 삐걱거림 또한 은근한 아름다움이 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낡고 헌 집이 아니라 이야기가 더욱 풍부해지는 따뜻한 집이 된다.
-362쪽

한옥은 가격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집은 오래가야 한다. 강산이 수십 번 바뀌어도 대대로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한국의 적송은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다. 그런 나무들로 지은 한옥들이 오랜 세월을 버텨 지금까지도 우리 앞에 꿋꿋이 서 있는 것이다. 튼튼한 한옥을 지을 수 있는 것은 소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에 방문했던 미륵사지는 몇 년 전부터 복원이 결정된 곳이다. 하지만 숭례문이 불타자 미리 준비했던 목재들 전량이 그쪽으로 우선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미륵사지 뿐 아니라 복원을 계획 중이던 많은 유적지들은 소나무가 원활히 공급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콘크리트 건물은 100년을 가기도 힘들다고 한다. 열 번을 다시 지을 비용으로 제대로 한 번 짓는 것이 낫다는 생각은 억지일까.

모던한 건물은 내가 먼저 다가가 설득하고 이야기해야 할 차가운 거래 상대처럼 여겨지는 반면, 전통적인 건물은 내게 다가와 나를 설득하고 이야기를 거는 것 같은 다정함이 느껴진다.
-3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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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하늘 2010-06-03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용준이 썼다해서 요 책 많이 궁금했는데...

마노아 2010-06-04 12:29   좋아요 0 | URL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었어요. 천천히 보기 좋은 책이에요.^^

2010-06-04 2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4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5 0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05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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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살에 이미 당신은 그 어떤 어른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대부가 바보 취급했던 담임선생도, 당신을 인질로 잡은 셈이었던 부모도, 어느 날 대부의 집으로 찾아와 유대인에 대해 독설을 퍼붓던 목사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신이 목사에게 "하지만 예수님도 유대인이었어요!"라고 하자 목사가 이렇게 대꾸했다지요. "얘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란다."-20쪽

어른들의 세계에 당신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당신은 강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당신의 세계 전체가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상태였으니까요. 난 항상 당신의 힘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 밑에 숨은 당신의 연약함도 느끼곤 했습니다. 당신이 극복해낸 그 연약함을 난 사랑했고, 당신의 연약한 힘에 놀라곤 했습니다. 우리는 둘 다 불안과 갈등의 자식이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서로가 서로에게 힘입어, 이 세상에서 있을 자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없던 자리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우리의 사랑이 사랑일 뿐만 아니라 일생 불변하는 계약이 되어야 했습니다.-20-21쪽

나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신뢰는 내게 위안은 될망정 안심은 되지 못했습니다.-42쪽

당신은 베케트, 사로트, 뷔토르, 칼비노, 파베제를 읽었습니다.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강의도 들었어요. 독일어를 배우고 싶어해서 필요한 책을 사기도 했지요. 나는 말렸습니다. "나는 당신이 독일어를 한마디라도 배우는 게 싫소. 난 다시는 독일어를 하지 않을 거요." 당신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의 이런 태도를 이해해주었습니다.-50쪽

직관도 감동도 없다면 지성도 없고 의미도 없음을 당신은 인지과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알았던 것입니다. 당신의 판단은 전달될 수 있지만 증명해 보일 수는 없는, 그러나 당신이 몸소 겪어 얻은 확신의 토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의 권위-그것을 '윤리'라고 합시다-는 논쟁할 필요도 없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반면 이론적 판단의 권위는 논쟁으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무너지고 맙니다. "왜 당신은 항상 옳은 거지"라는 내 말에 다른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내 판단이 필요하기보다는, 내게 당신의 판단이 더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죠.-53쪽

당신은 '다른 세상'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한 번 가면 아무도 못 돌아오는 나라에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낭만적 영어로 하면 이렇게 요약되지요.

There is no wealth but life.
"삶이 없는 한 풍요도 없다." 존 러스킨이 한 말.-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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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1 - 아프리카.중동.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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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 세계의 난민은 2천 7백만명.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전쟁은 있을 것이고 전쟁이 있는 한 난민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여자와 어린아이, 그들이 난민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억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73쪽

부하라 구시가지는 무려 140개나 되는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구시가지는 사방 걸어서 30분 정도니까 넓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옛날 대상들이 묵었던 여관들, 수십개의 아름다운 회교사원들, 마드라세라는 회교 신학교들, 궁전, 역사적 인물들의 간결하면서도 품위있는 묘지들이 있고 실크로드 대상들의 가장 반가운 길잡이였던 탑이 있다. 높이가 47미터나 되는 이 탑은 수백년간 세상에서 제일 높은 탑이었다고 한다.
이 탑은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온 도시가 초토가 될 때도 무사히 남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칭기즈칸이 이 탑 앞을 지나갈 때 바람에 모자가 벗겨져서 그 모자를 주우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칭기즈칸도 고개를 숙인 이 탑은 부술 수 없다며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87쪽

기원 전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왔을 때 이곳은 이미 육중한 성벽에 둘러싸인 실크로드상의 전설적인 오아시스 마을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여기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사마르칸트에 대해 들었던 그 믿을 수 없이 화려한 소문은 한가지만 빼고는 모두 사실이다. 그 한가지란 이곳이 소문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렇게 화려하고 번창했던 도시를 1220년 칭기즈칸이 지나가며 몽땅 파괴해버렸다. 그 후 티무르왕이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의 손자 때까지 80년간 모든 것을 총동원해 지금의 아름다운 도시로 복구했다.-89쪽

인류 역사상 찬란한 꽃을 피웠던 수많은 문명이 터키를 거쳐가며 전 국토에 그 흔적을 뚜렷이 남겨놓았다.
그리스 로마 문명이 시작되기 전인 기원전 2,000년에서 1,200년 사이에는 앙카라를 중심으로 발달했던 히타이트 문명이 그 찬란했던 영화의 파편들을 흩뿌려놓았고, 에페소스 등에는 그리스 로마문명의 자취가 선명하게 남아있으며 이스탄불에는 옛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천년간 번창했던 비잔틴 문화의 유적들이 세월의 흔적없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남서부 지대에는 초기 기독교 교회의 흔적이 흩어져있고 동부 에르줄름 등에는 서기 600년경에 번성했던 셀주크 터키의 화려한 명성이, 이스탄불에는 그 뒤를 이은 막강한 오스만 터키가 제국의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다.-106쪽

"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정성스러운 게 천성이자 직업이지만 내가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하려고 해요. 친절도 도가 넘치면 버겁고 부담이 되는 건 물론, 하고 나서도 내가 이만큼 해주었는데 하는 마음이 생겨 어떤 형태로든 반대급부를 기대하게 된단 말예요. 망국적인 한국병 '섭섭증'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지요." -앙카라 주재 한국 대사관 무관부인 오정희 씨-130쪽

윌드 비스트는 냄새는 잘 맡지만 멀리 볼 수 없고 얼룩말은 멀리 보는 눈은 있으나 냄새를 잘 맡지 못해 사자나 치타같은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공생하는 것이란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살아남기 위한 지혜는 대단하다.-141쪽

(킬리만자로 산자락의 차가족)
여기서는 미혼모가 그리 흉이 되지 않으며 시집을 가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단다. 미혼모는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다는 증명이 되므로 오히려 더 환영받는다고 한다. -147쪽

마사이 족의 주거지는 한 가족이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형태다. 마을과 마을은 적어도 걸어서 한시간 이상 걸릴 정도로 뚝 떨어져 있다. 가족은 축사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집을 지은 '보마' 라는 곳에서 사는데 중앙에 소와 염소, 양들의 축사가 있고 그 둘레에 4,5명의 부인이 각각 집을 한 채씩 짓고 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이 집을 짓는 일도 여자들 몫이라는 거다. 부인들끼리 힘을 합쳐 집 한 채 짓는데 보통 두 달 정도 걸린단다. 보마를 방문하자면 첫부인 집부터 시작해서 둘째, 셋째, 넷째 부인 집을 차례로 방문해서 가는 곳마다 내놓는 생우유나 끓인 우유에 설탕과 차잎을 섞은 전통차를 마셔야 한다. -204쪽

"마사이 족은 점심은 아예 안먹고 우유가 아침 식사이자 저녁식사예요. 아니, 그런 줄 몰랐어요?"
조슈아가 오히려 더 놀란다. 세상에, 사람이 어떻게 곡기는 하나도 집어넣지 않고 밤낮 우유만 먹고 살 수 있담.
그런데 정말로 마사이 족들은 특별한 날은 가끔씩 가축을 잡아 고기도 먹지만 평소에는 우유만 먹고 산다. 우유는 완전식품이라더니 우유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걸 생활로 증명하고 있다. 우유에서 모자라는 특정한 비타민을 공급하기 위해선지 들판에서 나는 약초와 야생열매를 약간 따먹는단다.
또 하나 마사이들이 먹는 것은 소 피다. 이들은 살아있는 소에서 마치 맥주배럴에서 필요할 때만 생맥주를 따라 마시고 꼭지를 잠가놓듯이 피를 뽑아 마신다.-208쪽

마사이 사람들은 치아가 하얗고 튼튼해 늙어 죽을 때까지 모두 자기 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것 뿐인가. 마사이 족은 대부분 작대기처럼 길고도 가는 다리에 호리호리한 몸매인데도 아주 단단해서 교통사고가 나면 차는 다 찌그러져도 그 차에 타고 있던 마사이 족의 뼈는 안 부러진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식인 우유 덕분이라고 믿고 있는데 얼마간은 과학적 근거도 있는 것 같다.-209쪽

노르웨이 인구가 고작 4백만~5백만인데 입양간 한국인 아이들이 6천명 정도나 되니 노르웨이에서는 적지 않은소수민족 집단이란다.-219쪽

에티오피아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나라다. 우선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유일하게 수천년 역사에 한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는 긍지를 가지고 있다. 이차대전 중에 이탈리아에 강점당한 적이 있으나 그 때도 강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쟁 중이었다고 이 나라 사람들은 말한다.

시바의 여왕과 이스라엘 솔로몬 왕 사이에서 태어난 메넬릭 1세가 에티오피아 북쪽 악숨에 정착하여 이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 1974년 셀라시에 왕이 하야할 때까지 한 왕조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왕조의 멸망 후 무시무시한 군부 공산정권 때문에 나라가 피폐했다가 1991년 악명 높은 독재자 멩기스투가 짐바브웨로 도망간 후 드디어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 근대화의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232쪽

에티오피아 여행은 모든 게 생소하다. 우선 하루도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이며 그 시작은 우리의 아침 6시. 이들이 0시라고 하면 그것은 아침 6시를 말하는 거다. 처음에 잘 몰라서 여러번 버스를 놓쳤다. 달력도 국제적인 그레고리안 달력을 쓰는 게 아니라 줄리어스 시저 때부터 써 온 줄리안 달력을 쓰고 있어서 1년이 13개월에 한 달은 30일, 그리고 맨 마지막 달은 5일이나 6일로 되어 있다.
서양력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했으나 그 탄생 연도를 달리 잡고 있어서 연도도 다르다. 예를 들면 이 글을 쓰고 있는 1996년 6월 5일이 에티오피아 달력으로는 1988년 9월 13일이다. -233쪽

'악'하고 '숨'이 막힌다고 해서 '악숨'인가. 악숨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운 경치 때문에 '악' 소리가 나오고 스릴 만점의 길 때문에 숨이 막힌다.

악숨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도시이자 성지다. 전설 속의 시바 여왕 무덤이있고 솔로몬과 시바의 아들인 메넬릭 1세가 이스라엘에서 직접 가져왔다는 모세의 성궤가 여기 교회에 모셔져 있다. 또 이곳이 1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중동 일대를 지배하면서 홍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을 장악했던 빛나는 악숨제국의 수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찬란하던 옛날의 영화는 찾을 길 없고 에리트리아와의 30년 전쟁을 치른 후유증만 심하게 앓고 있었다.-266쪽

대통령이 손수 운전을 하며 캐주얼 차림으로 거리 축제에 나와 격의없이 시민들과 신나게 춤을 추는가 하면 유창한 영어 실력과 외교술을 갖춰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대단하단다.
그 날도 직접 차를 몰고와서 연설을 시작하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민박집 식구들에게도 대통령에 대해 물어보니 '정말 좋은 사람이고 우리들의 자랑'이라고 입에 침이 마른다. 이 인기 만점 대통령이 끝까지 국민들의 기대와 사랑을 저버리지 않고 명예로운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에리트리아)-271쪽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있던 아랍연맹이 독립전쟁을 일으키자 영국이 응원군을 보냈다. 이 때 영국군의 로렌스 장군이 아랍군대를 이끌고 터키와 맞서 싸우던 곳이 바로 이 와디룸이란다. 사막 유목민으로 이루어진 아랍 베두인 군대는 사막전에 강하고 여기 와디룸은 물도 많을 뿐 아니라 바위산들이 많아 게릴라전을 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설적인 인물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불같은 신념과 와디룸의 지형적 이점을 바탕으로 결국 전쟁에 이기고 아랍의 독립을 이끌어냈다.-299쪽

화려한 명성을 자랑하는 페트라는 로마시대 이전부터 요르단 지역을 지배하던 아랍족, 나바티안족의 수도였는데 이 왕국의 전성기에는 다마스쿠스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향료, 비단, 노예의 전 무역로를 장악하여 엄청난 부를 누렸던 곳이다.
아름다운 건축물이 수없이 많던 도시가 4세기 무렵 큰 지진으로 땅속에 묻혀 천년 이상 잊혀져 있다가 1812년 스위스 탐험가에 의해 발굴되기 시작해 1958년에야 전체 모습이 드러났다.
페트라는 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맨 처음 요르단으로 입국한 곳이기도 하다. 이 페트라 안에 와디무사라는 곳에는 모세의 샘이 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이 나오게 했다는 바로 그 샘으로 지금까지도 이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식수원이 되고 있다.-300쪽

기원 전 10세기경 다윗이 예루살렘을 유대인의 수도로 정하고 그 아들 솔로몬이 화려한 신전을 지었다. 이것이 기원후 70년 로마군에 의해 파괴돼 지금은 그 북쪽 벽만 남아 유명한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으로 유대교의 성지가 되고 있다.
기독교 쪽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예수가 당나귀를 타고 입성해서 십자가를 지고 길을 걸어 골고다 언덕에서 처형된 기독교의 성지지만 회교 쪽에서 보면 또 그들의 가장 중요한 성지다.
모하메드가 천사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하룻밤에 메카에서 날아와 모든 예언자들을 만나고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성지 엘 아크 사원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307쪽

회교도들이 믿는 알라신은 유대교나 기독교에서 믿는 유일신인 하나님과 같은 신이다. 회교의 코란에 나오는 아담부터 모하메드까지 28명 선지자 가운데 21명은 성경과 똑같은 선지자다.
유대교는 '토라'라는 구약을 성전으로 삼으며 기독교는 이 구약에 신약을 더하여 성전을 삼고 회교는 이 구약에다가 마지막 예언자 모하메드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썼다는 코란을 성전으로 삼는다. 그러니까 세 종교 모두 구약으로부터 출발한 셈이다.-308쪽

베두인은 이집트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사막에서 양이나 염소, 낙타들을 키우며 사는 유목민의 총칭. 정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에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며 명예와 체면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310쪽

팔미라에서는 제노비아라는 꺽달진 여왕의 이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와 아랍 피가 반반 섞인 혼혈로 클레오파트라 뺨치는 미인이었던 제노비아는 야망 때문에 왕인 남편을 죽이고 스스로 여왕이 되어 로마를 공격하다가 패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기울기 시작한 팔미라는 후에 모슬렘 손에 들어갔다가 1089년 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만다. 현재의 팔미라는 최근에 발굴, 재건한 것이다.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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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8 제너시스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7
버나드 베켓 지음, 김현우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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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계가 아니야. 기계가 어떻게 아침의 풀잎 냄새와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겠어? 나는 내 피부에 쏟아지는 따뜻한 햇살의 느낌이고, 나를 덮치는 차가운 파도의 감각이야. 나는 절대 가 본 적 없지만 눈을 감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소이고, 다른 이의 숨결과 그녀의 머리카락색이야.-132쪽

너는 인간의 수명이 짧다고 비웃었지만, 바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에 생명을 불어주는 거야. 나는 사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상가지. 내가 호기심이고 이성이고 사랑이고 증오인 거야. 나는 무관심이기도 하고, 한 아버지의 아들이고, 그 아버지는 또 누군가의 아들이지. 나는 우리 어머니가 웃는 이유이고 또한 그분이 우는 이유기도 해. 나는 궁금함이고, 또 그 자체로 궁금함을 낳기도 하지. 그래, 세상이 네 버튼을 누르고 네 회로를 훑고 지나갈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이 나를 훑고 지나갈 수는 없어. 세상은 내 안에 머무르는 거야. 내가 세상 안에 있고, 세상도 내 안에 있는 거라고. 나를 통해 우주가 스스로 알아가고, 그 어떤 기계도 나를 만들어낼 수 없어. 내가 바로 의미야.-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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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산주의자다 2
허영철 원작, 박건웅 만화 / 보리 / 2010년 5월
품절


학습을 하는 데 중요한 것이 ‘호조반’이었어요. 수준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짝을 지어 서로 돕는 것인데 좋은 성적을 내면 돕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 칭송받았지요. 그리하여 모두가 최우등이나 우등이 될 수 있었어요. 자신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랐어요.
-134쪽

모택동 주석이 처음 농민군을 조직할 때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 것은 수준 높은 이론이나 교양 같은 게 아니었어요. 그보단 실제적인 행동 수칙, 이를테면 인민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마라, 바늘 하나라도 빌리면 갚아라, 대소변은 장소를 가려서 보아라, 같은 것이었지요. 그런 일상적인 것들이 훨씬 더 사람들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래서 짧은 시간에 모택동을 지지하는 홍군들이 엄청나게 모였던 것이지요. 조선에 와서도 마찬가지였지요.

-161쪽

-지도부가 권력을 누리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맞는 존중을 받을 뿐이라구요? 가능한가요?
-역사를 보면 권력을 가진 자가 그 힘을 누리지 않고 그저 자신의 역할만 충실히 수행한다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지도부가 권위를 가지기는 해요. 하지만 이론과 실천에서 모범이 될때 주어지는 것. 제대로 인민을 위하지 못한다면 절대 권위를 가질 수 없는 겁니다. 남쪽처럼 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지위가 절대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정책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일은 당원들이 맡아요.
-그렇다면 정책 결정과 집행이 결국 당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당에서는 어떤 문제든 반드시 회의를 거치지요. 처음에는 이런 문화들이 정착되는 시기였으니까 회의를 참 많이 했어요. 여기서는 북한이 무조건 독재를 한다고만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북조선은 상당히 민주적인 편이죠. 전쟁때도 해마다 당 대회를 열어서 중요한 문제를 토의하고 그랬거든요. 공개회의 같은 것을 열어 충분히 정책을 알려주니까 인민도 정책과 법령의 내용을 다 알고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178쪽

-사람들은 자꾸만 남조선은 민주주의 국가고 북조선은 독재 국가라는 식으로 말을 해요. 그런데 자본주의 국가에서 민주주의란 부르주아 독재를 말하는 것이거든요.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구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가 서로 반대되는 뜻이 아니예요.
-다 같은 민주주의지만 자본주의는 부르주아 독재를,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민주주의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냐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그런 점에서 볼 때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북조선에서 이뤄진 것 같아요. 예, 맞아요. 나는 이미 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184쪽

-그래서 여전히 저쪽의 민주주의를 더 신뢰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이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바로 저쪽에서 그렇게 했거든요.
-마지막 말씀, 한 번만 더 해주시겠어요? 어쩌면 그것은 선생님의 이상향일 뿐만 아니라, 힘 없고 가난한 백성이,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역사의 주체인 백성이 정치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가장 근본 생각이 아닐까 싶으니까요.
-백성을 하늘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거 그거 말인가요? 그렇다면 그건, 내가 북에서 다 경험한 것입니다.
-185쪽

-전에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기억나요. "남파 ‘간첩’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간첩은 적국에서 활동하는 첩자를 말하는 것이지만 우리에게 남조선은 적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파 ‘공작원’이라고 해야 옳다."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시겠지요?
-예, 간첩이란 국가 기밀을 빼돌리는 사람인데 우리는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것이니까요. 정전협정이 조인되고도 미국 때문에 통일 문제는 한 번도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어요. 국제회의에서 여러 번 정당한 남북통일 방안들을 제기했지만, 남쪽에서는 보도도 안 되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래서 남쪽에 알릴 필요가 있어서 내려왔지요. 그게 1954년이었어요.
-259쪽

세계의 주인은 인간입니다. 인간의 주인은 자신이고요. 그러므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가 주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자가 혁명을 하는 것도 다 주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그러므로 주체사상의 가장 기본은 내가 나의 주인이라는 ‘자주성’, 그러기 위해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창조성’, 거기에 주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의식이라는 ‘의식성’ 이렇게 세 가지를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공화국이 처한 현실에서 나온 겁니다.
-268쪽

-남에서 주체사상이란, 객관적으로 연구되기보다 이데올로기 힘 겨루기 과정에서 왜곡되고, 과장되고, 폄하되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최근에는 주체사상 논쟁 자체가 허구라는 시각도 있고요. 왜냐하면 결국 주체사상이란 북한 체제의 역사적인 형성물이자 체제 정당화의 이데올로기인데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논리를 정당화할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건 허구라기보다는 회의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모든 사상이 역사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잖아요. 주체사상을 흔히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도 다 구체적인 우리 나라 역사 상황에서 나왔기 때문이에요. 사상이란 게 본디 실제 역사에서 만들어지고 보편화되는 것인데, 어떻게 그걸 떼놓고 말할 수 있겠어요.
혁명이란 과거의 제도를 바꾸는 거예요. 왕이 하는 일을 ‘天命’이라고 했어요. 천명은 사람이 고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람이 고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革命’이에요. 여기서 ‘革’은 사람의 손질이 가해진 가죽을 뜻해요. 자연 그대로의 가죽인 ‘皮’와는 다르지요. 곧 천명을 손질할 수 있다, 천명을 바꿀 수 있다, 그것이 바로 혁명인 것입니다.-269쪽

한 가지 짚을 것은 자본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다르다는 겁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혁명을 이뤘지만, 그 혁명은 거기에서 멈춘 채 권력을 교체하는 것에서 끝났어요. 자본주의가 자랑하는 삼권분립이라는 것도 봉건 군주들, 승려들,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야합한 결과물일 뿐입니다. 의회는 신생 부르주아지들이 차지하고, 행정은 봉건 군주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차지하고, 사법은 승려의 몫이 되고 말았어요.

민중은 혁명에 동참했지만, 열매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혁명이 일어났다고 해도 결국에는 상층부만 교체된 것에 불과하니까요.
-270쪽

사회주의 혁명은 권력을 쟁취한 다음에 비로소 새로운 생산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니까요. 사유재산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대체 상상도 할 수 없는 제도 아닙니까? 바로 거기에서 새로운 체제를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정권을 빼앗아서 그것을 국유화한다는 것은, 권력을 쟁취함으로써 모든 것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때서야 비로소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사회주의 혁명도 권력을 쟁취한 뒤에 이루어졌지만 그렇다고 하나의 사회가 완성됐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인간 의식을 바꾸면서 좀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사회로 전진해야 하죠. 더 높은 수준의 사회는 있을망정, 완성된 사회는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271쪽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좀 더 높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그 점에서 나는 ‘인간의 의식 개조’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사유제도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의식을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언제나 인간의 정신이에요. 미국이 쿠바같이 작은 나라도 어쩌지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 것을 보아요. 50년 동안이나 온갖 모략과 압박을 가하면서 북조선을 없애려고 하지만 북조선은 여전히 건재하잖아요.
-그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으시는군요.
-예, 그 사회의 인민들이 당과 수령, 곧 지도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못 없애는 거지요. 북이 아무리 독재 사회라지만, 인민들의 저항이 거세다면 저렇게 유지될 수가 없지요. 남에서도 박정희 독재를 겪지 않았나요? 그때 학생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항거했습니다. 북이 미국에 대해서 아직도 저렇게 당당한 것은 그 사회가 독재체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옳기 때문에, 옳다는 것이 북의 인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272쪽

-그러니까 선생님 사상의 핵심은 바로 ‘사람’이군요. 노동력의 핵심, 역사의 주체, 그러나 완전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의식 개조를 해야 하는 존재. 그것을 이른바 ‘민중’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요? 전에 선생님이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한다고 한 바로 그 ‘백성’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도 되는 거지요?
-허허. 그렇게 보아도 되겠지요. 진정한 혁명이란 바로 백성, 사람, 민중에게서 시작된다고 나는 믿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바탕이라고 생각해요.
-273쪽

-지금껏 선생님의 수감 생활을 듣다 보니 두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그 안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낭만도 웃음도 모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 또 하나는 그 안에서도 "역사는 흐른다"는 거예요.
-327쪽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가족들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어요. 근본적으로 내 탓이 아니라 세상이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이라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나는 역사의 정당한 편에 섰던 것 뿐이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어 버렸다, 그것을 어찌할 것인가? 내 신념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는데 말이지요. 사람들은 나에게 물어요. 여전히 사회주의가 좋으냐고. 그럼 나는 대답하지요. 그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고. 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반드시 새로운 사회가 오는데 어떤 사회가 올 것인지를 모를 뿐이지요. 그것은 우리가 창조해 가는 과정이에요. 공산주의 사회가 좋다고 단번에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돼요. 그리고 그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지요.
-332쪽

우리는 먼저 현실을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가 분명히 있고, 또 그곳으로 가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러려면 많은 장애들을 겪어야 하지요. 그 장애를 제거하는데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혹은 1세기가 걸릴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요. 그러므로 모든 것은 현실을 살아가면서 극복해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더 높은 사회를 향하는 꿈을 잃지만 않으면 되요. 이런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면서도 얼마든지 미래를 지향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지요.
-334쪽

모든 역사의 발전 과정에는 특수한 계기가 있어요. 좀 더 높은 사회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더 많은 준비를 해야 할 것이구요. 나는 그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그 과정을 만들면서 바꾸고 나아가는 사람……. 나는 그렇게 살아 있어요. 하하하.
-336쪽

선생님은 오래된 기억들도 마치 앨범을 넘기듯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십 년 전 일도 희미한데, 사람 이름이나 지명까지도 정확히 기억해 내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선생님은 항상 사람을 먼저 떠올리고 그 뒤에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기억의 힘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박건웅)
-345쪽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세상을 다양하게 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우리와 다르게 살아온 한 사람을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자체로 인정하고 역사의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 땅이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서로 다른 생각들이 공존하며 자유롭게 사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말이지요.(박건웅)
-3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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