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냇물에 책이 있다 - 사물, 여행, 예술의 경계를 거니는 산문
안치운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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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삶의 안과 바깥에서 부당한 권력을 행사하는 야만이며, 파괴를 성장이라고 말하는 야만의 기교일 터이다. 폭력을 정의구현이라고 우겨 말했던 과거와, 파괴를 녹색성장이라고 양심 없이 내세우는 현재는 하등 다르지 않다. -11쪽

집 안에 내 삶의 속살이 있을까? 삶은 옹색하지 않아도 집은 옹색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을까. 집이 지닌 심미적 독립성은 오늘날 아파트에 의해서 사라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눈만 뜨면 값이 올라가는 아파트에서는 진지한 삶도, 진지한 삶을 사는 이들도 줄어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도시와 시골을 막론하고 이처럼 편한 주거공간은 없다고 여배우들이 광고하는 아파트들이 하늘을 가린다. -29쪽

파리와 서울을 망라하고,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거나 여행하는 이들은 자동차의 힘이 아닌 제 힘으로 달리는 사람들이다. 파리에서 이들은 행복해 보이지만, 서울에서 이들은 불안해 보인다. -36쪽

"세상은 더 이상 나의 심판자가 아니고, 내가 세상에 대한 심판자는 더욱 아니다. 세상이 다시 내가 마냥 놀아도 될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다. 자전거 타기는 서울을 놀이터로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우리 모두 자전거를 타자. 자전거를 타고 음악회에 가자.-38쪽

길은 사람과 더불어 태어난다. 사람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길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 그러므로 길은 사람이고, 사람은 길이다. 사람이 가는 것이 길이고, 길은 뒤따라오는 이들을 길들이기도 한다. 옛길을 걷다 보면 사람은 길을 걸으면서 길들여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옛길 위에 삶과 집이 포개져 있었다. -79쪽

편하기만 했던 여행은 금세 잊히기 마련인 것 같다. 여행은 불편함으로 자신이 와해되어야, 위험한 지경에 이르러야 자신 속으로 깊게 회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오늘의 시련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후에 꾸는 꿈은 매혹이 된다. 나는 다시 가고 싶다는 시련을 겪고 있다. 여행의 시작은 길고 긴 기다림이다.-100쪽

오랫동안 제국주의 시대 패권을 지닌 나라였던, 그 제국주의 피해자인 나라의 후대들이 길거리 청소를 하면서 사는 이곳. 동방은 서방의 나라들이 꿈꾸듯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 윤리와 역사가 빛나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동방은 서방의 세계가 과학과 제국주의로 무장해서 남긴 온갖 쓰레기로 뒤덮인 세계이며 썩을 대로 썩은 곳이다. 반면에 서방도 동방에서 우러러보듯이 그런 꿈의 낙원이 아니다. 처치하지 못할 새로운 쓰레기들이 동네 길 뒤편에 수북이 버려져 있고, 더러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지 않도록 껍데기로 덮어둔 허울 좋은 나라이기도 했다. 동방은 서방을, 서방은 동방을 서로 사랑하나 가까이 하기엔 먼 당신의 나라인가? -127쪽

프랑스에서 6월쯤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은 바캉스란 단어다. 1940년대 이후 노동자들까지 3주 이상의 유급휴가를 받기 위해 사회당과 공산당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가를 이 여름에 생각하게 된다. 이들에게 바캉스는 1년 열두 달 중 전반이 끝난 7월과 8월에 끼어 있다. 문화는 사실 일하는 것과 논다는 것의 복합이다. 문화는 더러 이 두 가지 사이에 존재하며 일과 휴식을 연결하는 다리와 같다. -141쪽

코메디 프랑세즈나 바스티유 극장이나 모두 도시의 한복판, 그것도 역사적 장소에 있다. 반면 우리 국립극장은 남산 뒤편에 유령의 집처럼 자리 잡고 있다.
국가는 국립극장 소속 각종 단체에 월급을 주며 그들에게 공연을 하도록 지원하지만, 그 공연이 시민들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 듯싶다. 우리나라 국립극장은 일상의 삶과 떨어진 채 제 기능을 맡지 못하고 있다.
......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일하는 배우와 연출가들은 그들대로, 무대장치나 기술분야에 일하는 이들은 그들대로 노조를 만들어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경제적 지원은 정부에서 하지만 그 운영은 전적으로 전문 연극인들에게 맡겨져 있다.-154쪽

처음 프랑스라는 나라를 좋아하게 된 것은 1970년대 군부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이곳을 자유로운 나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의 풍부한 말의 자유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말의 자유는 상상력의 자유에서 나온다. 말은 모든 행동과 표현의 근원이 되고, 사람들은 그런 가능성을 상상력이란 것에 의존한다. 상상력은 어떤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상상력은 지식보다 더 훌륭한 덕목으로 친다.
한국에서 나의 몸과 마음이 늘 피로한 것은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재와, 꿈꾸지 못했던 과거, 그 억압된 과거가 주는 힘겨운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자유와 상상력은 이 나라에 도착했다고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1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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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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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100미터 전.
하느님이 날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겠지?
벼랑 끝. 아니야, 하느님이 날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89쪽

남부 수단 현장에서 나는 하느님이 사람을 살리시는 것도, 죽게 내버려두시는 것도 보았다. 왜 어떤 아이는 살리고, 어떤 아이는 죽이셨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모두를 살려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두를 살려주는 건 정말 안 되는 일이었을까? 그걸 우리가 알 수는 없다.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구호요원으로서 알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하느님은 사람의 고통을 치유하라고 우리를 보내신 게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 그런 엄청난 고통을 치유할 수 있을까. 우리는 다만 고통받는 사람과 함께,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함께 두려워하고, 아파하는 것을 함께 아파할 수 있을 뿐이다. 가끔은 고통과 원망과 회의 앞에서 흔들릴지라도 그렇게만 할 수 있을 뿐이다.-132쪽

맺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자.

언제나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돈키호테>의 내용이다.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비이성적인 말이지만 나는 이것이 젊음의 실체라고 생각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도전, 무모하리만치 크고 높은 꿈 그리고 거기에 온몸을 던져 불사르는 뜨거운 열정이 바로 젊음의 본질이자 특권이다. 이 젊음의 특권을 그냥 놓아버리겠다는 말인가, 여러분.-152쪽

그래서 말인데 나는 이따금 대한민국 전 국민이 '1년에 백 권 읽기'를 하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즐거운 상상을 하곤 한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역시 책을 읽고 있는 옆 사람을 보고는 "이게 몇 권 째예요?"라고 묻고, 길에서 누군가 책을 들고 가면 사람들마다 "어, 저거 작년에 내가 열두 번째로 읽은 책인데", "올해 읽으려고 한 책인데", "내년 목록에 넣어야지" 하는 말들이 터져나옹는 상상.
......
9시 뉴스에는 "올해 첫 백 권 읽기 완독자가 나왔습니다. 충청북도 음성의 한 농부였다고 합니다. 자세한 소식 전해 듣겠습니다." 이런 소식이 헤드라인을 장식할 것이다. 백 권을 다 읽은 사람들이 지역마다 모여 갖가지 축제를 벌이고...... 정부 차원에서는 전국의 백 권 읽기를 달성한 사람을 강변 공원에 초대하여 국빈 대접을 하며 폭죽을 터트리고 축하해주는 행사를 벌일 것이다. 3년 이상 백 권 읽기를 달성한 사람은 세금도 깎아주고 직원 채용 때 보너스 포인트를 주면 어떨까.-164쪽

이 연습의 핵심은 이럴 때 돈이 많아 세 가지를 다 하면 좋을텐데, 돈이 없어 딱 한가지밖에 못해 분하고 초라하다라고 생각하지 말자는 거다. 대신 한정된 돈이지만 제일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 다른 건 안 해도 상관없다고 마음먹으라는 말이다. 밥을 굶고 책을 사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사기로 선택했기 때문에 밥먹는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나는 밥도 못 먹는다고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 있다.-192쪽

미국의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성공을 이렇게 정의하였다.

무엇이든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세상을 만들어놓고 가는 것

당신이 이곳에 살다 간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더 풍요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성공이다.

//이런 성공이라면 나도 꼭 하고 싶다.-210쪽

내 기도가 응답되는 복도 받고 싶지만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이 되는 복 또한 한껏 받고 싶다. 언감생심 복의 원천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복을 전달해주는 통로는 꼭 되고 싶다. 복이 들어와 쌓이는 '복의 종착지'가 아니라 들어와 쌓인 복이 골고루 나누어지는 '복의 환승역'이 되고 싶다. 그래서 하느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고 싶다.-221쪽

쓰나미의 최대 피해 국가인 인도네시아의 반다아체는 매우 보수적인 모슬렘 지역인데 긴급구호 초기에 우리 단체의 로고인 별 모양이 십자가처럼 보일 수도 있어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살지 모른다는 지적이 나왔다. 월드비전 지도부는 망설이지 않고 월드비전 로고를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건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며 태극 마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만큼이나 이례적인 일로 우리 단체의 홍보와 모금에는 치명적일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모금과 홍보보다 재난 피해자들이 거부감 없이 편안하게 우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우선이라고 판단한 거다. -264쪽

내 생각에 글로벌 리더십 과정에서 제일 먼저 고려하고 일관되게 강조해야 할 핵심은 '세계 지도자가 되려면 먼저 세계시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세계의 지도자가 된다는 사람이 세계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그 세계를 이끈다는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
세계시민이란 세계를 내 무대라고, 세상 사람들을 공동 운명체이자 친구라고 여기며 세계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한마디로 세계시민 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274쪽

나는 이런 세계시민 의식이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이라고 믿는다. 각 시대에는 저마다의 시대정신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주 독립이, 5,60년대에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산업화가, 7,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서 벗어나려는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다면 21세기에는 세계시민 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 특히 우리 젊은이들이 마땅히 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자 역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275쪽

나는 잘 알고 있다.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는 벌겋게 달궈진 고품질 인정이라는 불씨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지 거기에 바람을 살살 불어넣었을 뿐이다. 작은 바람에도 선홍색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 불꽃이 견딜 수 없이 뜨겁고 눈부시게 아름답기만 하다. -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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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tty 2009-10-2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좋은가요? 최근 한비야씨 책에 데어서...;;; 이건 좀 망설여지는데 마노아님의 고견 플리즈~~

마노아 2009-10-28 00:25   좋아요 0 | URL
무릎팍 도사 볼 때보다 더 감동이에요. 보면서 왈칵 눈물이 많이 났어요.
베스트셀러라 후딱 읽고 팔 생각이었는데 소장하기로 마음 바꿨어요. 읽어보셔요~ 추천! ^^
 
엽서속의 기생읽기
국립민속박물관 지음 / 민속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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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상 민족의 정통성과 역사가 단절되는 시기였다. 이로 인해 식민지적 경제의 파행성과 왜곡된 근대화 과정 등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과거사 청산은 사회사적 검토의 대상으로 일제시대 '기생'의 이미지도 포함하고 있다. 기생을 매음하는 창기로 자리 잡게 한 것은 일제의 치밀히 계산된 문화침략 중의 하나이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광범위한 직제 개편을 위해 기생들에게 일본제국 군대와 일본인을 위한 매춘의 사회화를 강요한다. 그것이 바로 '기생단속령'과 '창기단속령'이라는 지침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생의 이미지는 일본의 윤락녀 이미지로 차츰 탈바꿈하게 된다. -10쪽

그러나 우리나라 권번 기생은 대한제국 황실의 관기 예악문화를 전승하고 보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들은 현금, 가야금, 장구, 아쟁, 해금, 대금, 소금, 가곡 등의 기악과 성악은 물론 궁정무용인 춤, 가인전목단, 선유락, 항장무, 포구락, 무고, 검무, 사자무, 학무 등의 정재와 그 밖의 글씨와 그림을 익혀온 예악문화의 실현자이자 종합예술가들이었다. 특히 1920년대 초반에 서양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조선춤, 서양춤 할 것 없이 모든 춤을 기생들이 추었다. 기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능종목은 물론 일반교양까지 포괄하는 다양한 내용으로 짜여졌다. 전문 음악가이자 무용가라고 할 수 있는 종합예술가들이 바로 당시 기생들이었기에 전통문화예술을 발전시켜온 주역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10쪽

기생의 어휘에서 '생'은 어떤 생업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것을 뜻한다. 언제부터 정확하게 '기생'의 어휘가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은 조선 중기부터라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사대부와 기녀의 관계는 밀접했기에 유사한 방식의 어휘와 소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서생'은 글을 써서 생계를 삼아 공부하는 사람이고, '유생'은 유학을 공부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은 선비라고 지적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 중기부터 용례가 보이는 '기생'은 '기업(妓業)으로 생계를 삼고 있는 기녀'라 할 수 있다.-174쪽

"신라 중엽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는데, 이것이 기녀의 근원이라고 하였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제 24대 진흥왕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능화는 이로 미루어보면, 원화는 오늘날 기생과 같은 것이고 화랑은 오늘날 미동과 같은 것이고 풍류낭도는 오늘날 외입장과 같은 것이라 하였다. 또한 이에 장덕순은 "애초의 원화제에서 남자 300명 속에 낀 두 미인은 남자들의 총애를 받으려고 서로 경쟁했을 것이 뻔했고, 그래서 죽이고, 죽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것은 미상불 기생족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원화의 신화적 기록에 의하면 그 역할은 무녀와도 그리 거리가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물론 '서로 아름다움을 질투하였다'는 문구와 상징적으로 두 여인을 뽑아 무리를 이끌었다는 것도 무녀기원설과 서로 통한다.-175쪽

일제 강점기 당시 사회변화에는 기생에 대한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도 들어 있었다. 한쪽에서 보면 기생들은 적어도 봉건적인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적인 면에서는 현대적인 대중문화의 스타이기도 하였다. -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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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3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구판절판


"살인이 잔혹한 것은, 살인이 피해자를 죽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가족의 생활과 마음까지 서서히 죽여가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 가족을 죽이는 것은 살인자 본인이 아니라 그 가족들 자신의 마음이야. 정말 웃기는 이야기지만, 사실이 그래. 난 그게 싫어. 난 아무리 자신을 책망해도, 조금씩 죽어가도, 가만이 이를 악물고 보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인간이 아냐. 이제 더 이상은 싫어"-280쪽

"너를 가장 괴롭히고 있는 건 히구치 메구미가 아니야. 바로 너 자신이지. 그애도 그것을 아니까 그렇게 쫓아다니는 것이고, 네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어떤 마음의 위안을 느끼는 거야."
신이치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았다.
"마음의 위안이요......?"
"그럼. 나만 불행한 게 아니다, 내가 나쁜 게 아니라고 그애는 생각하는 거지."
우리는 모두 희생자라고 히구치 메구미는 말했었다.
"너는 이제 도망치지 않는다고 했지.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야. 멋진 결단이야. 그렇지만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머문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야. 이제 그애에게 말을 해줘. 이제부터 나는 자책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그 자책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이야."-281쪽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신이치는 입술이 떨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이치는 오랜 병마에서 깨어나는 하나의 징후를 본 듯한 기분이었다.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검은 덩어리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병의 원인은 제거했다.
신이치는 울었다. 길게, 많이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놓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쁨을 누렸다.
아리마 요시오는 신이치를 말없이 안아주었다.
누군가의 팔에 안겨보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주 억세고 따스한 팔이었다. 그것은 단지 부모나 어른의 팔이 아니었다.
고통스런 길을 함께 걸어갈 동지의 팔이었다.-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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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범 2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30
미야베 미유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구판절판


"진정한 악이란 이런 거야. 이유 따위는 없어. 그러므로 피해자는 자기가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는지 모르는 거야. 원한, 애증, 돈, 그런 이유가 있다면 피해자도 납득을 할 수 있겠지. 자신을 위로하거나 범인을 미워하거나 사회를 원망할 때는 그 근거가 필요한 거야. 범인이 그 근거를 제시해주면 대처할 방법이라도 있지. 그러나 애당초 근거 같은 건 없었어. 그거야말로 완벽한 ‘악’이야."
"난 잘 모르겠어."하고 구리하시 히로미는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더 심한 범죄들도 많잖아?"
"더 심한 범죄? 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더 많은 돈을 빼앗는 것?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어. 그건 어디까지나 범죄일 뿐, 악은 아니야."
-203쪽

"모든 피해자에게, 모든 피해자의 가족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던져주는 거야. 왜? 우리 딸이 왜 죽어야 했을까? 범인은 왜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일까? 왜, 왜, 왜?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몰라. 별것도 아닌 놈들이 잔머리를 굴려보겠지. 경찰도 눈을 부라리며 수사를 할 테지. 그러나 그들은 몰라.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걸 아는 사람은 나, 아니 우리뿐이지."

-209쪽

"신이치 네가 겪은 사건도 누군가 인수분해하겠지? 그러면 결국 그런 식의 글이 나올 거야. 범인을 비난하고 분노하거나, 피해를 입은 신이치의 가족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비참한가, 하고 애당초 정해져 있는 결론에 이르는 거야."
"......"
"그래서, 그런 인수분해 속에서는 히구치 메구미도 가련한 피해자가 되겠지. 하기야 그애가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아니고, 가족이 무너지면서 그애의 인생도 뒤틀리고 말았으니까. 그렇지만 그거도 인수분해 속에서는 그녀의 슬픔의 인자가 되어버리겠지."
......
"그런 것이 올바른 분석이라면, 어떤 궤변도 다 통하고 말 거야. 나쁜 것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불쌍한 인간만 남으니까. 남는 것은 피해자뿐이고, 나쁜 것은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버려. 그렇지만 그건 말이 안 돼. 그러니까 절대로 메구미의 말에 지면 안 돼. 그녀의 짐까지 네가 짊어져서는 안 되는 거야."
-420쪽

"불쌍하게도, 너무 빨리 만난 것 같아. 그애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나은 다음에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은 어떻게 해도 안 돼."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너라서 안 되는 게 아냐. 누구라도 안 돼. 훨씬 어른이고 훨씬 어머니 같은 사람이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을 거야. 아니면 차라리 머리가 텅 비어서 하루 종일 자기 밖에 생각하지 않는 여자이든지. 너는 어느 쪽도 아니거든. 어머니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고, 백치가 되기에는 너무 머리가 좋아."
-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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