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2
이양호 지음 / 글숲산책 / 2009년 10월
품절


「재투성이」이야기를 두고 일반 사람들은 동화라 하고 학자들은 민담이라 한다. 이러한 문학 장르를 최초로 갈무리한 독일에선 메르헨이라 하는데, 그 뜻은 ‘작은 이야기’일 뿐이다. 거기엔, 동화에 있는 아이 동(童)도 없고, 민담에 있는 백성 민(民)도 없다. 다만, 현대 작가들에 의해 지어진 이야기와 구별해야 할 땐, 폴크스Volks를 메르헨에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폴크스를 ‘백성 민’으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민이란 지배와 피지배를 바탕으로 한 말이지만, Volks는 그보다는 공동체를 뜻한다. 갑골문에서 밝혀진 民은 죄수의 눈을 찌른 것을 글자로 형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논어에 나타난 民도 人보다 낮은 신분을 가리킨다. 이에 반해 폴크스는 ‘군대무리’ 즉 전사 공동체에 그 말 뿌리를 두고 있다.
-16쪽

모두가 알다시피, 옛이야기의 지은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까닭에다, 이 문학 장르를 민담이라 번역한 까닭이 덧붙여져서, 옛이야기의 지은이가 민중일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여긴다. 통념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이 통념도 그것을 받치고 있는 밑돌이 엉성하다.
-17쪽

이야기꾼이 귀띔해주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우리의 예상을 비껴간다. 뿐만 아니라, 자못 엉뚱하다. 눈도 아니고 입술도 아니고 놀랍게도, 옷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옷의 아름다움이 왕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것이다.

-92쪽

서양 사람들의 피와 살을 이루는 데에 가장 지속적이고 근원적인 구실을 했던 성서를 보면, 옷에 관한 말이 언뜻언뜻 나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옷을 벗고 도망간 한 젊은이, 새하얀 옷을 입은 천사, 희고 빛나는 옷을 입은 예수님, 그분의 옷을 만지고서 12년 동안이나 앓았던 ‘피 흘리는 병’을 고침 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 성서에서 옷의 의미는 무엇일까? 강일상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님의 옷을 만졌다"는 것으로 마가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지금부터 우리가 해명해야 할 과제다. 만진 것이 왜 하필이면 옷인가? 손을 만졌다고 해도 상관없고 몸을 만졌다면 더 좋았을 법한데, 왜 하필이면 옷을 만졌다고 하는 것일까? 여인이 옷을 만진 게 주술적인 행위가 아니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마술적인 능력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이 옷은 마가에게서 상징적인 의미로 쓰였을 수 있다. 더욱이 여기 이 여인의 혈루증이 육체적인 질병이 아니라 유대 민중의 피 흘리는 삶을 상징하는 것이고 보면, 옷을 만진 이 행위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
-97쪽

우리 문명도 금을 귀하고 특별한 것으로 다루긴 했지만, 서양인들만큼은 아니었던 듯하다. 황금률, 황금시대란 말에서 보듯 그들은 가장 좋은 것, 아니 이상적인 것을 황금으로 표현했다. 심지어는 이러저러한 물질을 금으로 바꾸는 일, 즉 잡스런 성질을 바꾸는 일에, 숱한 사람들이 몸과 마음을 기꺼이 바쳤던 게 그들의 문명이다. (...)덧없고 허망한 이 세상에서, 변치 않고 언제나 제 꼴을 지켜가는 모습을 그들은 금에서 본 것이다. 또한 ‘금’의 독일 말 골드가 ‘빛나다, 반짝이다’에서 왔으니, 그들은 금과 빛을 한 동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빛이 나오는 바탕인 하늘을 나는 새가, 금 옷과 금 신발을 재투성이에게 내려준 점이 이 말에 힘을 실어준다.

-105쪽

그녀는 의붓 언니들과는 영 다른 것을 가리켰다. "집으로 돌아오실 때 모자에 부딪히는 어린 나뭇가지."
재투성이와 두 의붓 언니는 이렇게 달랐다. 의붓 언니들이 저자에서 파는 물건을 바란 데 반해, 재투성이는 자연이 키운 것을 바랐다. 그것도 아버지 모자에 부딪히는 것을. 바라는 게 무엇인가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의붓 언니와 재투성이는 바라는 게 달랐기에 사는 것도 달랐다. 그러니 삶을 갈무리한 것도 다를 터.
-113쪽

‘재’는 사람을 착잡하게 한다. 그 색깔이 그렇고, 촉감이 그렇다. 잿빛은 맥아리가 없다. 출렁임도 없고 잔잔한 흐름도 없다. 그렇다고 검은 색과 닮지도 않았다. 검은 색은 모든 것을 무화하여 ‘없음’을 오히려 세게 내세운다. ‘없음’을 통해 ‘있음’을 알리는, 기막힌 역설을 검은색은 알고 있다. 잿빛은 다른 색을 고스란히 빨아들이지도 못한다. 튕긴다는 점에서 잿빛은 있다. 그렇다고 다른 색에 힘 있게 맞서지도 못한다. 없다고 할 수밖에. 있는 듯 없는 듯, 잿빛의 꼴이다. 게다가, 조금 전까지 그곳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에게 잿빛은, 눈빛을 잃은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늙은이다.

-119쪽

‘재의 수요일’은 가톨릭, 루터교, 성공회가 다 치르는 절기다. 지금은 진탕 먹고 노는 날로 변질되었지만, 본래는 육적인 것을 다 끊는다는 뜻을 가진 카니발(사육제) 다음 날, 즉 예수님이 했던 광야에서의 40일간 금식을 기억하기 위한 사순절의 맨 첫날이 ‘재의 수요일’이다. 이 날 크리스천은 머리에 재를 바른다. 두덴에서 나온 말 뿌리 사전에 따르면, ‘재는 덧없음, 슬픔 그리고 속죄의 상징이다’고 나와 있다. 또한 독일어에 ‘재를 머리에 뿌린다’는 굳어진 말(숙어)이 있는데, 매우 후회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재’의 이런 상징성은 서양 문명의 받침돌들인 그리스·이스라엘·로마에 다 들어 있다. 그리스인들은 호메로스 시대부터 몸에 재를 뿌리거나 재 위에 앉음으로써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을 드러내 보였다. 로마인들은 새해를 정갈하게 시작하려고 새해 첫날, 재로 목욕을 했다.

-122쪽

잿빛은 사실 우리 문화가 천 년도 넘게 품었던 색이고, 지금도 지긋이 품고 있는 색이다. 불교의 입김 속에서 그랬고, 장자의 날개 속에서 그랬다. 스님들은 잿빛 옷을 걸치고 살아왔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도 그분들은 잿빛 옷을 벗지 않는다. 불기 없는 재, 탈 것 없는 재로 살다가, 드디어 몸조차 재가 되어 회신멸지한다.

-133쪽

재투성이가 키운 개암나무는 순전히 개인적인 나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독일 민족을 이루고 있는 게르만족과 켈트족에게 민속적인 의미를 갖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 사전에 보면, 개암나무의 문화적인 결이 잘 나와 있는데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개암나무가 액막이 특성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그것으로 뱀이나 마녀를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재투성이가 개암 나뭇가지를 어머니 무덤 위에 심은 것이다. 또한 로마에서는 휴전 협정이나 평화 협정을 논의할 때 이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로마, 영국, 독일에서 이 나무는 행운과 풍성한 열매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신부는 결혼식 때 개암 열매를 담은 바구니를 선물 받았다.
-1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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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0-07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잿빛에 밑줄 쫘악 그어 데려가요~

마노아 2010-10-07 22:25   좋아요 0 | URL
인상 깊지요? ^^

비로그인 2010-10-11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저런 걸 부탁해야겠군요. 당신이 나한테 올 때 당신 옷을 스쳤던 나뭇가지를 꺽어다 주세요,라고. 그래야겠어요. 그래야 하는 거였어요

마노아 2010-10-11 14:23   좋아요 0 | URL
아, 너무 낭만적이에요! 그런데 가느다란 가지가 아니라 몽둥이 수준으로 꺾어오면 어쩌지요? 그럼 낭만이고 뭐고 창피할 거예요.(>_<)
 
8년의 동행
미치 앨봄 지음, 이수경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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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이 남아 어슬렁거리는 것을 새로 온 젊은 랍비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혹은 더 이상 설교대에 오를 수가 없어 자존심이 상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렙은 자신이 늘 서던 설교대에 오르는 젊은 랍비들에게 부러움이나 시기를 전혀 느끼지 않았다(그는 성직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존심’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은퇴 후 그는 원래 쓰던 널찍한 방을 자진해서 비우고 작은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느 안식일 아침부턴가는 강단 옆의 상석인 커다란 의자에서 내려와 신도석 뒷줄의 아내 옆에 앉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깜짝 놀랐다. 존 애덤스가 대통령 퇴임 후 시골로 돌아갔듯이, 렙은 신도들 사이로 조용히 돌아간 것이다.
-87쪽

"‘왜 내가 부럽습니까?’ ‘랍비님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었을 때 신을 욕할 수 있으니까요. 신을 향해 울부짖고, 신을 원망할 수 있으니까요. 왜 내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느냐고 소리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전 신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의사였어요! 그런 데도 우리 형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요!’ 그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이었어. ‘전 누구를 원망해야 하죠? 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아요. 그러니 저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습니다.’"
렙은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슬퍼지는 듯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건 끔찍한 자기 비난이야."
그보다는 기도하고 응답받지 못하는 게 더 낫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들어 줄 존재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내 목소리를 듣고 대답해 주지 않는다고 믿는 게 훨씬 더 위안이 되지."
-119쪽

1975년, 렙의 설교 중에서
한 사내가 농장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는 농장에 찾아가 새로운 주인에게 추천장을 건넸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사람은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잠을 잡니다." 농장 주인은 일손 구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사내를 그 자리에서 고용했다. 그런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밤, 갑자기 사나운 폭풍우가 마을에 몰아쳤다. 거센 비바람 소리에 깜짝 놀란 주인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사내를 불렀지만, 사내는 깊이 잠들어 있어서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주인은 급히 외양간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가축들은 넉넉한 여물 옆에서 안전하게 자고 있었다. 그는 밀밭으로 뛰어나갔다. 밀 짚단들은 단단히 묶인 채 안전하게 방추 선에 덮여 있었다. 이번에는 곡물 창고로 달려갔다. 문들에는 빗장이 걸려 있었고, 곡물들은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있었다. 그제야 주인은 "이 사람은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잠을 잡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132쪽

우리가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 항상 신경 쓰면서 살아가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늘 관심과 애정을 쏟고 우리의 믿음을 바탕으로 행동하면, 미처 행하지 못한 일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의 말에는 항상 진실함이 담길 것이고, 사랑하는 이를 껴안는 우리의 두 팔에 힘이 들어갈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도 있었는데…….", "저렇게 했어야만 했는데……."하는 탄식과 후회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는 폭풍우가 치는 날에도 안심하고 잠잘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온전하고 후회 없는 모습으로 그들에게 마지막 이별을 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133쪽

나도 우울증이 중요하고 실제적인 병이라는 것은 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는 반드시 의학적인 치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울증이란 말이 너무 남용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실 우리가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부분 ‘불만’이라는 감정인 경우가 많다. 기준을 너무 높게 설정해 놓거나, 마땅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으면서 훌륭한 결과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에서 비롯된 감정 말이다. 나는 몸무게 때문에, 대머리 때문에, 직장에서 승진하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설령 그들 자신은 그것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닌 것처럼 행동했지만 말이다. 그들에게 우울함이란 신체적 질환과 같은 것이다. 약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들은 기꺼이 약을 먹는다.
-139쪽

그러나 약은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갖고 싶어 하는 것, 거울 속에 비친 외모에서 자존감을 찾으려고 하는 것, 끊임없이 일에 파묻혀 살면서도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말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안다.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잠을 최소한으로 줄여 가면서까지 일에 매달렸다. 명성과 성공을 쌓았고 부를 얻었다. 사람들로부터 박수와 칭찬도 받았다. 그런데 그런 삶이 계속되자 오히려 공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찢어진 타이어에 공기를 계속 불어넣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오랜 스승인 모리 교수님을 만나면서, 질주하던 내 삶에 ‘끼익’ 하고 제동이 걸렸다. 교수님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분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목격하면서 나는 내 삶의 속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140쪽

렙은 그 모든 치료와 약물에도 불구하고 신경 안정제, 우울증 치료제 같은 약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웃었다. 결코 화내지도 않았다. 또한 ‘나는 왜 태어났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와 있는지 잘 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을 찬미하기 위해서, 자신이 속해 있는 이 세상에 감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아침 기도는 항상 이렇게 시작했다. "주여, 오늘도 제 영혼을 다시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그날 하루는 특별한 보너스가 된다.
-141쪽

그럼 이제 행복의 비결이 뭔지, 수수께끼가 풀린 건가요?
"그렇다고 생각하네."
말씀해 주시겠어요?
"준비됐나?"
준비됐습니다.
"만족할 줄 아는 것."
그게 다인가요?
"감사할 줄 아는 것."
그게 다인가요?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
그게 다인가요?
렙이 내 눈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게 전부야."
(이 대화를 나누기 전 렙은 자신이 폐암에 걸렸단 사실을 알았다.)
-144쪽

(렙의 설교 중에서)
여러분, 사람은 왜 죽는가, 또 어떤 이는 왜 그토록 어린 나이에 죽는가 하는 물음이 때때로 우리에게 떠오릅니다. 그럴 때 저는 성서의 지혜로운 말씀에 의지합니다. 다윗은 당시에 비춰볼 때 그다지 오래 산 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사람들을 가르치고, 교훈을 주었으며, 시편과 같은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우리가 장례식 때 낭독하곤 하는 시편 23장의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제 딸 리나가 아예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는 리나와 4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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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25 0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치 앨봄은 제가 일부러 사서 읽진 않겠지만,
이렇게 만나게 되니 좋네요.

마노아 2010-09-25 21:12   좋아요 0 | URL
읽고 나서 엄마께 추천했더니 무척 좋아하셨어요. 이번엔 언니에게 추천하려고 해요. 가족이 같이 읽으니 더 좋아요.^^
 
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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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황제에게는 생존하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고, 역시 생존하는 형제들이 있었다. 적은 여전히 야만이라 대통을 미리 정해두는 법도가 없었으니, 생존하는 모든 황자들과 대왕들이 황위 계승의 자격을 가졌다. 그리하여 모반도 정변도 아닌, 모반보다 더하고 정변보다 더한 싸움이었다. 모두가 모두를 죽일 수 있었고, 가차 없이 그렇게 할 태세였다. 누구도 죽이려 하지 않는 자도 죽을 수 있었고, 죽지 않으려고 몸을 낮출 데까지 낮춘 자도 죽을 수 있었다.

-21쪽

새 황제가 났으니 그들은 다시 전쟁을 준비할 터였다. 전쟁은 일상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으나, 섭정왕의 포부가 크니 전보다 더 큰 전쟁이 될 게 틀림없었다. 조선은 그들의 적의 축에도 끼지 못했으나, 성가신 후방임에는 틀림없었다. 뒤를 걱정하면서 앞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전쟁 때마다 그들이 조선의 출병을 요구하는 것은 조선의 군대가 힘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후방을 비워두기 위해서였다.

-97쪽

꿈을 믿는 자들이란 꿈이 필요한 자들일 터...... 만상은 밤마다 깊은 잠이 들어 흉몽이고 길몽이고 꾸지 않았다. 더 높이 올라갈 데도 없었고, 더 낮은 데로 떨어질 데도 없었다. 그는 가장 낮은 바닥에서 뒹굴어 간신히 그 낮은 바닥을 기어 나왔을 뿐이었다. (...) 높이 오를 수 있는 자는 높이 있는 자들이었다. (...) 그의 꿈은 그저 오래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밤마다 잠이 깊어 해몽이 필요한 꿈 같은 것은 뀌지지도 않았다.

-98쪽

세자가 강 건너 청의 성도에 있으니, 강 가까운 곳의 백성들은 세자를 먹여살리는 일에 자신들의 뼈를 깎았다. 달마다 올라가는 세자의 삯찬에, 대신들의 녹봉에, 쇄마에, 날이면 날마다 동원되는 군역까지 의주부의 백성들이 적에 볼모로 있는 세자로 인하여 헐벗고 굶주리고, 목숨이 죽어나갔다. 전쟁에는 한 목숨 잃으면 그만이었으나, 전쟁 뒤끝에는 살아남은 목숨들이 더욱 고되었다. 오래 살아 그 모든 것을 다 목격한 늙은이들의 울음이 그래서 더욱 장하였다.

-145쪽

명이 그의 적이었다면, 그리고 적이 그의 편이었다면, 세자에게도 그 전쟁에 대한 소망이 있었을 것이다. 바라보며 두려운 것이 아니라, 두려운 것을 깨고 부수고자 저들처럼 눈알이 붉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는 바라볼 뿐이었고, 바라보며 두려울 뿐이었고, 그 두려움이 비루하여 환멸을 견딜 수 없음이었다.
응전하는 명의 장수들은 장했으나, 그들의 나라는 이미 비루했다. 숭정은 황제로서의 위엄을 이미 잃어, 아침이면 이자를 죽이고, 저녁이면 아침에 이자를 죽인 저자를 죽이라 하는 식이라고 했다. 조선은 명에서 멀고, 또한 저들에 의해 육로와 해로가 모두 끊겨 조선에까지는 가지 못하는 명의 참담한 소식들이 세자의 관소에는 속속 들어왔다.
-157쪽

봉림은 종군했던 전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낯빛이 차가워 세자라도 쉽게 말을 건넬 수가 없는 지경이곤 했었다. 봉림이 보았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세자는 이때에 알았다. 그것은 말로 전해질 수 없는 것이며, 글로도 적어 올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명이 끝났습니다. 미천한 최래는 외칠 수 있었으나, 세자는 말할 수 없었다. 봉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적의 땅에서, 그야말로 너무 오래, 모든 것을 보았다. 그들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한 사람은 세자, 한 사람은 대군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160쪽

조선의 대신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명과 청의 전투는 무의미했다. 소식이 멀어 전황이 늦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지고 이기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명이 이겨도, 져도 그들은 명을 받들 것이다. 숭정이 사라져도, 그들은 숭정을 이을 것이다. 성현의 뜻이 거기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지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광해를 쳤던 대의가 모두 거기에 있었다. 임금의 반정은 명의 재조지은을 잊은 광해를 내몬다는 명분으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임금의 자리가 거기에 있었으니, 임금이 수백 번 수천 번 적의 황제 앞에서 이마를 찧는다 하더라도, 임금이 명나라를 받들어 임금이 되었던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임금을 임금의 자리에 올린 자들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적에게 굴복한 것은 치욕이 될 것이나, 또한 원한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명을 등지면 남는 것이 없었다. 광해를 치면서 씨를 말리듯 내몰았던 광해의 정파가 다시 일어선다면, 그들에게 돌아올 것은 한때 광해의 정파가 그러했던 것처럼 멸문과 죽음뿐이었다.
-160쪽

세자는 임금의 아들이었다. 임금이 그들에 의해 임금이 되었으니, 세자도 그들에 의해 세자가 되었다.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으면 기원의 말처럼 세자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세자가 그들의 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세자는 적의 땅에서 결코 돌아오지 못할 것이었다. 적의 땅에 머물며 낮과 밤마다 홀로 삭였던 고독이 조선의 땅에 돌아와서는 고독을 넘어 슬픔이 되었다.
그러한데, 임금은 나를 위해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 정녕 울어주지 않으실 것인가......
-161쪽

상은 오래 아프셨다. 보위에 오른 후 반란과 전쟁이 끊이지를 않아 심화가 병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다. 노여움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몸속 깊은 곳의 농증이 되었다. 상이 스스로 보위에 오를 때 소망이 없으셨겠는가. 그러나 소망은 적에게 짓밟히고, 능욕은 사관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았다. 기록이 새로운 영광으로 채워질 날은 보이지 않고, 적의 내부를 깊이 알 수 없어 보위는 늘 위태하게 여겨졌다. 아프지 안혹, 세월을 어찌 견디실 수 있으실 것인가. 의관 하나 곁에 두는 일조차도 들고 일어서 가타부타 하는 대신들이 임금은 지겨웠다. 대신들이 삿되다 하는 의관을 부러 곁에 두고, 삿된 의관이 사술로 혈을 맘껏 찾으라고 벗은 몸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심화가 마음을 닦는 성현의 도리만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었다. 세월이 임금의 소망을 넘쳐서 흐르니, 임금의 세월이 임금의 것이 아니었다.
-173쪽

임금이 몸을 돌려 누웠다.여윈 몸의 등뼈가 세자를 향해 드러났다.
"울거라. 네 몸에 울음이 가득할 것이다."
세자에게 울라 하고 돌아누운 아비의 등이 흔들렸다. 상께서 울고 계셨다.
-176쪽

상소를 읽고 상소에 답하는 일로 임금의 하루가 새고 저물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욕은 오래 남았다. 궁이 정한 기운을 받는 자리에 있지 못하니 창경궁과 창덕궁을 버리고, 법궁인 경복궁도 버리고, 다른 궁으로 이어하시라는 상소가 또 난데없이 올라왔다. 대신들이 임금의 말을 받아, 백성들이 너나없이 곤궁한 이때에 새로운 궁으로 이어 운운한 자를 파직하시라는 상소를 다시 올렸다. 삿된 상소를 임금께 바친 승지도 파직하시라 했고, 그 상소를 올려 바쳤던 승지도 자신을 파직하시라 했다. 심화가 더쳐 다시 침을 맞으니, 삿된 침은 이제 그만 맞으시라, 또 상소가 올라왔다.
"경들의 뜻이 가상하다."
상이 답하셨다.
"가상하나 그만하라. 너희들이 나를 임금으로 보느냐!"
마침내 상이 참지 못한 말을 내뱉어 언로에 막힘이 없는 간원들이 다시 벌떼처럼 일어섰다.
몸에 가득한 울음은 임금의 것이었다. 누구도 누구를 위해 대신 울어줄 수 없었다. 세자가 임금의 곁에 있었으나, 임금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177쪽

세자가 심양에 들었을 때 날씨는 이미 초여름의 더위로 익어 있었다. 은근히 계절이 다가오고, 또 은근히 계절이 지나가는 조선과는 달라 북방은 모든 것이 급하고 뜨거웠다. 유목하며 살던 사람들은 무엇이든 머문 자리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계절을 쫓아 달리고, 계절을 피해 달렸다. 가다가 먼저 있는 자들이 있으면 치고, 그 자치를 차지했다. 그것이 그들의 피의 뜨거움이었다. 봄에 이르러 파종하고, 가을에 이르러 수확을 기다리는 조선 사람들의 일처럼 그들에겐 전쟁이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하늘이 그들을 그런 땅에 보내었던 것이다.

-204쪽

"성 밖에를 나가보았느냐?"
"아바마마께서 밖에 계시니 제가 안을 지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나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그리 말하더냐?"
"......제가 그리 알았습니다."
세자의 눈빛이 쓸쓸했다. 원손의 말에 거짓이 없었다. 누구도 원손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나 원손이 그것을 알았을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알았을 터인데도 누가 귀에 대고 꽝꽝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원손의 자리란 것이 그런 것이었다.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 가장 먼저 배우는 일들이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었다.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겹겹이 쌓여 마침내 남는 것이 없었다.
-206쪽

임금은 늘 전란 중에 있었다. 피와 군사의 목숨으로 보좌를 얻은 임금에게 세월은 피와 군사의 목숨으로 되갚았다. 광해를 몰아냈던 자들이 다시 광해를 세우겠다고도 했고, 적에게 무릎 꿇은 임금을 상으로서 받들 수 없다고도 했고, 적에게 당한 굴욕과 적을 향한 원한이 임금을 향한 굴욕과 원한이 되었다고도 했다. 임금 대신 새로이 보좌에 올릴 자들의 이름으로 폐주인 광해부터 시작하여 무수히 많은 종친들이 거론되었다. 역모의 고변이 올라왔을 때 임금이 가장 먼저 물은 것은 누구냐는 것이었다. 역모를 일으킨 자가 아니라 역모를 일으키려던 자들이 추대하려고 한 자의 이름이었다.

-214쪽

적의 땅에서 사는 동안 수도 없이 본 것이 바로 역모였다. 역모가 역심을 가진 자들에게서 일어나지 않고 역모를 필요로 하는 시절에 의해 일어났던 것이다. 필요치 않은 모가지들이 역모에 의해 남김없이 잘려나갔다.

-222쪽

역모에 세자의 이름이 오르내렸다고 했다. 그 진위가 어떠하든 간에 조선의 임금이 자신의 아들을 적으로 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어느 임금에게 적이 아닌 자식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 수위가 역모에 이를 정도로 높아졌으니, 세자의 입지가 더할 수 없이 위험한 정도에 이르렀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224쪽

틈은 어디에서나 벌어진다. 손톱 밑에 찔린 가시 하나 때문에 온몸이 썩을 수도 있는 일인 것이다. 세자는 믿을 만한 자였다. 청에 굴복하는 마음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기다림을 아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믿을 만하나 그래서 두려운 자였다.

-224쪽

산해관이었다. 장성이 시작되는 곳이었고 중원이 시작되는 곳이었으며 죽음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누르하치부터 시작하여 도르곤에 이르기까지 자들이 이곳에 이르기 위해 수십 년 동안의 전투를 멈추지 않았다. 죽어나가는 자들이 들판의 거름이 되고, 산 자들이 다시 전쟁의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여자의 배를 부르게 했다. 아들은 다시 전쟁에 나가고, 딸은 전쟁에 나갈 아들을 낳기 위해 남자에게 몸을 허락하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

-274쪽

"누구나 영원히 적입니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그걸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8년 전, 조선은 그걸 몰랐습니다. 조선의 적이 청뿐만 아니라 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아셨어야 했습니다."
-312쪽

(작가의 말 중)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할 당시의 기록들, 그 격변의 시기의 기록들을 중국 학자들이 조선왕조의 기록에서 빌려다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기록 문화는 그야말로 놀랍다. 경의를 금할 수가 없다. 너무나 냉정하여 너무나 무한한 이야기들이 그 안에 있다.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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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 건축과 서양 건축의 만남
임석재 지음 / 대원사 / 1999년 10월
품절


왜 그랬을까. 나무가 없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나무 찾고 다니기가 귀찮아서 그랬을까. 둘 다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휜 나무를 기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휜 나무도 곧은 나무와 조금도 다름없이 기둥으로써의 구조 역할을 거뜬히 해낼 수 있다. 휜 나무는 보기에 불안해 보이거나 흉해 보인다는 생각은 인위적 질서 중심의 서양식 가치관이 들어온 이후에 생긴 판단 기준일 것이다. (...) 한국의 전통 건축에는 뒤틀리고 휜 나무가 그대로 기둥과 대들보로 쓰인 예들이 많이 있다. 곧은 놈은 곧은 대로, 또 휜 놈은 휜 대로 편견이나 차별 없이 다 제 몫을 할 수 있다는 기막힌 평등사상을 이러한 한국 기둥은 얘기해주고 있다.

-41쪽

목구조는 수많은 부재들끼리 서로 의존하는 절묘한 균형력을 기초로 세워지기 때문에 한번 잘 짜여지기만 하면 돌덩이보다도 더 단단한 구조적 안정성을 갖는다. 이 위로 육중한 지붕이 묵직하게 눌러주면 목구조는 완강한 결속력을 지니며 수천 년을 버틸 수 있게 된다. 한국 전통 건축에서 장엄한 지붕이 무겁게 느껴지기 보다 차분한 안정감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지붕이 단순한 짐이 아니라 이처럼 아래쪽의 구조체를 도와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목구조는 화재나 전쟁 등 인재(人災)에 약한 단점이 있긴 하지만 반면에 부재들 사이의 상호 균형력을 갖기 때문에 지진에는 가장 유리한 구조 방식이기도 하다.

-55쪽

홍살문은 왕릉의 영역이 시작됨을 알린다는 점에서 사찰의 일주문에 해당된다. 홍살문의 높이는 일주문이나 솟을대문보다 높으나 단주 두 개만으로 이루어지는 매우 단순한 구성을 보여 준다. 이때 두 개의 단주 사이 꼭대기 부분에 열두 개의 살대가 더해지며 그 중앙에는 태극 마크가 붙여진다. 살대는 법도의 곧고 바름을 상징했는데 이것은 곧 나라와 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열두 개의 막대기는 열두 간지(干支)를 상징하기도 했다. 살대의 중앙에는 천지의 운행 원리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태극 마크가 붙여짐으로써 인간사 열두 간지의 순회를 다스리는 천하 일인 왕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서원에서처럼 왕과 나라의 권위를 상징하지 않을 경우 살대는 열두 개가 아닌 열 개가 쓰이기도 한다. 서원의 정문 앞에 홍살문을 세웠듯이 살대는 종종 솟을대문이나 서원의 내문 등에 쓰이기도 하였다.

-127쪽

서양 건축은 한국 전통 건축만큼 남향을 중시하지 않았다. 자연의 혜택을 누리기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기술로 이것을 해결하겠다는 현실적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양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건축은 어차피 땅 위에 인간만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렇다면 굳이 자연의 조건에 얽매일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 그보다 인간의 존재 의지를 표현해줄 다른 요소를 더 중시했다. 낭만주의가 유행하기 전까지 서양 건축에서 자연은 그 속에 안기는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손으로 개조해야 되는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서양 건축에서 햇빛을 일부러 피했을 리는 없다. 다만 그들이 아무 곳에서나 일광욕을 즐기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햇빛을 취하는 방식이 직설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이다.

-140쪽

당간지주는 돌이나 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찰들이 난리통에 불에 타 사라진 와중에도 지금까지 남아 백제나 신라 때의 유구한 불교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고찰의 전각들이 임진왜란 이후에 중건한 경우가 대부분인 가운데 당간지주는 확실히 사찰에서 가장 오래된 유구임에 틀림없다.

-185쪽

궁궐의 돌길은 살아있는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 이러한 직선의 이미지는 종묘에 오면 다소 변화가 나타난다. 종묘는 선대왕들의 위폐를 모시고 이곳에서 왕들이 제사를 지내던 곳이기 때문에 삶의 영역과 죽음의 영역 사이의 중간 단계에 해당된다. 종묘사직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일직선의 곧은 돌길이 놓였지만 살아있는 왕이 정사를 펼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품석은 생략되었으며 길 자체도 세 겹이 아닌 외겹으로 이루어졌다. 돌 색깔이 유난히 어두운 이유는 제사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종묘의 돌길은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적 여정을 상징한다.

-191쪽

왕릉의 돌길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망자(亡者)의 여정이기 때문에 인간적 교만을 상징하는 직선보다는 자연의 일부로 귀속되는 곡선으로 처리된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능 자체가 둥근 반원의 곡선 형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곡선 길이 더 잘 어울린다. 이처럼 왕릉의 돌길은 곡선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왕이 살아왔던 삶의 여정을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나간 삶의 여정은 곧 망자의 여정과 동의어로 해석될 수 있다.

-194쪽

서양 전통 건축에서 모서리는 메워지고 봉합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정의되었다. 그래야 기하학적 완결성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서양 전통 건축에서는 모서리가 딱 맞지 않으면 입이 벌어져 바람이 새듯 불완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곧 이상적인 공간은 두 개의 벽체와 천장이 만나는 모서리가 직각으로 반듯하게 맞아떨어져 물샐틈없이 정밀하게 짜여지는 경우이다. (...) 이 밖에도 모서리가 잘 봉합된 서양 전통 건축의 공간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서양의 생활 방식에 잘 맞는 긍정적인 측면을 갖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공간의 느낌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서양 전통 건축의 이러한 모서리 처리는 공간을 불투명하고 폐쇄적으로 만들면서 한국 전통 건축과 큰 차이점을 갖게 된다. (...) 특히 서양 전통 건축의 경우 돌이 주재료라는 점은 건물의 불투명성과 폐쇄성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249쪽

이에 반해 한국 전통 건축의 사각형 공간은 모서리가 조금씩 열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모서리가 열려 있는 사각형 공간은 엉성하고 짜임새가 덜할 지는 몰라도 공간을 투명하고 개방적으로 만들어준다. 투명하고 개방적인 공간은 편안한 느낌으로 발전하며 이 모든 느낌들은 그대로 한국 전통 건축의 사각형 공간이 갖는 특징으로 정의될 수 있다. 그리고 나무와 창호지가 주재료라는 점은 이러한 투명성을 배가시켜 준다.

-252쪽

한국 전통 건축의 사각형 마당은 네 면이 건물로 둘러싸이면서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인간의 감각 기능이 주변 환경을 편안하게 인식하는 한계를 잘 지키는 범위 내에서 마당의 크기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거기에는 또 하나의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건물과 건물이 만나는 모서리가 적당히 벌어져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틈새인 것이다. 한국 전통 건축의 사각형 마당 공간은 이처럼 틈새를 천시하거나 잊지 않고 세심한 배려를 기울이는 섬세한 매력이 있다.

-253쪽

모서리가 열린 투명한 사각형 공간은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기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 전통 건축의 단점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어 왔다. 사람은 누구나 방해받지 않고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은데 한국 전통 건축에서는 분명히 사람이 남들에게 너무 많이 노출된다. 특히 서양식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최근에 이러한 시각은 이제 우리의 일반적 생각이 되어버렸다. 특히 한옥에서 한번이라도 자본 사람은 밖에서 나는 조그만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마저도 너무 크게 들리는 통에 신경이 민감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현상들은 현대인들에게 전통 건축을 점점 더 낯설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한국 전통 건축의 투명한 공간은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을 높여주는 기능을 갖는다.

-256쪽

뒤집어 이야기하면 한옥의 불편한 점으로 지적된 이런 사항들이 바로 내․외부 공간 사이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한국 전통 건축의 특징에 해당되는 내용들이다. 모든 방 사이의 거리가 짧고 이동이 간단한 서구식 주택에 비해 같은 집안인데도 부엌에서 안방까지 가기 위해서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하며 산 넘고 강 건너듯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하는 한옥의 공간 구성은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하나의 독특한 건축적 특징일 수 있다. 겨울에 춥다는 말은 그만큼 외기와 내통이 잘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프라이버시 보호가 안 된다는 말은 거꾸로 한옥에서는 그만큼 간접 의사소통이 잘 된다는 것을 의마히가도 한다.
-308쪽

나무로 지어지면 내구성이 떨어진다지만 가회동, 옥인동, 돈암동 등 서울 시내 여러 곳에는 아직도 수십 년 된 한옥이 아무 문제없이 거뜬히 서 있다. 멀쩡한 집이 무너지는 경우는 오히려 콘크리트로 지은 집이며 아파트 재건축에서 볼 수 있듯 한국에서 콘크리트의 물리적, 사회적 수명은 20년을 채 넘기기 힘드니 나무보다 나을 것이 없다. 최근에 캐나다 통나무집이 마치 낭만적 전원을 즐길 만한 여유가 있는 상류층의 상징인 것처럼 과대 포장되어 유행하면서도 같은 나무집인 우리 한옥은 여전히 불편하고 재래적인 것으로 보려는 편견은 변하지 않고 있다.
-308쪽

한옥은 나무와 창호지로 지어지기 때문에 방안에 있더라도 다른 사람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간접 의사소통 방식에 의해 느낄 수 있다. (...) 이에 반해 프라이버시 보호도가 높은 폐쇄적인 방 속에 혼자 있다 보면 다른 사람의 존재는 한동안 관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방 속에 혼자 있던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져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 자체가 싫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투명한 공간을 갖는 한옥을 버리고 폐쇄적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 가족 사이에 대화가 줄어들고 이웃 사이에 멀어지게 된 이유이다.

-319쪽

서양의 전통 건축에서 건물의 내부는 전적으로 사적 공간이었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벽은 불투명하고 둔탁하게 폐쇄되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사였기 때문에 외부에 노출되면 안 되었다. 20세기 현대 건축은 한마디로 콘크리트와 철골이라는 새로운 기계 산업 건설 방식을 이용하여 전통 건축을 대체할 수 있는 투명하고 개방적인 공간을 창조하려던 작업이었다. 이러한 20세기 서양 현대 건축이 완성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동북아시아의 투명 공간이었다.

-321쪽

서양 현대 건축가들도 부러워하며 모방했던 한국 전통 건축의 대표적 특징이 정작 한국의 일반인들로부터는 버림받았다. 전문 건축가들이 한국 전통 건축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은 내용이 건물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로부터는 불편을 초래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 서구식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이제는 한옥이 지닌 장점은 장점으로서 작용하지 않는 반면 단점은 크게 부각되어 한옥이 사라지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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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존스가 문제다
크레이그 실비 지음, 문세원 옮김 / 양철북 / 2010년 8월
절판


"그러고 보니 스파이더맨은 뉴욕을 벗어나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단 말이지."
"왜?"
"어, 그러니까, 예르르르르를 들자면 말이지, 스파이더맨이 코리건에 와서 범죄를 소탕한다 치자. 그럼 영락없이 힘을 못 쓸 거야. 날아다닐 건물이 없잖아. 스파이더맨에게 필요한 건......"
"도시적인 환경이라고?"
"바로 그거요, 선생. 그러니까 내 말은, 스파이더맨이 고비 사막이나 남극에서 뭘 할 수 있겠느냐는 거야. 주어진 환경이 땅바닥밖에 없다면 말이야." -88-89쪽

"그러니까 그건 용기가 아니란 거지. 슈퍼맨은 강철 인간이잖아, 이이 멍청아. 천하무적이라고. 그러니 용감해질 필요가 없는 거야. 다치지 않는 걸 알고 총알에 맞서는 게 용감한 거냐? (...) 내 말의 핵심은 이거야. 잃을 것이 많을수록 용기가 더 많이 필요한 법이거든. 그렇기 때문에 배트맨이 슈퍼맨보다 우월하고 내가 너보다 무한정 똑똑하단 말씀." -94쪽

최근 들어 내게 일어난 끔찍스러운 일련의 사건들 중에 폭탄 투하 사건이 그나마 가장 덜 폭력적인 사건으로 느껴지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사실상 가장 끔찍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 사건에 용의자 사진이나 피 묻은 장갑 따위는 없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확실히 규정짓기 어렵다. 거리감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일수록 무신경해지고 무책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뉴스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는데 말이다.-208쪽

부모를 죽이고 아이들을 고아로 만든 후 크리켓 공 날리듯 내던지고는 얄팍한 거짓말이나 해 대는 세상. 남들보다 가난하고, 피부색이 어둡고, 또 부모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멀쩡한 사람이 평생 스스로를 쓰레기로 여기도록 만드는 세상. 삼십억이나 되는 사람을 초청해 놓고 전부 외롭게 만드는 세상. 사분의 삼이 물로 이루어졌다면서 아무도 시원하게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세상. -209쪽 -209쪽

위로란 얄팍하고 허무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문제를 덮어 버리는 것이 가장 나쁘다. 끝없는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잦아들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가능성들과 열린 결말, 그리고 사건의 조각들과 각본들. 영원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을 것이다. 가장 간절한 것은 진실 아닌가? 그 진실이 무엇을 담고 있건 간에 말이다. -211쪽

재스퍼 존스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다. 여자친구인 동시에 가장 친한 친구, 어쩌면 유일한 친구였으리라.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슬픈 일이다. 그토록 가까운 사람을,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사람을, 같이 도망쳐서 새롭게 시작하기로 약속했던 사람을 잃다니. 그리고 이곳에 와서 다시 그녀를 떠올리다니.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이곳에서. 끔찍한 일의 연속이다. 하지만 재스퍼 존스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재스퍼의 마음을 가리고 있는 슈퍼히어로의 복장을 벗어 던져야 한다. 그가 말한 상관하지 않는다는 표정,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자주 지어야만 했을까?
그렇게 살면 얼마나 외로울까? 재스퍼가 날 필요로 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에서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 함께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녀석이 나를 친구로 여기고 있는 건지 궁금하다. 그랬으면 좋겠다. -236쪽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내 고통은 물론 상대방의 고통도 같이 느꼈을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함에 있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 상대방처럼 짓밟히고 물에 흠뻑 젖도록 해주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다. 다시 채워진 빈구멍과도 같다. 빌린 돈을 갚는 것과 같다.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한 행동의 결과물이다. 이는 심하게 상처 입은 결과가 수면 위로 보낸 잔물결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는 말은 슬픔이다. 아는 것이 슬픔인 것처럼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때로 자기연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내 자신을 연다는 뜻이다. 껴안건 조롱하건 복수하건 간에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용서를 구하는 말이다. 착한 사람의 메트로놈은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진정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나아가게는 할 수 있다. 틈을 메워 주는 역할을 한다. 미안하다는 말은 성찬식과 같다. 제물이며 선물이다-338쪽

"그럼, 스스로가 정말 대견스럽겠구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거라, 알았지? 아저씨 말 알겠지? 오늘 넌 정말 위대한 일을 한 거야. 그것만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는 거다. 알겠니?" -347쪽

"찰리, 네가 그런 장면을 보게 되다니 아빠가 미안하구나. 괜찮니?"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길을 피한다.
"그래, 아빠도 그렇다고 말하면 네 기분이 좀 나아질지 모르겠다. 참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다."-348쪽

"믹 톰슨이 바보 겁쟁이라서 그래. 시궁창 인생을 사는 인간이지. 두고 보렴, 계속 저러고 살 테니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잡느니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편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단다. 하지만 언젠간 벌 받을 날이 오겠지. 그런 사람이 있는 곳엔 언제나 해리 롤링스씨 같은 사람들이 버티고 있으니까 말이야."-349쪽

패터슨의 저주. 제목 밑에 아빠 이름이 쓰여 있다. 나는 못된 아이처럼 입술을 실룩거린다. 벅틴의 질투. 견딜 수 없다. 당장 갈기갈기 찢어서 방에 흩뿌리고 싶다. 아빠의 친절하고 다정한 얼굴에 도로 던져 주고 싶다. 아빠의 비밀을 공유하면 멋질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제로 닥치고 보니 그저 배신감만 들 뿐이다. 내 가슴속에서 뭔가 대단히 소중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다. 마음씨가 비뚤어지고 속 좁은 놈이 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작품이 훌륭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내가 먼저 아빠의 서재로 찾아가 그간 힘들게 쓴 원고뭉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원고에 내 도장을 찍어서 말이다. 제목 밑에 쓰인 내 이름을 보며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373쪽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 그 일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건 아니잖아. 세상이 정해진 규칙대로만 돌아간다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을 거야. 하지만 확실한 진리는 말이지, 우리가 해야 한다는 거야. 해야만 한다고." -383쪽

음모와 왜곡이 난무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과 실제로 보았다며 주장하는 사람들이 판을 쳤다. 진실을 목 졸라 묻어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 같았다. 로지의 복막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완전히 다른 역사가 쓰이고 있었다. 거짓말과 추측이 하나 둘씩 쌓여 가면서 허구가 진실이 되어 갔다. 잭 라이어넬은 잉크와 똥을 뒤집어썼지만 그는 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괴물이 되었고 살인자가 되었다. 인간 말종, 미치광이가 되었다.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마을 전체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교회도 더 이상 그의 영혼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403쪽

그제야 나는 알게 된다. 그를 알게 된다. 가장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버려진 아이. 나는 항상 재스퍼를 랜들 맥머피라고 여겼고 나 자신은 힘없고 겁 많은 따개비라고, 그래서 그에게 붙어 공생하면서 용기를 위장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스퍼도 나와 같은 이유로 내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내가 똑똑하거나 믿을 만하거나 충성스럽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 아무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스퍼가 그날 밤 내 방 창문으로 찾아온 것은 완전히 겁에 질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내 방 창문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불 주위로 몰려드는 곤충처럼 내 방 창문까지 이끌려 온 것이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야 했던 것이다. -451쪽

재스퍼 존스도 우리 같은 아이들처럼 두려워한다면 나 같은 아이는 평생을 가도 겁이 없어질 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제프리 루가 떠오른다. 배트맨에 대한 우리의 토론도, 용기에 대한 마크 트웨인의 말도. 어쩌면 용기가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우리가 걷는 걸음걸이에 얼마큼의 무게가 실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용기란 그런 것이다. 브루스 웨인도 여전히 두려워하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왜냐하면 그는 빌어먹을 배트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란 결국 정직함이다. 그것만이 비결이다. -452쪽

"재스퍼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도 아니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리고 넌 내가 아는 만큼도 재스퍼를 모르잖아. 로라가 아는 것만큼 말이야. (...) 넌 재스퍼에게 벌을 주고, 짐을 지우고, 또 로라가 바랐듯이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리고 너 자신에게도 똑같은 벌을 주고 싶어 하는 것 같고. 하지만 너나 재스퍼의 잘못이 아니란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458쪽

새가 하늘을 맴도는 모습과도 같다. 하늘을 나는 느낌을 갖고 싶으면, 매의 발에 긴 끈을 묶어 하늘로 날리면 된다. 더 높이 올리고 싶으면 얼레를 풀고는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보면서 스릴을 만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그 연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지면 다시 끌어내리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땅에 서서 구경만 할 뿐 따라 올라갈 수가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을 붙들 수 있을 만큼 체중이 충분히 무겁다는 것도 멋진 일 아닌가? 그래서 그 연을 하늘에 고정시키고 한동안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말이다. 잘 두었다가 보고 싶을 때 꺼내어 바라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처럼 말이다.-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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