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에서의 사색
이시우 사진 / 인간사랑 / 2007년 6월
품절


군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초소에
햇살이 가득 들었습니다.

긴장 속의 평화
관성보다는 차라리 긴장이 좋습니다.
관성은 무시를 전제로 하지만
긴장은 평등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18쪽

새로운 전투기에 밀려
전시장으로 밀려난
고철 전투기의 거미줄에
이슬이 마디마디 맺혀 서로를 비추고 있었습니다.

평화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관계의 발전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32쪽

지뢰로 발목을 잃은 조만손 씨는
자다가 가끔 있지도 않은 발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눈을 뜹니다.
묻어둘 순 있어도 사라질 순 없는 것.
진실입니다.-36쪽

어느 새 나무는 철조망의 키를 넘어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습니다.
진보란 주인으로서의 성장이며 보수란 관성으로서의 정체입니다.
-53쪽

어둠은 어둠대로
고독은 고독대로 아름답습니다.
외로움은 상처의 조건이 아니라
성숙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62쪽

누가 말했습니다.
싱그런 담쟁이 넝쿨이 하루빨리 자라 철조망을 덮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철조망이 그 안으로 숨어버리면 더 문제입니다.
단절 없는 청산은
낡은 것을 편들기 마련입니다.-79쪽

나는 사진계가 우리 시대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진계에는 황석영도 없고 윤이상도 없으며, 이응로도 없다. 예술가는 시대의 맨 앞에서 시대를 예감하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예지와 헌신을 전제로 해서만 헤밍웨이의 저 유명한 말은 가능하다. "위대한 예술가이면서 위대한 사상가가 아닌 사람은 없다." 누군가는 이 말을 뒤집어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지도자이면서 위대한 예술가 아닌 사람은 없다." 우리는 예술이 지도자의 선택과목에서 필수과목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술가는 그래서 시대의 스승이 되어야 한다.-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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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지성 시인선 333
김광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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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른 베르크의 별

밤마다 북녘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처음에는 이름 모를 붙박이별인 줄 알았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반짝이는 불빛
나중에는 그것이 중세의 고성인 줄 알았다
그러나 슈테른베르크 산봉우리에 올라가보니
그것은 산정에 구축한 레이더 기지였다
밤마다 하늘에서 반짝이던 별
갑자기 땅으로 떨어지고
산정에서 빛나던 고성의 불빛
꺼져버리고 말았다
차라리 가보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마음속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을 것을-126쪽

효자손

우체국 앞 가로수 곁에
아낙네가 죽제품 좌판을
벌여놓았다 대나무로 만든
광주리와 키와 죽침 따위에 섞여
효자손도 눈에 띄었다 건널목
신호등이 황급하게 깜빡이지 않았더라면
그 조그만 대나무 등긁이를 하나
사왔을지도 모른다
노인성 소양증만 남고
물기 말라버려 가려운 등을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며 장난 삼아
간질간질 긁어주던
고사리 같은 손
이 작은 효자손이 어느새 자라서 군대에 갔다
옆에는 나직한 숨결마저 빈자리
어둔 창밖으로 누군가 지나가며
빨리 떠나라고
핸드폰 거는 소리
뒤에서 슬며시 등을 떠미는 듯
보이지 않는 손
벽오동 잎보다 훨씬
커다란 손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부드러운 손-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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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8 2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0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19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1-20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01-1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집트 여행 준비는 잘 되고 있지요?
핫팩은 준비하셨나~ ^^

마노아 2010-01-19 14:37   좋아요 0 | URL
헤헷, 준비 진행중이에요~ 핫팩도 두 개 구입했어요. 유후~
 
그곳이 멀지 않다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5월
구판절판


천장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13쪽

밀물이 내 속으로

쌓고
또 쌓고
쌓는지도 모르고
쌓고
싸는 것의 허망함을 알면서
쌓고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오기로
쌓고
이것도 먹고사는 일이라고 말하며
쌓고
부끄럽다 얼굴 붉히면서도
쌓고
때로 공허함이 두려워서
쌓고
지우지 못해 끊지 못해
쌓고
바닥도 끝도 없음을
쌓고
또 쌓다가

어느 날
내가 쌓은 모래성이 밀물을 불러왔다-58쪽

이끼

그 물들
그냥 흘러간 게 아니었구나

닳아지는 살 대신
그가 입혀주고 떠나간

푸른 옷 한 벌

내 단단한 얼굴 위로
내리치며 때로 어루만지며 지나간
분노와 사랑의 흔적

물 속에서만 자라나는
물 속에서만 아프지 않은

푸른 옷 한 벌-64쪽

速離山에서

가파른 비탈만이
순결한 싸움터라고 여겨온 나에게
속리산은 순하디순한 길을 열어 보였다
산다는 일은
더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는 듯
평평한 길은 가도 가도 제자리 같았다
아직 높이에 대한 선망을 가진 나에게
세속을 벗어나도
세속의 습관은 남아 있는 나에게
산은 어깨를 낮추며 이렇게 속삭였다
산을 오르고 있지만
내가 넘는 건 정작 산이 아니라
산 속에 갇힌 시간일 거라고,
오히려 산 아래서 밥을 끓여 먹고 살던
그 하루하루가
더 가파른 고비였을 거라고,
속리산은
단숨에 오를 수도 있는 높이를
길게 길게 늘여서 내 앞에 펼쳐주었다-69쪽

부패의 힘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세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를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 되는 나여-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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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1-17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 시집을 읽으면 정말 쩡~ 하고 울리는 시가 많아요.

마노아 2010-01-18 00:01   좋아요 0 | URL
어느 분이 올렸던 시가 좋아서 시집을 샀더랬는데, 역시 좋은 시가 많더라고요. 쩡~하는 울림!

꿈꾸는섬 2010-01-17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나희덕 시집...마음이 쩡~~~해요.

마노아 2010-01-18 00:01   좋아요 0 | URL
이분 시집을 또 구입해야겠어요. 너무 좋네요.^^

같은하늘 2010-01-1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보관함으로...

마노아 2010-01-18 20:36   좋아요 0 | URL
제가 밟았던 수순을 그대로~
 
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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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빠른 화연이의 사과. 화연이의 말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상처는 내가 받았습니다. 거짓 소문은 살을 보태가면서 빠르게 퍼졌습니다. 하지만 정정된 진실은 더디게 퍼지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사라져버렸습니다. 아직도 아빠가 자살했다고 믿는 아이가 있을 정도입니다.-21쪽

이렇게 아주 사소한 일로 선생님이 정신줄을 놓고 마는 일을 두고, 아이들은 초짜 선생님의 통과의례, 즉 신고식이라고 했다. 신고식을 거치면 비로소 대한민국의 정식 선생님이 되어, 앞으로 계속 때리는 선생님이 되든 무관심으로 초지일관하는 선생님이 되든 한다는 것이다.-66쪽

엄마가 준 컵을 꼭 쥐었습니다. 차가웠습니다.
"천지야, 속에 담고 살지 마. 너는 항상 그랬어.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잘해도 싫어요, 소리는 못 했어. 만약에 지금 싫은데도 계속하고 있는 일 있으면, 당장 멈춰. 너 아주 귀한 애야, 알았지?"
이제 그만 멈추려고요. 눈물이 자꾸 굵어졌습니다.
"에이, 나도 갑자기 라면이 슬퍼지네. 라면이 너무 슬퍼."
미안해요, 엄마.-110쪽

"그런 사람하고 왜 결혼했어?"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결혼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더라. 누가 누굴 지켜. 그거 웃긴 거야."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지 그랬어?"
"지쳤지 나도. 사람 안 변하더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원래'라는 말이야. 걔가 원래 그런다. 원래 그러는 거 모르고 결혼했냐? 환장할 뻔했다. 뭘 해도, 원래라는 말 앞에서 다 무너지는 거야. 처자식 굶고 있는데, 원래가 어딨냐? 나도 진짜 원래 그런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원이 없겠더라."-147쪽

"어찌된 게 요즘 애들은 단체전은 없고 개인전만 있는 거 같아요. 그렇게 혼자 다 하려니 알아야 할 게 얼마나 많겠어요."
"부모님들이 시상대에 여럿이 올라가는 것보다, 자녀 혼자 올라가는 모습을 더 원하는 게 아닐까요?"
"하하하. 생각해보니 나도 그러네요. 우리 딸들이 제일이라는 말, 입에 달고 살았거든요. 나도 다 너희들을 위해서란다, 라고 하면서 아주 우아하게 폭력을 행사했죠. 너 꼭 쟤 이겨야 돼, 결국 그거였거든요."-160쪽

"그럼 잘 챙겨. 나처럼 잃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네 동생, 내 동생 아니고, 네 아빠, 내 아빠 아냐. 근데 넌, 여전히 내 친구야. 화연이 편지만 가져갈게. 그리고 미라야, 분명히 말하지만 천지는 멍청한 게 아니라 착한 거야. 착한 애는 가만히 놔두면 되는데, 꼭 가지고 놀려는 것들이 생겨서 문제지. 자기 맘에 들면 착한 거고, 안 들면 멍청한 건가? 나, 간다."-195쪽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2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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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 김용택 동시집
김용택 동시집, 이혜란 그림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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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토란 잎에 내린
이슬비가 모여
또르르 굴러
개미 위에
툭 떨어진다.
"어!
이거,

물벼락이여?"-21쪽

지구

발등이 젖어요.
아침이거든요.
쑥이랑, 잔디랑, 씀바귀랑, 토끼풀이랑, 다 이슬을 달고 있어요.

해가 뜨네요.
이슬들이 반짝 문을 엽니다.
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집,
그 집으로 어디 한번 들어가 볼까요.

아침 풀밭에서는
가만가만 걸어요.
내가 들어 있는
이슬이 깨지거든요.

지구도 작은 이슬방울이랍니다.-30쪽

꼴등도 3등

달리기를
했다.

다해 1등
재석이2등
나 3등

우리 반은
모두 세 명이다.-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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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0-01-11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이 시집 귀여워요. 나도 <꼴등도 3등> 좋아해요. 근데 이 시집 그림, 참 좋지 않아요?

마노아 2010-01-11 23: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림도 참 좋았어요. 밑줄긋기에 그림 올리는 기능이 있으면 같이 올리고 싶었답니다. 하다 못해 똥싸는 어린이마저도 사랑스러웠다니까요.^^

꿈꾸는섬 2010-01-12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좋아요.^^ 함박웃음이 절로 나와요.

마노아 2010-01-12 12:04   좋아요 0 | URL
거울같은 동심의 세계에요~^^

같은하늘 2010-01-12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김용택 선생님의 시집은 참으로...ㅎㅎㅎ
운동 못하는 우리 큰아이 작년에 처음으로 하는 운동회에서 여섯명 달려 5등하고 꼴등 안했다고 좋아했는데... -.-;;;

마노아 2010-01-12 12:07   좋아요 0 | URL
초등학교 때 8명 달리는 달리기에서 3등 해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졸업할 때까지 3등 안에는 못 들어봤어요.ㅜ.ㅜ

무스탕 2010-01-12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미한테 정말 물벼락이 떨어졌겠네요 ^^
만화영화 '호튼' 이 생각났어요 :)

마노아 2010-01-12 23:09   좋아요 0 | URL
호튼을 보지 못했지만 무척 귀여울 것 같다는 예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