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 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이양호 지음, 박현태 그림 / 글숲산책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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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라면, 아이 동이라는 글자에서 보듯 어린이가 지은 것이거나 어린이가 짓지 않았더라도 어린이에게나 어울리는 내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만을 마음에 두고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엮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래동화는 어린이만을 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선, 전래동화의 엄지손가락이라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그림 형제는, 그들이 엮은 책 제목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이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린이만이 아니라, 어른도 그 책의 독자로 여긴 것입니다.-12쪽

<동화학>이라는 두툼한 책을 지은 루돌프 가이게르. 그는 자기 책 머리말에 "메르헨, 즉 동화는 본래 어른을 위한 이야기였다. 그렇긴 하나, 동화의 위대함은 어린이에게도 그것을 들려줄 수 있다는 데에 있다"고 쓰고 있습니다. 경북대 독문과 교수인 김정철 님도 <그림 형제의 동화>에서 "동화가 원래는 성인들을 위해, 성인들이 구연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라고 쓰셨습니다.-13쪽

우리 말 '동화'로 옮긴 독일어 낱말은 메르헨인데, 그 낱말은 단지 '작은 이야기'라는 뜻일 뿐 거기에 '어린이'를 뜻하는 어떤 것도 들어 있지 않다.-14쪽

그림 형제가 편찬한 사전 이야기를 좀 더 할게요. 형은 1785년에 태어나서 1863년에 죽었고, 동생은 1786년에 태어나서 1859년에 죽었는데, 두 형제는 '독일이라는 본디꼴(정체성)'을 이뤄내려고 무척 애썼어요. 그것을 위해 두 형제는 200여 편에 이르는 옛이야기를 모아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 모음>이라는 책을 내고, 독일어 사전을 편찬했어요. 그런데 그 사전의 규모가 워낙 컸기에, 아(a)부터 에프(f)까지 밖에 못하고 그들은 세상을 떠났어요. 나머지는, 형제가 죽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갈무리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사전의 규모는 깨알만한 글씨로 A4 용지를 가득 메웠는데, 그 쪽 수가 3만을 넘는 사전. 더구나 두 형제가 다산 정약용과 함께 공기를 마셨던 같은 시대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두 형제의 어마어마한 뜻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거예요. 지금도 두 형제가 이루어낸 사전이 독일어 사전 중 가장 크고, 권위가 있어요. -129쪽

산이건 평지건 상관없이, 나무들이 엄청나게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곳을 그들은 발트wald라고 해요. 이 단어를 그냥 '숲'이라고 옮기기엔 맞지 않는 것 같아, '엄청난'을 덧붙여서 옮겼어요. 우리말 '숲'은 크다는 생각을 별로 일으키지 않고 오히려 낭만적인 느낌을 자아내잖아요? 그런데 독일의 발트는 우리말 산맥에 해당할 만큼 큰 규모이거나, 우리나라 한 도시만한 넓이에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찬 곳을 말하거든요. 당연히 잘못 들어가면 빠져나오기 어려워요. 지리산에서 길을 잃은 거나 다름없어요. 우리의 새하얀 눈 아이는 뒷동산이 아니라, 무시무시하게 큰 산맥을 헤쳐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것도 혼자서. 그곳에서 우리의 아가씨가 맞닥뜨린 건 돌, 가시덤불, 짐승이었어요.-135쪽

이야기꾼이 얼마나 섬세한가를 우리는 여기서도 알 수 있어요. 단 셋으로 숲에 있는 것, 즉 세상에 있는 것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몽땅 말했으니 얼마나 뛰어난 이야기꾼인지 아시겠죠? 돌은 생명이 없는 것을, 가시덤불은 생명은 있되 옮겨 다닐 수 없는 것을, 짐승은 생명도 있고 옮겨 다닐 수도 있는 것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거든요. 다시 말해 새하얀 눈 아이는 숲에 있는 모든 것 즉 세상에 있는 온갖 험상궂은 것을 맞닥뜨리면서 살았던 거예요. -135쪽

일곱이라는 수는 도대체 서양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일곱 켜를 가지고 한 옥타브를 만들고, 7일을 일주일이라 하는 걸로 봐서, 숫자 7은 무엇을 의미한다 할 수 있죠? 그래요. 일곱은 매듭을 짓는 수라 할 수 있어요. 매듭을 지은 다음에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니까, 되풀이의 수라 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이 아이의 나이가 일곱 살이라는 것을 생물학적인 나이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 이제 아시겠죠? 생물학적인 나이라기보다는, 여태까지를 매듭짓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는 길목에 서 있는 아이의 정신을 그렇게 말한 거라고 보는 게 훨씬 나을 거예요.-143쪽

창세기에 따른다면, 하느님이 세상을 며칠 만에 창조하죠? 엿새만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하루를 쉬었다 하니까, 하느님이 일하기를 시작할 때부터 끝마칠 때까지 며칠이 걸린 거죠? 쉬는 것도 거기에 넣어 생각해야 하니까, 이레가 걸린 거예요. 음악에서도 쉼표까지 함께 넣어서 박을 계산한다는 것 알고 있죠? 이렇게 일곱이라는 숫자는 서양인에게 아주 특별한 수예요. 왜 이 이야기에서 일곱 살 먹은 새하얀 눈 아이가 일곱 고개를 넘어, 일곱 난쟁이가 사는 오두막집에 이르렀다고 하는 줄 이제 눈치챘죠?
일곱 살은 상징성만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사람에게 특별한 뜻이 있어요. 일곱 살을 앞뒤로 젖니가 빠지고, 간니가 나오기 시작하거든요. 발도르프 교육의 샘을 판 슈타이너는, 한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데 있어, 이갈이를 매우 큰 매듭으로 보았답니다. 이갈이를 할 즈음에야 어린이는 지적인 것을, 그것도 이론의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성의 길을 통해서 받아들일 만한 상태가 된다고 그는 말했어요.-144쪽

광석이 다른 돌이나 흙과 달리, 가치가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죠? '빛난다'는 점에 있지 않나요? 이제 앞의 물음, '광석을 캐러, 왜 산으로 다닐까?'를 풀 수 있겠네요. '빛'이라는 낱말이 그 열쇠예요. 즉 광석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빛을 내는 거예요. 옛 서양 사람들은 광석은 별에서 온 것이라고 믿었어요. -149쪽

산을 거룩함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은 비단 기독교만 그런 것은 아니예요.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 대부분이 산꼭대기였으며, 지금도 무당들은 산에 올라가 기도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공자도 "태산에 올라서야 이 세상(에 있는 부귀가)이 참으로 자잘한 것임"을 알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유학에서 최고 경지인 "仁者는 산을 좋아할"밖에요. -150쪽

우리 옛 분들은 사농공상이라고도 하고, '농사는 천하를 먹여 살리는 큰 뿌리'라고도 하여 농부를 꽤 좋게 여겼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서양 사람들은 성 안에서 사는 도시인과 성 밖에 사는 사람으로 나누고, 성 밖에 사는 농부를 천민이나 다름없이 여겼어요. 장사치나 수공업자들은 성 안에 사는 도시인이기에, 아무리 볼품이 없어도 그들을 농사꾼보다는 윗길에 놓았죠. 그러니 이 여자가 농사꾼 마누라가 되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볼품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로 보아야 해요.-161쪽

난쟁이들은 사방에서 환히 보이는 유리로 된 널에 그 주검을 넣은 다음, 그 관에 금으로 그 애의 이름을 쓰고, 그애가 왕의 딸이었음을 밝혔어요. 새 하얀 눈 아이가 '왕의 딸'이었다는 말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기서 나와요. 독일어에 공주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이야기꾼은 그 낱말을 쓰지 않고 굳이 '왕의 딸'이란 말을 여기서 쓰고 있어요. 기독교에서 쓰는 '하느님의 아들/딸'이란 말을 떠올린다면, 여기서 쓰는 "그녀는 왕의 딸이었다"는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그런 글을 널짝 위에 쓴 다음, 일곱 난쟁이는 그 널을 산 위에 가져다 놓았어요. -181쪽

올빼마, 까마귀, 그리고 작은 비둘기가 널 속에 누워있는 새하얀 눈 아이를 슬퍼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세 날짐승이 상징하는 것. 우선 셋 모두 하늘을 난다는 점. 우리의 아가씨 안에서 하늘다운 것이 구실을 하지 못하자, 하늘을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하늘다운 새들이 그 애의 죽음을 슬퍼하는 거라 말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미네르바(올빼미)는 황혼녘이 되어야 날아오른다"는 말 들어본 적 있으세요? 일이 끝날 무렵에야 알게 된다는 '앎의 비극성'을 시적으로 나타낸 말이지요. 여기서 올빼미는 앎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리스 신화에서 올빼미는 지혜의 여신인 아테네의 속성으로 나오고 있거든요.-183쪽

세 가지가 무더기 짓는 것을 한 번 세어볼까요? 눈처럼 새하얀, 피처럼 붉은, 창틀처럼 검은;피 세 방울; 뾰족뾰족한 돌, 가시투성이, 사나운 짐승; 띠, 빗, 사과; 세 날에 걸친 난쟁이들의 울음; 올빼미, 까마귀, 작은 비둘기까지 여러 번 나오지요?-185쪽

기독교에선 이른바 삼위일체를 말한다는 것 들어봤죠? 하느님, 예수님, 성령이 이름은 달라도 바탕이 하나라는, 다시 말해 '셋인 하나'라는 게 그거예요. -186쪽

뛰어넘다가 흔들렸지. 온 시간이 흔들렸어. 온 시간이 흔들렸으니, 알곡 아닌 쭉정이 다 날아갈 밖에. 제 몸 아닌 것, 떨어지지 않고 배겨낼 수 있겠나? 종들이 큰 품 들여 하늘과 땅을 흔들었고, 그 덕에 우리의 아가씨도 번쩍 눈을 떴구나.-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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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2-25 0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굳이 동양의 사상과 접목하려 한 것은 제 취향은 아니지만, 새하얀 눈 아이를 처음으로 올바르게 번역한 책이어서 제가 정말 사랑하는 책이어요. 왜 백설공주냐구요! 백설이 뭐여요 백설이 ㅠㅠ

마노아 2010-02-25 10:52   좋아요 0 | URL
이 책 읽기 전에 이미 번역이 무지 잘못됐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암튼 제가 이 책을 만난 건 전적으로다가 Jude님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크리스티앙 자크와 함께 하는 이집트 여행
크리스티앙 자크 지음, 김병욱 옮김 / 문학세계사 / 2006년 11월
품절


덴데라, 사랑의 여신의 영지

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신전은 신성과의 연계를 이루고 있는 기념물들 가운데 마지막 기념물이다. 이 왕조의 여신의 이름 하토르는 <호루스의 거처>를 뜻한다. 그녀는 독수리 호루스가 탄생하는 하늘이요, 별들의 조화가 지배하는 우주다. 종종 하토르는 암소의 예민한 귀를 가진 여자의 모습이나, 혹은 파라오에게 영원한 젊음의 젖을 바치는 천상의 암소의 모습으로 그려지곤 했다. -118쪽

아몬은 <숨어있는 자>를 의미한다. 그는 너무나 신비로워 아무도 그의 참모습을 모른다. 그는 두 개의 높은 깃을 세운 영관을 쓴 인간의 몸으로 화신한다. 때로 그의 피부는 푸른색이다. 활기를 주는 대기의 신인 그는 뱃사공들의 수호신이 아니었을까? 신성한 두 동물에 그의 온갖 신비가 깃들어 있다. 그 하나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에너지의 상징인 숫양이요, 다른 하나는 세상이 시작될 때 최초의 비명을내지르며 알을 낳아 거기서 우주를 탄생시킨 나일강의 기러기이다.-129쪽

카르나크의 유적들은 백 헥타르가 넘는 면적에 걸쳐 펼쳐져 있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한 건물들 가운데 가장 넓은 면적이다.
부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카르나크는 약 8만 명이 살고 있었고 65개의 마을과 2000km2 이상의 땅, 그리고 상당수의 가축들과 조선소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신전은 왕이 일단의 대사제들에게 경영을 위임한 엄청난 사업들의 핵심이었다. 파라오는 카르나크에서 왕위에 즉위했다. 아침에 그는 왕궁을 떠나 신전으로 갔으며 거기서 심신을 정화시켰다. 그리고는 하트셉수트의 오벨리스크 옆에 있는 홀로 들어가 두 개의 왕관을 받았다. 그런 다음 <왕의 상승>의식, 즉 위대한 종교의식에 입문하는 의식을 치렀다. 새 파라오는 그렇게 아몬과 하나가 된 후에야 박수 갈채를 받으며 파라오로 인정받았다.-131쪽

룩소르 신전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들 중 하나(높이 25m, 무게 250톤)가 아직 남아 있으며, 다른 하나는 파리로 옮겨져 콩코드 광장에 세워져 있다. 이 오벨리스크들과 황금으로 도장된 소형 피라미드들 덕택에, 이곳은 성화(聖化)되어 위험한 힘들이 흩어졌으며 천상의 힘들이 이 신전 쪽을 향했다. 이 뾰족한 돌탑들의 토대에는 토트 신의 동물인 비비 원숭이들이 빛의 탄생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151쪽

(룩소르 신전) 탑문에 표현된 장면들은 람세스 2세가 히타이트족들의 이집트 침략을 막고 그들의 진군을 멈추게 하기 위해 벌인 카데시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왕이 이 전투를 여러 곳(카르나크, 라메세움, 아부심벨)에서 상기시킨 것은 그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 이상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파라오는 이 전투 때 배신을 당해 홀로 버려졌었다. 혼자서 다수의 적과 맞서게 된 그는 아버지인 아몬 신의 구원을 받아야 했다. 하나됨과 빛의 화신으로서, 왕은 대형화된 모습으로 현신하여 다수의 적과 어둠을 물리쳤다.-155쪽

남서 방면에서 우리는 예배행렬을 하나 보게 되는데, 봉헌물들을 지닌 열일곱 <왕자들-여기서 왕자란 하나의 호칭일 뿐이다. 이 칭호를 갖는다고 왕의 혈육인 것은 아니다-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행렬의 스타>는 역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살찌운 여섯 마리의 거대한 황소들이다. 황소들은 단장된 모습들이며 두 뿔 사이에 꽃 장식까지 달고 있다. 그들 중 두 마리의 등에는 흑인 한 명과 아시아인 한 명이 타고 있다.-156쪽

나일강 서안의 지하분묘들과 다른 신전들을 향해 가다 보면, 마치 들판에서 길을 잃은 듯한 두 개의 거대한 조각상을 보게 된다.
이 초대형 동상들은 하푸의 아들 아멘호테프 시공장이 아멘호테프 3세를 위해 건설한 그 방대한 '수백만 년의 신전'의 유적들이다. 석공들은 하나의 조각상을 만드는 데 하나의 사암 덩어리를 사용했다. 그 재료는 북쪽 700km 지점에 위치한 붉은 산 광산에서 채굴했는데, 어떤 마술적/상징적 이유들로 인해 거리나 운송 수단이 어떻든 이 사암 덩어리를 이용해야만 했다.
아멘호테프 3세의 '카'가 거대한 옥좌에 앉아 있고, 옥좌에는 두 대지의 결합이라는 중요한 의식 행위가 형상화되어 있다. 나일강의 두 신이 상이집트를 상징하는 백합과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왕의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왕의 어머니와 딸이 조각상의 양쪽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27년, 지진이 일어나 테베 지역을 뒤흔들면서, 이들 대형 동상들에 뜻밖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지진의 충격으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동상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균열들이 돌에 <이상 작용>을 일으켜 괴이한 현상을 빚어냈다. -164쪽

해뜰 무렵이면 동상이 어떤 노래 소리 같은 기이한 소리를 내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에티오피아의 영웅 멤논이 매일 해가 뜰 때마다 구슬픈 탄식을 내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의 이름은 대형 동상들을 가리키는 데 쓰이는 말인 <기념물>을 뜻하는 이집트어 '메누'에 가깝다. 그의 어머니, 장밋빛 손가락들을 가진 여명은 이슬을 만들어 아들에게 다시 생명을 줌으로써 그의 호소에 응답했다. 그 대형 동상들에 깃든 '카' 역시, 매일 아침 의식에 쓰이는 말 <평화 속에서 깨어나라>가 발설될 때마다 되살아났던 게 아닐까?
이 기적은 고대 세계 전체에 유명해졌다. 기원후 130년, 동양에 관심이 많았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수차례나 이 기묘한 연주를 들으러 왔다. 한데 또 다른 로마 황제 루시우스 셉티미우스가 199년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그 동상들을 복원하고자 손을 댔던 곳이다. 뜻은 좋았으니 그 결과는 통탄스런 것이었다. 노래가 그쳐버렸기 때문이다.-164쪽

하트셉수트는 이집트 왕 투트모시스 2세의 첫째 왕비였다. 왕이 죽자 그녀는 후궁이 낳은 10살 나이의 아들 투트모시스 3세의 섭정을 하다가 스스로 파라오가 되어 기원전 1498년부터 1483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여성이 왕의 지위에 오른 것이 그때가 처음은 아니며, 또한 그것은 이집트의 어느 누구에게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자 그 다음 왕으로 예정된 투트모시스3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투트모시스 2세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통치 기간을 은폐하면서 자신을 투트모시스 1세의 통치에 곧장 연계시키고자 했는데, 그리하여 이 여 파라오의 이름으로 된 일부 카르투슈들에 망치질을 했다. 하지만 그중 여럿은 손을 대지 않거나 알아볼 수 있는 상태로 남겼다.-168쪽

라메세움

첫번째 안뜰, 제2탑문 앞에 있는 벼락맞은 초대형 동상 하나가 이곳에서 펼쳐진 예술이 얼마나 눈부신 것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이 <왕자들의 태양>은 높이가 20m에 무게는 천 톤이 넘는다. 이 '카'의 조각상의 강력한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석공예술은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정교하다. -180쪽

허물어진 제1탑문에는 람세스 2세가 통치 5년 차(카데시 전투)와 8년 차 때 히타이트족과 시리아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의 일화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집트 군대가 적의 요새 여러 곳을 탈취하여 적들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파라오가 신성한 빛을 대신하여 카오스의 힘을 물리치고 있다. 그의 앞에는 화살 맞은 시신들과 흩어져 달아나는 도망자들뿐이다. 파괴를 모면하기 위해 카데시 市는 파라오에게 굴복한다. 오론트 강 위에는 박살난 수레들과 시신들이 떠가고 있다.-181쪽

메디네트 하부

사람들은 이 유적이 대체적으로, 람세스 3세가 모델로 여긴 람세스 2세의 장례신전 라메세움을 모방하여 세워진 것으로 간주한다.
보존 상태가 훨씬 좋은 메디네트 하부는 '도시 신전'의 놀라운 예라 할 수 있다. 파라오의 대신전 외에도, 다른 여러 신성한 건물들과 왕궁, 사제들의 거처, 신성호수, 나일강의 수위표, 작업장, 행정청, 선창, 창고, 도서관, 마구간, 우물 등은 아직도 그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6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일했으며, 재상이 여기에 자신의 사무실을 두고 법정을 주관했다.-184쪽

서 테베 : 왕들의 계곡

<계곡>이란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 공간을 기대했다가는 당황하게 될 것이다. 태양에 그을린 돌들의 세계를, 가파른 절벽 사이에 갈색과 황적색 돌들로 된 성소를 발견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 준엄한 풍경을 고독과 메마름이 지배하고 있으며, 이곳을 보호하는 여신, '서방의 첨봉'인 바위산 위를 새매들이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날고 있다. 아무래도 그 일부가 인간의 손에 의해 재단된 듯한, 왕들의 계곡을 굽어보는 이 피라미드(산)는 시선을 끈다. 왕의 무덤들이 이 피라미드의 제실들로 여겨지는 것처럼, 이곳이 유적지로 선택된 데는 이 산의 존재도 한몫했다.
왕들의 계곡은 신왕국 파라오들의 마지막 거처이다. 아멘호테프 1세(기원전 1551-1524)가 이 장소를 선택했다. 신성한 주인으로 숭배받기는 했으나 그는 이곳에 매장되지 않았다. 이 유적지의 최초 거주자는 투트모시스 1세(기원전 1524-1518)다.-196쪽

왕들의 계곡은 험하고 은밀하지만, 여왕들의 계곡은 개방적이고 다가가기가 쉽다. 바로 그래서 이 계곡은 많은 고통을 받았다. 도굴꾼들이 무덤을 약탈했고 개중에 어떤 무덤들은 불살라지기도 했다. 후기 왕조 시대에는 여러 분묘들이 미라와 석관 안치소로 이용되었다. -208쪽

'네페르'라는 말은 <미, 완벽, 성취>를 뜻하는 말로, 그 완벽함은 굳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조화로운 발전(이 경우는 천상의 낙원에서의)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갖는다.
분묘의 수는 대략 아흔 개로 헤아려지나, 많은 무덤들이 파괴되거나 단순한 동굴로 변해버렸다. 발굴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체계적인 탐사를 해나간다면 여러 가지 놀라운 발견들을 하게 될 것이다.
이곳에는 신왕국 때(특히 제19왕조와 20왕조의)의 여왕들과 <왕자들>이 묻혀 있다.-208쪽

부활을 위해 남성은 오시리스가 되어야 했으나, 여성은 오시리스이자 하토르가 되어야 했음을 상기하자.-211쪽

서 테베 : 데이르 엘-메디네흐, 진실의 광장

장인들은 세속의 <눈들과 귀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비밀리에 작업을 했다. 그들은 파라오와 재상의 직속이었고, 자기들 고유의 법정과 학교를 소유했으며, 독신으로 지내거나 가정을 꾸려, 밤낮으로 파수병이 지키는 높은 담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함께 생활했다.
평화로이 살며 자신들의 예술에만 헌신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이 정부로부터 제공되었다. 빨래를 하는 이들, 빵 굽는 이들, 도공들, 직조공들, 어부들, 정원사들이 그들을 위해 일했다. 물은 당나귀가 끄는 마차와 짐꾼들이 매일같이 날라주었다. 약간만 지체해도 심한 항의를 받았다.-227쪽

숫양의 머리를 가진 도자기의 신 크눔은 도자기를 빚을 때 쓰는 둥근 회전원판인 녹로 위에서 신들과 인간들과 동식물들을 빚어냈다. 크눔은 대지가 아직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어느 언덕에 출현했다. 태초의 물과 하늘이 뒤엉켜 있었다. -235쪽

규모로만 본다면(길이 137m, 너비 80m) 에드푸는 이집트에서 카르나크 대신전 다음으로 큰 신전이다. 이 신전이 다른 요소들(사제들의 거처, 창고들, 작업장들)은 사라져버리고 없는 한 성지의 심장부였음을 잊지 말자.

이 건물은 고왕국 이후 호루스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일련의 건물들 중 제일 나중에 세워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 에우에르게테스 통치 때인 기원전 237년 8월 23일에 착공되어 57년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건축가의 이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다. 사카라의 계단식 피라미드의 창조자요, 이집트의 모든 신전의 건설자인 임호테프가 바로 그다!-242쪽

콤 옴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어느 정도 번영을 누리던 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 때, 古 호루스에 해당하는 그리스의 아폴론을 기리는 새 신전 건설에 결정적 도움을 준 이들은 바로 이 지역에 주둔하던 부대 소속의 기병들과 보병들이었다.-253쪽

고대에 아스완은 누비아와의 국경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는 좀스런 세관이 하나 있었고, 황금이며 상아, 흑단, 동물가죽 등 아프리카로부터 들여온 산물들이 거래되는 큰 시장이 열렸다. 아스완이라는 이름 자체가 <무역>을 의미하고 있지 않은가?-259쪽

엘레판티네 섬에는 그 유적들로 미루어 판단해볼 때 웅장한 건물이었을 크눔 신전 외에도, 제6왕조 때의 위대한 인물 헤카-이브라는 현자에게 바쳐진 작은 성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수위표와 90계단으로 된 돌층계를 보게 된다. 층계 벽에는 물의 높이를 잴 수 있는, 쿠데(약50cm)별로 나뉜 눈금들에 해당하는 표식들이 있다.
그리스인 에라토스테네스가 기원전 230년에 지구의 둘레를 잰 곳이 바로 여기다. 그것은 발견이라기보다는 재발견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집트 신전의 기술자들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듯하기 때문이다.-261쪽

아스완은 특히 방대한 채석장들로 이름 높았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최상급 화강암뿐 아니라 사암과 섬록암 등을 채굴했다. 시공장들은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돌들을 찾아 이곳까지 왔다. 게다가 적재할 짐의 하중에 맞는 배들을 만들기도 했는데, 거대한 돌들과 오벨리스크들을 운송한 그 노동 조직에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채석장에는 종종 태양이 매섭게 내리쬔다. 햇살이 바위들 위에서 반사하고, 열기가 무시무시한 가뭄으로 풍경을 압살한다. 아직도 이곳에서는 석공들의 노동 흔적들과, 길이 42m에 무게가 1200톤이나 나가는 소위 <미완성> 오벨리스크 하나를 볼 수 있다. 아마도 지진 때문인 듯 화강암 덩어리에 갈라진 금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막 다듬기 시작한 이 엄청난 거석을 그 자리에 내버렸던 것이다.-262쪽

필레는 여마법사 이시스의 영지이다. 아스완에 첫 번째 댐이 세워지기 전, 여행객들은 이 유적지의 매혹적인 아름다움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댐은 이 섬의 불행이었다. 일년에 몇 달씩이나 물에 잠기게 했다. 12월부터 6월까지, 기념물들의 꼭대기만이 물 밖으로 나와 있었으며, 그래서 사람들은 조만간 훼손될 것을 염려했다.

1960년에는 첫 번째 댐보다 훨씬 큰 새 댐의 건설이라는 새로운 위험이 이 불행한 필레 섬을 위협한다. 이제 신전은 결정적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이다.
국제사회가 동요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신전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해체 작업은 1974년에 시작되었다. 낱낱이 해체된 건축물들은 필레 섬을 떠나, 일년 내내 물에 잠기지 않는, 근처의 작은 섬 아길키아로 옮겨졌다. 24개국이 협력했고 4만 5천 개의 벽돌들이 옮겨졌으며 원래의 섬과 같은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준공식은 1980년 3월 10일에 거행되었다. 신전이 다시 태어난 날이었다.-265쪽

문자 기록들이 가리키고 있듯이, 이시스는 생명의 원천이요,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마법사이며, 천신들에게 별자리를 정해주는 여군주이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그의 동의없이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것에 그의 봉인이 표시되어 있다.-273쪽

1960년 3월, 전세계는 누비아를 위협하는 위험을 발견하고서 동요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장 후르시초프와 동맹을 맺은 나세르가 아스완에 새 댐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는데, 그렇게 되면 누비아는 물에 잠길 터이므로 주민들을 몰아내야 할 뿐더러 다수의 빼어난 기념물들과 문화가 파괴될 수밖에 없었다.
누비아를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러 나라들의 재정적 지원과 유네스코 덕분에 모든 건물들이 물에 잠기게 되는 상황은 면했다. 일부 건물들은 해체되어 나세르 호수 기슭에 다시 세워질 수 있었고, 또 어떤 것들은 외국으로 옮겨졌다. 덴두르 신전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있고, 데보드 신전은 마드리드에 있으며, 타파 신전은 레덴(네덜란드)에 있고, 엘-레시야 신전은 토리노 박물관에 있다.-275쪽

아부심벨은 람세스 2세가 많은 노력을 기울인 누비아의 심장이다. 그가 황량한 사막 유적지에 치세 24년에 착공한 이 건축물은 그의 통치 때 이루어진 건축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281쪽

상하 이집트의 왕관을 쓰고, 이마에는 우라에우스 뱀이 있고, 가짜 수염을 단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 있는 대형 동상들은 엄청난 기세를 과시하고 있다. 그 동상의 샌들 아래에는 왕의 적들이 영원히 굴복당해 있다.

대형 동상들 사이사이로 여성 형상들이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옆의 보호자들에 비하면 매우 연약해 보인다. 그들은 람세스 2세의 어머니와 아내와 딸들이다. 그들의 역할이 결코 장식적인 것만은 아니다. '카'의 에너지를 관리하여 그것이 대형 동상들 속에 머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2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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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일시품절


"이 사람들에게 씨앗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에요."
이야기인즉 작년에 한정된 구호 자금 때문에 한 마을은 씨를 배분하고 그 옆 마을은 주지 못했단다. 안타깝게 비가 오지 않아서 파종한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씨를 나누어준 마을 사람들은 씨를 심어놓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수확기까지 한 명도 굶어 죽지 않았는데, 옆 마을은 아사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똑같이 비가 오지 않는 조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씨앗을 뿌렸다는 그 사실 하나가 사람들을 살려놓은 것이다. 이곳에서의 씨앗이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 있었다.-76쪽

보통 이스라엘인의 교육열만 뜨겁다고 알고 있지만 팔레스타인인의 교육열은 뜨겁다 못해 끓어오른다. 대부분 하루 2천 원 미만으로 살아가는 가난한 난민촌 사람들이 구호 단체에게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식량도 옷도 아닌 학교 건립이다.-234쪽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하늘로 솟아야 할까요, 땅으로 꺼져야 할까요? 우리도 살 땅이 필요하고 가족들과 고향에서 최소한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수백만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이스라엘의 정착촌 역시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1967년에 맺어진 제네바 협약은 점령국이 점령지를 식민지로 만들 목적으로 인구와 군대를 이주시키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240쪽

"우리 오빠를 죽인 이스라엘 군인, 빨리 커서 다 죽여버릴 거예요."
그저 인형놀이나 해야 할 아이의 입에서 그렇게 험한 말이 거침없이 나오는 게 안타까웠다. 단 한 번도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아보지 못한 파티마가 어른이 될 때쯤이면 그 평화라는 것이 찾아올까? 아니, 아이가 그때까지 살 수나 있을까? 운 좋게 어른이 되더라도 이렇게 뼛 속 깊은 증오를 가지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244쪽

무스타파에게 동생이 떠내려간 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아이들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아픈 마음을 다독여주고, 너는 피해자가 아니라 용감한 생존자라고 알려주는 것이 이 아이가 앞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하다. 이 치료는 복잡한 상담이나 비싼 약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섞여 놀거나 그림이나 간이 연극을 하는 등 아주 간단한 과정으로 이루어진다.-2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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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안식처, 이집트로 가는 길
정규영 지음 / 르네상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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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집트 왕가의 결혼을 살펴보면 근친결혼의 측면 외에 한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그것은 파라오의 왕권은 왕비 우선 순위 1위와 결혼하고 있는 동안에만 정통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파라오는 그의 왕비가 생존해 있는 경우에 한해 파라오로서 군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파라오는 혈족에 상관없이 가족내 왕비 서열에 들어 있는 모든 여자와 미리 결혼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왕비가 먼저 죽을 경우 발생할지도 모를 원치 않는 퇴임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왕권의 모계 상속을 나타내는 한가지 예가 람세스 2세이다. 람세스 2세는 자기 딸들은 물론,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와도 결혼했다. 이와같은 결혼은 왕가의 피를 순수하게 하려는 의도 외에, 왕위의 굳건한 유지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왕위의 계승이 모계 상속이 아닌 남성 위주로 이루어졌다면, 구태여 여동생이나 자신의 딸,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결혼하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41쪽

우리가 잘 아는 클레오파트라의 결혼만 해도 그렇다. 처음에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큰오빠와 결혼한다. 바꾸어 말하면, 클레오파트라의 큰 오빠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함으로써 왕권을 계승한 것이 된다. 오빠가 죽자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남동생과 결혼한다. 남동생은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함으로써 왕권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집트를 침공했을 때, 그가 이집트 왕위를 합법적으로 계승하여 통치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도 역시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하는 길이었다. 로마에 결혼한 아내가 있었던 안토니우스 역시 왕권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42쪽

왕권을 장악한 하트셉수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자는 파라오가 될 수 없다는 수천 년의 전통을 깨고, 공식석상에서 남장을 했으며 파라오의 가짜수염을 붙였다.
대 이집트 제국의 실질적인 파라오가 된 하트셉수트 여왕은 애절한 사랑을 한 파라오로도 기록을 남기고 있다. 그녀가 파라오 재위기간 중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이집트의 왕관없는 파라오'라고 불렸던 신전 건축가 센무트였다.
...
건축가 센무트는 여왕의 명령에 의해 장제전을 건축하면서 하트셉수트 여왕의 무덤 옆에 자신의 비밀 무덤을 설계하였다고 한다. 비록 그의 비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지만, 죽어서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한 그의 소망이 바로 여왕 자신의 소망이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43쪽

현대 건축 공학자들은 100년에 15cm 정도가 침강하는 땅이라면 사무 빌딩용 건물 부지로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미국의 국회의사당은 지난 200년 동안 12cm 정도 침강하였다. 그런데 약 63억 kg이나 나가는 대피라미드는 5천년 동안 불과 1.25cm 밖에 가라앉지 않았으며, 더구나 피라미드가 위치한 기초 부분은 지진과 지반운동에 가장 영향을 덜 받는 지역이다.
...
1992년 10월 이집트에 강도 6도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약 400명의 사망자와 만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수백 채의 가옥과 콘크리트 건물이 한 순간에 무너진 엄청난 지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가 입은 피해는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 TV에서 지진 발생 당시 피라미드 속에 들어가 구경을 했던 관광객과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피라미드가 약간 흔들리는 것만 느꼈을 뿐이라고 말했다.-152쪽

기원전 2,600년 무렵은 아직 철기 시대 이전이므로 이집트인들이 가진 연장 중에 가장 강한 것은 청동연장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집트에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연장이나 도구가 거의 없었다. 청동연장을 사용했다 해도 채석장에서 2.5톤에서 10톤에 이르는 돌을 청동정을 이용해 오차가 없이 자르고 다듬는 일을 하기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 왕묘실에 있는 무게가 40톤까지 나가는 화강암들을 청동 연장을 사용하여 다듬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석조 블록 하나를 캐고 다듬고 이동하고 제자리에 놓는 데 평균 1시간이 걸린다고 가정하고,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고 한다면 하루에는 10개의 블록을, 1년에는 3,650개의 블록을 샇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속도라면 쿠푸 왕의 피라미드를 쌓는 데 걸리는 시간은 헤로도토스가 말한 대로 30년이 아니라 약 715년이 되어야 한다.

-153쪽

20년 동안 250만 개의 돌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하였다는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의 말을 여과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어떻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한 돌의 운반 방법으로 많은 학자들이 믿고 있는 것은 이른바 '굴림대론'이다. 굴림대 역할을 하는 통나무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고 앞에서 인부들이 밧줄을 이용하여 끌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경사론'이 있다. 피라미드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옆에 제방을 비스듬히 쌓아 그 둑길로 돌을 운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무엇보다도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무한한 인력의 공급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을 모순으로 꼽을 수 있다.
-153쪽

현대 공학의 이론을 빌리면 무게 2.5톤~15톤짜리 석조 블럭 하나를 옮기기 위해서는 약 150명 정도의 사람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헤로도토스의 말대로 20년 동안 250만 개의 돌을 운반했다면 하루 평균 1,400개의 돌을 운반해야 했을 것이고, 한 블럭당 150명의 남자가 매일 네 차례 왕복했다고 가정하면 52,500명의 남자가 동시에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러나 52,500명의 장정들이 20미터도 채 되지 않는 넓이의 길 위에 꽉 들어찬 채 돌을 나르는 일이 가능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분명 '아니다'이다.
돌을 굴리는 데 필요한 통나무 역시 구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서 자라는 나무로 대표적인 것은 대추야자 나무였는데, 이집트인들이 주 식량원이던 이 나무를 단순히 돌을 나르기 위해 잘랐을 리 만무하다. 이 나무들을 레바논 등과 같은 해외에서 수입을 했다고 쳐도 엄청난 무게의 바위에 눌린 나무들이 부서져 버릴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154쪽

지금까지 이야기한 대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피라미드 건설 당시 단단한 돌을 다듬을 수 있는 연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헤로도토스가 말한 기간 안에 피라미드를 완성시킬 수 있는 노동력이 없었으며, 돌을 운반하는 일이 산술적으로나 방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의 세 가지 이유 때문에 "피라미드는 여전히 신비에 싸여 있다"고 말한다.-154쪽

대피라미드의 외계인 건설 주장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방사선 탄소동위원소 측정방법에 의해 대피라미드가 피라미드의 초기 형태라고 알려진 조세르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보다 최소한 450년은 먼저 건설되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 건설된 7번째나 8번째 피라미드가 아니고 가장 먼저 세워진 피라미드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후에 지어진 작은 피라미드들은 대피라미드를 모방한 것들이며, 결국은 피라미드 건설에 실패한 것들이 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외계인(화성이나 기타 행성에서 온)들이 기자에 최초로 대피라미드를 건설했다. 그 후에 이집트인들이 이 피라미드를 모방하려고 90여 차례 시도하였으나 모두가 실패로 끝났다.'라고 말이다. 너무 비약시킨 결론인 듯싶지만 이집트의 수도 이름인 카이로가 '화성(카히라)'과 관계가 있는 것도 새로운 각도에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의구심은 또 다른 의구심을 낳는다.-155쪽

발견 당시 이 태양선은 땅 속에 매장되어 있었는데 무덤에 넣기 위해 완전히 분해되어 있던 상태였다. 나무의 재질은 레바논 삼나무였으며 생전에 실제로 파라오가 사용했던 배를 부장품으로 묻은 것임이 밝혀졌다. 신기한 것은 이 배를 만드는 데 단 하나의 쇠못도 사용하지 않았으며 나무와 나무는 구멍을 뚫은 후 전부 끈으로 묶어 만들었다는 점이다.-156쪽

수천 년 동안 미소를 머금은 스핑크스가 바라보는 방향은 동쪽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의 신앙에서 '동쪽'이 갖는 의미는 단순한 방향의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해가 뜨는 동쪽은 흔히 생명과 부활의 세계와 동일시되는 반면 서쪽은 죽음의 세계를 나타낸다. 이집트의 모든 피라미드가 전부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159쪽

콥트교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와는 달리 특이하게도 네 끝 부분이 손가락처럼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다. 세 갈래 갈라진 부분은 각각 성부, 성자, 성신의 성삼위일체를 나타낸다고 한다.-174쪽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일생동안 자신의 이름을 딴 60여 개의 도시를 건설한 것으로 유명한데, 불행하게도 대왕 자신은 살아 생전에 이 알렉산드리아를 보지 못했다.-232쪽

알렉산드리아의 쇠퇴는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주민들과 로마의 황제 사이에서 빈번히 불화가 발생함으로써 시작하였다. 콘스탄티노플 대제는 알렉산드리아의 대안으로 급기야 자신의 이름을 딴 새 도시를 건설하는데 이 도시가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 콘스탄티노플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제 지중해 연안에 또 하나의 경쟁도시를 갖게 된 것이다. -234쪽

알렉산드리아의 쇠퇴를 가속화시키는 데는 자연도 한몫을 하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일강의 흐름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푸스타트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는 나일강의 두 지류 중 서쪽 지류는 원래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지중해로 흘러갔다. 그러나 이 지류가 물길을 약간 동쪽으로 틀어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로제타를 통해 바다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
설상가상으로 알렉산드리아는 중세 유럽의 십자군 전쟁 때 공격을 받아, 나폴레옹이 1798년 그의 군대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약 4천 명 정도의 주민이 사는 가난한 어촌으로 전락해 있었다.-235쪽

로제타석의 발견으로 학자들이 가졌던 기대와 흥분은 잠깐, 아부 키르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함대에게 대패한 나폴레옹은 영국 함대의 포위망을 뚫고 단신으로 본국에 귀환했다.
프랑스군의 패배와 함께 영국은 이집트를 점령하고 프랑스인들이 발견한 로제타석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프랑스인들은 로제타석의 복사본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상형문자의 해독작업은 그 후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기타 유럽 국가들에서 행해질 수 있었다. -259쪽

나세르에 따르면 영국은 이집트의 44% 지분마저 빼앗아 갔다. 운하의 소득은 1955년에 3500만 영국 파운드, 즉 1억 달러였는데 그 중에서 이집트가 챙긴 돈은 어이없게도 3백만 달러로 불과 3%에 불과했다.영국은 이집트로부터 매년 1억불을 가져갔지만 향후 5년 동안 이집트에 대한 원조액으로 고작 7천만 달러만을 책정해 놓고 있었다. -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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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02-11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줄긋기만 봐도 굉장한 정보가 들어 있는 책이네요.
마노아님이 이런 곳을 다녀왔다는 얘기고...^^

마노아 2010-02-11 01:38   좋아요 0 | URL
하핫, 결국 그런 얘기가 되네요.^^;;;

카스피 2010-02-11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넘 부럽습니다^^

마노아 2010-02-11 18:10   좋아요 0 | URL
아직 오지 않은 카스피님의 멋진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gimssim 2010-02-11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 땜에 이집트를 스쳐지나가듯 했는데 책을 보니 좀 꼼꼼히 공부하고 다시 가보고 싶네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아요.

마노아 2010-02-11 18:10   좋아요 0 | URL
저도 더 많이 공부하고 가지 못한 게 후회되었어요.
그래도 모자란대로 만족하려고 해요.^^

2010-02-11 17: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1 2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0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17: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2-12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스트아시아판타지 1 - 천제지자
오연 글.그림 / 애니북스 / 2008년 3월
품절


영고

소도는 모계사회의 전통을 이어갔다. 소도에서 태어난 선인들은 교육을 받다가 나이가 들면 소도 밖으로 유람을 떠나 기술을 전파하고 자신의 학문을 만들어 정치를 하다가 10월 상달이 되면 다시 소도로 와서 집단행사를 하였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소도의 번영과 생명의 줄을 만들기 위해 집단 성교를 하여 새 생명의 씨앗을 내렸는데, 이런 행동은 과거 인간의 도가 없을 때 자연에서 배운 것이었다.(개미와 벌 등에서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제천의식 후의 집단 성교는 우리만이 아니라 이집트과 수메르 지역 및 인도 초원지대와 태평양 건너 인디안, 멕시코, 남미에서 고루 이뤄진 행동이다. 집단 성교를 위해 대마를 흡입하였는데 이 또한 집단의식과 제천행사에는 당연히 행해지던 것이었다. 그러나 농경위주의 시대가 도래하자 하늘의 기운이 필요없다고 느낀 농민들은 그런 현상을 이해 못하며 금기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사는 후대에 이르러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등으로 불렸고, 현대에 이르러 개천절로 변형되었다.-84쪽

동이

과거 동북아시아에서 활동한 민족이다. 한자의 원형을 만든 종족인-중국 학자들도 인정한다. 갑골문을 만든 상나라도 동이족의 방계이고, 한자의 원형은 동이들이 살았던 지역에 주로 발견된다-고조선을 지칭한 말로도 해석되며 화하족의 동쪽지역에 살았던 민족이어서 동이라고 불렸다. 동북공정을 만든 중국 사학자 손진기는 동이를 한나라 때부터 중화에 흡수된 민족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후대 중국사서에 기록된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우리역사를 동이열전이라고 따로 기록한 것에 위배된다. 동이는 우리민족의 기원이 되는 호칭이다. 동의 기원이 '동쪽'이 된 것은 후대에 일이고, 갑골문과 금문에 의하면 자루형태로 묘사되어져 있다.-소도에거 길을 떠나는 검은 옷 입은 선인을 유심히 보라-'자루'라는 글자는 자루를 묶을 때 '동여매다' '동앗줄'이란말로 아직 우리말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멀리 자루를 메고 이동하는 사람을 묘사한 게 아닌가 싶다. 동쪽이란 뜻은 화하족의 시선에서 동쪽에 살던 사람이었기에 생겨난 개념 같다. 이는 중국의 사전엔 활을 멘 사람, 동방지인으로 설명되어 있다. 큰 활을 잘 쏘는 민족...바로 우리 아닌가. -134쪽

큰 사람이 큰 활을 메고 있는 모양이다. 이 만화에서는 옷을 표현할 때 가급적 목둘레를 지나가는 옷깃을 왼쪽 방향으로 그렸는데, 그 이유는 활을 쏠 때 현재 남자들 옷처럼 오른쪽 방향으로 했을 경우엔 화살을 쏠 때 옷에 화살이 걸렸기 때문이다. 과거 유목 생활을 하고 사냥을 하던 고대인들의 모습에서 그 사실을 찾을 수 있으니, 유심히 보면 사냥하는 남자들의 옷깃은 전부 왼쪽방향이다.바로 고구려 고분벽화다.-134쪽

화하족

지금 중국을 지배하는 한족을 말한다. 우리의 시각에서 서쪽에 있기에 서토인이라고도 한다. 과거 서역지방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낙양, 서안일대를 차지하고 살아온 민족을 뜻하며, 농경중심적이었고 채색토기를 가지고 있었다. 한족을 지칭하는 중화... 고문과 금문에 의하면 중은 땅 가운데에 깃발을 꽂은 모양이다. 마을을 상징하는 깃발은 언제나 잘 보이는 마을 가운데에 세워두었기 때문에 후대에 가서 그 깃발 형태에서 가운데란 뜻이 생긴 것이다. 태양이 막대기 가운데에 있으니 가운데란 뜻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금문을 보면 깃발 모양이란 걸 알 수 있다. 그 다음으로 화는-한왕 머리에 새겨진 글-상형자로서 겹겹이 둘러진 꽃잎을 묘사한 것이다. 바로 모란꽃이다. 장미와 모란꽃의 원산지가 바로 낙양, 서안 일대이다. 그들이 왕조를 세우면 언제나 주나라의 예법을 따르는데, 주나라가 꽃을 숭배한 민족이자 그 일대에서 활동한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건 그들만의 전통이다.-134쪽

신단수

신령스러운 나무. 단군의 '단'을 차음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웅녀가 남편을 만나게해달라고 소원을 빈 곳도 신단수였다. 각저총에서 씨름-씨름은 고대에는 종교행사였다. 스모경기를 보면 현재는 단순한 스포츠지만 그 원류는 고대 제사풍습이란 걸 알 수 있다-하는 사람 옆에는 신단수가 크게 서 있다. 또한 제단유적에도 신단수의 흔적이 보인다. 고대인들은 신단수를 통해 신이 내려온다고 믿었다. 과거엔 마을 입구에도 마을을 지켜주는 신단수가 있었으며, 심지어 현대에도 아파트 앞 큰 마당공간에 큰 나무를 심어놓는다. 무의식중에 문화원형이 살아 있는 증거다. 이 만화에서는 중요한 건축물과 동맹의식을 하는 제단에도 묘사되었다. 고대풍물을 그릴 때는 꼭 넣어야 할 아이템이다.-134쪽

바람

해와 달

제삼서화에서 제천의식 후 바람이 불고 긴 끈들을 꼬이게 한 후 태양과 달이 동시에 있을 때 남녀가 교접행사를 가졌다. 남녀가 만나면 통해야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르신들은 연애를 '바람난다'고 말한다. 바람이란 말은 묘하게 교접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꼬시다'란 말에도 기원이 있으니 남녀가 꼬여야 자식을 낳고, 실도 조여야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해모수와 유화의 야합을 여와신화로 차용한 건 바로 여와가 생명을 낳은 탄생의 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와의 모습은 항상 몸이 꼬여있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 연결이 기막히게 정확해진다. 그리고 태양이 질 무렵 달을 그렸는데, 과거 우리 전통혼례는 이 시간에 이루어졌다. 반대쪽에 달이 떠올라 하루 중에 태양과 달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해질무렵이야말로 음양이 최고조인 시간이다. 그리고 우린 그 시간에 결혼을 해왔다.-134쪽

삼족오, 두꺼비

천신의 사자인 삼족오는 태양 속에 숨어 사는 전설상의 새이다. 천문수준이 높았던 고대에 흑점을 발견해 삼족오로 변형시켰다는 설도 있다. 삼족오는 양을 상징하는 태양 안에 있는 그림으로 묘사되며, 발이 세 개인 이유는 양을 상징하는 수가 홀수이기 때문에 둘보다 셋을 차용했다는 설과 3이라는 숫자에 신성성을 둔 우리 고유의 문화형식이라는 설이 있다. 반면 두꺼비는 땅을 상징하는 영물로서 달 안에 있다. 달은 음을 대표하는 것인데 달에 두꺼비가 혼자 있지 않고 토끼와 같이 있는 이유는 두꺼비 혼자 있으면 홀수가 되므로 음인 달에 어긋나 두 마리 영물을 집어넣어 음수인 짝수로 만들었다는 의미로 보인다. 덕화리 2호 무덤에서 이 형식이 극명하게 보인다. 이 만화에서 삼족오는 앞으로 다가올 태양을 암시하는 것이고, 두꺼비는 해모수가 땅에서 받는 고통을 의미한다.-222쪽

해모수는 스물세 살에 하늘로부터 내려왔으니 단군 고열가 57년(임술) 4월 8일(음력)이다. 우리는 4월 초파일을 불교에서 석가가 태어난 날로 기념하고 있는데, 정작 다른 불교국가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지 않는다. 석가의 탄신일은 2월 8일이며, 이는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생일에서 비롯한다.(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기념하는 곳은 우리 뿐이며,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되어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전통이다) 불교가 이 날을 차용한 것을 보면 해모수의 생일이 얼마나 큰 행사로 이어져 내려왔는가를 알 수 있다.-222쪽



한자라는 것은 동양문화의 결합체이다. 한자를 잘 살펴보면 그 말의 어원이나 문화원형을 알 수 있다. 이름 앞에 붙는 姓에는 女가 들어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모계사회를 보여주는 글자다. 그러나 그 후대에 나오는 조상이라든가 손자, 손녀를 뜻하는 孫이란 단어에 들어 있는 子는 부계사회를 뜻하는 남자 상징어다. 조는 현재 비속어지만 조+ㅈ(ㅅ)의 변형이고, 손이란 글자에도 역시 아들이 들어간다. -222쪽

웅심산

해모수와 유화가 합궁한 곳. 그렇다면 곰 웅자가 들어간 것은 우연인가? 이런 코드는 신화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 환단고기에 보면 환웅은 웅씨의 딸과 맺어지며, 삼국유사에서 환웅은 웅녀와 결합해 단군을 낳는다. 이렇듯 유화는 웅녀 코드의 연장선이며, 그녀를 통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한국 특유의 곰 숭배 사상이 보인다.-222쪽

'보리'는 과거 유목민들이 정착하여 심은 작품이지요.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며 동쪽 지역민들이 잘 재배한다 하여 서토인들이 그들을 예맥족이라 부르기도 했지요. 과거에는 기장이 주요 곡물이었기 때문에 제사 때 무당이 기장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제사지내는 곳을 일컫는 '사직'이란 말에 기장을 뜻하는 '직(稷)'이 남아 있지요.-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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