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네 방향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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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속표지에 마치 인형극장의 막이 오른 것처럼 열려진 무대에 배우(인형)들이 인사하는 것같은 모습이 보인다. 부자연스런 움직임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마리오네뜨처럼도 보인다. 이보나 스타일의 이런 딱딱한 그림이 주는 적절한 어울림이다.

유럽의 동쪽을 굽이져 흐르는 비스와 강가에 아주 오래된 도시가 있다.
작가님의 고향 폴란드를 떠올리며 책을 읽는다. 길고도 복잡한, 어찌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가 스며있는 곳. 그러나 작가님은 그런 슬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런 일상 속의 공간을 꾸며주었다.

시내 한가운데 네모반듯한 광장에는 600년 전에 세워진 커다란 시청 건물이 있다. 시청 건물 위로 시계판 네 개가 동서남북을 향하고 있는 네모난 시계탑이 서 있다. 이 시계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동서남북에는 집들이 있고, 그곳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당연하게도.


누군가에게는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빨리 지나가는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가슴이 터져라 가지 않는 시간이지만, 공평하게 흘러가는 시간. 백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똑같이 흘러가는 이 시간을 작가는 네 방향에서 표현했다.

첫번째는 1500년에서 출발한다. 때는 2월의 어느 날이었고, 시간은 아침 6시다.
동쪽 집에서는 항상 부엌을 보여주고, 남쪽 집에서는 작업실을, 그리고 서쪽은 아이들의 방이며 북쪽은 거실을 표현한다. 각각의 방향에서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 보자.

요리사 아주머니가 어부아저씨가 얼음구멍을 뚫고 잡아온 물고기를 보고 있다. 오늘 저녁에는 큰 잔치가 있을 예정이다. 지금은 사육제 기간이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를 유심히 보시라. 뒤에도 몇 차례 나올 예정이니까.

1500년을 살고 있는 기술자 빌헬음의 남쪽 공방. 가죽으로 책을 만들고 있다. 500년 뒤에 만들 책과 나중에 비교해 보면 재밌다. 문명의 역사이자 인류의 역사가 변화해 가는 과정을 시간 순으로 잘 표현해 주었다.

서쪽 집 아이들 방에 어린이들이 잠들어 있다. 눈썰매와 아기 침대를 비교해 볼 수 있고, 이 시대 이 지역에서 유행하는 문양같은 것도 눈여겨볼 수 있다. 2월의 아침 6시면 아직 해가 뜨기 전일 것이고, 아이들은 당연히 꿈나라에 머물러 있다.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따뜻하다.

북쪽 집의 거실 풍경도 보인다. 먼 여행을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이른 아침에 떠나야 할 만큼 먼 거리인가 보다. 옷과 장신구, 그리고 가구에 그려진 무늬들이 눈길을 잡는다. 이런 느낌이구나.

시간을 백년 뛰어넘어 보자. 1600년 4월이다. 시간은 아침 9시.
뭔가 분주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시간이 아닌가.
작품 속 시간은 부활절을 하루 앞둔 토요일이다.
기독교 최대 명절이다. 사람들의 들뜬 기분을 미리 짐작해볼 수 있다.

동쪽 집은 부엌이 보이는 방향이다. 부활절 음식 준비가 한창이다. 부활절 케이크 바바에 넣을 달걀흰자를 저어 거품을 내고 있는 우치아 아주머니가 보인다. 양념이 되어서 조각난 생선. 얼라, 100년 전에도 등장했던 생선이 이젠 조리 과정 중에 있다.
우치아 아주머니의 자세는 명화 그림의 패러디에 해당되겠다. 정말 그럴싸하다.

남쪽 집 공방에서는 구두 제작이 한창이다. 100년 전에 책을 만들게 했던 그 가죽이 이제는 구두의 재료가 되었다. 테오필은 주교님이 신을 신발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내일 있을 부활 미사에서 주교님이 신을 구두니 중요한 순간이다.

서쪽 집 아이들 방에는 부활절 달걀에 무늬를 그리고 있는 아해가 보인다. 침대에는 아파서 누워있는 오스카도 있다. 다음 날인 부활절에는 막내 여동생 테레사가 세례를 받을 예정이다.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아이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산다고 돌아가신 증조 할머니가 말씀 하셨다 한다.

북쪽 집 거실에는 카타쥐나 아가씨가 내일 딸의 세례식을 기다리는 친구에게 줄 흰 불라우스에 수를 놓고 있다. 앞서 등장한 서쪽 집의 테레사의 엄마가 친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쩌나. 밖에서는 강물이 범람하고 있고, 가족들은 곧 이 안락한 집을 떠나야만 한다.

1700년이 되기까지, 이 도시의 생활은 전처럼 윤택하지 못했다. 무역이 이전처럼 많은 이익을 주지 못했고, 전쟁도 도시를 봐주지 않았다. 스웨덴 군대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성 외곽 지역이 불타 버려 다시 재건되지 않았다. 광장에서는 이따금 처형되는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사람들의 일상은 이어졌다. 시간은 여전히 똑딱똑딱 흐른다. 1700년 6월의 어느 날, 오후 1시의 풍경이다.

동쪽 집 부엌이다. 이날은 일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인 하지. 성 얀 축일 행사가 있는 날이다. 슬라브 민족이 지켜오던 태양제와 기독교가 결합한 축제일인 성 얀 축일은 6월 12일에 행해진다. 이날 밤 젊은이들이 강가에 나와 꽃관을 띄우는데, 상류에서 여자가 띄운 꽃관을 하류에 있던 남자가 받으면 두 사람의 사랑이 맺어진다고 한다. 그야말로 로맨틱한 행사다. 위도가 높은 나라에서는 여름이 짧기 때문에 하지제는 큰 축제다. 이 책에는 이런 식으로 배경이 되는 지역의 정치, 문화, 종교, 음식 등등... 여러가지를 간접경험할 수 있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참 꼼꼼한 작가님이시다.

북쪽 집 거실에서는 로스네르 씨네서 말다툼이 벌어졌다. 좀 전에 친 한낮의 천둥 소리가 사람들의 기분을 더 사납게 만들었나보다. 두 사람들의 외동딸이 가난한 조각 장인과 사랑에 빠져, 자기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면 집을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며 부모님을 협박하였다. 로스네르 씨 부부는 오늘 두 연인이 성 얀 교회에 몰래 만나 비스와 강으로 꽃관을 띄우러 갈 거라는 사실을 모른다. 두 연인의 성 얀 축일이 이곳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 될 것인지 몹시 궁금하다. 거실의 분위기와 부모님의 옷차림을 보건대 로스네르 씨네 집은 제법 부유한 편인가 보다. 가난한 조각 장인과 엘리자가 부디 행복하기를!!

남쪽 집 공방은 이제 시계방이 차려져 있다. 가장 위쪽에 걸려있는 벽시계를 유심히 보자. 뒤에 다시 출연할 예정이다.^^

서쪽은 아이들 방이다. 앞의 장 그림에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는 장면이 나왔는데, 이번 그림에서 아이들이 흠뻑 젖어 등장했다. 각각의 개성을 살리면서 연속성과 개연성을 계속 추구하는 작가님의 센스가 돋보인다. 아이는 연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내일은 영명축일.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을 지닌 가톨릭 성인의 축일을 기념하여 축하하는 날이다. 가톨릭에서는 이 날을 제2의 생일로 여긴다.

이후 백 년 동안, 비스와 강가의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겹겹의 불행이 찾아왔다. 스웨덴 군대가 다시 쳐들어 왔고, 아름다운 시청 건물과 함께 시계탑과 시내의 집들이 불에 탔다. 앞서 등장했던 시계 공방의 기술자의 후손이 다시 시계탑을 세우고 시계를 수리하지 않았을까.

도시에는 흑사병이 돌았고, 프러시아 사람들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도시는 가난해졌고, 어려운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구두 기술자는 구두를 만들고,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몇백 년 동안 그랬듯이, 교회 앞에는 거지들이 앉아 있었고 뱃사람들은 강을 통해 바다로 목재를 날랐다.
그렇게 1800년이 되었다. 8월의 어느 날, 오후 5시다. 햇살이 가득한 여름의 늦은 오후 시간이다.

동쪽 집에서는 여전히 부엌 풍경이 보인다. 요리 중인 부인의 뒤로 낯익은 그림이 보이는데 누구 그림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유명한 그림! 생강빵이 유명한 곳인 만큼, 아주머니는 저녁에 만들 생강빵 준비에 여념이 없다. 반죽에 들어갈 후추와 정향, 생강과 계피를 절굿공이로 잘게 부숴둔 터였다. 그릇들에 담긴 식재료들을 보는 것도 재미나다.

남쪽 집 공방은 모자 장인이 살고 있다. 까다로운 손님이 프랑스 패션 잡지에서 본 모자를 주문했고, 그 모자를 쓴 자신의 초상화를 외국에 나가 있는 약혼자에게 보낼 생각이라고 했다. 마틸다는 그 손님이 무척 부러웠지만, 12년 뒤 자신이 어떤 잘생긴 프랑스 장교와 사랑에 빠져 비스와 강변의 도시를 떠나, 죽을 때까지 지금은 알지도 못하는 언어로 말하며 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직 몰랐다. 당연하게도. 들고 있는 책 속에서 그 당시 유행하던 여러 패셔너블한 모자를 감상할 수 있다. 멋지구나!

서쪽 아이들 방에서 엄마가 정리를 하고 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간 아이들은 며칠 뒤 방학이 끝나기 전에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엄마는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도와주느라 바빠질 것이다. 엄마는 벽에 걸린 아이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했다. 벽에 걸린 그림은 누군가의 사진을 붙인 것인데 작가님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혹시 작가님 자신이거나 작가님의 아이들?

북쪽 거실에는 그틀리브 씨가 초대 손님과 만찬의 마무리를 즐기고 있다. 벽에는 100년 전에 제작된 시계가 걸려 있다. 위에서 보고 내려온 바로 그 시계다. 그야말로 골동품 시계다.
고틀리브 씨 부부는 손님에게 아직은 귀한 커피와 마지판(아몬드 간 것에 설탕과 장미유를 넣어서 만든 과자)을 디저트로 대접한다. 아주 귀한 설탕은 은으로 만든 함에 넣고 열쇠로 잠가 보관했는데 열쇠가 어디로 갔는지 몰라 오늘 커피에는 설탕을 넣지 못했다. 이 열쇠는 뒤에 다시 등장한다. 잊지 말기를!

다음 100년 동안도 이 도시는 전쟁을 비켜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들어왔고, 러시아의 군대도 지나갔다. 또 그뒤엔 프러시아 군대가 들어왔다. 이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고 폴란드인과 독일인, 유대인이 뒤섞여 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군인이 되었다. 그야말로 전쟁의 세기였다.

낡은 나무다리 대신 철로 만든 다리가 세워지고, 광장에는 이 도시를 세계에 알린 유명한 천문학자의 동상이 세워졌다. 코페르니쿠스를 말한다.

때는 1900년 10월, 가을이 깊어가는 어느 날의 저녁 8시 풍경이다. 가을비가 내렸고, 해가 져서 캄캄하다. 멀리서 전차 소리가 들려온다. 5년 뒤에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첫 자동차가 이 도시에도 등장할 것이다.

동쪽집 부엌에서는 가이스트 씨 가족이 저녁을 먹고 있다. 힘든 하루를 보낸 오늘, 저녁을 먹고 다들 일찍 잠들 생각이다. 이른 아침 아직 캄캄한 시간에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갔다 온 것이다. 벌써 서리가 내리기 시작했기에 올해 버섯을 따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따 온 버섯은 겨우내 비고스에도 넣고, 만두에도 넣고, 성탄절에 먹는 버섯 수프에도 넣는다. 이 도시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이렇게 감상해 보는 것도 큰 재미다. 생강빵 이야기도 어김 없이 등장한다.

남쪽 공방은 사진가 지그문트 야코비의 작업실이다.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는 여인의 사진을 손질하고 있다. 수동 포샵질이라고 보면 된다. 아빠 앞에는 네 살짜리 딸 로테가 놀고 있다. 이 어린아이가 훗날 뉴욕에 살면서 아인슈타인과 샤갈의 사진을 찍는 유명한 사진작가 로테 야코비라는 걸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서쪽 아이들 방에는 유모가 아이들에게 안데르센의 '장난감 병정'을 읽어주고 있다. 큰오빠 타데우쉬는 벽장 속에 있는 상자에서 보았던, 납으로 된 장난감 병정을 생각하고 있다. 브루노 증조할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100년 전 서쪽 집에 살았던 그 아이가 브루노 맞다!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브루노는 기병대 대장으로 참전했던 여러 전투 이야기를 들려주셨었다. 그만큼 군인이 많았던 도시, 전투가 많았던 도시의 역사 되겠다.

북쪽 집 거실에서는 식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눌 만한 시간대인 것이다. 힐다는 지난 6월에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집을 나가 버린 언니 생각을 하고 있다. 오늘 언니한테 편지가 와서 모두들 한시름 놓았다. 부모님은 벌써 언니를 용서하고 집으로 돌아오길 바라고 있다. 크리스마스쯤에는 집에서 결혼식이 열릴지도. 이곳의 문화는 집에서 결혼식을 여는구나... 짐작해 본다.

다음 백년 동안, 세상에는 두 차례 끔찍한 전쟁이 일어난다. 첫 번째 전쟁의 결과 광장에 폴란드 군대가 나타났다. 간판에 폴란드어가 등장하고, 아이들은 다시 폴란드어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도시는 크게 융성했고,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나면서, 20년 동안 이 도시를 떠났던 독일인들이 다시 나타났다. 또다시 폴란드어 사용이 금지되고, 많은 폴란드인들이 독일로 끌려가거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전쟁이 잦아들자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거나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왔다.
새로운 구역과 도로와 광장은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가끔은 시위대의 함성 소리도 들려왔지만.

그렇게 2000년이 되었다. 12월 31일, 자정. 이제 새로운 세기와 새천년이 열릴 것이다. 추운 날씨임에도 광장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하늘도 축복하는지 흰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동쪽 집 부엌은 식사를 준비했던 흔적이 가득하다. 미처 치우지 못하고 광장의 축제에 나갔나보다.
잘 발라 먹은 생선 요리가 보인다. 앗, 이 생선은! 바로 앞에 앞에서도 등장했던 그 물고기다. 얼음낚시로 잡혀서 도마 위에 토막이 나 있던 그 생선이, 이제는 누군가의 맛좋은 식사 후의 모습으로 변해 있다. 이렇듯 정교하게 연출된 시간의 흐름이라니!

남쪽 공방은 그림책을 만드는 화가의 작업실이다. 그런데 작업대 위에 놓여있는 그림책의 표지가 낯익다. 이 책의 저자 이보나의 '파란막대' 책이 아닌가! 아핫, 이 작업실은 작가님의 작업실 되겠다. 벽에 걸린 사진도 아마 본인 사진? 접시 위의 비스킷과 차가 담긴 잔, 서랍 위의 책들도 모두 정겹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들은 나처럼 먼 나라의 전혀 모르는 독자들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작가님도 아직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

서쪽 아이들 방에는 카츠페렉이 오늘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아빠 때문에 무척 기뻐하고 있다. 아빠는 오늘 하루 종일 카츠페렉과 함께 종이 극장을 세워 놓고 놀았다. 종이로 새 주인공들과 옷들과 가구도 만들었따. 옛날에 증조할머니도 이 극장을 가지고 놀았고, 할머니도 엄마도 종이를 오려 주인공을 만들어서는 인형극을 하며 놀았다. 얼라, 그렇다면 이 극장놀이는 이 책의 소재이자 이야기 속 이야기가 아닌가! 역시나 정교하고 섬세한 이보나 작가님이시다.

북쪽 집은 이제 호텔의 거실이 되었다. 외국인 둘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 두 사람은 호텔 앞에서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작은 은색 열쇠를 주웠다. 이 열쇠란 200년 전에 잃어버렸던 바로 그 설탕 상자의 열쇠가 아닌가!

무려 600년에 걸쳐서, 네 방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침부터 밤까지의 시간을 다뤘다. 그 사이에 사계절도 지나갔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했고, 그들의 삶이 여과 없이 보여졌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이런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할 것이다. 여전히 희노애락에 찬, 똑같고도 다른 사람들의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일상들이 말이다.

누구에게난 공평하지만, 누구에게나 참 다르게 다가가는 그 시간, 시간, 시간들. 작품은 600년이라는 시간을 거쳐오면서 여러 사건과 인문들을 종으로 횡으로 가르고 나누고 합하면서 큰 줄기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마치 퍼즐조각 맞추듯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힘이 세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을수록 더 즐거워지는 책이다. 읽을 때마다 더 새롭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종합 선물 세트 같다. 아름답고 근사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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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9 0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9 0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9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2-12-29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대단한 작가라고 책을 볼때마다 경탄합니다!

마노아 2012-12-29 01:24   좋아요 0 | URL
여태껏 보았던 중에서 이 책이 가장 대단해 보여요.
포토리뷰는 별점을 줄 수가 없어서 아쉬워요. 별다섯은 너끈히 줘야 마땅한 책인데 말이지요.^^

자하(紫霞) 2012-12-29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림을 보니 자연스레 이보나여사가 떠오르네요.
섬세함이 느껴져요.
이 책은 전에 못 본 책인데 마노아님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네요~^^

마노아 2012-12-30 00:36   좋아요 0 | URL
독특한 자신만의 색깔이 분명한 이보나 여사님이세요.^^
제가 좋아하는 그림체는 아니지만, 글과 그림과 창조성의 조합은 아주 근사하네요.
읽는 재미가 아주 컸어요.^^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 2016 영광군민 한책읽기운동 선정도서 선정, 아침독서 선정, 2013 경남독서한마당 선정 바람그림책 6
이세 히데코 글.그림, 김소연 옮김 / 천개의바람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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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아하는 이세 히데코의 작품이다.

책장을 열고 작가와 역자 이름이 소개된 그 페이지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첼로 교실에 새 학생이 왔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나'보다 훨씬 어려운 곡을 술술 연주해냈다. 힘이 넘쳤지만, 왠지 화를 내는 것 같은 그런 연주를...

연습이 끝나고 늘 가는 공원에 들렀다. 거기서 그 아이와 만났다.

그 아이는 내 첼로 소리가 꼭 강아지 소리 같다고 했다.

잃어버린 강아지 그레이를 떠올리게 해서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아빠는 강아지 대신 첼로를 사주셨다. 그렇게 해서 연주하게 된 악기다.

그 아이는 같이 연주하자고 했다. 두 사람은 언덕 위에 편하게 앉아 첼로를 켜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첼로로 여러 소리를 연주해 냈다. 활자만으로는 소리를 들을 수 없건만, 저렇게 음표를 그려주니 정말로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 같고, 강물이 또르르르 구르는 것만 같다.

피아노의 숲에서 내가 종종 감탄하게 되는 배경 묘사와 비슷하다.

 

 

그 아이는 고베에서 왔다고 했다.

연주를 마치고 큰길로 나왔을 때 진풍경을 보았다. 무수한 사람들이 첼로를 메고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다.

두 아이도 따라가 보았다. 건물 안에는 첼로는 꺼내는 사람, 무언가 신청하고 나누어 주는 사람, 그리고 온갖 연령대의 다양한 사람들이 자리 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가 첼로를 연주하는 것일까?

알고 보니 이 자리는 '대지진 복구 지원 음악회' 참가 신청을 받는 곳이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마을이나 피해를 당한 마을 사람들을 응원하는 음악회라고 한다.

첼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다고.

고베에서 왔다는 그 아이는 당장 참석하겠다고 했다.

아이는 신청서를 접수하자마자 건네받은 악보를 앞에 놓고 바로 음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 진지한 얼굴에 이끌러 '나' 역시 케이스에서 첼로를 꺼냈다.

옆자리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고,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느끼면서 연주하는 거라고 조언을 해주셨다.

 

연습을 마치고 다시 들른 공원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순간에 마을도, 집도, 가족도, 친구도 모두 사라져버렸던 참혹했던 지진의 참사를...

지금 할아버지가 연주하는 첼로는 그때 세상을 떠난 친구의 유품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린 폐허더미 흑백 사진 앞에 첼로를 들고 서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인다.

빛조차 스며들 수 없는 깊은 슬픔이 그림 속에 자리한다.

 

 

그 아이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이 동물까지 돌볼 수가 없어서 하늘로 보내준 새들의 이야기를...

그래도 그 새들은 날개라도 있어 더 높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사람 손을 필요로 하는 다른 동물이었더라면 더 안타깝지 않았을까...

 

복구 지원 음악회에 나가기로 한 뒤 '나'의 첼로 소리가 달라졌다고 선생님이 말씀해 주셨다.

지극한 마음이 소리의 깊이와 감동의 무게를 더해준 게 아닐까.

첼로 교실에는 참가자가 더 늘어났다.

할아버지와 그 아이와 '나'는 공원에서도 연습을 했다. 숲이 청중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연주였으리라.

무엇보다도 위로가 가득한 따뜻한 연주.

 

가을이 오고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첼로를 켤 때면 그레이가 생각난다. 그 아이는 떠나보낸 새 플로르를 떠올리며 연주를 할까.

 

 

드디어 대지진 복구 지원 음악회가 열리는 날, 참가자가 천 명 넘게 불어났다.

일본 여기저기에서 백 명, 이백 명씩 모여서 연습했다고 한다.

외국에서도 첼리스트가 많이 왔다.

색색의 케이스를 멘 사람들 행렬이 공연장으로 향한다.

모두 자신의 그림자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중한 또 하나의 자신을....

 

객석에 있는 수천수만 개의 눈과 귀가 연주자들에게 쏟아졌다.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가족이나 친구들도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이윽고 울려 퍼지는 천 개의 첼로 소리.

높고도 낮게, 빠르고도 느리께, 부드럽고도 힘차게, 그렇게 앞으로 나왔다가 뒤에서 받쳐주는 소리, 소리들...

천 명이 첼로를 켠다. 첼로의 활은 바람이 되어 스쳐간다.

천 개의 첼로는 천 개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그러면서도 하나의 곡을 이루었다. 하나의 마음이 된 것이다.

 

 

대지진 이후, 고베에서는 25만 그루의 목련을 심었다.

목련은 봄이 되면 하얀 꽃을 피운다. 마을마다 나무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 천개의 소망이 하나가 되어 하늘로 향한다.

간절한 소망과 위로를 담아서....

 

첼로는 심장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연주하는 악기라고 했다. 낮지만 힘차게, 부드럽고도 강렬하게 울리는 첼로 소리.

 

이 작품을 쓴 이세 히데코는 고베 대지진이 있고 두달 뒤에 스케치북을 들고 거리를 걸었다.

그렇지만 백지 스케치북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잊어서는 안 될 풍경은, 그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려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그림으로써 안심하게 될까 봐, 눈과 손이 기억한 후 잊어버릴까 봐...

 

그로부터 3년 후 고베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고베 대지진 복구 지원 자선 행사인 '천 명의 첼로 음악회'에 참가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열세 살 때 첼로를 처음 만났던 이세 히데코는 그렇게 1998년 11월, 천 명 중 한 사람이 되어서 잊어서는 안 될 풍경 앞에 섰다.

그렇게 마음을 담았던 첼로 연주는, 분명 연주자들까지 치유해 주는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이세 히데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때 그리지 못했던, 그리지 않았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 그림책이 완성되기까지 그가 그린 첼리스트도 천 명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극진한 마음을 담아 이 작품을 만들어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모양을 한 악기, 인간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악기 첼로.

첼로를 켜는 사람의 모습은 사람이 자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영화 굿바이에서 주인공은 오케스트라가 해산된 이후에 고향에서 시신 닦는 일을 하게 된다. 구토도 일으키고 여러모로 좌절도 했지만 마침내 장례사로 거듭난다. 영화 마지막에서 그는 망자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무사히 가길 바라면서 언덕 위에서 첼로를 연주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보내고 남은 사람을 또 위무했다. 여기 이 책의 사람들처럼.

 

지금 대한민국에도 '힐링'이 필요한 사람이 참 많다. 이 추운 날, 마음이 가난한 무수한 사람들에게 천 개의 바람, 천 개의 첼로가 다가갔으면 한다. 기꺼이 그 연주에 동참해줄 우리도 기대해 본다. 그렇게 위로하고, 상처는 치유하며 살아보자. 어떻게든,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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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6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빈 라덴이 아니에요! 가로세로그림책 2
베르나르 샹바즈 지음, 바루 그림, 양진희 옮김 / 초록개구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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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집트 출신 낫시르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할머니의 고향 이집트보다 낫시르는 미국에 더 익숙한 미국 소년이다. 갈색 피부를 가진.

 

존은 낫시르의 단짝 친구다. 존의 부모님이 휴가를 보내는 펜실베이니아의 한 호숫가에서 낫시르는 2001년의 여름을 지냈다.

 

존은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야 했다. 존의 부모님은 침례교도이고 낫시르의 부모님은 이슬람교를 믿지만, 존과 낫시르는 모두 종교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둘은 그보다 야구 이야기를 더 좋아하는 개구쟁이 단짝 친구일 뿐이다.

 

9월 11일은 새 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견학을 가는 날이었다. 게다가 이날은 글렌 축일이기도 했다.

학생들이 탄 버스는 동물원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것은 악어들의 첫 식사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수첩에 견학한 내용을 적는 것은 쉬웠지만, 보이는 동물을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낫시르는 낙타 앞에서 피라미드 이야기를 꺼냈다.

스핑크스가 있는 피라미드에 가려면 낙타를 타야 하는데, 그러면 보트를 탈 때처럼 몸이 앞뒤로 흔들린다고 설명해 주었다.

스핑크스 앞에서는 구경만 했고, 나중에 아스완에서 낙타를 탔을 때 정말 어찌나 흔들리던지 아주아주 무서웠다는 기억을 보태 본다.

 

아이들이 열심히 견학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선생님은 숨이 멎는 듯한 소리를 내뱉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사고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승객을 태운 비행기가 세계 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았고, 빌딩에 화재가 났다.

낫시르의 친구 바리의 삼촌이 쌍둥이 빌딩에서 일하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로 무시무시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상벨이 울리는 가운데 흩날리는 재와 함께 사방에는 탄내가 진동했다.

방어벽을 치는 경찰들과 놀라서 사방으로 달려가는 사람들로 인해 광장 근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 낫시르의 가족들은 모두 무사했다. 연락이 두절되었던 누나도 체육관에 대피해 있었다.

낫시르는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꿈을 꾸다가 깨었다.

화재 때문에 뛰어내렸던 사람들이 바닥에 부딪쳐 으스러지기 직전에 눈을 떴지만 이 때의 충격은 낫시르에게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 일을 직접 겪은 사람이건, 간접적으로 당한 사람이건 모두에게 말이다.

 

바리의 삼촌은 쌍둥이 빌딩에서 돌아가셨다.

존은 침울해 보였고 무척 짜증이 나 있었다.

존은 영웅 놀이를 할 때도 악당 역할은 더 이상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9.11 테러의 주범과 동일시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존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소식이 궁금해서 전화를 걸면 존의 엄마는 쌀쌀하게 말씀하셨다.

편지도 보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탄저균 감염 우편물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제대로 전달 되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누나는 빨간 폴로 티셔츠와 파란 치마를 입고 학교에 갔다. 성조기를 연상시키는 옷을 입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전한 것이다.

낫시르는 피라미드가 그려진 초록 티셔츠를 좋아하지만, 부모님은 입지 않는 게 좋다고 하셨다.

미국 연방 수사국이 새로운 법에 따라 알카에다의 테러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록색은 조심하는 게 좋다는 말씀이셨다.

 

그리고 그 무렵 존은 학교를 옮기게 된다. 침례교단에서 운영하는 사립 학교로.

그 학교에는 낫시르와 같은 이슬람교도 학생은 없을 것이고, 그것이 안전한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또 시간이 흘러 10월 31일 할로윈 데이. 낫시르는 드디어 존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존은 낫시르와 친구들을 피했다.

부모님 때문에 낫시르와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페드로도 되고 첸도 괜찮지만 낫시르는 안 된다고 했다. 낫시르의 아빠가 이슬람교도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낫시르는 얼어붙고 말았다. 내 이름은 낫시르라고, 빈 라덴이 아니라고 펄쩍 뛰었지만 이후로도 존은 낫시르를 피했다.

그렇게, 가장 절친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끔찍한 테러와, 그로 인한 보복 전쟁과 무분별한 몰아세우기로.

 

다시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2011년 5월 1일. 스무살 생일 파티에 참석했던 날 저녁, 낫시르는 빈 라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한결 마음이 놓이면서 기뻐했지만, 그가 죽었다고 해서 이미 죽은 바리 삼촌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때 죽었던 무수한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낫시르와 친구들은 다시 광장으로 나갔다. 혹시라도 그곳에서 존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빈 라덴이 죽었으니, 이제 존도 낫시르를 다시 친구로 받아줄 수 있을까? 부모님의 강요 때문이었지만 필시 후회했을 존의 마음에 이제는 어떤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괜히 작품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해본다.

 

 

어려운 주제인데도 제법 절제가 되어 있고,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장점이 있는 책이다. 걸프 전쟁 이후 국제 사회에서 입김이 세진 미국이 여러 분쟁 지역에서 갈등을 부추겼던 일들, 알 카에다의 만행과 이어지는 9.11 테러. 그리고 테러 이후 폭주해 버린 미국의 오만한 전쟁들. 그것들이 그림 속 사진으로 책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개 되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전쟁을 반대하던 목소리도 함께 소개했다. 이슬람교도들이 그들의 적이 아님을, 전쟁이 답이 아님을 외치는 구호들이 가슴에 박힌다. 시간과 장소를 바꾸면 저런 메시지는 어디에서도 울려퍼질 수 있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후세인이 죽었고, 빈 라덴도 죽었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후유증과 9.11 테러의 상처로 힘들어 하고 있다. 그 때를 이용해서 부시는 연임에 성공했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누군가는 악의 축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부추기는 입김 속에서 누군가는 전쟁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벌었다. 독재자의 손자와 독재자의 딸이 지도자가 되어버린 한반도와 극우 성향의 일본 새총리, 이렇게 급속도로 얼어붙는 동아시아의 판세 속에서 이 책이 어린이 책의 무게로 읽히지가 않는다.

 

'내 이름은 칸'이란 영화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 책의 낫시르와 같은 고민이 나올 것이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란 책도 함께 떠오른다. 영화도 만들어졌는데 우리 나라에는 언제 개봉하려는지?

 

길지 않은 내용 안에 역사와 전쟁과 갈등, 인권과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 복합적으로 다뤘다. 어려운 주제인데 솜씨 좋게 구성했다. 독특한 설정의 그림들도 인상적이다. 평화를 갈망하며 더불어 읽기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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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가 온 첫날 밤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226
에이미 헤스트 글, 헬린 옥슨버리 그림, 홍연미 옮김 / 시공주니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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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던 날, 헨리는 길에서 강아지 한마리와 마주칩니다.
얼마나 눈속에 버려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던, 추워보이던 강아지.
강아지는 헨리와 함께 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졌지요.
헨리는 기꺼이 강아지와 함께 돌아가기로 결정했어요.
아기 때 쓰던 낡은 담요를 가져와서 강아지를 감싸 안았죠.
헨리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강아지는 오들오들 떨면서 기다렸을 거예요.
그리고 헨리가 돌아온 것을 알았을 때 아주 기뻤겠지요.
헨리는 강아지를 안은 채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걸어갔어요.
그리고 어떤 이름을 지으면 좋을까 고민을 했지요.
자신의 이름은 헨리 콘. 그래서 헨리는 강아지의 이름을 '찰리'라고 지었어요.
찰리 콘! 근사한 이름이었어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헨리는 찰리에게 집안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었어요.
자신의 방과 비밀 장소도 기꺼이요.
그리고 이곳이 앞으로 찰리가 살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꾸만 얘기해 주었지요.
헨리는 찰리가 다시 또 버려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지 않게 배려하고 또 배려했던 거예요.
엄마와 아빠는 찰리가 온 것을 싫어하지 않는 눈치예요.
헨리가 산책을 시켜 주고 먹이를 제때 챙겨줘야 한다고 알려주셨지요.
찰리와 함께 산책을 하고 먹이를 챙겨주는 일은 헨리가 해주고 싶었던 일이에요.
앞으로 언제까지나요~

엄마와 아빠는 찰리가 부엌에서 자야 한다고 했어요.
우리는 식탁 아래에 커다란 베개를 놓고 찰리의 잠자리를 만들었지요.
그곳은 보일러에서 따스한 기운이 나오는 곳이거든요.
찰리의 잠자리로 그다지 나쁘지 않을 거예요.
헨리는 낡은 곰 인형 보보를 찰리 옆에 놓아주었어요.
어릴 때 함께 자던 보보가 이제는 찰리를 지켜줄 거예요.
찰리와 보보 사이에 조그만 빨간 시계도 놓아 주었어요.
한밤중에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울리면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소리처럼 들리거든요.
그 심장 박동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안정을 찾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헨리는 참으로 다정한 아이, 그리고 찰리는 참으로 운이 좋은 강아지지요.
헨리는 자신의 엄마와 아빠가 그랬듯이, 찰리가 잠들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요.
찰리는 쌔근쌔근 숨소리를 냈고, 그 소리를 들으니 헨리도 솔솔 잠이 왔지요.

헨리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창밖을 내다보며 상상했어요.
눈쌓인 언덕 위에서 찰리와 함께 뛰어노는 모습을요. 아주 재밌는 시간일 거예요.
찰리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은 깜깜한 한밤중이었어요.
헨리는 그 소리가 찰리의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죠.
헨리는 서둘러 찰리에게로 달려갔어요.
얼른 달려가 찰리를 안아주고 안심시켜줘야 했거든요.

헨리는 찰리를 안은 채 천천히 집안을 돌아다녔어요.
다시금 자신의 방과 침대를 보여주었고,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계신 엄마와 아빠도 보여 주었죠.
찰리는 차차 안정을 찾아갔어요.
헨리는 찰리의 배를 쓰다듬어 주면서 다정히 말했어요.
"우리 언제까지나 친구로 지내자!"
친구라는 이 다정한 말을 찰리는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잠이 들었던 찰리는 다시금 울면서 깨어버렸어요.
귀찮아하지 않고 다시 또 부리나케 달려가 찰리를 안아준 헨리.
찰리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어요. 어쩌면 꿈을 꾸었을지도 몰라요.
다시 또 버려지는 서러운 꿈을 꾸었을지도요.
헨리는 찰리를 안은 채 부엌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보여주었어요.
"달님이 너를 위해서 달빛을 비춰 주는 거야."
헨리의 속삭임에 찰리는 행복해졌을 거예요.
다시 천천히 집 안을 보여주며 방으로 돌아온 헨리.
그런데 찰리가 침대 위에 앉자 그 자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보이네요.
엄마 아빠의 말씀이 떠올랐지만 헨리는 이대로 잠자리에 들고 말았어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키며, 그렇게 사랑을 나누다가 헨리와 찰리는 모두 잠이 들고 말았어요.
그렇게 헨리와 찰리는 깊고도 단, 그리고 따뜻한 잠에 빠져들었어요.
찰리가 우리 집에 온 첫날에 말입니다.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시종 이야기해주는 것도 반갑고요.
반려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아이의 정서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함께 하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게 몹시 좋을 것 같아요. 책임감도 가질 것이고, 체온의 따뜻함도 기억할 것이고요.
외국에서는 노숙자들이 춥기 때문에 강아지를 키우면서 많이 끌어안고 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친구이면서 큰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될 테지요.
트위터를 보면 유기견 관련해서 도움 요청하는 글이 자주 보여요.
버려지는 생명들이 안타깝고, 그들을 향해 도움을 요청하고 또 그 손 잡아주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지요. 개인의 마음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정책적으로 이 분야에 대한 개선이 있었으면 합니다. 찰리에게 헨리가 나눠준 그런 온정이 곳곳에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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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바닷속 집
가토 구니오 그림, 히라타 겐야 글, 김인호 옮김 / 바다어린이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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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바다 위에 쌓아 올린 낡은 집에서 홀로 살고 있었다.
처음엔 이 마을도 다른 마을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지금 이곳엔 할아버지만이 외로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물이 차올라서 살던 집이 물속에 잠겨 버리면 잠긴 집 위에 새로 집을 지었다.
그 집이 또 잠기면, 그 위에 또 새집을 지었다.
이렇게 해서 마치 나무 상자를 몇 개씩이나 쌓아 올린 듯한 집이 되고 만 것이다.
어찌 보면 바벨탑이 연상되기도 한다.

할아버지가 이 집에 홀로 남게 된 것은 삼년 전부터다.
할머니가 그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아침에일어나면 집 한가운데에 있는 낚시터 뚜껑을 열고 물고기를 잡았다.
맛좋은 아침 반찬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지붕 위에는 달걀을 낳아주는 닭이 있고, 빵을 굽기 위해 밀도 기른다.
부족한 물건들은 집 근처를 오가는 보따리장수의 배에서 산다.
아마도 할아버지처럼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모양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쓰던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짓는다.
이웃집 할아버지와 체스를 두기도 하고
멀리 사는 자식들이 보낸 편지를 읽기도 하면서
나름 하루하루 즐거운 날들을 보내고 계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밖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잠이 든다.
어찌 보면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한 삶이 아닌가.

그러던 어느 해 겨울, 또다시 바닷물이 마루까지 차올랐다.
할아버지는 다시 새집을 짓기 위해 준비운동을 했다.
예전에는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집을 짓는 이들이 많았지만,
계속해서 차오르는 바닷물에 지쳐서 이제는 모두들 이사를 가버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집을 짓던 할아버지는 실수로 연장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연장은 바닷속으로 떨어졌고, 연장을 찾기 위해 할아버지는 잠수복을 입었다.
연장은 삼 층 아래 집에 떨어져 있었다.
이 집은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의 집이었다.
짐작키로, 아마도 일년에 한차례씩 집을 지어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어쩌면 과거로 내려가면 좀 더 오랜 기간 살 수 있었는데, 점차 물이 차오르는 시간이 빨라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연장을 줏으려던 할아버지는 추억에 젖어들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어느 봄날의 풍경이다.
할머니는 가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좀 더 아래쪽 집으로 헤엄쳐 가 보고 싶어졌다.
예전에 살던 집과 마주칠 때마다 거기서 살던 옛 시간들이 새롭게 재생되었다.
마을에 축제가 있어서 자식들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던 기억과, 할머니가 손자들에게 맛있는 파이를 구워 준 시간들이 떠올랐다.
집집마다 창문을 예쁘게 꾸미고 퍼레이드 배가 음악을 연주하며 다가오기도 했다. 화려하고 즐거운 기억이다.

또 그 아래의 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째 딸이 새 신부가 되어 시집을 갔던 곳이었다.
할머니가 만든 드레스를 입은 딸은 무척이나 예뻤다.
아마 어제 일처럼 손에 잡힐 듯 만져지는 시간일 것이다.

또 어느 집에서는 키우던 새끼고양이를 잃어버려서 비가 오는데도 열심히 고양이를 찾았던 게 떠올랐다.
아직 어리던 아이들은 슬피 울다가 편지를 써서 병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새끼 고양이가 그 편지를 받기는 힘들었을 테지만, 그리운 마음은 꼭 전해졌을 것만 같다.
그리고 이 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아기가 태어났던 집이다.
아직 젊던 할머니가 아기에게 입힐 옷을 지었고, 할아버지는 아기를 태울 그네를 만들었다.
행복이 가득한 풍경이다. 소박하고 아름답다.
그렇게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할아버지는 벅찬 추억들과 조우했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아래 층에 있는 집까지 내려왔다.

그 집은 이곳에 아직 물이 없고 뭍이었던 시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이였던 시절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이곳에서 함께 자랐고, 어른이 되어 결혼을 했다.
결혼한 두 사람은 이곳에 작은 집을 지었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처음이 시작된 역사적인 장소인 것이다.

그랬던 집이 물에 잠기면서 새로이 집을 짓고, 다시 물이 차오르면 그 위에 집을 지으면서 오늘까지 이어져 왔다.
집들은 겹겹이 쌓여 있고, 추억도 그렇게 포개져 있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곳은 할아버지의 모든 것,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잠겨 있는 곳이니까.
바닥에 앉은 채 추억에 젖은 할아버지의 쓸쓸한 모습이 아련하다.
하지만 분명 그 고운 기억들을 가득 품고서 다시 씩씩하게 살아갈 할아버지를 알고 있다.

봄이 되어 할아버지의 새집이 완성되었다.
벽 틈으로 민들레 한 송이가 피어서 할아버지의 소박한 집을 멋스럽게 빛내고 있다.
집은 이전보다 훨씬 작아졌지만, 언젠가 집을 올릴 수 없을 만큼 더 작아질 수도 있겠지만, 할아버지의 사랑의 크기와, 그 안에 깃든 기억의 힘들은 결코 작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참으로 행복하신 분!

책의 마지막 장에 실린 그림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의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이다.
둘이 함께 수상 자전거를 몰고 계시다.
이렇게 해로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아주아주 부러운 풍경이다.



이 작품의 원작 애니메이션이다. 짧지만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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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12-01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은 추억을 공유해야 더 깊어지는 것 같아요.
젊어서 함께 해야 늙어서도 함께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부부도 함께 하는 연습을 해야겠어요.^^

마노아 2012-12-02 00:07   좋아요 0 | URL
켜켜이 쌓인 시간의 층과 그 무게를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좋은 기억으로 많이 쌓고 싶어요. 아아, 저도 어여 옆지기를 만나야 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