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친구야 웅진 우리그림책 21
강풀 글.그림 / 웅진주니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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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내리는 깜깜한 밤, 혼자 자다 잠이 깬 아이는 엄마 아빠의 방으로 가려다가 그만 문지방에 발가락을 찧고 말았다.
아무리 크게 울어도 엄마 아빠는 깨지 않았고, 아이는 약이 올라 더 크게 울었다.
그때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그만 울어. 네가 그렇게 울면 사람들이 우리가 우는 줄 알고 싫어한단 말이야."
세상에, 말을 걸어오는 이는 아기 고양이였다.
"네가 울면 이 근처에 고양이가 올 수 없잖아."
고양이는 어쩐지 영물같아서, 말을 한다고 해도 그닥 이상해 보이지를 않는다.
아무도 보는 이 없으면 어린 아이에게 말쯤은 걸어줄 것 같은 존재다.
아기 고양이는 자신이 집을 찾는 중인데 도와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아이는 옷을 입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왔다.
고양이를 따라 눈 쌓인 담장 위를 걸어가는 아이의 상기된 볼이 귀엽기만 하다.
대단한 모험을 향해 떠나는 힘찬 첫걸음처럼 보인다.

아이는 고양이가 높은 곳에 올라가면 덩달아 높은 곳에 올라갔고, 고양이가 지붕 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면 역시 그 뒤를 따라 뛰어다녔다. 어느새 엄지발가락이 아픈 것은 까맣게 잊게 되었다.
고양이는 놀다 보니까 너무 멀리 나와 버려서 집을 못 찾게 되었다고 했다.
집이 어떻게 생겼냐고 묻자 아늑하다고 했다.
비를 피할 수 있었고 편안하게 누울 수 있는 바닥이 있다고.
그야말로 안빈낙도를 연상시키는 집이 아닌가.
고양이다운 의연함이 보인다. 도도하고 당당한...
둘은 한참을 걸었다. 아이는 점점 힘들어졌고, 발가락도 다시 아픈 것만 같았다.
아이는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 안 나냐고 재차 물었다.
고양이의 대답이 짠하다.
"엄마 아빠가 있었어."
결국 고양이는 엄마 아빠를 찾는 중이었다.
아늑했던 집은 엄마 아빠가 계셨기 때문에 완성될 수 있는 따뜻한 곳이었다.

좁은 골목에선 무섭게 생긴 커다란 개가 지나가는 둘을 보고 으르렁거렸다.
큰 개는 화가 난 것처럼 짖어댔고, 고양이는 겁에 질려 한달음에 도망쳤다.
더불어 도망치던 아이는 아까 그 개한테 고양이의 엄마 아빠를 본 적이 있는지 묻기로 했다.
고양이에 대해 개에게 묻는 아이가 개는 황당하기만 했다.
왜 고양이가 싫으냐는 질문에 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개들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란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다.
아이다운 순진한 질문인데, 정말로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개와 고양이를 함께 키우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개와 고양이가 앙숙이라는 것은 어쩌면 선입견일까? 아니면 경험적 근거가 있는 것일까?

막다른 골목에서는 아기 고양이가 무서워 벌벌 떠는 생쥐를 만났다.
생쥐는 고양이에 대해서 자신에게 묻는 것에 역시 황당해했다.
아이에겐 역시 의문투성이일 것이다. 그렇지만 고양이와 생쥐는 가까이하기엔 좀 먼 사이이지.
그리고 세번째로 마주친 것은 똑같은 고양이지만 무척 경계심이 강하고, 그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검은 고양이였다.
모두들 아기 고양이의 부모를 보지 못했지만, 또 그들은 왜 서로 으르렁거리는지도 설명하지 못했다.
그냥 그래왔으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서가 대답의 전부였다.
당연하지 않은데도 당연히 발톱을 세우고 산 그런 관계가, 이곳에만 있을까.

아이와 고양이는 한참을 걸어갔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눈은 점점 많이 쌓였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고양이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고양이와 아이는 조금씩 지쳐갔다.
그리고 갈림길을 만났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둘은 구멍가게 앞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쉬었다.
구멍가게의 이름이 은총이다. 강풀 작가의 아기 태명으로 보인다.^^
쉬면서 고양이는 아이에게 아까 왜 울었냐고 물었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자기 방이 생겼고, 그래서 혼자서 자다가 깨보니 무서웠다고 했다.
안방을 가려다가 문지방에 엄지발가락을 찧었다고...
아이는 엄마 아빠에게 가는 짧은 길에서 그만 울었던 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아기 고양이가 더 의연하고 의젓해 보인다.
인간보다 훨씬 용감한 동물의 본능아닐까.
내가 혼자서 잠을 잔 것은 다 큰 어른이 되어서였지만, 나도 그날은 무서워했던 기억이 난다.
한밤중에 깨어 엄마 아빠가 보고 싶었던 아이가, 자신이 울어도 깨지 않는 엄마 아빠가 야속했을 마음이 잘 그려진다.

눈위의 발자국은 점점 새로 내린 눈에 묻혀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더 버티다가는 아이마저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기 고양이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자신은 좀 더 멀리 가보겠다고.
아이는 더 도와주고 싶었지만 고양이는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용기가 생긴 것은 아이 덕분이었다.
무서워하던 개와 고양이, 심지어 나를 무서워하는 쥐와도 얘기를 해본 경험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서 집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새로운 한발자국을 내딛을 준비를 갖춘 것이다.
둘의 우정이 극대화되는 장면을 클로즈업 한 그림이다.
어두운 게 아니라 보라빛으로 물든 하늘이 예쁘다.
아이와 고양이에게서 나오는 얕은 입김도 따뜻하게만 보인다.

아이를 혼자 보내자니 걱정이 되었던 고양이는 다시 왔던 길을 따라가줄까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젓한 고양이를 보며 용기를 얻은 아이는 자신도 혼자 가보겠다고 말한다.
고양이는 만약 집을 못 찾으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그 집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말해주는 상대가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진심으로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둘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는 친구들.
왼쪽으로는 아이의 발자국이 이어지고, 오른쪽으로는 고양이의 발자국이 이어진다.
"안녕."
"안녕."


아이는 혼자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길 위의 발자국은 눈에 덮여 보이지 않았고, 아니는 돌아가는 길이 헷갈렸다.
그렇지만 집을 잃을 걱정은 없다.
아까 지나치면서 만났던 친구들이 아이에게 길을 안내해 준 것이다.
잔뜩 털을 세우며 센 척했던 검은 고양이가, 오들오들 떨던 생쥐가, 그리고 으르렁거렸던 큰 개가 아이가 가는 길을 가리켜주었다.
아이는 다시 고양이를 만나면 자기네 집을 알려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끝까지 친구를 챙겨주는 마음이 곱기만 하다.
아까는 황당해했던 큰 개가 고양이가 먼저 말을 걸면 생각해 보겠다고 한발 뒤로 뺀다.
하하핫, 아이에게 그런 것처럼 고양이에게도 똑같이 말을 걸어주면 되는 거지.^^

아이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넘다가 창문턱에 또 발가락을 찧고 말았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엄마 아빠가 계신 안락한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제 무서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다.
아이는 한밤 사이 한뼘씩 성장했고 용감해졌다.

엄마 아빠 사이에서 잠이 든 예쁜 아이.
아이의 편안한 잠과 부모님의 보호가 마음을 벅차오르게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참으로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

창밖에는 고양이 가족이 보인다. 엄마 아빠를 모두 찾았나보다.
흐뭇한 미소가 내 눈에도 흐뭇해 보인다.
다시 이들이 친구 사이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양이들을 키우며, 고양이 사진 찍어 트윗에 올리는 것을 낙으로 삼던 강풀 작가.
아기 아빠가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본명은 은총이 아니니 아마도 태명으로 보인다.
태어날 아기를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그렇게 동화책을 남겨준 아버지라니,
아이에게 이보다 멋진 선물이 또 있을까.

책의 앞뒤 표지 안쪽 그림이다.
첫 그림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이고, 끝 끄림은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난 뒤의 장면이다.
눈이 가득 쌓이고 있던 밤 풍경이 해가 떠오르는 여명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색감 차이는 물론, 온도 차이까지 느껴지는 그림이다.
아직도 그림 못 그린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강풀 작가지만 내 보기엔 참 좋은 그림이다.
본인만의 스타일을 잡았고, 섬세함과 정교함을 넘어서는 따뜻함이 무엇보다도 좋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두번째 읽을 때 더 좋은 그림책이기도 하다.
안녕, 친구야.
독자들에게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는 강풀 작가에게 고마움을 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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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곰 2013-01-31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강풀씨의 작품이 별로 였는데, 시간이 갈수록 작품성도 높아지고 개념만화가의 길을 걷는 것 같아 구입도 하고 추천도 해요^^ 이번 영화도 너무 좋았구요. 위 그림책도 구입했는데 소리내서 읽으면 더 좋더라구요^^

마노아 2013-01-31 11:57   좋아요 0 | URL
소리내서 읽는 것 저도 추천이요. 아, 상상으로도 정겨운 걸요.
강풀작가님은 앞으로가 더 기대되어요. 개념 작가에 상상력도 좋고, 무엇보다도 따뜻한 인간미가 있어요.
어휴, 완소 작가님이에요.^^

아무개 2013-01-3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트윗을 안해서 어디선가 언뜻 본 강풀님 고양이가 요 그림속 고양이와 비슷한것 같던데...
갑자기 집에 있는 우리 고냥씨들이 마구 보고프네요.

마노아 2013-01-31 11:58   좋아요 0 | URL
우헤헷,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걸요. 일부러 모델 삼아 그렸을지도 몰라요.
저는 예전에 고양이가 무서웠는데 요새는 그래도 예쁘다~라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순오기 2013-01-3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곧 아빠가 되는 강풀 작가님, 멋진 아빠가 되겠지요~ 축하축하!!
이 그림책 나도 찜했어요~ 아직 장바구니 결제는 못했지만.^^

마노아 2013-01-31 16:10   좋아요 0 | URL
이미 예쁜 딸이 태어났어요. 딸바보로 출산 전부터 등극해버렸지 뭐예요.
저도 사려고 찜해놨는데 언니가 먼저 구입해서 같이 읽었어요.^^

순오기 2013-02-01 00:17   좋아요 0 | URL
오~ 강풀 작가님, 벌써 딸바보가 되셨군요.^^

마노아 2013-02-04 01:06   좋아요 0 | URL
듬직한 딸바보랍니다. 거구와 대조되는 자그마한 아이가 잘 어울려요.^^

BRINY 2013-02-06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고양이 키우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에고..여기서 또 고양이를 보네요.

마노아 2013-02-07 00:58   좋아요 0 | URL
으하핫, 사방에서 유혹을 하고 있군요.^^ㅎㅎㅎ
 
엄마 사용법 - 제16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대상작 신나는 책읽기 33
김성진 지음, 김중석 그림 / 창비 / 201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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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독특했다. 엄마 사용법이라니? 아이가 원하는 엄마상 같은 걸까? 내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아이는 정말로 본인이 원하는 엄마 스타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엄마가 배달되어 온단다. 이 무슨 놀라운 상황인가?

 

작품의 배경이나 시대는 크게 신경쓰지 말자. 어느 시대 어느 때건, 작품 속에선 '생명장난감'이라는 게 등장한다. 조립한 다음에 작동을 시키면 살아서 움직인다. 주인공 현수는 이전에 '익룡'을 샀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조립을 다 하기 전에 작동을 시켜서 눈이 없었던 익룡은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사고를 내고 파란  사냥꾼에게 잡혀갔다. '파란 사냥꾼'이란 바이오 토이 사의 직원들이다. 파란 옷에 피노키오 모양의 마크를 단 작업꾼들.

 

 

창밖으로 떨어져 나뭇가지에 걸린 익룡이 파란 피를 흘리고 있다. 마치 찢어진 연처럼 걸린 익룡은 현수에게 상처로 남았다. 파란 사냥꾼들은 생명장난감이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익룡은 분명 비명을 질렀다. 마음이 없는 생명장난감은 고통도 없다고 했다. 그 얘기, 믿을 수 있을까?

 

그때의 경험으로 아빠는 현수가 '엄마'를 사달라고 했을 때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나 출장 중에 손자를 돌봐주기로 했던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쳐서 병원에 가시는 바람에 당장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빠는 결국 엄마를 사주기로 한다.

 

마침내 배달되어 온 엄마. 현수는 택배 상자를 직접 집 안까지 들고 갔다. 제법 무거웠지만 어린 아이가 들 수 있을 만큼은 되었다. 생명장난감은 마음이 없기 때문에 무겁지 않은 거라고 했다. 마음의 무게라... 왠지 마음이 묵직해 진다.

 

생명장난감은 깨어나서 처음 본 사람만 따르게 되어 있다. 엄마를 처음 만나는 소중한 자리다. 현수는 거의 목욕재계 한 뒤에 엄마를 조립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열심을 보였지만 실수로 손끝을 베어서 핏방울이 엄마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피는 금세 엄마 몸에 스며들었다. 마치 심장이 뛰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듯이... 그런데 깨어난 엄마는 현수를 낯설어 했다. 식사를 챙겨 주었지만 방에 우두커니 앉아서 나오지를 않았다. 현수가 생각했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 날, 현수는 또 다시 지각했다. 학교 가는 길엔 지붕 위에서 똥을 던지는 고릴라와 마주치곤 했다. 벌써 두번이나 머리에 똥을 맞은 전력이 있던 현수는 하늘도 보랴, 똥도 피하랴 아주 힘들었다. 선생님은 또 다시 고릴라 핑계를 댈 거냐고 타박이시다. 현수는 속상했다. 릴라보다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깨워주지 않으신 것이다. 선생님은 현수에게 엄마가 없었던 것을 알기 때문에 또 믿지 않으시는 눈치다. 현수는 자꾸만 속상해졌다.

 

날씨가 화창했지만 현수는 비가 오기를 바랐다. 비가 오면 엄마가 우산을 들고 학교에 데릴러 와줄 것만 같아서였다. 본인이 원하는 엄마 모습이 분명 나타날 거라고 아직도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그런데 같은 반의 정태성은 현수의 엄마가 '불량품'이라고 했다. 파란 사냥꾼이 와서 잡아 갈 거라고 엄포를 놓았다. 힘도 세고 키도 큰 정태성은 학급 친구들을 많이 괴롭혔다. 급식에 싫어하는 토마토가 나오면 주머니에 숨겼다가 현수처럼 작은 아이들에게 던지는 아이다. 사냥꾼에게 엄마가 잡혀가면 저 토마토처럼 망가질 거라고 무시무시한 소리도 해대는 아이다. 현수는 엄마가 불량품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정태성은 아침에 깨워주지도 않는 엄마는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불량품이라고 거듭 말했다. 정태성이 설명하는 엄마의 역할이란 아이를 위해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설거지하고, 온갖 집안일을 해주는 도우미에 불과했다.

 

현수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집에 왔을 때 초인종을 누르면 환한 얼굴로 문을 열며 맞아주는 엄마, 잘못한 일이 있으면 야단도 치는 엄마, 벽에 세우고 키도 표시해 주고 심부름도 시키는 엄마, 같이 구름도 보면서 뭉실뭉실 하얀 양이랑 토끼도 찾고 축구도 같이 하고 화분에 꽃도 심는 엄마다. 지렁이가 나오면 무서워해서 자신이 쫓아내주면 자랑스럽게 바라봐주는 그런 엄마...

 

아이의 소박하면서도 구체적인 엄마 상이 뭉클하다. 다감한 아이다. 세상 때 묻지 않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아이다. 자주 넘어지곤 했던 현수는 넘어져서 다친 할아버지께 귀여운 조언도 해준다.

 

"이건 비밀인데요, 아무도 안 볼 때는 조금 창피하더라도 앉아서 신발을 신으면 돼요. 저도 사실 친구들이 안 볼 땐 바닥에 앉아서 신발을 신어요."

 

할아버지께도 구체적인 조언을 해주는 당찬 어린이 현수! 할아버지도 현수에게 조언을 해주실 차례다.

 

 

할아버지는 현수의 고민을 이해하셨다. 그러나 '엄마사용법'을 자세히 읽어봤지만 거기에는 현수가 원하는 '진짜' 엄마가 없다. 회사에서 소개한 사용법에는 가사 도우미 역할만 하는 엄마가 있을 뿐이다. 기계적으로 일만 하는 엄마는 표정이 없다.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습득이 빠른 엄마에게 현수가 진짜 엄마 역할을 가르쳐주라고 했다. 해서 현수는 본인이 만나고 싶은 그 엄마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자기 전에 책도 읽어주고, 학교 갈 때는 환하게 웃으며 손도 흔들어주었다. 엄마는 현수보다도 더 실감나게 이야기책을 읽어주셨고, 현수와 함께 산책하는 것을 즐기게 되었다. 현수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표정을 갖게 된 엄마, 웃을 줄 아는 엄마는 기존에 보이던 생명 장난감과 달랐다. 아랫집 할머니는 불량품이 분명하다며 신고까지 해버렸다. 파란 사냥꾼이 엄마를 잡기 위해 포위망을 좁혀 왔다. 현수는 엄마를 지붕 위로 끌어올려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처음 받았을 때와 달리 엄마가 너무 무거웠다. 그렇다! 엄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마음이 자라서 표정도 있고, 생각도 있고, 감정도 있는 엄마는 결코 장난감이 될 수 없었다.

 

 

위기에 처한 현수를 도와준 것은 뜻밖에도 고릴라였다. 늘 현수에게 똥을 던져서 힘들게 했던 바로 그 고릴라 말이다. 고릴라는 더듬더듬 말도 했다. 도움을 입은 현수는 왜 똥을 던지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고릴라는 그게 친구가 되자는 의미라고 생각했단다. 불량품으로 분류되어 수거될 상황에 처한 고릴라가 도망친 것은 정태성의 집에서였다. 늘 무언가를 던지곤 하는 정태성에게서 처음 받은 인상을 '친구가 되자'는 의미로 해석한 고릴라. 마음이 짠하다. 정태성은 무려 마음을 가진 이 고릴라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잠시 벗어난 위기가 끝이 아니었다. 파란 사냥꾼을 피하려면 엄마는 현수 곁을 떠나야 한다.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보내주어야 한다. 감정을 가진 엄마를, 진짜 엄마 같은 내 엄마를 만났는데, 그 엄마와 헤어져야 한다. 어린 현수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아픈 이별이다. 현수는, 정말 엄마와 헤어지게 되는 것일까? 다른 길은 없는 것일까?

 

상상력이 기발한 책이다. 재밌를 뛰어넘는 깊은 감동도 있다. '엄마'에게 기대되곤 하는, 그리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 또 아이가 엄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품은 무생물 장난감을 통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 무게를 지닌 마음이 계속 입가에 맴돈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피노키오 마크를 가진 파란 사냥꾼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마저리 윌리엄스의 '헝겊 토끼 인형'이 괜히 진짜 토끼가 된 것이 아니다. 시간과 추억을 사랑으로 메꾼 관계가 생명력을 주었다. 그것이 마법이고, 그것이 기적이었다. 진짜 엄마 사용법을 알아차버린 현수, 진정한 엄마 사용법이란 '사랑'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낸 현수에게 진짜 엄마가 무사히 곁에 있어주기를!

 

덧글) 오타 하나 있다.

50쪽 그렇지만 그런 일을 절대로 없을 거야 >>> 그런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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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viana 2013-01-12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무슨 편집자의 글 같은 리뷰인가요.... 궁금해도 너~무 궁금해지잖아요.

마노아 2013-01-12 22:26   좋아요 0 | URL
으하하핫, 이 무슨 과찬의 말씀을~ 파비아나님 반갑습니다. 새해 복 듬뿍듬뿍 받으셔요~
혹시 작품의 결말이 궁금하시다면 비밀글로 말해줄 수 있어용~^^ㅎㅎㅎ

같은하늘 2013-01-17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지난주에 빌려왔다 못 읽고 반납했다는 슬픈전설이...ㅜㅜ
다시 빌려와야징~~ㅋㅋ

마노아 2013-01-18 18:45   좋아요 0 | URL
다시 봐요. 참 좋은 책이에요. 뭉클뭉클(>_<)
 
나는 비단길로 간다 푸른숲 역사 동화 6
이현 지음, 백대승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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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좋았던 푸른숲 역사 동화 시리즈다. 게다가 제목부터 흠뻑 반하게 만들었다. '비단길'이 나오고, 작품 속 주인공은 무려 '발해' 사람이다. 이름도 예쁘다. 붉은 비단 홍라. 금씨 상단의 외동딸 금홍라. 홍라의 어머니는 금씨 상단을 이끄는 대상주다.

 

그러나 태풍에 배가 부서지고 홍라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홍라를 물에서 건져낸 것은 신라 출신 소년 비녕자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곁을 지켜준 이는 금씨 상단의 호위무사 친샤와 수습 천문생 월보였다. 어머니의 생사를 알 수 없던 홍라는 서둘러 상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하여, 비녕자의 집에서 맡아 기르던 말을 제멋대로 금가락지 하나로 값을 치르고 잡아 탔다. 나름 결단력 있고, 행동도 빨랐지만 분명 무례한 결정이었다. 값을 치른다고 해서 거래가 무조건 성사되는 것이 아닐텐데, 어린 홍라는 아직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상경성에 돌아와서도 어머니의 행방은 찾지 못했다. 사람들을 보내어 사방으로 알아보았지만 알 길이 없었다. 빌린 배는 난파되었고, 물품들은 모두 잃었다. 일꾼들은 품삯을 요구했고, 빚쟁이들이 날마다 찾아왔다. 특히나 상경성 제일 부자이면서 고리 이자로 비싼 섭씨 영감네 독촉이 무시무시했다. 날마다 불어나는 빚 때문에 금씨 상단이 통으로 넘어갈 판이었다. 게다가 국가에 물품을 대야 하는 날짜도 다가오고 있었다. 황실의 혼인식에 쓸 비단 오백 필이 필요했다. 여러모로 홍라에게는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홍라는 어머니께서 위기 상황에 빠지면 쓰라고 했던 묘원의 열쇠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그드 은화를 발견한다. 황실에 바칠 비단 오백 필은 너끈히 살 양으로 말이다. 그러나 홍라는 거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짜르의 얼굴이 새겨진 특별한 은화였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로 가면 더 많은 양의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두 배라면 비단 천 필. 밀린 빚을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홍라는 결심했다. 사마르칸트는 멀어서 시간에 댈 수 없지만 솔빈의 소그드 인 마을에 가면 여기보다 나은 값으로 거래를 할 수가 있다. 솔빈에 가서 은화를 팔고, 그 돈으로 솔빈의 말을 사는 것이다. 솔빈의 말은 당나라까지 널리 알려진 명마이니, 이 말을 장안에 가져가면 훨씬 비싼 값에 팔 수 있다. 그리고 장안에서 비단을 싸게 사서 돌아오면 몇 갑절의 이문을 남길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홍라는 당장에 행동에 옮긴다. 언제까지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섭씨 영감의 이자가 불어나는 상황이다.

 

그러나 홍라에게 은화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빚쟁이들이 몰려올 터, 최대한 은밀하게 조용하게 움직여야 했다. 그리하여 호위무사 친샤와 수습 천문생 월보가 같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홍라를 구해줬던 인연이 있던 비녕자가 부모를 잃고 이 자리에 합류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뜻밖의 감시인이 따라붙었다. 섭씨 영감의 아들이 차용 증서를 갖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반갑지 않은 혹이 붙었으니 이 소년의 이름은 쥬신타! 아버지를 닮아 셈에는 빠르지만 아버지같이 지독한 수전노는 아니다. 홍라가 그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잠시 홍라가 움직인 길을 살펴보자. 당시 발해에는 여러 개의 국제 교역로가 있었다. 발해의 수도 상경에서 부여부를 지나 거란으로 향하는 거란도, 상경에서 영주를 거쳐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이르는 영주도, 상경에서 서경을 거쳐 압록강에 이르고, 거기서 서해를 건너 산동 반도에 상륙해 다시 육로로 장안까지 갈 수 있는 압록도가 있다. 여기에 동경을 거쳐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가 있고, 동경을 거쳐 바다 건너 일본의 서부 해안으로 향하는 일본도가 있다. 홍라는 엄마를 따라 이 여러 길들을 다녀본 경험들이 있다. 그러나 이 먼 길을 스스로 주도해서 가는 길은 분명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배포 있게 출발했고, 시간을 다투어 말을 달렸다.

 

경험은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법! 급한 마음에 서둘렀지만 그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았다. 무리한 행보로 탈이 나버린 홍라. 여러모로 시간을 지체했고, 장안까지 가는 건 도저히 무리였다. 분하지만 보다 차분하고 냉정한 판단을 하는 쥬신타의 충고로 홍라는 등주까지로 길을 단축시킨다. 당나라 땅인 등주에서도 솔빈의 말은 반응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비단은 보다 값싸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홍라의 일행은 등주로 향한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절정과 반전은 모두 등주에서 일어난다. 짜릿한 첫 거래의 성사와 뜻밖의 일탈, 그리고 예기치 못했던 사건들까지...

 

열세살 홍라로서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길이었다. 상단에서 나고 자라 많은 것을 보아왔지만, 구경하던 사람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기술도 부족했고, 진심을 표현하는 것도 어리숙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겐 상처를 주었고, 본인도 약한 마음에 스스로를 베어버렸다. 여기까지 도착한 배짱은 인정해 준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홍라는 분명 부잣집 철모르는 아가씨일 뿐이었다.

 

 

힘들었던 여정이었지만 흑수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던 아버지도 만났다.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크고 따뜻했다. 다 정리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자는 제안은 달콤하고도 위험했다. 그러나 홍라는 어머니의 강인하고도 끈질긴 핏줄도 이어받았다. 홍라는 이 거래를 스스로 마무리 짓고 싶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생각만큼 쉽지 않아 보이지만...

 

 

홍라의 호위 무사 친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친샤의 속 이야기가 나올 때 무척 슬펐다. 그녀가 말을 잃게 된 과정과, 그 후의 삶이 그림 속에서 말없이 전달되었다.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는 그림인데, '발해'라는 무척 낯선 나라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까닭이다. 물론, 남은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그림들을 있는 그대로 다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상징적으로 잘 포착해서 옛스러우면서도 개성 강한 느낌이 잘 전달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그림만 따로 찾아서 몇 번이나 더 들여다볼 정도로 말이다.

 

이 책은 홍라가 교역길에 나서면서 여러 사건들을 접하게 되는 일종의 모험으로도 읽히지만 그것보다 '성장 소설'로 더 크게 다가온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제 생각만 할 줄 알던 철부지 아가씨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시련을 당하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고 꿈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책 속의 인물들은 그렇게 순리를 따라갔다. 가야할 곳으로 향했고, 갚아야 할 것들을 갚았다. 그리고 새출발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이 나온다. 홍라는 비단길을 택한 것이다.

 

 

책의 표지 그림이기도 한 이 그림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독자를 흐뭇하게 만들고 기대를 갖게 하는 그림이다. 그 비단길, 그 도전, 그 모험, 그 성장, 홍라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갖고 싶게 만들 것이다.

 

책에서는 국사 책에서 몇 안 되게 나오는 발해에 관한 것들이 적절하게 소개된다. 말갈과 흑수를 포함한 다문화 국가 발해, 무왕 시절의 명장 장문휴, 선왕 때 해동성국이라고 불렸던 일 그리고 신라 장보고와 청해진 등등. 그리고 이 책에서 기발하게 등장한 십자가도 소개한다.

 

사진 속 불상의 가슴에 걸린 십자가가 보이는가. 조선 후기에 기독교가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미 8세기 무렵에 우리 조상들은 저 먼 서방의 종교와 교류하고 있었다. 앉아서 이방인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길을 뚫고 교역을 했던 발해다운 문화 전파다. 불교와 기독교가 자연스럽게 섞인 이 모습에서 평화로운 미소가 지어진다.

 

국제도시였던 발해의 상경성. 그곳에서 뻗어나가 세계로 향했던 우리의 조상들. 그 기개가 근사하다. 그런데 지금은 작은 한반도도 반으로 갈리어 바다를 통하지 않고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분단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조상들께도 면목이 없지만, 후손들에게도 낯부끄럽다. 얼마 전 내한한 영화 감독 라나 워쇼스키는 꿈이 뭐냐고 묻는 무릎팍 도사에게 "One Korea"라고 했다. 한방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평화와 공존을 사랑하는 한 외국인이 분단과 단절로 가득한 이 나라에서 지극히 당연하게 말한 한마디. 원 코리아. 우리는 하나된 조국을 바라며 살고 있는가 떠올려 보니 눈물이 날만큼 속상했다. 발해의 역사마저도 도둑 맞을 위험에 처한 오늘날의 현실을 개탄하며 이 책을 보았다. 홍라와 같은 도전이 필요하다. 그 용감한 한 걸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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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0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0 2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음이 아플까봐 꿈공작소 5
올리버 제퍼스 글.그림, 이승숙 옮김 / 아름다운사람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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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바탕에 파란색 제목의 글씨가, 가운데에 자리한 초록병의 색깔 배합이 예쁘다. 그리고 얼굴이 발갛게 물든 어린 소녀도. 아직은 병이 더 크다. 소녀가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어떤 이야기인지 들여다보자.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머릿속은 온통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밤하늘의 별에 대한 생각과 바다에 대한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녀의 호기심을 채워주는 존재는 할아버지셨다. 의자 뒤로 가득한 책이 할아버지의 입술을 거쳐서 소녀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 모든 분야에 탁월했을 할아버지의 존재. 게다가 소년의 눈높이에 맞추어서 얘기해주셨을 것만 같다. 참으로 다정하고 다정한 할아버지.

 

땅바닥에 누워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별자리 이야기를 해주셨을 할아버지. 수영하는 손녀를 지켜봐주는 안전한 보호자.

 

 

소녀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기쁨에 겨웠다. 아무렇게나 그려진 낙서같은 그림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해줄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의자가 비어버렸다. 할아버지의 부재. 추억이 멈춰버렸다.

 

 

해는 졌고, 꽃은 시들 것이다. 의자는 비어 있고, 소녀는 마음을 다쳤다.

 

 

두려워진 소녀는 잠깐만 마음을 빈 병에 넣어두기로 했다. '마음이 아플까봐!' 그랬다.

마음을 담은 병을 목에 걸었다. 그러자 마음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게 달라졌다. 별에 대한 생각도 바다에 대한 관심도 사라졌다. 비어진 마음은 이것들을 담아내지 못했다.

어느덧 소녀는 세상에 대한 열정도 호기심도 잊은 채 어른이 되었다.

마음은 자라지 못했고, 몸만 성장했다.

병은 점점 무거워졌고 몹시 불편했다. 그래도 소녀의 마음만은 안전했다.

두터운 벽에 갇혀 소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해 호기심 많은 작은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소녀는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소녀도 아이의 물음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따.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마음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갖은 방법을 썼지만 실패했다. 병은 깨지지 않았다. 그저 통통 튀어서 데굴데굴 굴러갈 뿐...

 

 

그런데 그 병이 임자를 만났다. 병에서 마음을 꺼내줄 아이에게로 간 것이다.

호기심 많은 작은 아이는 병속에서 마음을 꺼냈다. 마음에게 자유를 주었고, 주인을 찾아주었다.

이제 비었던 의자는 채워졌고, 잃었던 시간을 채워 갔다.

묻어두었던 많은 것들이 다시 되살아났다. 할아버지가 채워주셨던 그 추억이, 이제 소녀를 거쳐서 그 소녀만큼 작은 아이에게 전해질 차례다. 할아버지는 많은 것을 주셨다. 당신이 떠나셔도 사라지지 않을 많은 것을, 많은 마음을...

 

 

이제 병은 비었다. 그러나 마음은 채워졌다. 마음은 아프지도 무겁지도 않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유산이다.

 

 

책의 앞뒤 표지를 열면 나오는 속표지 모습이다. 작은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돌봐주는 어른이 보인다. 아마도 할아버지일 테지. 아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아이를 보며 얼마나 사랑스러움을 느끼는지 대사 없이도 전해진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고운 책이다.

 

유아용 책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속에 깃든 이야기들을 어린이들이 잘 이해해줄지 모르겠다. 그보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더 크게 다가갈 것 같다.

 

마음이 아플까 봐... 혹시 외면했던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혹시 마음이 아플까 봐 좀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지 또 생각해 본다. 내 마음 아픈 것만 생각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그렇게 함으로 내가 더 힘들지는 않았는지... 이제 그 병을 비워야겠다. 마음은, 아프지 않아요. 내게 돌아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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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곰 2013-01-10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 책 너무 좋아요. 전 책먹는 아이때부터 좋아했는데 이 책과 날고싶어! 도 무척 좋아요^^ 마음이 아플때마다 열어보는 책인데 마노아님이 소개해주시니 더욱 좋은걸요^^

마노아 2013-01-10 21:32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책이에요. 작가 이름으로 검색해보니 책 먹는 아이가 나와서 깜짝 놀랐어요. 저는 그 책은 그냥 그랬었는데, 지금 이 감정으로 다시 보면 그때보다 더 좋게 읽힐 것 같아요. 말씀하신 책과 날고 싶어도 읽고 싶어지네요. 기대가 커졌어요. 헤헤헷^^
 
파란 막대 파란 상자 Dear 그림책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글 그림, 이지원 옮김 / 사계절 / 2004년 12월
구판절판


어떤 나라에 사는 클라라라는 여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막대기 하나를 받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막대였다.
신비롭게도, 이 막대는 이 집안의 모든 여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막대는 점점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다. 클라라는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막대의 유래와 원래 쓰임새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막대에는 기록이 있다.
그러니까 막대를 받은 아이들이 막대를 어떤 용도로 썼는지를 기록한 공책이다.
클라라 역시 이 공책에 무언가를 쓰게 될 것이다.

이 막대에 대해서 처음으로 기록을 남겼던 이는 클레멘티나다. 막대는 그 전에도 집안의 여자들에게 전해 내려왔지만, 그 사용처에 대해서 제일 먼저 기록한 사람이 클레멘티나.
그녀는 이 막대를 생쥐 키치아를 훈련시키는 데 썼다. 막대의 도움으로 키치아는 훌륭한 곡예싸가 될 수 있었다.

클레멘티나의 딸 로잘리아는 연극을 좋아했다. 해서 감자와 헝겊으로 만든 얼굴을 막대에 꽂아 배우 인형을 만들곤 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의 얼굴은 정성껏 만들어 파란 막대에 꽂았다. 파란 막대로 만든 인형은 늘 주인공이었다.

로잘리아의 조카 테클라는 동그라미 그리기를 좋아했다. 파란 막대는 모래밭이나 눈밭 위에 여러 동그라미를 그리는 데에 쓰였다. 막대를 꽂고 실을 달아 또 다른 막대를 걸면,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었다. 멋진 아이디어다!

다음 번 주인인 발비나는 나무토막이나 종이로 배를 만들어 호수에 띄우기를 좋아했다. 발비나는 손수 만든 멋진 배에 파란 막대를 붙였다. 막대가 곧 돛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배가 바람에 떠밀려 잃어버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이웃에 사는 어부 아저씨가 배를 찾아서 돌려주셨다. 덕분에 파란막대의 역사는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진정 신비로운 막대다.

얌전히 말 잘 듣는 아이가 되기 싫었던 체칠리아는 막대에 팻말을 붙여서 '싫어요!'라는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오, 이것도 멋진 걸! 진정한 1인 시위다.

라우라는 파란 막대를 마법의 막대라고 믿었다. 마치 해리포터의 마술봉처럼 파란막대를 사용한 것이다. 언젠가는 소원이 이루어질 거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이 배신하지 않았기를!!

클라라의 할머니인 아델라는 태양과 구름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다. 호기심쟁이 아델라 할머니는 그림자의 길이에 관심을 갖고는 파란 막대를 이용해 해시계를 만들었다. 진정한 과학소녀의 탄생이다!

다음 장의 주인은 클라라의 엄마 테레사다. 어린 시절의 테레사는 라우라처럼 파란 막대가 마법의 막대일 거라고 생각했다.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테레사는 막대로 하늘을 나는 마법의 빗자루를 만들었. 그리고는 날마다 빗자루를 타고 침대에서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마녀배달부 키키가 떠오른다. 어제 늦은 밤 귀가하면서 텔레포트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어붙은 발을 구르며 생각했다. 파란 막대가 있다면 나도 그런 상상을 했을지도...

주자 언니는 천장에 커다란 하트 무늬를 그리는 데에 파란 막대를 사용했다.
천장에 커다란 색칠을 했음에도 혼나지 않고 존중해 주었다는 그 문화가 더 감탄스럽다.

이제 클라라 차례다. 클라라 역시 이 파란 막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면 무엇으로 쓸까? 칠판 지시봉으로 쓰면 아주 예쁘지 않을까,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해보았다. 체벌용이 아닌 그야말로 지시봉 말이다. 침대 밑에 들어간 연필을 꺼내는 데에도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런데, 이 파란 막댐가 어떤 상자에 딱 맞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 이제 책을 뒤집어서 뒤에서부터 다시 읽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떤 나라에 사는 에릭이라는 남자아이가 아홉 살 생일 선물로 이상한 상자 하나를 받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나무 상자였다.
이 상자는 이 집안의 모든 남자아이들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상자는 비밀스럽고 특별하게 느껴졌고, 에릭은 마치 자기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게다가 상자에는 특별 선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이 상자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적어놓은 공책이었다.
에릭 역시 이 공책과 상자에 흠뻑 매료될 것이다.

첫번째 기록을 남긴 사람은 레오나르도다. 그 이전 세대부터 전해져 온 상자이지만, 상자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기록을 남긴 이는 레오나르도가 처음이다.
레오나르도는 상자 속에 다섯 개의 거울을 붙여 두고 놀았다. 거울이 반사시키는 빛은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레오나르도는 거울을 빼 버리고 상자를 물려주었지만, 공책에 거울의 크기와 거울을 상자 안에 붙이는 방법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유산은 이렇게 물려주는 법이지. 혼자만 알면 무슨 재민겨!

레오나르도의 아들 빈첸티는 상자에 희귀 튤림을 심어 키웠다. 정성껏 가꾸자 춘분날에 아름다운 튤립 꽃이 피었다 한다.

빈첸티의 조카 알프레드는 상자 덕분에 100코론을 벌었다고 했다. 상자 안에 100명의 사람을 넣을 수 있다고 내기를 한 것이다. 그 사람이란 천 명도 들어갈 수 있는 종이 인형이었다.

티모테우스는 아빠가 되어 보고 싶어서 상자 안에서 달걀을 부화시켰다. 따뜻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닭이 품지 않아도 온도만 조절되면 병아리가 깨어나는겨???

루드빅은 상자 안에 세 개의 주사위를 넣었다. 어떤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상자를 흔들어서 주사위를 쏟아낸 것이다. 나온 수를 모두 합쳐 홀수면 '네'로, 짝수면 '아니오'로 결정했다고. 흥미롭긴 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방법은 아니다.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보면 어떻게 던져도 앞면만 나오는 동전이 있는데, 그쪽이 더 마음에 든다.

판크라치는 공작 솜씨가 좋았다. 상자에 구멍을 뚫지 않고도 바퀴 네 개를 달아서는 멋지게 수레로 활용했다고 한다. 오늘 나는 공구 없이 커다란 철제 선반을 맞추느라 손가락이 다 아작 났다. 내게도 그런 솜씨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에릭의 할아버지 테오도르는 모래섬 '바오바' 이야기를 좋아했다. 테오도르는 자기만의 바오바 섬을 고안해 냈다. 상자 안에 두 개의 병을 주둥이가 마주보도록 설치한 다음, 가운데에 구멍을 뚫은 코르크 마개를 끼워 모래시계를 만든 것이다. 테 오도르는 이것으로 자기만의 시간을 측정했다. 그리고 그 시간 단위의 이름을 '바오바'라 정했다. 그야말로 창의력과 창조성이 넘치는 아이였구나!

에릭의 아빠 지그문트는 도자기로 만든 코끼리 인형에게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주었다. 파란 상자 안에 은박지를 깔고 물을 부은 다음 추운 겨울에 밖에 내놓아 꽁꽁 얼렸던 것이다. 오, 은박지만으로도 방수가 되는 훌륭한 상자로군! 아무튼 지그문트의 아이디어도 훌륭하다.

에릭의 형 미코와이는 상자 안에 여러 가지 실험 재료와 도구들을 보관했다. 형은 그 도구로 섣달 그믐날 밤에 불꽃놀이 실험을 했다. 오늘이 음력으로 1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면 미코와이가 실험했던 그날이 될 뻔했다. 그럭저럭 재밌는 우연이다.

에릭은 공책을 덮었다. 이제 그 공책을 채울 사람은 자신이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 해낼 것 같은 벅찬 설렘과 감동이 따라오지 않았을까. 나라면 파란 상자를 가지고 무엇을 했을까? 담아 놓고 거의 열지 않는 도구로는 쓰고 싶지 않다. 가끔, 혹은 자주 열어보고 생각을 정리할 만한 무언가를 넣었으면 좋겠다. 어이쿠, 저금통으로 만들어 저축을 하는 상상은 너무 재미가 없는 걸... ^^

근데 그거 아나? 이 파란 상자에 어떤 막대가 꼭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재밌는 책이다. 먼저 만들어진 다음에 번역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작가와 편집진이 '기획'해서 만든 책이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다운 번뜩이는 재치다. 다음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어린이들이라면 더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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