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정의가 관철되는 곳에서 질서는 당연히 지켜지지만, 질서가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정의 요구가 압살된다. 정권이 유별나게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가진 자들에게 법과 질서는 사적 이익의 창과 방패다." (한겨레, 홍세화 칼럼)

- 굳이 한국사회가 아니어도 충분히 적용 가능할 것이다. 윤리를 강조하는 가정에서, 학칙을 강조하는 학교에서, 회칙을 강조하는 조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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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수유너머 연구실 고미숙 선생님의 책.
"직관이 결여된 비판력", "서사가 결여된 정보" 제가 요즘 느끼는 갈증과 맞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 아래는 본문에서 필요한 내용만 발췌, 필요에 맞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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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공부의 폐해

- 가정, 학교, 국가가 모두. 주체와 대상의 경계가 없다. 홈스쿨링이나 대안학교도 반극단에 치우쳐 있을 뿐. 부모와 학교가 아이를 돕더라도, 국가(공동체) 차원에서의 희망이 없다.
“그 누구도, 어떤 청소년도 이런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그게 더 끔찍한 일이다. 제 3공화국의 반공이념도 이보다 더 견고하진 않았다. 그건 질문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니까.”

- [호기심] 공부에 대한 모든 생각을 학교식으로 재편한다. 갓난아이의 호기심은 학교에 입학하면서 사라진다.

- [연령별 균질화] 그러나 공부에는 나이가 없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에너지와 지혜를 주고 받아야 한다.
“학교가 공부에 대한 모든 표상을 독점하고 있다.”

- 학교에 대한 지원을 늘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 고전과 네트워킹

- [문제의식] 기존과 다른 스스로만의 문제의식을 먼저 설정해야 한다.

- [고전과 코뮌] 왜 고전인가? 탈근대적 시도의 일환. 즉, 근대적인 방식으로는 할 수 없는 새로운 공간과 방식을 만드는 것. 공간은 코뮌이요, 방식은 고전 읽기라는 것. 여기서 코뮌이란, 어떤 조건의 제약도 없는 자유로운 네트워크.

- [암송과 네트워킹] 근대적 묵독과 암기 대신, 전근대의 암송. 암송의 핵심은 타인과의 네트워킹.
낭송은 자기 자신의 다른 면을 발견하는 것. 영어도 낭송으로 공부하는 것이 좋다. 사람들과 같이 읽어야 한다.
지식으로 사적으로 소유하지 말라.
“우월감과 열등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다.”
“스승과 친구는 하나다. 스승이면서 친구처럼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으면 스승이 아니고, 친구면서 스승처럼 배울 게 없다면 역시 친구가 아니다.” (이탁오)
“공부란 궁극적으로 자기를 넘어서는 것일진대, 거기에 우와 열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갈 수만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할 따름이다.”
“별로 아는 게 없는데도 배울 수 있을까요? 중요한 건 지식의 양이 아니다. 자신을 진정 비울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 [구술] 어떤 상황이나 문맥을 서사적으로 재현하는 능력

- [글쓰기] 글쓰는 과정 속에서 신체 역시 달라지게 된다.
“정보의 계열에 서사적 육체를 입힐 수 있어야 비로소 지식의 영역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 [삶에서 배워라] 근대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하면서 몸과 분리. 삶과 분리. 한없이 협소한 전문적인 영역으로 축소. 자폐증, 사랑, 질병, 운명, 음식, 일상에서 배울 수 있다.
“고립감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외부에 대한 적개심을 낳는다. 내부를 향하면 자살충동, 외부를 향하면 목적 없는 공격 심리가 된다.”
“타나토스로서의 에로스! 이것은 일종의 허무주의다. 지금, 여기의 삶을 부정하고, 불행과 상처를 과장하면서 자학과 피학 사이를 오감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허무주의.”
“조건이나 상황이, 혹은 나아가 운명이 두 사람의 결합을 방해한다 해도 사랑 자체가 주는 행복을 가로막을 수는 없다. 왜냐면 그것을 불행이라 여기는 건 그 상황에 대한 가치판단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잘 웃는 것이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는 것.”
“대개의 여성들은 다이어트나 성형을 할 때 외에는 자기 몸에 일체 관심이 없다. 그러다가 심각한 병이 들면 아무 생각 없이 병원에 가서 몸을 맡겨버린다.”
“남이 봐주는 사주는 아무런 맥락이 없습니다. 내가 자란 환경과 부딪혔던 사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사주는 자기가 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사주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라, 내 인생을 어떻게 칠해갈까 하는 영감과 가능성의 창조 행위입니다.”
“공부하는 그 순간이 목적이자 이유여야 한다.“
“지식이란 대상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신과 다른 입장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다 보면,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나 이질성은 무화되어 버린다. 오직 동일한 규준 위에서의 위계와 서열화만 가능할 뿐이다. 직관이 결여된 비판력. 결국 잘 다듬어진 합리적 주체들만 양산하게 될 뿐.”

# 참고도서

이반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얼 쇼리스 <희망의 인문학>: “빈민들이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매우 급진적인 행동이다.”
“빈민들에겐 그저 재활 교육이나 직업과 관련한 공부만 시켜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어설픈 동정심이거나 감상적 사치에 불과하다. 그들이 진정 박탈당한 것은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통찰할 수 있는 정신적 자산이었다.”

# 어휘

* 자폐적이다: 자신 혹은 소수의 집단 안에만 갖혀 널리 소통되지 못하다.
* 형해화: 사람의 몸과 뼈. 즉, 형식에만 치중하는 것.
* 파토스(↔로고스): 정념, 충동
* 레퀴엠: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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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3-30 16:51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조선일보)

자유로운 토론 막는 전체주의 비판
칼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합리주의는 비판적 논증에 귀 기울이고 경험에서 배우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런 태도를 말한다. ‘내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옳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면 우리는 진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논증과 관찰 같은 수단을 통해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해 사람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이다. - 본문 중에서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는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경제적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사회주의 운동에도 참여했다. 빈대학에서 26세 때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후 1937년에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뉴질랜드로 망명했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과학철학과 사회철학 분야에서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든다는 평가를 받는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은 그가 뉴질랜드 망명 시절인 1938년에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침공 소식을 듣고 집필하기 시작하여 1943년에 완성했으며 1945년에 출간되었다. 전체주의가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시기에 집필됐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제목대로 포퍼가 ‘열린 사회의 적’이라고 판단한 사상가들, 이를테면 플라톤, 헤겔, 마르크스 같은 이들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포퍼의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과학철학을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점쟁이가 당신에게 “올해 운수 대통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런데 당신은 큰 사고를 당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점쟁이를 찾아가 따졌다. 점쟁이는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운수가 대통해서 큰 사고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거다.” 점쟁이의 예언은 반증(反證)할 수 있는 가능성, 그러니까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없다. 따라서 점쟁이의 말은 과학이 아니다.

칼 포퍼가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는 기준이 바로 이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을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기 위한 ‘반증가능성 이론’이라고 부른다. 포퍼에 따르면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은 과학을 자처하지만 과학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반증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고, 마르크스가 역사발전의 법칙으로 내세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과학적인 법칙이 아니라 점쟁이의 예언에 가깝다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은 기존 이론의 오류를 수정하여 더 나은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의 오류를 다시 수정하여 좀더 나은 이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요컨대 반증을 통해 오류를 점진적으로 수정하면서 과학은 발전한다. 포퍼의 이러한 과학철학은 사회철학에서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경제적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떤 것이 지금의 불평등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데 나은 방법인지 토론한다. 그리고 토론을 통해 도출한 합의에 따라 기존의 제도나 법률을 수정한다. 그렇게 수정한 제도나 법률에 다시 문제점이 있다면 역시 토론을 통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한다. 이런한 과정을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한다. 한마디로 점진적이고 합리적인 개혁 노선인 것이다.

소수의 지배층이 권력을 장악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허용되지 않는 ‘닫힌 사회’에서는 문제를 개선해 나갈 수 없다. 예를 들어 플라톤이 ‘국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국가는 포퍼가 보기에는 ‘철저하게 닫힌 사회’에 불과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지닌 철학자가 통치하는 플라톤의 이상(理想)국가는 가능하지도 않고 가당치도 않은 꿈에 불과하다. 가장 선하고 지혜로운 자(者)가 통치해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결국 독재에 대한 옹호이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국가는 비판과 토론을 통한 문제 해결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닫힌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또한 역사의 일정한 법칙을 상정하고 그 법칙의 절대성을 강조함으로써, 반증될 수 없는 사이비 과학을 주장했다. 더구나 그가 꿈꾸는 공산국가는 혁명을 통해 달성된다는데, 이것은 결국 사회 전체를 단번에 변화시켜 어떤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릇된 기대일 뿐이다. 
 
포퍼가 이 책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완전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는 완전한 사회를 혁명과 같은 수단을 동원해서 단번에 이룩할 수 있다는 꿈을 버리고, 이 세상을 좀더 나은 사회로 만들기 위해선 점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을 그는 ‘점진적 사회공학’(piecemeal social-engineering)이라 부른다. 마치 결함 있는 기계를 기술자가 고치고 개선해서 좀더 나은 기계를 만들어 내듯이,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을 통해 조금씩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내세운 포퍼가 폭력과 유혈을 수반하는 혁명에 반대한 것은 당연하다. 폭력과 혁명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 더구나 불필요한 고통을 초래하고 더 많은 폭력을 불러오며 자유를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가 폭력, 혁명, 독재 등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것은 나치즘과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가져온 비극을 목격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포퍼가 말하는 ‘열린 사회’와 ‘점진적 사회공학’이 지닌 문제점은 없을까? 첫째, 혁명이나 폭력을 통하지 않으면 도저히 개선할 길이 보이지 않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에서 점진적 사회공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둘째, 열린 사회의 핵심적인 조건인 시민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은 긴 시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모든 문제에 대해서 비판과 토론을 통해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면 정말로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은 전체주의에 대한 가장 철저한 비판이자 민주주의 이념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옹호인 것만은 틀림없다. 포퍼가 꿈꾸었던 ‘열린 사회’는 사회 구성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에 동등하게 참여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런 사회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때문에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펼친 주장에 계속해서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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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화학물질의 해악을 낱낱이 고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

1950년대 정도만 해도 여성 과학자는 미국에서조차 대단히 희귀한 존재였다. 또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여성 과학자는 남성 과학자들의 위세의 눌려서 그야말로 얌전히 실험실만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1962년 자그마한 몸매의 한 여성 과학자가 세상을 뒤바꿀 만한 놀라운 일을 저질렀다.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은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라는 책을 발간해 그때까지만 해도 ‘꿈의 화학약품’으로 간주되던 농약과 살충제의 위험성을 낱낱이 고발했던 것이다.

생물학자로서 교육을 받고 한동안 연방정부 산하 기관에서 해양생물학자로 일했던 카슨은 자신이 습득했던 과학적 정보를 유려한 필치로 풀어낼 수 있는, 과학과 문학을 겸비한 보기 드문 재원(才媛)이었다. 하지만 ‘침묵의 봄’의 발간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될 수 있었던 일은 물론 아니었다. 책의 내용은 당시 번창일로에 있던 화학회사들과 화학공업계에, 그야말로 메가톤급 핵폭탄이 될 것이 자명했다. 만약 그로 인한 후폭풍을 감당하고자 하는 결연한 용기와 의지가 카슨에게 없었더라면 책 발간은 아예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침묵의 봄’ 발간 이후 40여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레이첼 카슨이 존경받는 이유는 바로 그런 ‘용기 있는 고발 정신’ 때문이라고 하겠다. 열성적인 생태주의자이자 자연보호주의자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카슨은 1964년 56세 때 된 암으로 사망하였다.

사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온통 뒤바꾸는 기폭제가 되는 일은 대단히 드물다. 그런데 ‘침묵의 봄’은 당시만 해도 기적의 화학물질로 칭송되던 각종 살충제, 제초제, 살균제들이 환경오염과 환경훼손의 주범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 써 그런 기폭제의 역할을 하였다.

“미 대륙의 한가운데 모든 생물이 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평화로운 한 마을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낯선 병이 이 지역을 뒤덮어버리더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닭들이 이상한 질병에 걸렸다. 소 떼와 양 떼가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농부들의 가족도 앓아 누웠다. … 낯선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내 새들이 모두 사라져버린 것을 알아챘다. 봄이 돌아왔지만 새들의 지저귐은 들을 수 없고 들판과 숲과 습지에는 오직 침묵만이 흘렀다.” 이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카슨은 그런 침묵의 세상이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인류에 경고하였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드는 원흉으로 살충제와 농약을 비롯한 각종 화학물질의 대량 사용을 적시하였다. 화학물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학전을 위해서 개발된 약품들 중 일부가 유해곤충의 박멸에 효과가 탁월하다고 알려지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화학약품은 소량만 살포해도 효과가 탁월하고 약효가 오랜 기간 지속되며 무엇보다도 제조가 용이해 값이 싸다는 장점 때문에 매년 엄청난 양이 농경지와 자연에 뿌려졌다. 그리고 매년 점점 더 많은 화학약품이 개발되면서 그 독성과 지속성 역시 점점 더 강력해졌다.

자연에 살포된 농약과 살충제가 애초 박멸하고자 했던 해충에만 효과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살포하는 과정에서 먼저 농부들을 중독시키고(실제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농약중독 사례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이어서 자연계의 먹이사슬을 통해 ‘느릅나무 잎-지렁이-울새-독수리’의 순서로 화학물질이 축적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가 하면 화학물질의 오랜 지속시간으로 말미암아 DDT와 PCB처럼 이미 오래 전에 생산이 중단된 화학약품도 여전히 하천과 호수의 침전물 속에서 검출되고 있다. 심지어 전혀 그런 물질을 접촉해 본 적이 없는 에스키모인의 몸 속에서까지도 발견된다.

카슨의 경고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카슨은 탐욕에 가득 찬 인간은 점점 더 강력한 화학물질을 개발하고 또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사용함으로써 결국은 자연계의 균형이 깨지고 급기야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새들부터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카슨에게 있어서 ‘침묵의 봄’은 곧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는 서막이다. 

‘침묵의 봄’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현대인의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보다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장밋빛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농약과 살충제를 마구잡이로 사용한 결과 봄이 찾아와도 새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그것을 어찌 봄이라 하겠는가? 그런 환경 속에서라면 우리 생활이 제 아무리 풍요롭다고 해도 어찌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침묵의 봄’은 환경오염의 재앙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비록 느리게나마 서서히 세상을 바꾸어 나갔으며 이제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세상은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과거 40년 전의 상황과 비교할 때 적어도 레이첼 카슨이 우려했던 ‘침묵의 봄’은 현실로 재현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지금도 일부 환경낙관론자들은 카슨의 경고가 너무 과장된 것이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시대에 앞선 그런 경고가 있었기에 ‘침묵의 봄’이 현실화되지 않았을 것이리라.

‘침묵의 봄’이 발간된 이후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세계적으로 환경오염 방지를 위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만약 21세기가 40년 전 카슨이 살았던 시대보다 환경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낫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과학기술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카슨의 주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겠다. 다행스럽게도 카슨이 고발했던 주장의 상당 부분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화학물질의 독성은 과거보다 크게 낮아졌고 자연계에서 쉽게 분해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화학물질의 경우에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인체 호르몬과 유사한 화학구조를 가진 미량의 화학물질이 여전히 자연계에 존재하면서 환경호르몬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 그러한 예라 하겠다.

40여년 전에 발간된 저서에 대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평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그 저서가 과학기술 분야의 책이라고 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 책 또한 오늘날 우리 현실에 꼭 맞는 그런 책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 사용되는 농약은 더 이상 카슨 시대의 농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책이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여성 과학자의 예리한 관찰력, 용기 있는 고발정신,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통찰력이다. 가뜩이나 혼돈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라면 모름지기 한 번쯤은 시대를 앞서 살았던 카슨의 입장이 되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물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기적이기에 이에 대항해 싸움을 벌일 때조차도 경외감을 잃어서는 안 된다. 자연을 통제하기 위해 농약과 살충제 같은 무기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능력 부족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른다면 그런 야만적인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함이다. 과학적 자만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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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작업의 낭비요소 없애 생산성 높여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법’
 
“눈에 보이는 물적 자원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의 노력이 더 크게 낭비되고 있다.” - 프레더릭 테일러
 
1911년 출간된 ‘과학적 관리법’(The Principle of Scientific Management)은 조직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작업의 흐름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원리를 정립한 경영학 최고의 고전이다. ‘경영학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저자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W. Taylor)는 산업혁명 이후 공장생산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던 관행을 타파하고, 작업현장을 과학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시간연구’와 ‘동작연구’를 바탕으로 작업에 소요되는 시간을 체계적으로 정립하여 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본원리를 제시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업적은 훗날 노동조합이 활성화하면서 “인간노동을 기계화했다”는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에 분업을 통한 전문화를 도입하고 과학적인 작업 방식을 정립한 테일러리즘은 막스 베버의 관료제와 더불어 기업조직과 경영활동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본원리로 평가받고 있다.

훗날 노동자에게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지만, 사실 과학적 관리법은 노사공동의 번영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테일러는 능률이 향상되어야 고임금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기업 차원에서는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과 영국에서는 관세 인하, 경영권 세습 규제, 사회주의식 세제 개혁 등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정작 기업과 개인의 번영을 위해 필수적인 생산성 향상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테일러는 노동자의 나태한 태업을 막는 것이 생산성 향상의 지름길이라 보았다. 당시의 노동자는 ‘기계의 생산량이 증가할수록 실업률이 증가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비능률적인 주먹구구식 방법을 계속 사용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테일러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생산성 증대와 원가절감을 통해 제품가격을 떨어뜨려야 수요가 늘어나고 새로운 고용이 창출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컨대 구두를 기계화에 의해 대량 생산하게 되면 평균 5년에 한 켤레 정도 구입하던 소비자가 1년에 두 켤레를 구입할 수 있을 만큼 가격이 낮아지고, 이로 인해 수요가 늘어나면서 신규고용이 발생한다는 논리다. 테일러는 “과도한 노동에 대해 동정하기보다는 왜 낮은 생산성으로 적은 임금을 받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임금의 원인이 태업에 있다”고 지적했다.

태업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는 천성적으로 게으른 자연적인 태업이다. 또 하나는 조직적 태업으로, 아무리 부지런한 사람이라도 혼자 너무 열심히 일하면 다른 동료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므로 하향 평준화식의 태업을 하게 된다. 과학적 관리법에서는 “이러한 조직적인 태업을 막기 위해 임금제도를 수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하루의 임금이 정해진 상태에서는 하루에 해야 할 작업량이 적을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이로 인해 태업의 악순환 고리가 생기게 된다. 이런 분위기를 일소하기 위해서는 작업량만큼 임금을 지급하는 차별성과급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선철 운반 및 벽돌 쌓기, 자전거 베어링 검사 등의 모든 작업에는 업무 수행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이 필요하다. 과학적 관리법을 적용할 경우 벽돌 운반에 필요한 총 동작을 18번에서 5번으로 줄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작업대에 벽돌을 가지런히 쌓아놓으면 필요한 곳으로 벽돌을 옮기는 작업을 단순화시킬 수 있다. 즉 작업하기 편리한 위치에 벽돌을 내려놓는 판을 마련하는 등 간단한 도구를 고안해 수천 년간 해온 불필요한 동작을 제거함으로써 1인당 1시간에 쌓을 수 있는 벽돌의 개수를 120개에서 350개로 늘릴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오래 일하게 하는 것보다 제한된 시간에 집중적으로 작업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예컨대 자전거용 볼베어링 생산 공장에서 여공들은 전통적으로 하루에 10시간30분씩 작업하고 있었다. 과학적 관리법에서 진행한 시간 연구의 결과 하루 10시간30분의 작업 시간을 10시간, 9시간30분, 9시간, 그리고 8시간30분으로 단축하면서 임금은 동일하게 지불했더니 산출량이 오히려 증가했다. 즉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분명히 하고, 볼베어링 제조 공정의 숙련 정도를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숙련도에 따라 공정에 투입하는 방식을 조정한 결과 생산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단순히 솔선수범하는 근면한 자세보다 과업의 과학적 관리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일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적정한 인재에게 적정한 과업을 할당하고, 성과보상을 합리적으로 한다면 모든 사람이 태업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게 된다는 논리다. 결국 종업원이 자율적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체계적으로 정립된 과학적 방식을 관리자가 종업원에게 적용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다. 관리자와 종업원이 협력해서 과학적으로 작업에 임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공동의 책임을 지는 것이 과학적 관리법의 근본 철학이다.

“과학적 관리법은 노동자를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갖추게 되면 보다 흥미롭게 과업을 수행하면서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다. “과학적 관리법이 노동자의 창의성을 저해한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과업 수행 방식을 혁신하는 창의적인 제안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즉 기존의 방식보다 우수한 새로운 방식을 작업자들이 제안하여 공장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 과학적 관리법의 기본 철학이므로 오히려 종업원의 창의성을 높일 수도 있다.

이런 차원에서 21세기에 와서도 과학적 관리법은 여전히 유효하고 나름의 의미를 지닌다. 첫째, 과학적 관리법은 노사공영(勞使共榮)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능률 향상을 통한 노사공영은 현대기업이 추구하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둘째, 과학적 관리법은 현대 지식경영의 효시이다. 관리자는 과학적 관리에 필요한 지식을 창출하고 공유하는 역할을 하고, 노동자는 학습된 지식을 실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지식경영이다. 셋째, 하루의 공정한 작업량을 설정하고 작업량에 따라 차별성과급을 주는 제도는 성과에 따른 연봉제를 추구하고 있는 현대기업이 추구하는 기본방향과 일치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업조직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 과학적 관리법은 낡은 방식을 버리고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조직을 혁신해야 한다는 경영의 기본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모든 고전에서 배우는 교훈의 공통점은 ‘기본에 충실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과학적 관리법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기본은 아마도 ‘전문화’와 ‘혁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윤철 한국항공대학교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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