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군요.)

- 통제이론은 범죄 행위가 충동과 그것을 저지하는 사회적 통제간 불균형의 결과로 발생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범죄가 증가하는 이유는 범죄의 기회와 대상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 사회와의 결속력이 약하다면 잠재된 비행과 일탈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 통제이론은 범죄 예방 역시, 목표물 강화가 최선책이라고 말한다. 근본적인 충동(범죄자) 보다는 사회적 통제(범죄를 저지르는 기회와 상황)을 조정해 균형을 맞추겠다는 것.

- 목표물 강화 이론은 정치가들의 호응을 얻어 실용화되었고, 주로 부유층의 요새 심리가 두드러진 나라에서 범죄 발생률을 줄이는 데에 성공했다.

- 이 방법은 범죄의 원인을 다루지 않아 무장 사회를 초래할 수 있고, 범죄의 목표물이 강화되면서 범죄의 대상이 끊임없이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발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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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성 시기와 배경

(1) 2차 세계대전 - 反 파시즘
(2)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호황 - 알제리(→프랑스), 모로코(→네덜란드), 터키(→독일)인 이주

- 변질 시기와 배경

(1) 오일 쇼크 이후의 불황
(2) 산업 구조 변화, 제조업의 동유럽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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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영 씨의 책을 읽고 마이리뷰로 쓰려던 것을 미루다 못해 간단한 밑줄로 대체합니다. 시대별 특징은 지은이의 것을 빌려왔고, 작품들은 제가 보고싶은 것들로 꼽았습니다.

- 1960년대
[특징] 기성 연극계에 대한 비판,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마당극에 대한 문제제기.
[작품] 서울대 문리대 연극반 <혈맥> <유민가>

- 1970년대
[특징] 서울대 부산대를 중심으로 탈춤부흥운동 시작. 마당극의 전형(현실주의, 민족주의, 전통연희 부활의 혼재)이 실험되고 생성되었던 시기.
[작품] <진오귀굿>(73, 김지하) <소리굿 아구>(74, 채희완) <예수의 생애>(77, 임진택) <미얄>(79, 임진택)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78) <함평 고구마>(78) <덕산골 이야기>(78) <공장의 불빛>(78, 김민기 채희완) <김상진 장례식>(78)

- 1980년대
[특징] 마당극의 양적인 성장, 기성 연극계와의 재결합 시도, 지역 마당극 패의 형성(광주-놀이패 신명, 제주-수놀음, 부산-자갈치, 대구-함께 사는 세상, 청주-열림터)
[작품] <장산곶매>(황석영 채희완) <토선생전> <공해풀이 마당굿 - 나의 살던 고향은>

- 1987년 이후
[특징] 노동연극, 노래판굿의 부각
[작품] <쇳물처럼> <어떤 생일날>

- 1990년대
[작품] <우리 동네 갑오년>(94, 우금치) <칼노래 칼춤>(94, 한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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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명종 대, 사림 중 서인 집권 기. 내수사에 의한 왕실 외척의 치부가 극심했다. 그의 세력은 관군과 동등한 규모에 훨씬 조직적이었고, 빼앗은 물건은 종로 시전에 내다팔아 자금으로 활용했다. 지나친 조정의 압력을 받은 관원들이 여럿의 가짜 임꺽정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장길산] 숙종 대, 서인과 남인 간의 환국이 일어나며 붕당 정치가 무너져가던 시기.

[홍경래] 순조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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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임꺽정 [?~1562] 조선시대의 의적이다. 양주(楊州)의 백정(白丁)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開城)에 쳐들어가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官軍)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加都致)와 참모(參謀) 서림(徐林)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討捕使) 남치근(南致勤)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九月山)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명종실록(明宗實錄)》에는 그의 이름이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적혀 있다. 

장길산 본래 광대 출신이나 용맹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도당을 모아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장길산 일행은 이를 염탐하고 모두 달아났다. 1692년(숙종 18) 평안남도 양덕(陽德) 일대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운 그는 뒤를 쫓는 관군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다시 함경도 서수리(西水羅) 등지로 달아나 그곳에서 활약하였다. 북쪽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상업활동을 한 것이 특이하다.
1696년(숙종 22) 서울의 서얼 출신 이영창(李榮昌)·금강산의 승려 운부(雲浮)와 손을 잡고 승려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장길산 사건은 17세기 이후 어려워진 사회조건 속에서 하류계층에 속했던 서얼·승려·농민 등이 힘을 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모반사건의 하나였다.
조정에서는 그를 잡으려고 각 관찰사와 병사에게 엄명을 내리고 많은 상금을 걸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홍길동(洪吉童)·임꺽정(林巨正)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으로 알려져 있다.
 
홍경래 [洪景來, 1771~1812]  출신 지역은 평안도 용강군 다미동(多美洞)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가계를 알 수 없으며, 아들만 네 형제인 집안의 셋째로 처 최소사(崔召史)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신분은 대개 몰락양반이라고 설명하여 왔으나, 평민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경제적으로는 전답이나 노비를 지니지 못한 빈궁한 처지에 있었다.
유교는 물론 풍수(風水)에 상당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당에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한 지식인이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민중의 희원을 반영하여 초인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정진인설(鄭眞人說)을 봉기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뛰어난 무술 실력을 지니고 있어 직접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하기도 하였으며, 병법에도 밝아 다양한 전술로 관군과 대항하였다.
이 밖에 성장과정과 과거응시 등에 대해서 19세기 후반 작자미상의 한문단편 《홍경래》를 근거로 설명해 왔으나, 그 내용들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1801년(순조 1)에 우군칙(禹君則)과 병란(兵亂)을 논의한 뒤로 10년 동안 각지를 다니며 향촌의 유력자, 무술을 갖춘 장사(壯士), 그리고 부호를 끌어들여 봉기를 준비하였다.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의 직책을 띠고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의 봉기로부터 만 4개월 동안 계속된 반란을 총지휘하였다.
1812년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정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하였으며, 정부로부터 '군대를 일으켜 반역한 우두머리[擧兵逆魁]'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민중들 사이에서는 저항과 변혁의 상징으로 인식되어 죽지 않고 하늘을 날아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다.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에는 그가 이끈 군사력과 봉기 이념에 명확한 한계가 있었지만, 당시의 지배체제가 아니라 기층사회에서 성장한 인물로서 대규모의 항쟁을 주도한 점에서 중세사회의 극복에 중요한 단계를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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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25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가도 될까여?^^*

sb 2007-03-25 2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긴 합니다만, (이미 밝혔듯이)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가져와 정리만 한 것인데.
 

<DIV style="line-height:170%; padding:10">-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의원 활동을 하기 전에 내어놓은 책입니다. 당시, 자유기고가 로서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분야 별로 갈무리 한 형식입니다. 사실, 유시민 씨가 썩 글을 잘 쓰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활발하게 활동하는 일군의 필자들 중에서, 경제 분야 칼럼을 쓰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글을 좋아합니다. 이미 절필 선언을 한 그이지만, 과거 그가 표방했던 지식소매상과 그는 무척이나 잘 어울려 보입니다. 지식소매상으로서 그는, 뒤섞여 있는 문제의 쟁점을 하나의 경제 법칙에 맞추어 정리하고 나열하는 데에 소질이 있습니다. 또한, 그가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주의자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있는 점 역시, 책읽기를 훨씬 수월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 이번 경제 분야 칼럼들은, IMF와 외환 보유, 환율, 수출과 수입, 주식 시장, 신문 시장, 부동산 정책,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달고 닿은 주제들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과 내일의 주제로 끊임 없이 등장할 내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그 동안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환율 결정 원리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환율 상승의 장기적인 요소(물가상승률, 경상수지 적자)와 단기적인 요소(자본 수입업자, 외국 투자자들의 자본거래)를 구분하면, 96년 OECD 가입과 함께 이루어진 금융분야 규제 철폐가 환율 시장에 미친 영향력을 큰 오해 없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97년 외환위기에서 나타났던 급격한 환율 상승 역시 이러한 장 단기적 요소에 모두 영향을 받았을 것이죠. 

- 환율의 상승은 곧 원화 가치의 하락을 의미하고, 이것은 곧 실물 자산 소유자들과 화폐 자산 소유자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리게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IMF가 외환 대출의 조건으로 내세운 긴축 정책은

- '수출 이데올로기' 라고 불리우는 환율에 얽힌 수출업자들의 이해관계도 새삼스레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환율이 하락할 경우, 원화의 가치가 올라가 원화로 구매계약을 체결해야 하는 수출업자들이 압박을 받게 되고, 그것이 그대로 언론보도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 결국, 외환위기란,

1971년 금본위제 붕괴의 배경(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달러 통화량의 증가, 프랑스의 환금 정책)과 그로 인한 IMF의 위상의 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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