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해가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 정호승 -
앗, 무엇인가?
문득 돌이키어 존재의 꼬리를 쫓는
보일듯 보일듯
그러나 희뿌연 연기만이 허공에 가득차는데
어디서 들려오는 가야금 소리
더듬더듬 걸어가는 저 길가에
노파가 앉아서 가야금을 켜는데
줄없는 가야금에서 나는 소리라
여보게 나그네
여기 와서 앉게나
뭐 그리 바삐 걸을 이유라도 있나
세상 끝이라도 가려는 것인가?
내 가야금 곡조 한곡 들어보게
이게 바로 내 인생이라네
곡조 소리에 눈을 감고
선율을 타고 깊이 깊이 내려가는데
아, 무엇인가?
온우주가 그 선율 하나로 가득차는데
그 천상의 선율을 따라
우주가 춤을 추네
문득 주위 고요해지고
눈을 뜨고 보니
노인도 가야금도 간 곳 없네
가슴은 아직도 가야금 선율에 떨려오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푸른 나무 그늘진 뜨락에서 이따금 새가 지저귄다.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며 말했다.
"이것은 내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이고,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이로다. 오색 채색을 문장이라고 한다면 문장으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오늘 나는 책을 읽었다."
- 박지원, 答京之之二 -
고라니와 사슴의 무리
쑥대로 이은 집.
창 밝고 사람은 고요한데
배고픔을 참고서 책을 보노라.
- 송시열, 書畵像自警 -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이듯 찰나에 맡긴 이몸.
부귀는 부귀대로 빈천은 빈천대로 즐기리.
입을 벌려 웃지 못하면 그가 곧 바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