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활짝 피었을 때, 달은 훤하게 밝은 보름달이 정취가 있는가? 빗속에서 보이지 않는 달을 그리워하고, 좁은 방에 들어박혀 봄이 가는 것도 모르고 지내는 것이, 직접 꽃이나 달을 보기보다 더욱 깊은 정취가 느껴진다. 이제 막 봉오리가 터지려는 가지나, 벚꽃이 흩어진 마당이 오히려 정취가 있다. 와카 머리말에, "벚꽃 구경을 갔더니 이미 다 져서"라든가, "사정이 있어 벚꽃 구경을 못 가고"라고 하면, "벚꽃을 보고"라고 읊은 것보다 정취가 없을까? 꽃이 지고 달이 기우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특히 풍류를 모르는 사람이, "이 가지 저 가지 꽃은 다 졌구나. 이젠 무엇을 볼꼬?"라고 하던가?

   모든 일은 처음과 나중이 멋있다. 남녀간의 사랑도 그저 만나 밀회를 나누는 것만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못 만나서 그리워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탄식하며, 긴긴 가을밤을 혼자 지새며, 멀리 있는 연인을 그리며, 연인을 만나던 허름한 초막에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만이 사랑의 정취를 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천리 멀리까지 비치는 보름달을 하염없이 보는 것보다, 오랫동안 기다리다 새벽녘에야 겨우 올라오는 새벽달을 보는 것이 더욱 정취가 있다. 특히 깊은 산속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푸른 달빛, 소낙비가 오고 구름 사이로 숨은 달은 더욱 감동적이다. 참나무와 상수리나무의 반짝이는 잎에 달빛이 빛날 때,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눌 친구를 생각하며, 교토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대체로 달이나 꽃은, 꼭 눈으로 보아야만 하는 것인가? 봄에는 집에 들어 앉아, 달밤에는 잠자리에 누워서, 벚꽃이나 달을 마음속에 그려 볼 때야말로 한없는 정취를 맛볼 수 있다. 멋을 아는 사람은, 깊이 빠지는 것 같지 않으며, 감상하는 모양도 담백하다. 교양없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요란하게 즐긴다. 꽃을 볼 때도 사람들을 비집고 바싹 다가가, 꽃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술을 마시고 렌가를 짓기도 하며, 흥에 겨운 나머지 꽃가지를 함부로 꺾는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한답시고 샘물에 손발을 마구 담그고, 눈을 볼 때도 뜰에 내려가 일부러 발자국을 남기는 등, 무엇이나 멀찌감치 두고 감상할 줄을 모른다.

  그런 촌놈들이 가모 축제를 구경하는 꼴이란 실로 가관이다. "행렬이 참 더디 오는군. 그 동안 관람석에 있을 필요가 없지"하며, 집안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먹고 마시며, 바둑을 두거나 쌍륙을 치며, 관람석에는 망보는 사람을 둔다. "축제 행렬이 지나갑니다"하면, 모두 허둥지둥 관람석으로 나와 난간 밖에까지 몸을 내밀고,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려 든다. 그리고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다가, 행렬이 다 지나가면 다음 행렬이 올 때까지 또 먹고 마시며 논다. 그들은 그저 축제행렬만 보면 그만이다.

  그러나 교토의 지체높은 분들은, 행렬을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젊은 하인들은 윗사람들 시중드느라 바쁘고, 옆에서 모시는 사람은 꼴사납게 몸을 빼고 볼 수도 없으므로, 억지로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주변이 온통 접시꽃으로 꾸며서 우아하고 아름다운데, 날이 밝을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조용히 모여드는 수레 주인을 알고 싶어서, 누구일까 하고 보노라면, 아는 소몰이꾼이나 하인이 보인다. 우아하고 꾸민 수레가 오가는 모양을 보고 있노라면 지루하지 않다.

  해질 무렵이 되면, 쭉 늘어섰던 수레와 꼭 찼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곧 한산해진다. 사람들이 뜸해지면 관람석의 발이나 못자리를 치우고, 어느새 한산해지는 모양은, 이 세상의 덧없음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숙연해진다. 이러한 큰 길 풍경을 보아야, 축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축제 관람석 앞을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제법 많은 것을 보면, 세상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죽은 다음에 내가 죽는다 해도, 그 때는 곧 닥쳐올 것이다. 큰 그릇에 물을 담고 작은 구멍을 뚫으면, 구멍으로 새는 물이 지금은 조금이지만, 계속 샌다면 물은 곧 다 없어지고 만다. 장안의 이 많은 사람들이 하루도 안 죽는 날이 없다. 그것도 어찌 하루에 한 두명 뿐이겠는가. 화장터나 공동묘지, 그 밖의 야산에 장례가 많은 날은 있어도 하나도 없는 날은 없다. 그래서 관을 파는 사람은 묵힐 틈이 없다. 나이나 건강에 상관없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 죽음이다. 오늘날까지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온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니 어찌 잠시라도 이 세상을 느긋하게 보낼 수 있겠는가?

  마마코다테(같은 수의 흑백 바둑돌을 둥글게 늘어놓고, 몇 번 째 되는 돌을 치워 나가다가,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돌이 흑백인가를 맞히는 놀이)에서 쌍륙 돌을 늘어놓고, 잡히는 것이 어느 돌인지 모르지만, 맞혀서 돌을 하나 치우면 다른 돌은 잡히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하나씩 차례로 지우는 사이에, 돌은 모두 치워진다. 세상살이도 이와 같다. 무사가 전쟁에 나갈 때는, 죽음이 닥친 것을 알고 집이나 자기를 잊는다. 속세를 떠난 사람이 암자의 조용한 분위기에 젖어서, 죽음이 닥친 것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한적한 산골이라고, 죽음이라는 적이 갑자기 달려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싸움터로 나가는 무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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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잘 타기로 유명한 남자가 사람을 시켜, 높은 나무에 올라가 가지 끝을 자르게 했는데, 아주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까지는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다가, 작업을 다 하고 내려올 때, 거의 지붕 높이만큼 내려왔을 때야 "헛디디지 말고 주의해서 내려오게"라고 했다. "그 정도까지 내려왔으면 뛰어내려도 되는데, 왜 그런 주의를 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바로 그것이지요. 높아서 눈앞이 아찔하고, 나뭇가지가 휘청거려 위험할 때는, 스스로 주의하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지요. 실수란 방심할 때 꼭 일어나는 법이지요"라고 하였다.

미천한 사람의 말이지만 성인의 가르침과 같았다. 게마리(가죽으로 만든 공을 제기처럼 차고 노는 귀족의 놀이)에서도 어려운 공을 잘 차낸 뒤, 안심하면 반드시 공을 잘못 차서 땅에 떨어뜨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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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하고 심심한 것을 괴로워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남에게 간섭받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세상사를 따르다보면, 마음은 세상 명리에 이끌려 흔들리기 쉽고,

남과 사귀다 보면 남을 의식한 나머지 내 마음을 잃게 된다.

남과 어울려 웃고 즐기며, 이익을 다투고, 원망하거나 즐거워하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일정하지 않다.

갖가지 생각들이 자꾸만 일어나, 득실을 따져야 하는 고민이 그치지 않는다.

무엇을 홀린 데다 또한 취한 것이며, 취중에 꿈을 꾸고 있다.

세상의 명리를 바쁘게 쫓아다니다, 모두 멍하니 자기를 잊어버렸다.

아직 불교의 도리를 깨닫지 못하였더라도, 속세의 인연에서 잠시 벗어나 몸을 조용히 하고,

세속 잡사에 상관하지 말고, 마음을 편히 하면, 잠시나마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먹고 사는 것, 세속의 교제, 솜씨나 취미, 학문 등 모든 세속적인 인연을 끊어 버리라"고, <마카시칸>(중국 수나라때 씌여진 천태종의 경전)에도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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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늦게 태어나지 않아 한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또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 한날에 같이 태어났지요.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마을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고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 함께 선비가 되었지요.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 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전 옛 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날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경보에게)

 

박규수의 상고도회문의례

벗들이 상봉하면 기분을 상쾌하게 하고, 마음에 드는 일이 없을까  안달한다. 안부와 요즘 관심사를 묻고 나서 공부하다 새로 얻은 것이 있는지 알아본다. 그러고 나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옛사람은 차를 마시고 나서 논어를 풀이했다. "는 격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따져보려 하지만 이전에 배운 공부가 보잘것없어 더 따지고 입증할 거리가 없다. 과거 답안지에 쓸 문장을 꺼내보지만 지루하고 허망하여 기분을 잡칠까 걱정이다. 결국에는 다 그만두고 다시 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음악을 듣고 기생을 희롱한 이야기, 나들이하고 놀이하는 즐거움에 대화가 이른다. 그러나 이따위는 옛사람이 취하지도 않았고, 내 성격에 맞지도 않는다. 이 밖에 향을 사르고 차를 품평하는 취미나 서화와 골동품을 감상하는 고상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을 기울이기에는 천박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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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3-02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상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퍼갑니다. 다시 한 번 우정을 생각해 본 계기가 되었네요. 행복한 3월이 되시기를......

달팽이 2007-03-02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님에 비하면 저는 그저 아주 간단하게 올리는 것이지요.
앞으로는 님의 태도를 좀 배워볼 생각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 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현대는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큰 바다와 같고 물질은 거품과 같습니다. 바라를 봐야지 거품은 따라가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눈길을 돌려 밖을 내다보지 마십시오. 자기 속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모든 보배가 자기 속에 가득 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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