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욱 박사의 금강경 강화 백성욱 박사 전집 1
백성욱 지음, 김강유.이광옥.김원수 엮음 / 김영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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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강경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사를 해서 짐정리를 끝내고 법문으로 공부를 하다가 다시 금강경 독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올라왔는데 때마침 이 책이 출판되어서 좋았다. 금강경의 현토로 나는 늘 백성욱 선생님의 현토로 십수년을 독송해왔는데 금강경 독송본 책자를 여러 번 닳아서 필요하던 차에 독송본이 다시 출간되어 기쁘고 기쁘다. 


  십수년을 독송을 해도 마음의 본바탕의 자리를 알지못하고 사구게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와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이 마음으로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와서 비로소 그 뜻을 알게 되자 독송이 다시 하고 싶어졌다. 보되 보지 않고 듣되 듣지 않고 하지만 하지 아니한다는 마음의 자리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마음으로 알게 되자 비로소 독송의 의미도 보다 새로워지게 됨을 알게 되었다. 


  돌아가신 강선생님의 고마움에 눈물이 흐른다. 부처님과 제불보살님들의 은혜에 눈물이 흐른다. 그것은 내 업장이 녹아내리는 탓일것이라 생각된다. 비로소 제대로 독송하고 법문듣고 간경할 줄 알게 됨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본성을 모르면 간경과 독송이 무익하고 본성을 알면 비로소 공부가 시작된다는 말씀이 알게 되었다. 몸마음이 말없는 가운데 움직이고 공감하고 떨리는 도리가 여기에 있다. 이 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도리가 바로 이것임을 보게 되니 일상사가 공부가 됨을 알게 되었다. 목전사의 일이 바로 이것의 작용임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백선생님의 기존의 책들에서 보지 못한 글들을 조금 더 접할 수 있다는 점과 금강경공부의 중요성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나에게는 그렇다. 왜 선생님이 자신의 본성을 보고도 이 공부에 말년에 매진하였는지 나는 비로서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백성욱 선생님과 강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맙고 고맙다. 마음 밝히는 공부의 수많은 길이 모두 자신의 본성에게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 자리에서 아상을 비우는 공부인데 그 방식은 법의 인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내 공부인연이 이렇게 걸어왔기에 또 앞으로 가는 길도 그러하다. 


  길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있다면 그 이후의 공부는 스스로 본성의 길을 따라 어긋나지 않는 법이다. 본래 나지도 죽지도 않는 그 마음이 이 순간 온 누리에 가득하니 보는 것이 보이는 것이요 색이 공이고 공이 색임을 눈 앞에서 보면 그게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이다. 하지만 공부의 길은 끝이 없다. 우리처럼 어둔 이들에게는 한 때 심성을 보아도 오랜 습에 의해 익힌 번뇌 망상이 바로 떨어지지 않기에 후 점수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익숙한 것은 낯설게 하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공부.....이제 비로소 만연을 쉬고 공부의 길에 입문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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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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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몬드는 우리 뇌의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를 가리킨다. 이 부분이 비정상적이면 감정과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이 책의 주인공인 윤재는 선천적으로 편도체에 문제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을 느끼는 부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성장기를 거치면서 비교적 문제없이 자라지만 가장 사랑하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건으로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소년이 성장하면서 타인과 공감하고 진실한 우정과 사랑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다. 


  '곤'이는 이러한 윤재와 같은 또는 다른 특성을 가진 아이다. 또래의 곤이는 어릴 때 부모와 헤어져서 소년원에서 자라며 어머니의 사랑이 결핍되어 나약한 자신을 외면적으로 보여지는 강함으로 이겨나가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다. 어쩌면 정상인을 사이에 두고 윤재와 곤이의 극단적인 결핍과 부족함을 통해 저자는 두 아이의 소통과 우정을 통해 사랑을 회복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려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원래 정상이라는 범주는 사회가 정해놓은 것이다. 사람은 제각각 다른 것인데 일정한 범주 안에 들어가야 한다는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히 튀기 싫어서 그 정상의 범주내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태어나기를 다양하게 태어난 다양한 아이들은 그 성장 속에서 자신의 특별한 특성을 죽여가면서 정상의 범주에 맞추어가려고 한다. 물론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일반적인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의 경우에는 그렇다. 


  도라와의 첫 사랑의 감정 또한 윤재를 성장시켰다. 그의 편도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만든 하나의 해결책이 되었다. 뇌과학에서는 뇌의 한 부분이 소실되거나 기능을 못해도 다른 부분이 그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편도체가 작아서 생긴 문제가 때로는 성장과정에서 다른 부분이 그 역할을 맡게 될 경우 정상적인 성장도 가능하다고 한다. 곤이는 윤재의 감정의 껍질을 뚫고 들어온 첫 존재였다. 또한 심박사와 같은 어머니의 역할을 대체해 준 존재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통해 우정을 통해 서로 간의 따뜻한 소통을 통해 성장하고 치유되는 삶을 살아간다. 세상에 구제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구제하기 위한 노력을 그만둘 뿐이다라는 말처럼 결국 마음은 우리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고 또 그 해결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도록 인생지워져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윤재와 곤이 같은 특별하고 비정상적이고 색다른 존재들일런지도 모른다. 누구나가 자신만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우리는 고통받고 또 극복하고 그래서 성장하는 과정을 거쳐 누구나가 어른이 된다. 


  누구나가 완전하지 못하고 정상적이지 못한 괴물을 내면에 갖고 있으면서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상처받고 힘들어하지만 결국 관계와 소통과 사랑을 통해 치유하고 성장하는 것이 인생은 아닐까 하고 이 소설은 말한다. 우리도 윤재와 곤이처럼 아직 성장과정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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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 다락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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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제목이 '앵무새 죽이기'였을까? 앵무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실 이 책의 이야기에서 앵무새라는 말은 단 한 번 나온다. 핀치 에티커스 변호사의 딸이자 이 책의 주인공인 스카웃의 마지막 말 중 하나다. "그건 앵무새를 쏘아 죽이는 것, 그런 종류였지요? 그렇지요??"라는 말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한 양심' 정도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거짓을 참지 못하고 사회적 불의에 대해 항의하고 약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것, 나아가 적극적 자비로까지 나아가는 개념일 수도 있겠다.

 

  이 책을 아주 오래 전에 읽다가 일간지에 소개된 책을 보고 다시 읽기로 마음먹었다. 이 책은 한 소녀의 관점에서 엄마를 어릴 때 잃고 변호사 아버지와 흑인 가정부와 세 살 위의 오빠와 함께 유년시절부터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미국의 근대화로 오는 시기의 미국의 흑백차별문제, 그리고 메이컴 지역에서의 특수성(이웰가족과 백인과 흑인들의 문화가 어우러진...)속에서 아이들이 홀로된 아버지 밑에서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며 선한 양심에 눈을 뜨면서 성장해가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포레스트 카토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처럼 아이들이 감정과 분노와 연민과 화 등의 다양한 감정의 굴곡을 겪으면서 성장해가고 '머리를 꼿꼿이 들고 이겨내는 과정'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우선 핀치 에티커스라고 하는 변호사 아버지가 성숙하고 건전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양육과정에 얼마나 섬세한 마음을 쓰면서 보살피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결핍은 더욱 책임감을 더하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모습을 보면 한 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 나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가정부 흑인 칼퍼니아 아줌마도 흑인으로서는 글을 읽고 쓰면서 깨인 의식을 갖고 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아이들의 양육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이러한 따뜻하고 열린 보살핌 속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젬과 스카웃은 엄마의 부재로 인한 트라우마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며 밝게 생활한다.

 

  이 지역의 신비스러운 부 래들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뭔가 비현실적이면서 사회의 갈등과 차별로부터 문을 닫아버린 듯한 폐쇄적이고 밀폐된 이 집의 아들 아서가 이 아이들의 성장을 오랫동안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는 사실과 자신을 숨기고 아이들과 교류하고 그의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점과 마지막으로 이 아이들의 생명을 구하면서 세상 속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아서는 이 이야기의 끝은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 불의 속에 '선한 감정과 선한 의지'를 유지할 수 있을까? 깨인 의식을 갖추는 것도 그 하나일 수 있지만 나는 보다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당연하게 그런 판단과 연민이 일어나는 것은 가정과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와 어울리고 배려하고 자라면서 얻은 사랑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인생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가지게 되는 일종의 '앵무새'가 아닌가 생각된다. 앵무새는 인간의 말을 흉내내고 그 인간의 말은 바른 마음을 담아낼 때 비로소 '양심과 선함'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앵무새를 죽이는 사회야말로 차별과 편견을 재생산해내며 그 부정의와 불합리 속에 권력과 명예를 쫓으려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상의 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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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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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나오는 단편 소설들을 매우 어둡다. 세월호 사건으로부터 촛불집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황을 예감으로써 그려나간다면 이와 비슷한 어두운 색조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세상은 모르고 오직 아빠와 딸 사이에서만 흐르는 그 무거움과 불편함의 이야기에서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절망을 극복하게 해 줄 아이라는 존재가 더욱 심연의 어둠속으로 삶을 추락시키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이 책은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사회에 대한 반영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래된 사랑의 원점은 그 두 사람이 사랑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허무함을 극복하려 허무함을 한 스푼 더 떠서 그 위에 얹는 행위의 반복밖에 되지 않는 만남의 의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늘 허무의 원점으로 회귀하는 각자의 삶은 결국 존재의 소멸이라는 것에서 끝이 난다. 과연 쳇바퀴처럼 도는 이 인생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무엇일까? 때론 선문답같기도 하고 때론 디스토피아의 깨고 싶은 꿈같기도 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것이 없는 삶, 아무리 희망을 가지려해도 사회의 뿌리부터 썩어버린 그래서 은폐와 왜곡과 거짓만이 통하는 사회에서 사는 삶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멀쩡하게 죄없는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현실.. 그것은 마치 '신의 장난'처럼 끝없는 좌절과 절망만을 비참하게 느끼게 하는 상황과도 같다. 어떤 몸부림을 쳐도 그것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결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절망감....우리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내면에서 또 나아가 사회와 국가와 세상에서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지독한 절망 속에서 어쩌면 우리 스스로에게 '희망'을 묻고 싶은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의 희망은 소설 밖의 한 문장이다.

 


 "이십년을 함께 해온 아내 은수에게. 사랑과 경의를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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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산이 울렸다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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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레드 호세이니의 세번째 작품이다. 역시 훌륭하다.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프랑스, 유럽으로 무대가 더욱 커진 것처럼 울림도 더욱 깊었다. 왜? 제목을 "그리고 산이 울렸다."라고 지은 것인지에 대해 책을 다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사랑하는 자의 부재라는 것은 슬픔이자 절망이 된다. 그러나 그 사랑의 타자는 부재이지만 그것을 마음 속에 살아있는 존재로서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아픔과 슬픔을 말없이 묵묵히 지켜주었던 존재는 바로 산이었다.

 

  이 이야기는 작은 단편들로 구성된 것 같다. 압둘라와 파리의 이야기 그리고 와다티와 닐라의 이야기, 이사벨의 사랑이야기, 아델과 골람의 이야기 등등의 작은 이야기들은 서도 동떨어진 각 각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이 어떤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커다란 하나의 이야기 속에 제자리를 찾아갈 때 우리는 소설의 구성으로서도 보다 큰 그림들을 그려나가게 된다. 한 일생 전체를 관통하는 압둘라와 파리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서로의 부재 속에 많은 이야기들이 가지처럼 뻗어나가며 그 줄기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압둘라와 파리에게서 일생 동안 만날 수 없었던 사랑의 부재는 닐라와 와다티에게로 압둘라와 그의 딸 파리에게로 닐라와 그의 딸 파리에게로 그대로 유전자의 복제처럼 반복된다. 결국 사랑은 부재 속에서 완성되는 것일까? 평범한 일상으로 존재했다면 알 수 없었던 소중함을 그들은 일생동안 추구하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평범한 일상을 신의 선물로 감사하며 살 수 있다면 그것은 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압둘라와 파리는 압둘라의 죽음을 앞두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압둘라는 파리를 알지 못하여 결국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 서로의 부재는 서로의 가슴 속에 생생히 그리움으로 남았다면 서로의 만남은 결국 헛돌고 마음의 만남은 이루지 못하게 되고 이같은 비극은 이를 일생동안 지켜보았고 그들의 삶을 연민했고 어루만져주었던 산을 울렸다.

 

  우리가 각자의 오늘의 삶에 울릴 수 있다면 작가는 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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